제 9장 성령의 유효적 소명 .... TULIP의 I인 불가항력적 은혜는 중생과 유효적 소명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존 거스트너(John Gerstner)가 대학생이었을 때, 20세기 초에 가장 뛰어난 석학 중 한 사람이었던 존 오르에게서 신학 과목을 하나 들었는데 강의 도중에 오르는 칠판에 큰 글자로 “중생이 믿음을 선행한다”라고 썼다고 한다. 이 글은 거스트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교수가 실수를 해서 무의식중에 순서를 바꾸었다고 생각했다. 믿음이 중생의 선제 조건이고,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거스트너가 개혁주의 신학에 노출된 첫 경험이었다. 중생이 믿음을 선행하는 것이지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그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상이었다. 교수의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듣고 나서 거스트너는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종의 칼빈주의자들의 양상이 아니가 생각한다. 로저 니콜이 말한대로, “우리는 모두 나면서부터 펠라기안주의자들이다.” 그리스도께 회심한다고 즉각적으로 펠라기안적인 성향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회심하는 아주 초기 순간부터 이미 우리 속에 있는 펠라기안주의적인 성향은 남아 있었고, 이방주의에서 그것을 가지고 나왔으며, 인간의 자유와 본유적인 선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견해와 함께 세속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교회에서는 찰스 피니 후로 미국 복음주의 목을 졸라왔던 알미니안주의가 널리 파급되어 있다. (197~198p)
1. 일방적인 중생 .... 유일한 성령에 의한 중생의 교리는 구속의 전체적인 과정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첫 단계 혹은 처음 상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205p) .... .... 그러나 요지는 우리가 먼저 중생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일 수도, 보이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믿음의 긍정적인 반응을 위해서는 먼저 중생이 있어야 한다.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의 서정을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믿음이 중생을 선행하도록 했다. 영적으로 죽고 죄에 매여있는 죄인이 어떻게든 그의 사슬을 벗어버리고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도록 해서 거듭나도록 하는 믿음을 행사해야만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중생이란 선물이 아니라 은혜에 반응을 보인 보상이다. 알미니안들은 이 경우에도 은혜가 우선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중생의 은혜를 제공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고 첫 걸음을 놓으셨다. 그러나 엄밀히 이 걸음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죄인에 의해 훼방될 수 있는 걸음이었다. 만일 죄인이 이미 제공된 은혜에 동의하거나 받아들이기를 거절할 경우 은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206p)
2. 거부할 수 있는 은혜 ....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중생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은혜이며 구원을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208p).... 3. 유효적 소명 4. 중생과 세대주의 .... 주 되심-구원의 핵심인물이었던 세대주의자 제인 하지스(Zane C. Hodges)의 가르침을 간단히 설펴보도록 하자. 그는 그의 저서 [절대자유]에서 말하기를,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생의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은 신약성경이 지속적으로 증거하는 바이다. 그것만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마음의 중심에 뿌리를 내리는 능력 있고 생명을 주는 씨앗이 된다.”
하지스는 중생이 기적임을 분명히 증거하는데 이 기적은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 기적이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즉 믿음이 중생을 선행하고 중생을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하지스를 준펠라기안 진영에 속한 것으로 규정하게끔 한다.
.... 하지스가 중생을 믿음의 결과로 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생은 믿음 때문에 발생한다. 하지스에게 있어서 믿음은 분명히 중생을 선행하기 때문에 단순히 TULIP의 I로부터만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TULIP의 T로부터도 거리가 멀다. 그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복음으로의 믿음에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개혁주의의 전적 타락설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무능을 인정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대주의자라고 자칭하는 하지스나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은 위장된 칼빈주의자라는 비난을 거스트너에게 받은 것이다.(214~215p) .... .... 구원의 서정을 말할 때 개혁주의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중생이 믿음을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중생은 믿음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에 중생은 믿음을 선행한다. 이는 참으로 믿음의 절대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은 논리적인 순서이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믿음이 먼저 발생하고 얼마 신간이 지난 후에 의롭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에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믿음과 칭의 사이에는 시간적 공백이 없이 동시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칭의를 선행한다고 말하는가? 시간적 의미가 아닌 논리적인 의미에서 믿음이 칭의를 선행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칭의가 믿음에 의존하는 것이지 믿음이 칭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개혁주의가 중생은 믿음을 선행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시간적 순위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이 믿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중생에 의존한다고 우리는 말하는 반면 하지스와 모든 준펠라기안주의자들은 중생이 믿음의 결과로 믿음에 의존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믿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원죄의 영향력의 범위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어거스틴이나 다른 여러 핵심적인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대로 원죄가 도덕적 무능을 내포하고 있다면 믿음은 오직 중생의 결과로만 가능해지고, 중생은 유효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만 가능해진다.
중생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라 함은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인 이 은혜가 주권적이라는 의미이다. 이 은혜는 주권적으로 거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어떤 인간의 공적도 섞이지 않은 진짜 은혜인 것이다. 바로 이 은혜로 갇힌 자들이 놓임을 받으며 죄로 죽은 자들이 새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는다. 이것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몸을 굽히시고, 처음 창조의 때와 같이 영적으로 생명이 없는 흙 조각을 취하여 호흡을 불어넣으시고, 그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를 나타낸다.
중생이란 초자연적인 역사이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유효하게 하시는 일방적인 역사이다. 중생은 또한 죽은 자가 살아나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 되는 살아 있는 믿음(fides viva)의 인도되는 재창조의 역사이다.(216~217p)
개혁주의 은혜론, R.C. 스프롤, 기독교문서선교회, 197~217p에서 발췌
|
출처: 생명나무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둥지
첫댓글 R.C. 스프롤.의 글 >성령의 유효적 소명>> 존 거스트너(John Gerstner)가 존 오르에게서 "중생이 믿음을 선행한다"라고 들었다. 충격, 개혁주의신학에 노출된 첫 경험 >
>로저 니콜> 태어나면 펠라기안주의자들, 회심즉시 펠라기안적 성향이 고쳐지는 것이 아님. 교회는 찰스 피니 후로 알미니안주의가 널리 파급됨.
>알미니안주의는 믿음이 중생을 선행하도록 구원의 서정을 바꾸어 놓았다? 이 이론은 중생이란 선물이 아니라 은혜에 반응을 보인 보상이다.?
겨듭나지 못한 사람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중생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은헤이며 구원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것.
>하지스, 중생을 믿음의 결과로 본다. 거스트너로부터 위장된 칼빈주의자라고 비판받음
> 개혁주의, 중생은 믿음을 선행한다. 믿음의 절대 필요조건, 그러나 구원의 서정은 논리적인 순서이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생기는 순간에 의롭게 된다. 때문에, 믿음과 칭의사이에는 시간적공백이 없다. 다만, 논리적으로 믿음이 칭의를 선행한다. 논리적인 칭의가 믿음에 의존하는 것이지, 믿음이 칭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개혁주의의 중생은 믿음을 선행한다.고 말할 때, 시간적 순위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의문03) 믿음이 중생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반면, 하지스와 준펠라기안주의자들은 중생이 믿음의 결과로 믿음에 의존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믿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 이 비판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시간성'이 아닌 '논리적 순위'를 반드시 붙여야 성립한다. 전제라는 것이 '논리적'인 것이라면, 시간적으로 동시적이라고 한다면, 구별을 할 수는 있지만, 분리해서는 안될 것 같다. 삼위일체에서도 1격이 2격을 낳았으나 시간적으로 간격을 둘수없다.
어거스틴은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인 불가분리의 관계적으로 설명한다. 중생과 믿음이 논리적인 순서일 뿐이라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좀더 살펴보자.
의문04)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 믿음이 중생의 결과라면, 전적인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면, 이미 중생은 결정되어져 있다는 것으로 귀결될것 같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무슨 기준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결국, 예정론의 신학적 기준에 따르다보니 어쩔수 없는 결과인가? 믿음이 중생의 결과라고 했는데, 나중에 붙인 말이 "논리적인 순위"에 불과하다?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