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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회화의 심미적 대화
홍 용 희
1. 말하는 회화, 말하지 않는 시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세종 29년(1447) 4월 17일 도화서 화원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안견(安堅)을 자신의 처소로 부른다. 그는 안견에게 진중하면서도 신명에 겨운 표정으로 무어라고 한참을 당부하듯 설명한다. 그로부터 3일 후 4월 20일 안견은 안평대군을 찾아오는데, 그의 손에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들려있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지난 밤 꿈에서 본 복숭아 과수원의 황홀한 풍경을 안견에게 실감나게 얘기해 주면서 이를 그림으로 그려 줄 것을 부탁했고, 종 6품 선화(善畵)를 거쳐 정 4품 호군(護軍)에까지 올랐던 천재 화가 안견은 이를 쾌히 수락하고 돌아간 지 3일만에 독특한 자신의 구도와 필법으로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를 완성시켜 들고 온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듣고자 하는 <몽유도원도>에 얽힌 극적인 이야기는 비단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안평대군은 안견이 그려온 <몽유도원도>에 찬탄을 보내면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들인 신숙주, 이개, 최항, 서거정,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과 정인지, 김종서, 고득종을 비롯한 21명의 문신들을 불러모아 각기 여기에 대한 시(詩)․부(賦)․서(序) 등을 짓게 한다. 그는 이들이 지어온 총 68수의 글에 자신이 직접 지은 서시와 발문을 보태어 책을 묶었으니, 그것이 바로 현재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시권(夢遊桃源圖詩卷)>이다. 이상의 일련의 과정을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 → 안견의 <몽유도원도> → 21명의 문사들의 <시(詩)․부(賦)․서(序)> 이다. 이때,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말하는 회화’ 이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말하지 않는 시’라고 지칭해 볼 수는 없을까? <꿈 이야기>는 언어를 통한 생생한 감각적 묘사이고, <몽유도원도>는 감각적 언어의 조형적 표현이다. 문학이 회화의 원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러나 회화와 문학의 이와 같은 관계는 그 역도 성립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해 21명의 문사들이 제각기의 다양한 제화시를 창작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호 연관 구조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감각적 심상의 표현’이라는 공통분모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와 회화의 근친성은 <몽유도원도>의 창작에 얽힌 내용을 통해 비로소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현장감 있는 하나의 실례를 든 것 뿐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문학과 회화는 자매예술로서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앞을 향해 걸어나왔다. 여기에서 호메로스의 아킬레스 방패에 새겨진 무늬에 대한 노래, 단테의 「신곡」에서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수태고지상(受胎告知像), 복카치오의 환영의 사랑에서의 조형적 기술 그리고 이태리의 화가 봇티첼리(1445-1510)나 지오르지오네(1476-1510) 등의 작품이 문학 작품의 깊은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열거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다만, 여기에서는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을 거듭 확인하고자 할 따름이다. 특히 예술 작품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밀접하게 결부되는 경우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는 명제를 승인할 때, 시가 회화와 손잡고 걸어온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시 장르는 시각적 예술의 감각적 심상의 섭수를 통해 예술적 감응력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것이다.
그러나 시와 회화의 근친성을 시 장르에서의 시각적 심상에서만 찾는 것은 지나치게 표면적인 층위에 그친 논의이다. 회화의 본령 역시 감각적 묘사가 아니라 정신이 전해져 절묘한 형상을 얻는 경지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시와 회화는 언어와 색채라는 질료의 차이와 미(味)와 관(觀), 즉 음미하거나 바라볼 수 있는 감상 방법의 차이 이외에는 서로 상통하는 동일성을 지닌다고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시에 나타나는 회화성의 미적 가치 역시 회화미학의 미의식에 입각하여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특히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전통을 강조했던 동양의 회화미학의 미의식에 기대어 우리 현대시의 회화성에 관한 논의를 구체적인 실례가 되는 몇몇 작품을 중심으로 개진해 보기로 한다.
2. 문인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전통
우리에게 시와 그림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미학은 매우 낯익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문화사에는 문인화의 도도한 전통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 중에 그림이 있고 그림 중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소동파가 문인화의 시조에 해당되는 당나라 때의 왕유 (王維)(699-759)의 그림을 평한 유명한 글귀이다. 이러한 평가는 왕유의 그림이 문기(文氣)가 충만하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서․화(詩․書․畵)를 삼절(三絶)이라 하여 하나의 단위 개념 속에서 파악한 문인화의 인식론적 특성과도 연관된다. 시(詩)란 수양한 학문의 절제된 표현이며, 서(書)란 인품이 청아한 경지에 이르러 그 품격을 글씨로 나타내는 것이며, 화(畵)란 주로 산수화를 비롯하여 화훼화나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 사군자와 포도, 소나무, 연꽃 등을 자유자재로 그려냄으로써 시와 서에서 다하지 못한 흥취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송나라 때부터 발흥한 그림과 글씨 속의 각각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제시(題詩) 혹은 제화(題畵)는 문학의 연장으로서의 그림, 그림의 연장으로서의 문학의 위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서 문인화는 조선시대 후기 추사 김정희에 와서 정착된다. 김정희의 수묵은 고도로 축적된 선비의 인품과 학문이 메마른 먹자취의 한 획 한 점에 스며들어 있고 몇 획 되지 않은 단순한 선임에도 불구하고 담묵으로 노니는 난초와 화제가 흡사 선삼매 화삼매(禪三昧 畫三昧)의 경지를 이룬 듯 글씨와 그림이 일체를 이루었다. 김정희의 문인화에 대한 인식은 1848년 제주도에서 서울에 있는 그의 아들 상우(商佑)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는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법(蘭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는 까닭이다.”
추사는 이와 같이 회화의 근간으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하는 심의위주(心意爲主)의 인식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난을 그릴 때에 서법과 화법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지면(紙面)에 그리는 것보다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작품은, 그의 시정(詩情)과 화의(畵意)가 융화된 시․서․화 일치의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한 예에 해당된다.
積雪萬山江冰欄干
指下春風乃見天心
온 산 눈 덮혀 가득하고
강물은 얼어서 난간 되었네
손 잡힐 듯 부는 봄바람에
어찌 하늘 뜻 모르리요.
추사의 수묵화 ≪난맹첩(蘭盟帖)≫ 중의 <흑란도(黑蘭圖)>에 나오는 시편이다. 이 시는 “손 잡힐 듯” 부드럽게 감지되는 바람결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이끄는 자연의 묘리를 직시하고 이에 순응하는 심정을 고담한 어조를 통해 운취 있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적 운취는 고스란히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난초의 상승하는 기운에 전파되어 봄의 촉기를 더욱 선명한 감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특히 <흑란도(黑蘭圖)>의 천상으로 열려있는 여백은 “천심(天心)”이 들어찬 산 공간으로 다가온다. 시와 그림이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우주의 순리에 순응하는 초탈의 정신 세계를 펼쳐 놓고 있다. 수묵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 즉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을 터득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가 이룬 문인화의 경지는 허유, 흥선대원군, 권돈인 등에 의해 계승되면서 산수도나 묵란도 등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그러나 제도화, 합리화, 전문화를 내세운 근대성의 본격적인 출발과 함께 시․서․화 삼절의 총체적 인식이 쇠퇴되어가면서 점차 각기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화되어 간다.
그러나 현대시에서의 회화성 역시 동양회화미학의 근원 요소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섭수하는 것은 시각적인 표현의 층위를 넘어서서 심미적 깊이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토양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일찍이 소식이 “형사로서 그림을 논하는 견해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다” 라고 했던 것처럼 그림이 단순한 형용의 감각적 묘사일 수 없듯이 시에서의 회화성 역시 외양의 시각적인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경(意境)의 터득으로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회화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수묵에 관한 이론은 남조(南朝) 양원제(梁元帝)인 蕭繹(소역)(502-557)을 시발로 잡지만 그러나 이미 위진남북조 시대 때의 정교(政敎)를 위한 예술에서의 심미를 위한 예술로의 전환에서부터 기본 토대가 마련된다. 3-6세기 간의 미학사상들의 주요 내용은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리는 것과 관련된 <득의망상(得意忘象)>, 정신이 전해져 그림으로 드러남을 강조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할 것을 강조하는 <징회미상(澄懷味象)>, 진실된 주제의식과 생동하는 형상을 운위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등으로 정리된다. 7-8세기에 이르면 왕유의 <수묵위상론>이 제기되면서 실제 회화적인 체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오도자(吳道子) 이후의 수묵선담, 파묵, 발묵법 등은 본격적인 수묵화의 경지를 재촉해 나간다. 수묵미학의 전개와 함께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버리고 안으로는 그 심원함을 터득하는 인식론을 강조한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 근원의 현묘함을 터득할 것을 강조하는 <구득기원(俱得其元)>, 물상과 나 모두를 잊는 경지를 일컫는 <물아양망(物我兩忘)> 등의 미학론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회화미학이 우리 나라의 중요 문인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 모더니즘과 시각적 영상의 가치
우리 근대시사에서 시의 회화성이 전면에 뚜렷하게 부각된 것은 1920-30년대 모더니즘시에 이르러서이다. 1)다다이즘 계열 2) 초현실주의 계열 3) 이미지즘 계열 4)네오 클레식 계열 등으로 유형화되는 1920-30년대 모더니즘에서 언어의 감각적 회화성이 표나게 두드러진 계열은 이미지즘이다. 1920-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후견인이며 이론가인 김기림의 전언에 주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말의 音으로서의 價値, 視覺的 映像의 價値 또 이 여러 가지 價値의 相互作用에 의한 全體的 效果를 意識하고 一種의 建築學的 設計 아래서 詩를 썼다. 詩에 있어서 말은 單純한 手段 以上의 것이었다. 모더니즘은 이리하야 前代의 韻文을 主로 한 作詩法에 對抗해서 그 자신의 詩法을 지어냈다.
종전의 작시법을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한 모더니즘 시법의 특징에 대해 말의 “시각적 영상의 가치”를 첫 번째 항목으로 꼽고 있다. 모더니즘 중에서도 이미지즘 계열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이론체계에 가장 상응하는 시인은 정지용, 김광균, 장만영, 장서언 등이었다.
다음 시편은 말의 “시각적 映像의 가치”가 참신한 이국적 감수성과 습합되면서 독특한 분위기의 시적 회화성을 펼쳐 보여 주고 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砲火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帳幕 저 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서정」(1940) 전문
김기림이 지적했듯이 김광균의 시 세계는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과시하고 있다. 조락해가는 가을의 정경과 현대 문명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비애감이 투명하고 참신한 시각적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들을 달”리는 급행차, “세로팡紙로 만든 구름” 등의 시각적 묘사는 낭만적인 도시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시적 자아의 창백한 고독감과 허무의식을 자아내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캔버스의 전반에 걸쳐 배어 나오는 낭만적 우수의 분위기는 응축적 여운을 남기지 못한 채 가볍게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 부분의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가는”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의 형상 역시 소녀 취향의 감상성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근대성의 진행과 함께 출현한 “길/ 급행열차/ 공장” 등의 새로운 문명 풍경이 하염없는 비애를 느끼게 한다는 논법은 어느 누구도 수긍시키기 어렵다. 한 편의 시에서 감상성의 노정은 감정의 분출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매개항의 결핍에서 연유한다. 이 시의 회화성에는 감각적인 묘사의 절묘함이 빛나는 반면에 그 내면의 정신 세계의 간곡함이 미약하다. 이것은 응축된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그림, 즉 동양의 회화미학의 기본 요소에 해당하는 이형사신론(以形寫神論)의 미의식이 결핍된 경우이다.
김광균 시에 표나게 드러나는 회화성은 그의 미술에 관한 관심사의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전라북도 군산(1932-36)을 거쳐 서울에 정착(1936년 초여름)하면서 김기림, 오장환을 비롯한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신홍휴, 최재덕, 김만형 등의 화가들과 사귀면서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었으며, 고호의 수차가 있는 가교가 수록된 근대화집을 접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시는 그림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앞서가는 회화를 쫓아가기에 바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당시 미술에 대한 치기어린 호기심과 들뜬 설레임이 묻어 나온다. “쫓아가기에 바”쁜 수준의 미술에 대한 성급한 미의식이 그의 시 세계의 회화성에도 비슷하게 반사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는 화가 친구들과 인상파의 그림에서 화가들이 소재를 수용하는 태도와 그것을 가공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시적 감각을 발전시킨 것으로보인다.
물론 김광균 시의 회화성이 기교적인 묘사 수준에 그친 주된 원인을 그의 미술적 인식의 초보적인 수준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도시 문명에 대한 비애와 현대인의 단절감을 노래한 대부분의 모더니스트의 시편들이 임화가 비판한 “문화의 외면(外面)”에만 매달리는 “기교주의”와 “관념주의의 환상”을 노정시키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도시 문명의 진행이 현실적으로 시인들에게 내적 충격을 던져줄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점, 설령 어느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할지라도 근대 문명의 이면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시인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발표된 회화적 심상이 두드러진 모더니즘의 작품 중에 근대 문명 속의 단절감과 고독을 노래한 이국적 정서의 시편과 상반된 자리에 놓이는 전통적인 자연 소재의 작품은 어떠했을까?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東海)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順伊),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장만영, 「달․포도․잎사귀」(1936) 전문
달빛으로 농담과 조도가 조절되고 있는 이 시편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시적 화자는 벌레의 울음소리로 감지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 포도, 포도 넝쿨 밑의 어린 잎새가 서로 어우러져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관조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미적 관조의 거리는 순이에 대한 반복적인 호명을 통해 견지된다. 이때, “순이”는 3인칭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의 순정한 내적 자아로 해석된다. 화자는 자신의 순진무구한 내적 자아를 일깨워 맑고 순수한 마음결로 “고풍한 뜰”의 풍경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동양 회화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미상관도(味象觀道)>의 미의식 즉 형상을 음미하여 관조하는 도에 이르는 경지와 근접하게 상응된다. 물론, <미상관도(味象觀道)>의 미의식이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시적 화자가 달, 포도, 잎사귀가 서로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동해 바다 물처럼” 깊은 우주적 신비를 감지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1930년대 이 시편이 도시 문명의 외관에 대한 묘사와 이국적인 우수의 정서에 탐닉하는 창백한 감상성과는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저력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당시의 모더니즘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시인인 정지용의 경우 전반기의 시 세계에서 표나게 드러나는 탁월한 감각적 묘파, 이를테면, “바다는 뿔뿔이/달아날랴고 했다.//푸른 도마뱀같이/재재발렀다.//꼬리가 이루/잡히지 않었다.//흰 발톱에 찢긴/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바다2」) 등에서 보여주는 날렵하고 재기발랄하게 표현하는 탁월한 시각적 심상의 감각화에서 점차 전통적인 동양 정신의 깊이로 나아간 점은(백록담(1941)) 매우 시사적이다. 정지용의 시적 여정의 변화는 회화적 심상의 궁극적인 지향성이 정신세계를 옮겨 절묘함에 이르는 천상묘득(遷想妙得)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보듯, “언어의 영상적 가치”를 강조한 1920-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이미지즘의 계열은 우리 현대시사에서의 회화성이 제 위치를 찾아가는 양상들을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
4. 그림 읽기와 시적 미의식
고흐의 근대 화집 水車가 있는 架橋를 돌려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1930년대 서울 시단의 한 풍경은 이제 아득한 추억의 장막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림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앞서가는 회화를 쫒아가기에 바빴”던 열악한 환경에서는 멀리 벗어났다. 세계의 모든 명화의 화집들이 우리의 손길이 쉽게 닿는 가까운 일상 속에 다가와 있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애호가를 거느리고 있다는 고흐의 화집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소용돌이치는 빛의 역동성을 통해 절대 고독, 영혼의 절규, 죽음에 대한 잠재의식을 처절하게 표출했던 고흐의 미술 세계는 우리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대표적인 분화구로 작용해왔다. 고흐의 그림과 생애를 소재로 한 주요 시편을 모은 시집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하였음은 이를 뒷받침 한다.
다음의 시편은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과 시인의 주관적인 심미성이 만난 창조적인 대화의 장면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불빛 흐린
언제나 불빛 흐린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형만이
언제나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소리들을 꿈 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새벽에는
빛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정진규, 「감자 먹는 사람들 - 삽질소리」 전문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 듯, 네델란드의 화가 반 센트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이 원텍스트이다. 고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 세잔,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된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 붓터치를 살리는 묘법, 전통적인 주제로부터의 탈피 등의 공통적인 특징 위에서 인상주의보다 항구적인 회화적 질서, 자연 속에 내재하는 굳건한 조형적 질서 등을 집중적으로 추구하였다.
위의 시편의 밑그림이 되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5식구가 등장한다. 고흐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해 “농부의 그림에서 베이컨, 담배연기, 그리고 감자 냄새가 풍긴다면 좋다. 그것은 분명 건강한 그림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고흐의 그림이 한국의 시인의 내밀한 시적 상상력으로 옮겨 와 농촌에서 가족들과 함께 “불빛 흐린/저녁 식탁”에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어린 시절을 살려내고 있다. 이 시의 시상에서 또 다시 우리의 눈길을 모으게 하는 것은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회상에서 더 나아가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삽질 소리”가 첨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삽질 소리”의 연원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고흐 그림의 흐린 남폿불의 조도에서 비롯되는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탕색을 가리킨다. 시인은 이 바탕색의 어둡고 칙칙한 색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유난히 무겁고 각지게 드러나는 표정에서 노동하는 삶의 신산스런 현실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타고난 사람이었다”는 진술은 대대로 숙명처럼 이어온 힘겨운 농부의 생애에 대한 처연한 표백이다. 위대한 화가의 창조하는 힘으로서의 색채 미학이 시인의 가족사적 내력의 굴곡을 환기시키고 있다. 정진규의 주관적 미의식과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의 깊고 내밀한 대화가 목도되는 장면이다. 동양의 회화미학에서 중요시 여기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필(226-249)이 제기한 도가적 사고에 입각한 <득의망상(得意忘象)> 즉,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리는 창조적 미의식과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한편, 다음 시편은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과 우리 나라 어느 마을의 연못에서 그 주위의 빛, 공기, 하늘 등과 어우러져 있는 “수련”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읽힌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전문
여름날 호수 위에 핀 “섬광처럼” 흰 색조의 “수련”의 이미지는 프랑스의 화가 모네의 “수련” 연작을 연상시킨다. (위 시편이 수록된 작품집 역시 “수련” 연작으로 이루어진 수련이다.) 이 시의 시상의 전개 역시 모네의 인상파의 화법에 따르고 있다. 인상파 화가들은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과 대상의 인상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화면에 옮겼다. 그들은 빛에 따라 바뀌는 사물과 그 주제를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의 시편의 질료 역시 “요동치고” “미끄러지는” 빛의 비늘들이다. 마치 “수련”은 수면과 수면 위에 “사랑의 말들처럼” 미끄러지는 수많은 빛들의 교호 작용의 산물로 보인다. 마지막 행의 “푸른 물위에 수련”을 “섬광”에 비유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수련은 물이 스며들면서 잘 버무러진 빛의 반죽덩어리인 것이다. 형체도 무게도 부피도 없는 빛의 다발과 수면의 파동으로 잉태된 “수련”을 시인은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는 “수련”을 통해 빛의 우주적인 교향악을 직시하고 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동양 회화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징회미상(澄懷味像)>의 미의식 즉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함으로써 사물이 지닌 영묘한 정신 세계를 감지하는 경지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현대 시와 회화의 만남은 서양화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동양화의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다음 시편은 농담과 여백의 화법으로 형상화된 낮고 고즈넉한 수묵정원의 풍경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fp이다.
누가 살던 집인지
둥그렇게 집터가 있고
웃자란 나무들 하늘로 뻗쳤다
사금파리 흩어진
마른 개울 속에 침묵이
콸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마른 노래를
물에 풀며
있었다
무명실 같은
노래를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
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눈감았다 떠도 다시
수묵의 정원 속이었다
―장석남, 「水墨정원 - 序」 전문
장석남은 고요하고 아늑한 “水墨정원”을 은밀하게 가꾸어 놓고 그 곳에 거주하며 즐겁게 완상하고 있다. 수묵정원에는 인기척은 물론이고 “개울”도 메말라서 앙상하다. 그래서 사위는 온통 침묵만이 그윽할 따름이다. 이 텅빈 여백의 정원에서 무엇을 완상한단 말인가. 그러나 화자는 생생하게 울려퍼지는 소리의 파문을 경청하고 있다. 침묵에도 “콸콸콸콸 흐르”는 역동적인 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마른 개울”에도 “마른 노래”가 배어나오는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화자는 이러한 물음을 가슴속에 되새기며 수묵 정원을 거닌다. 그는 여백 속에 내재하는 현묘함의 근원을 묻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에는 화자가 “부둣가에 우연히/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배가 들어와” 배를 매고 그 배를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장석남, 「배를 매며」 일부
부둣가에 배를 매고 그 배를 바라보고 있다.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온종일을 떠 있다”.
빈배의 풍경이 한가롭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배 안에 우주가 그득히 실려서 울렁이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홀로 멀리서 바라보는 한적한 거리를 통해 그 근원의 현묘함을 체감하는 구득기원(俱得其元)의 미의식을 즐기고 있다.
5. 시와 회화의 창조적 대화를 위하여
시와 그림의 대화란 단순히 언어를 통한 시각적 심상의 감각화나 그림을 통한 시적 내용의 묘사의 차원에서 논의될 성질이 아니다. 시와 그림의 올바른 관계는 상호 창조적인 심미적 대화의 장으로 열려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의 회화성이란 시인의 회화에 대한 심미적 주관성에 입각한 만남의 자리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의 회화에 대한 시적 창조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고흐의 그림에 대한 서로 다른 문인들의 수많은 창작품의 산출을 재론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시와 회화의 대화의 심미적 깊이와 창조성에 있다. 그렇다면 시의 화화성의 창조적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오랜 전통을 지닌 동양회화미학의 유현한 흐름에서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미학의 기본 요소에 기대어 살펴본 현대시의 회화성에 관한 몇 가지 실례는 그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회화미학의 심미관을 비롯해서 그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수묵미학의 체현 방식에 대한 미의식, 그리고 우리 나라의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문인화 전통의 높은 경지는 오늘날 현대시와 회화의 대화의 장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라는 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맑은 마음으로 형상을 관조하여 체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심원한 도(道)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 미학의 기본 원리에 대한 깊은 탐구는 오늘날 현대시의 한켠에서 적지않게 나타나는 국적 불명의 경박한 감성과 부유하는 기표의 현란함, 즉 1930년대 모더니즘시 계열을 향해 임화가 비판한 “문화의 외면(外面)”에만 매달리는 “기교주의”와 “관념주의의 환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이에 대한 극복의 한 이정표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홍 용 희
1. 말하는 회화, 말하지 않는 시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세종 29년(1447) 4월 17일 도화서 화원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안견(安堅)을 자신의 처소로 부른다. 그는 안견에게 진중하면서도 신명에 겨운 표정으로 무어라고 한참을 당부하듯 설명한다. 그로부터 3일 후 4월 20일 안견은 안평대군을 찾아오는데, 그의 손에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들려있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지난 밤 꿈에서 본 복숭아 과수원의 황홀한 풍경을 안견에게 실감나게 얘기해 주면서 이를 그림으로 그려 줄 것을 부탁했고, 종 6품 선화(善畵)를 거쳐 정 4품 호군(護軍)에까지 올랐던 천재 화가 안견은 이를 쾌히 수락하고 돌아간 지 3일만에 독특한 자신의 구도와 필법으로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를 완성시켜 들고 온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듣고자 하는 <몽유도원도>에 얽힌 극적인 이야기는 비단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안평대군은 안견이 그려온 <몽유도원도>에 찬탄을 보내면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들인 신숙주, 이개, 최항, 서거정,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과 정인지, 김종서, 고득종을 비롯한 21명의 문신들을 불러모아 각기 여기에 대한 시(詩)․부(賦)․서(序) 등을 짓게 한다. 그는 이들이 지어온 총 68수의 글에 자신이 직접 지은 서시와 발문을 보태어 책을 묶었으니, 그것이 바로 현재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시권(夢遊桃源圖詩卷)>이다. 이상의 일련의 과정을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 → 안견의 <몽유도원도> → 21명의 문사들의 <시(詩)․부(賦)․서(序)> 이다. 이때,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말하는 회화’ 이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말하지 않는 시’라고 지칭해 볼 수는 없을까? <꿈 이야기>는 언어를 통한 생생한 감각적 묘사이고, <몽유도원도>는 감각적 언어의 조형적 표현이다. 문학이 회화의 원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러나 회화와 문학의 이와 같은 관계는 그 역도 성립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해 21명의 문사들이 제각기의 다양한 제화시를 창작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호 연관 구조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감각적 심상의 표현’이라는 공통분모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와 회화의 근친성은 <몽유도원도>의 창작에 얽힌 내용을 통해 비로소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현장감 있는 하나의 실례를 든 것 뿐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문학과 회화는 자매예술로서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앞을 향해 걸어나왔다. 여기에서 호메로스의 아킬레스 방패에 새겨진 무늬에 대한 노래, 단테의 「신곡」에서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수태고지상(受胎告知像), 복카치오의 환영의 사랑에서의 조형적 기술 그리고 이태리의 화가 봇티첼리(1445-1510)나 지오르지오네(1476-1510) 등의 작품이 문학 작품의 깊은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열거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다만, 여기에서는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을 거듭 확인하고자 할 따름이다. 특히 예술 작품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밀접하게 결부되는 경우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는 명제를 승인할 때, 시가 회화와 손잡고 걸어온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시 장르는 시각적 예술의 감각적 심상의 섭수를 통해 예술적 감응력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것이다.
그러나 시와 회화의 근친성을 시 장르에서의 시각적 심상에서만 찾는 것은 지나치게 표면적인 층위에 그친 논의이다. 회화의 본령 역시 감각적 묘사가 아니라 정신이 전해져 절묘한 형상을 얻는 경지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시와 회화는 언어와 색채라는 질료의 차이와 미(味)와 관(觀), 즉 음미하거나 바라볼 수 있는 감상 방법의 차이 이외에는 서로 상통하는 동일성을 지닌다고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시에 나타나는 회화성의 미적 가치 역시 회화미학의 미의식에 입각하여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특히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전통을 강조했던 동양의 회화미학의 미의식에 기대어 우리 현대시의 회화성에 관한 논의를 구체적인 실례가 되는 몇몇 작품을 중심으로 개진해 보기로 한다.
2. 문인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전통
우리에게 시와 그림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미학은 매우 낯익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문화사에는 문인화의 도도한 전통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 중에 그림이 있고 그림 중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소동파가 문인화의 시조에 해당되는 당나라 때의 왕유 (王維)(699-759)의 그림을 평한 유명한 글귀이다. 이러한 평가는 왕유의 그림이 문기(文氣)가 충만하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서․화(詩․書․畵)를 삼절(三絶)이라 하여 하나의 단위 개념 속에서 파악한 문인화의 인식론적 특성과도 연관된다. 시(詩)란 수양한 학문의 절제된 표현이며, 서(書)란 인품이 청아한 경지에 이르러 그 품격을 글씨로 나타내는 것이며, 화(畵)란 주로 산수화를 비롯하여 화훼화나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 사군자와 포도, 소나무, 연꽃 등을 자유자재로 그려냄으로써 시와 서에서 다하지 못한 흥취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송나라 때부터 발흥한 그림과 글씨 속의 각각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제시(題詩) 혹은 제화(題畵)는 문학의 연장으로서의 그림, 그림의 연장으로서의 문학의 위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서 문인화는 조선시대 후기 추사 김정희에 와서 정착된다. 김정희의 수묵은 고도로 축적된 선비의 인품과 학문이 메마른 먹자취의 한 획 한 점에 스며들어 있고 몇 획 되지 않은 단순한 선임에도 불구하고 담묵으로 노니는 난초와 화제가 흡사 선삼매 화삼매(禪三昧 畫三昧)의 경지를 이룬 듯 글씨와 그림이 일체를 이루었다. 김정희의 문인화에 대한 인식은 1848년 제주도에서 서울에 있는 그의 아들 상우(商佑)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는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법(蘭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는 까닭이다.”
추사는 이와 같이 회화의 근간으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하는 심의위주(心意爲主)의 인식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난을 그릴 때에 서법과 화법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지면(紙面)에 그리는 것보다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작품은, 그의 시정(詩情)과 화의(畵意)가 융화된 시․서․화 일치의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한 예에 해당된다.
積雪萬山江冰欄干
指下春風乃見天心
온 산 눈 덮혀 가득하고
강물은 얼어서 난간 되었네
손 잡힐 듯 부는 봄바람에
어찌 하늘 뜻 모르리요.
추사의 수묵화 ≪난맹첩(蘭盟帖)≫ 중의 <흑란도(黑蘭圖)>에 나오는 시편이다. 이 시는 “손 잡힐 듯” 부드럽게 감지되는 바람결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이끄는 자연의 묘리를 직시하고 이에 순응하는 심정을 고담한 어조를 통해 운취 있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적 운취는 고스란히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난초의 상승하는 기운에 전파되어 봄의 촉기를 더욱 선명한 감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특히 <흑란도(黑蘭圖)>의 천상으로 열려있는 여백은 “천심(天心)”이 들어찬 산 공간으로 다가온다. 시와 그림이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우주의 순리에 순응하는 초탈의 정신 세계를 펼쳐 놓고 있다. 수묵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 즉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을 터득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가 이룬 문인화의 경지는 허유, 흥선대원군, 권돈인 등에 의해 계승되면서 산수도나 묵란도 등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그러나 제도화, 합리화, 전문화를 내세운 근대성의 본격적인 출발과 함께 시․서․화 삼절의 총체적 인식이 쇠퇴되어가면서 점차 각기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화되어 간다.
그러나 현대시에서의 회화성 역시 동양회화미학의 근원 요소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섭수하는 것은 시각적인 표현의 층위를 넘어서서 심미적 깊이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토양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일찍이 소식이 “형사로서 그림을 논하는 견해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다” 라고 했던 것처럼 그림이 단순한 형용의 감각적 묘사일 수 없듯이 시에서의 회화성 역시 외양의 시각적인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경(意境)의 터득으로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회화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수묵에 관한 이론은 남조(南朝) 양원제(梁元帝)인 蕭繹(소역)(502-557)을 시발로 잡지만 그러나 이미 위진남북조 시대 때의 정교(政敎)를 위한 예술에서의 심미를 위한 예술로의 전환에서부터 기본 토대가 마련된다. 3-6세기 간의 미학사상들의 주요 내용은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리는 것과 관련된 <득의망상(得意忘象)>, 정신이 전해져 그림으로 드러남을 강조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할 것을 강조하는 <징회미상(澄懷味象)>, 진실된 주제의식과 생동하는 형상을 운위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등으로 정리된다. 7-8세기에 이르면 왕유의 <수묵위상론>이 제기되면서 실제 회화적인 체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오도자(吳道子) 이후의 수묵선담, 파묵, 발묵법 등은 본격적인 수묵화의 경지를 재촉해 나간다. 수묵미학의 전개와 함께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버리고 안으로는 그 심원함을 터득하는 인식론을 강조한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 근원의 현묘함을 터득할 것을 강조하는 <구득기원(俱得其元)>, 물상과 나 모두를 잊는 경지를 일컫는 <물아양망(物我兩忘)> 등의 미학론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회화미학이 우리 나라의 중요 문인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 모더니즘과 시각적 영상의 가치
우리 근대시사에서 시의 회화성이 전면에 뚜렷하게 부각된 것은 1920-30년대 모더니즘시에 이르러서이다. 1)다다이즘 계열 2) 초현실주의 계열 3) 이미지즘 계열 4)네오 클레식 계열 등으로 유형화되는 1920-30년대 모더니즘에서 언어의 감각적 회화성이 표나게 두드러진 계열은 이미지즘이다. 1920-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후견인이며 이론가인 김기림의 전언에 주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말의 音으로서의 價値, 視覺的 映像의 價値 또 이 여러 가지 價値의 相互作用에 의한 全體的 效果를 意識하고 一種의 建築學的 設計 아래서 詩를 썼다. 詩에 있어서 말은 單純한 手段 以上의 것이었다. 모더니즘은 이리하야 前代의 韻文을 主로 한 作詩法에 對抗해서 그 자신의 詩法을 지어냈다.
종전의 작시법을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한 모더니즘 시법의 특징에 대해 말의 “시각적 영상의 가치”를 첫 번째 항목으로 꼽고 있다. 모더니즘 중에서도 이미지즘 계열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이론체계에 가장 상응하는 시인은 정지용, 김광균, 장만영, 장서언 등이었다.
다음 시편은 말의 “시각적 映像의 가치”가 참신한 이국적 감수성과 습합되면서 독특한 분위기의 시적 회화성을 펼쳐 보여 주고 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砲火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帳幕 저 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서정」(1940) 전문
김기림이 지적했듯이 김광균의 시 세계는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과시하고 있다. 조락해가는 가을의 정경과 현대 문명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비애감이 투명하고 참신한 시각적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들을 달”리는 급행차, “세로팡紙로 만든 구름” 등의 시각적 묘사는 낭만적인 도시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시적 자아의 창백한 고독감과 허무의식을 자아내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캔버스의 전반에 걸쳐 배어 나오는 낭만적 우수의 분위기는 응축적 여운을 남기지 못한 채 가볍게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 부분의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가는”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의 형상 역시 소녀 취향의 감상성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근대성의 진행과 함께 출현한 “길/ 급행열차/ 공장” 등의 새로운 문명 풍경이 하염없는 비애를 느끼게 한다는 논법은 어느 누구도 수긍시키기 어렵다. 한 편의 시에서 감상성의 노정은 감정의 분출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매개항의 결핍에서 연유한다. 이 시의 회화성에는 감각적인 묘사의 절묘함이 빛나는 반면에 그 내면의 정신 세계의 간곡함이 미약하다. 이것은 응축된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그림, 즉 동양의 회화미학의 기본 요소에 해당하는 이형사신론(以形寫神論)의 미의식이 결핍된 경우이다.
김광균 시에 표나게 드러나는 회화성은 그의 미술에 관한 관심사의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전라북도 군산(1932-36)을 거쳐 서울에 정착(1936년 초여름)하면서 김기림, 오장환을 비롯한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신홍휴, 최재덕, 김만형 등의 화가들과 사귀면서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었으며, 고호의 수차가 있는 가교가 수록된 근대화집을 접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시는 그림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앞서가는 회화를 쫓아가기에 바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당시 미술에 대한 치기어린 호기심과 들뜬 설레임이 묻어 나온다. “쫓아가기에 바”쁜 수준의 미술에 대한 성급한 미의식이 그의 시 세계의 회화성에도 비슷하게 반사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는 화가 친구들과 인상파의 그림에서 화가들이 소재를 수용하는 태도와 그것을 가공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시적 감각을 발전시킨 것으로보인다.
물론 김광균 시의 회화성이 기교적인 묘사 수준에 그친 주된 원인을 그의 미술적 인식의 초보적인 수준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도시 문명에 대한 비애와 현대인의 단절감을 노래한 대부분의 모더니스트의 시편들이 임화가 비판한 “문화의 외면(外面)”에만 매달리는 “기교주의”와 “관념주의의 환상”을 노정시키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도시 문명의 진행이 현실적으로 시인들에게 내적 충격을 던져줄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점, 설령 어느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할지라도 근대 문명의 이면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시인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발표된 회화적 심상이 두드러진 모더니즘의 작품 중에 근대 문명 속의 단절감과 고독을 노래한 이국적 정서의 시편과 상반된 자리에 놓이는 전통적인 자연 소재의 작품은 어떠했을까?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東海)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順伊),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장만영, 「달․포도․잎사귀」(1936) 전문
달빛으로 농담과 조도가 조절되고 있는 이 시편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시적 화자는 벌레의 울음소리로 감지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 포도, 포도 넝쿨 밑의 어린 잎새가 서로 어우러져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관조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미적 관조의 거리는 순이에 대한 반복적인 호명을 통해 견지된다. 이때, “순이”는 3인칭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의 순정한 내적 자아로 해석된다. 화자는 자신의 순진무구한 내적 자아를 일깨워 맑고 순수한 마음결로 “고풍한 뜰”의 풍경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동양 회화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미상관도(味象觀道)>의 미의식 즉 형상을 음미하여 관조하는 도에 이르는 경지와 근접하게 상응된다. 물론, <미상관도(味象觀道)>의 미의식이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시적 화자가 달, 포도, 잎사귀가 서로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동해 바다 물처럼” 깊은 우주적 신비를 감지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1930년대 이 시편이 도시 문명의 외관에 대한 묘사와 이국적인 우수의 정서에 탐닉하는 창백한 감상성과는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저력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당시의 모더니즘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시인인 정지용의 경우 전반기의 시 세계에서 표나게 드러나는 탁월한 감각적 묘파, 이를테면, “바다는 뿔뿔이/달아날랴고 했다.//푸른 도마뱀같이/재재발렀다.//꼬리가 이루/잡히지 않었다.//흰 발톱에 찢긴/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바다2」) 등에서 보여주는 날렵하고 재기발랄하게 표현하는 탁월한 시각적 심상의 감각화에서 점차 전통적인 동양 정신의 깊이로 나아간 점은(백록담(1941)) 매우 시사적이다. 정지용의 시적 여정의 변화는 회화적 심상의 궁극적인 지향성이 정신세계를 옮겨 절묘함에 이르는 천상묘득(遷想妙得)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보듯, “언어의 영상적 가치”를 강조한 1920-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이미지즘의 계열은 우리 현대시사에서의 회화성이 제 위치를 찾아가는 양상들을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
4. 그림 읽기와 시적 미의식
고흐의 근대 화집 水車가 있는 架橋를 돌려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1930년대 서울 시단의 한 풍경은 이제 아득한 추억의 장막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림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앞서가는 회화를 쫒아가기에 바빴”던 열악한 환경에서는 멀리 벗어났다. 세계의 모든 명화의 화집들이 우리의 손길이 쉽게 닿는 가까운 일상 속에 다가와 있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애호가를 거느리고 있다는 고흐의 화집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소용돌이치는 빛의 역동성을 통해 절대 고독, 영혼의 절규, 죽음에 대한 잠재의식을 처절하게 표출했던 고흐의 미술 세계는 우리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대표적인 분화구로 작용해왔다. 고흐의 그림과 생애를 소재로 한 주요 시편을 모은 시집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하였음은 이를 뒷받침 한다.
다음의 시편은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과 시인의 주관적인 심미성이 만난 창조적인 대화의 장면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불빛 흐린
언제나 불빛 흐린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형만이
언제나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소리들을 꿈 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새벽에는
빛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정진규, 「감자 먹는 사람들 - 삽질소리」 전문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 듯, 네델란드의 화가 반 센트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이 원텍스트이다. 고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 세잔,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된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 붓터치를 살리는 묘법, 전통적인 주제로부터의 탈피 등의 공통적인 특징 위에서 인상주의보다 항구적인 회화적 질서, 자연 속에 내재하는 굳건한 조형적 질서 등을 집중적으로 추구하였다.
위의 시편의 밑그림이 되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5식구가 등장한다. 고흐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해 “농부의 그림에서 베이컨, 담배연기, 그리고 감자 냄새가 풍긴다면 좋다. 그것은 분명 건강한 그림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고흐의 그림이 한국의 시인의 내밀한 시적 상상력으로 옮겨 와 농촌에서 가족들과 함께 “불빛 흐린/저녁 식탁”에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어린 시절을 살려내고 있다. 이 시의 시상에서 또 다시 우리의 눈길을 모으게 하는 것은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회상에서 더 나아가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삽질 소리”가 첨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삽질 소리”의 연원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고흐 그림의 흐린 남폿불의 조도에서 비롯되는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탕색을 가리킨다. 시인은 이 바탕색의 어둡고 칙칙한 색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유난히 무겁고 각지게 드러나는 표정에서 노동하는 삶의 신산스런 현실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타고난 사람이었다”는 진술은 대대로 숙명처럼 이어온 힘겨운 농부의 생애에 대한 처연한 표백이다. 위대한 화가의 창조하는 힘으로서의 색채 미학이 시인의 가족사적 내력의 굴곡을 환기시키고 있다. 정진규의 주관적 미의식과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의 깊고 내밀한 대화가 목도되는 장면이다. 동양의 회화미학에서 중요시 여기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필(226-249)이 제기한 도가적 사고에 입각한 <득의망상(得意忘象)> 즉,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리는 창조적 미의식과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한편, 다음 시편은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과 우리 나라 어느 마을의 연못에서 그 주위의 빛, 공기, 하늘 등과 어우러져 있는 “수련”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읽힌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전문
여름날 호수 위에 핀 “섬광처럼” 흰 색조의 “수련”의 이미지는 프랑스의 화가 모네의 “수련” 연작을 연상시킨다. (위 시편이 수록된 작품집 역시 “수련” 연작으로 이루어진 수련이다.) 이 시의 시상의 전개 역시 모네의 인상파의 화법에 따르고 있다. 인상파 화가들은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과 대상의 인상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화면에 옮겼다. 그들은 빛에 따라 바뀌는 사물과 그 주제를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의 시편의 질료 역시 “요동치고” “미끄러지는” 빛의 비늘들이다. 마치 “수련”은 수면과 수면 위에 “사랑의 말들처럼” 미끄러지는 수많은 빛들의 교호 작용의 산물로 보인다. 마지막 행의 “푸른 물위에 수련”을 “섬광”에 비유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수련은 물이 스며들면서 잘 버무러진 빛의 반죽덩어리인 것이다. 형체도 무게도 부피도 없는 빛의 다발과 수면의 파동으로 잉태된 “수련”을 시인은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는 “수련”을 통해 빛의 우주적인 교향악을 직시하고 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동양 회화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징회미상(澄懷味像)>의 미의식 즉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함으로써 사물이 지닌 영묘한 정신 세계를 감지하는 경지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현대 시와 회화의 만남은 서양화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동양화의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다음 시편은 농담과 여백의 화법으로 형상화된 낮고 고즈넉한 수묵정원의 풍경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fp이다.
누가 살던 집인지
둥그렇게 집터가 있고
웃자란 나무들 하늘로 뻗쳤다
사금파리 흩어진
마른 개울 속에 침묵이
콸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마른 노래를
물에 풀며
있었다
무명실 같은
노래를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
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눈감았다 떠도 다시
수묵의 정원 속이었다
―장석남, 「水墨정원 - 序」 전문
장석남은 고요하고 아늑한 “水墨정원”을 은밀하게 가꾸어 놓고 그 곳에 거주하며 즐겁게 완상하고 있다. 수묵정원에는 인기척은 물론이고 “개울”도 메말라서 앙상하다. 그래서 사위는 온통 침묵만이 그윽할 따름이다. 이 텅빈 여백의 정원에서 무엇을 완상한단 말인가. 그러나 화자는 생생하게 울려퍼지는 소리의 파문을 경청하고 있다. 침묵에도 “콸콸콸콸 흐르”는 역동적인 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마른 개울”에도 “마른 노래”가 배어나오는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화자는 이러한 물음을 가슴속에 되새기며 수묵 정원을 거닌다. 그는 여백 속에 내재하는 현묘함의 근원을 묻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에는 화자가 “부둣가에 우연히/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배가 들어와” 배를 매고 그 배를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장석남, 「배를 매며」 일부
부둣가에 배를 매고 그 배를 바라보고 있다.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온종일을 떠 있다”.
빈배의 풍경이 한가롭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배 안에 우주가 그득히 실려서 울렁이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홀로 멀리서 바라보는 한적한 거리를 통해 그 근원의 현묘함을 체감하는 구득기원(俱得其元)의 미의식을 즐기고 있다.
5. 시와 회화의 창조적 대화를 위하여
시와 그림의 대화란 단순히 언어를 통한 시각적 심상의 감각화나 그림을 통한 시적 내용의 묘사의 차원에서 논의될 성질이 아니다. 시와 그림의 올바른 관계는 상호 창조적인 심미적 대화의 장으로 열려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의 회화성이란 시인의 회화에 대한 심미적 주관성에 입각한 만남의 자리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의 회화에 대한 시적 창조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고흐의 그림에 대한 서로 다른 문인들의 수많은 창작품의 산출을 재론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시와 회화의 대화의 심미적 깊이와 창조성에 있다. 그렇다면 시의 화화성의 창조적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오랜 전통을 지닌 동양회화미학의 유현한 흐름에서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미학의 기본 요소에 기대어 살펴본 현대시의 회화성에 관한 몇 가지 실례는 그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회화미학의 심미관을 비롯해서 그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수묵미학의 체현 방식에 대한 미의식, 그리고 우리 나라의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문인화 전통의 높은 경지는 오늘날 현대시와 회화의 대화의 장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라는 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맑은 마음으로 형상을 관조하여 체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심원한 도(道)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 미학의 기본 원리에 대한 깊은 탐구는 오늘날 현대시의 한켠에서 적지않게 나타나는 국적 불명의 경박한 감성과 부유하는 기표의 현란함, 즉 1930년대 모더니즘시 계열을 향해 임화가 비판한 “문화의 외면(外面)”에만 매달리는 “기교주의”와 “관념주의의 환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이에 대한 극복의 한 이정표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홍 용 희
1. 말하는 회화, 말하지 않는 시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세종 29년(1447) 4월 17일 도화서 화원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안견(安堅)을 자신의 처소로 부른다. 그는 안견에게 진중하면서도 신명에 겨운 표정으로 무어라고 한참을 당부하듯 설명한다. 그로부터 3일 후 4월 20일 안견은 안평대군을 찾아오는데, 그의 손에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들려있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지난 밤 꿈에서 본 복숭아 과수원의 황홀한 풍경을 안견에게 실감나게 얘기해 주면서 이를 그림으로 그려 줄 것을 부탁했고, 종 6품 선화(善畵)를 거쳐 정 4품 호군(護軍)에까지 올랐던 천재 화가 안견은 이를 쾌히 수락하고 돌아간 지 3일만에 독특한 자신의 구도와 필법으로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를 완성시켜 들고 온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듣고자 하는 <몽유도원도>에 얽힌 극적인 이야기는 비단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안평대군은 안견이 그려온 <몽유도원도>에 찬탄을 보내면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들인 신숙주, 이개, 최항, 서거정,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과 정인지, 김종서, 고득종을 비롯한 21명의 문신들을 불러모아 각기 여기에 대한 시(詩)․부(賦)․서(序) 등을 짓게 한다. 그는 이들이 지어온 총 68수의 글에 자신이 직접 지은 서시와 발문을 보태어 책을 묶었으니, 그것이 바로 현재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시권(夢遊桃源圖詩卷)>이다. 이상의 일련의 과정을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 → 안견의 <몽유도원도> → 21명의 문사들의 <시(詩)․부(賦)․서(序)> 이다. 이때,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말하는 회화’ 이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말하지 않는 시’라고 지칭해 볼 수는 없을까? <꿈 이야기>는 언어를 통한 생생한 감각적 묘사이고, <몽유도원도>는 감각적 언어의 조형적 표현이다. 문학이 회화의 원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러나 회화와 문학의 이와 같은 관계는 그 역도 성립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해 21명의 문사들이 제각기의 다양한 제화시를 창작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호 연관 구조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감각적 심상의 표현’이라는 공통분모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와 회화의 근친성은 <몽유도원도>의 창작에 얽힌 내용을 통해 비로소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현장감 있는 하나의 실례를 든 것 뿐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문학과 회화는 자매예술로서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앞을 향해 걸어나왔다. 여기에서 호메로스의 아킬레스 방패에 새겨진 무늬에 대한 노래, 단테의 「신곡」에서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수태고지상(受胎告知像), 복카치오의 환영의 사랑에서의 조형적 기술 그리고 이태리의 화가 봇티첼리(1445-1510)나 지오르지오네(1476-1510) 등의 작품이 문학 작품의 깊은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열거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다만, 여기에서는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을 거듭 확인하고자 할 따름이다. 특히 예술 작품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밀접하게 결부되는 경우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는 명제를 승인할 때, 시가 회화와 손잡고 걸어온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시 장르는 시각적 예술의 감각적 심상의 섭수를 통해 예술적 감응력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것이다.
그러나 시와 회화의 근친성을 시 장르에서의 시각적 심상에서만 찾는 것은 지나치게 표면적인 층위에 그친 논의이다. 회화의 본령 역시 감각적 묘사가 아니라 정신이 전해져 절묘한 형상을 얻는 경지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시와 회화는 언어와 색채라는 질료의 차이와 미(味)와 관(觀), 즉 음미하거나 바라볼 수 있는 감상 방법의 차이 이외에는 서로 상통하는 동일성을 지닌다고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시에 나타나는 회화성의 미적 가치 역시 회화미학의 미의식에 입각하여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특히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전통을 강조했던 동양의 회화미학의 미의식에 기대어 우리 현대시의 회화성에 관한 논의를 구체적인 실례가 되는 몇몇 작품을 중심으로 개진해 보기로 한다.
2. 문인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전통
우리에게 시와 그림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미학은 매우 낯익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문화사에는 문인화의 도도한 전통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 중에 그림이 있고 그림 중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소동파가 문인화의 시조에 해당되는 당나라 때의 왕유 (王維)(699-759)의 그림을 평한 유명한 글귀이다. 이러한 평가는 왕유의 그림이 문기(文氣)가 충만하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서․화(詩․書․畵)를 삼절(三絶)이라 하여 하나의 단위 개념 속에서 파악한 문인화의 인식론적 특성과도 연관된다. 시(詩)란 수양한 학문의 절제된 표현이며, 서(書)란 인품이 청아한 경지에 이르러 그 품격을 글씨로 나타내는 것이며, 화(畵)란 주로 산수화를 비롯하여 화훼화나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 사군자와 포도, 소나무, 연꽃 등을 자유자재로 그려냄으로써 시와 서에서 다하지 못한 흥취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송나라 때부터 발흥한 그림과 글씨 속의 각각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제시(題詩) 혹은 제화(題畵)는 문학의 연장으로서의 그림, 그림의 연장으로서의 문학의 위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서 문인화는 조선시대 후기 추사 김정희에 와서 정착된다. 김정희의 수묵은 고도로 축적된 선비의 인품과 학문이 메마른 먹자취의 한 획 한 점에 스며들어 있고 몇 획 되지 않은 단순한 선임에도 불구하고 담묵으로 노니는 난초와 화제가 흡사 선삼매 화삼매(禪三昧 畫三昧)의 경지를 이룬 듯 글씨와 그림이 일체를 이루었다. 김정희의 문인화에 대한 인식은 1848년 제주도에서 서울에 있는 그의 아들 상우(商佑)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는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법(蘭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는 까닭이다.”
추사는 이와 같이 회화의 근간으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하는 심의위주(心意爲主)의 인식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난을 그릴 때에 서법과 화법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지면(紙面)에 그리는 것보다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작품은, 그의 시정(詩情)과 화의(畵意)가 융화된 시․서․화 일치의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한 예에 해당된다.
積雪萬山江冰欄干
指下春風乃見天心
온 산 눈 덮혀 가득하고
강물은 얼어서 난간 되었네
손 잡힐 듯 부는 봄바람에
어찌 하늘 뜻 모르리요.
추사의 수묵화 ≪난맹첩(蘭盟帖)≫ 중의 <흑란도(黑蘭圖)>에 나오는 시편이다. 이 시는 “손 잡힐 듯” 부드럽게 감지되는 바람결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이끄는 자연의 묘리를 직시하고 이에 순응하는 심정을 고담한 어조를 통해 운취 있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적 운취는 고스란히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난초의 상승하는 기운에 전파되어 봄의 촉기를 더욱 선명한 감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특히 <흑란도(黑蘭圖)>의 천상으로 열려있는 여백은 “천심(天心)”이 들어찬 산 공간으로 다가온다. 시와 그림이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우주의 순리에 순응하는 초탈의 정신 세계를 펼쳐 놓고 있다. 수묵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 즉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을 터득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가 이룬 문인화의 경지는 허유, 흥선대원군, 권돈인 등에 의해 계승되면서 산수도나 묵란도 등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그러나 제도화, 합리화, 전문화를 내세운 근대성의 본격적인 출발과 함께 시․서․화 삼절의 총체적 인식이 쇠퇴되어가면서 점차 각기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화되어 간다.
그러나 현대시에서의 회화성 역시 동양회화미학의 근원 요소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섭수하는 것은 시각적인 표현의 층위를 넘어서서 심미적 깊이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토양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일찍이 소식이 “형사로서 그림을 논하는 견해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다” 라고 했던 것처럼 그림이 단순한 형용의 감각적 묘사일 수 없듯이 시에서의 회화성 역시 외양의 시각적인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경(意境)의 터득으로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회화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수묵에 관한 이론은 남조(南朝) 양원제(梁元帝)인 蕭繹(소역)(502-557)을 시발로 잡지만 그러나 이미 위진남북조 시대 때의 정교(政敎)를 위한 예술에서의 심미를 위한 예술로의 전환에서부터 기본 토대가 마련된다. 3-6세기 간의 미학사상들의 주요 내용은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리는 것과 관련된 <득의망상(得意忘象)>, 정신이 전해져 그림으로 드러남을 강조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할 것을 강조하는 <징회미상(澄懷味象)>, 진실된 주제의식과 생동하는 형상을 운위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등으로 정리된다. 7-8세기에 이르면 왕유의 <수묵위상론>이 제기되면서 실제 회화적인 체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오도자(吳道子) 이후의 수묵선담, 파묵, 발묵법 등은 본격적인 수묵화의 경지를 재촉해 나간다. 수묵미학의 전개와 함께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버리고 안으로는 그 심원함을 터득하는 인식론을 강조한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 근원의 현묘함을 터득할 것을 강조하는 <구득기원(俱得其元)>, 물상과 나 모두를 잊는 경지를 일컫는 <물아양망(物我兩忘)> 등의 미학론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회화미학이 우리 나라의 중요 문인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 모더니즘과 시각적 영상의 가치
우리 근대시사에서 시의 회화성이 전면에 뚜렷하게 부각된 것은 1920-30년대 모더니즘시에 이르러서이다. 1)다다이즘 계열 2) 초현실주의 계열 3) 이미지즘 계열 4)네오 클레식 계열 등으로 유형화되는 1920-30년대 모더니즘에서 언어의 감각적 회화성이 표나게 두드러진 계열은 이미지즘이다. 1920-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후견인이며 이론가인 김기림의 전언에 주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말의 音으로서의 價値, 視覺的 映像의 價値 또 이 여러 가지 價値의 相互作用에 의한 全體的 效果를 意識하고 一種의 建築學的 設計 아래서 詩를 썼다. 詩에 있어서 말은 單純한 手段 以上의 것이었다. 모더니즘은 이리하야 前代의 韻文을 主로 한 作詩法에 對抗해서 그 자신의 詩法을 지어냈다.
종전의 작시법을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한 모더니즘 시법의 특징에 대해 말의 “시각적 영상의 가치”를 첫 번째 항목으로 꼽고 있다. 모더니즘 중에서도 이미지즘 계열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이론체계에 가장 상응하는 시인은 정지용, 김광균, 장만영, 장서언 등이었다.
다음 시편은 말의 “시각적 映像의 가치”가 참신한 이국적 감수성과 습합되면서 독특한 분위기의 시적 회화성을 펼쳐 보여 주고 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砲火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帳幕 저 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서정」(1940) 전문
김기림이 지적했듯이 김광균의 시 세계는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과시하고 있다. 조락해가는 가을의 정경과 현대 문명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비애감이 투명하고 참신한 시각적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들을 달”리는 급행차, “세로팡紙로 만든 구름” 등의 시각적 묘사는 낭만적인 도시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시적 자아의 창백한 고독감과 허무의식을 자아내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캔버스의 전반에 걸쳐 배어 나오는 낭만적 우수의 분위기는 응축적 여운을 남기지 못한 채 가볍게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 부분의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가는”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의 형상 역시 소녀 취향의 감상성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근대성의 진행과 함께 출현한 “길/ 급행열차/ 공장” 등의 새로운 문명 풍경이 하염없는 비애를 느끼게 한다는 논법은 어느 누구도 수긍시키기 어렵다. 한 편의 시에서 감상성의 노정은 감정의 분출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매개항의 결핍에서 연유한다. 이 시의 회화성에는 감각적인 묘사의 절묘함이 빛나는 반면에 그 내면의 정신 세계의 간곡함이 미약하다. 이것은 응축된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그림, 즉 동양의 회화미학의 기본 요소에 해당하는 이형사신론(以形寫神論)의 미의식이 결핍된 경우이다.
김광균 시에 표나게 드러나는 회화성은 그의 미술에 관한 관심사의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전라북도 군산(1932-36)을 거쳐 서울에 정착(1936년 초여름)하면서 김기림, 오장환을 비롯한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신홍휴, 최재덕, 김만형 등의 화가들과 사귀면서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었으며, 고호의 수차가 있는 가교가 수록된 근대화집을 접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시는 그림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앞서가는 회화를 쫓아가기에 바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당시 미술에 대한 치기어린 호기심과 들뜬 설레임이 묻어 나온다. “쫓아가기에 바”쁜 수준의 미술에 대한 성급한 미의식이 그의 시 세계의 회화성에도 비슷하게 반사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는 화가 친구들과 인상파의 그림에서 화가들이 소재를 수용하는 태도와 그것을 가공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시적 감각을 발전시킨 것으로보인다.
물론 김광균 시의 회화성이 기교적인 묘사 수준에 그친 주된 원인을 그의 미술적 인식의 초보적인 수준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도시 문명에 대한 비애와 현대인의 단절감을 노래한 대부분의 모더니스트의 시편들이 임화가 비판한 “문화의 외면(外面)”에만 매달리는 “기교주의”와 “관념주의의 환상”을 노정시키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도시 문명의 진행이 현실적으로 시인들에게 내적 충격을 던져줄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점, 설령 어느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할지라도 근대 문명의 이면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시인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발표된 회화적 심상이 두드러진 모더니즘의 작품 중에 근대 문명 속의 단절감과 고독을 노래한 이국적 정서의 시편과 상반된 자리에 놓이는 전통적인 자연 소재의 작품은 어떠했을까?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東海)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順伊),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장만영, 「달․포도․잎사귀」(1936) 전문
달빛으로 농담과 조도가 조절되고 있는 이 시편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시적 화자는 벌레의 울음소리로 감지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 포도, 포도 넝쿨 밑의 어린 잎새가 서로 어우러져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관조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미적 관조의 거리는 순이에 대한 반복적인 호명을 통해 견지된다. 이때, “순이”는 3인칭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의 순정한 내적 자아로 해석된다. 화자는 자신의 순진무구한 내적 자아를 일깨워 맑고 순수한 마음결로 “고풍한 뜰”의 풍경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동양 회화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미상관도(味象觀道)>의 미의식 즉 형상을 음미하여 관조하는 도에 이르는 경지와 근접하게 상응된다. 물론, <미상관도(味象觀道)>의 미의식이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시적 화자가 달, 포도, 잎사귀가 서로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동해 바다 물처럼” 깊은 우주적 신비를 감지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1930년대 이 시편이 도시 문명의 외관에 대한 묘사와 이국적인 우수의 정서에 탐닉하는 창백한 감상성과는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저력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당시의 모더니즘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시인인 정지용의 경우 전반기의 시 세계에서 표나게 드러나는 탁월한 감각적 묘파, 이를테면, “바다는 뿔뿔이/달아날랴고 했다.//푸른 도마뱀같이/재재발렀다.//꼬리가 이루/잡히지 않었다.//흰 발톱에 찢긴/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바다2」) 등에서 보여주는 날렵하고 재기발랄하게 표현하는 탁월한 시각적 심상의 감각화에서 점차 전통적인 동양 정신의 깊이로 나아간 점은(백록담(1941)) 매우 시사적이다. 정지용의 시적 여정의 변화는 회화적 심상의 궁극적인 지향성이 정신세계를 옮겨 절묘함에 이르는 천상묘득(遷想妙得)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보듯, “언어의 영상적 가치”를 강조한 1920-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이미지즘의 계열은 우리 현대시사에서의 회화성이 제 위치를 찾아가는 양상들을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
4. 그림 읽기와 시적 미의식
고흐의 근대 화집 水車가 있는 架橋를 돌려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1930년대 서울 시단의 한 풍경은 이제 아득한 추억의 장막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림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앞서가는 회화를 쫒아가기에 바빴”던 열악한 환경에서는 멀리 벗어났다. 세계의 모든 명화의 화집들이 우리의 손길이 쉽게 닿는 가까운 일상 속에 다가와 있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애호가를 거느리고 있다는 고흐의 화집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소용돌이치는 빛의 역동성을 통해 절대 고독, 영혼의 절규, 죽음에 대한 잠재의식을 처절하게 표출했던 고흐의 미술 세계는 우리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대표적인 분화구로 작용해왔다. 고흐의 그림과 생애를 소재로 한 주요 시편을 모은 시집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하였음은 이를 뒷받침 한다.
다음의 시편은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과 시인의 주관적인 심미성이 만난 창조적인 대화의 장면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불빛 흐린
언제나 불빛 흐린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형만이
언제나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소리들을 꿈 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새벽에는
빛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정진규, 「감자 먹는 사람들 - 삽질소리」 전문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 듯, 네델란드의 화가 반 센트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이 원텍스트이다. 고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 세잔,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된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 붓터치를 살리는 묘법, 전통적인 주제로부터의 탈피 등의 공통적인 특징 위에서 인상주의보다 항구적인 회화적 질서, 자연 속에 내재하는 굳건한 조형적 질서 등을 집중적으로 추구하였다.
위의 시편의 밑그림이 되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5식구가 등장한다. 고흐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해 “농부의 그림에서 베이컨, 담배연기, 그리고 감자 냄새가 풍긴다면 좋다. 그것은 분명 건강한 그림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고흐의 그림이 한국의 시인의 내밀한 시적 상상력으로 옮겨 와 농촌에서 가족들과 함께 “불빛 흐린/저녁 식탁”에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어린 시절을 살려내고 있다. 이 시의 시상에서 또 다시 우리의 눈길을 모으게 하는 것은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회상에서 더 나아가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삽질 소리”가 첨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삽질 소리”의 연원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고흐 그림의 흐린 남폿불의 조도에서 비롯되는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탕색을 가리킨다. 시인은 이 바탕색의 어둡고 칙칙한 색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유난히 무겁고 각지게 드러나는 표정에서 노동하는 삶의 신산스런 현실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타고난 사람이었다”는 진술은 대대로 숙명처럼 이어온 힘겨운 농부의 생애에 대한 처연한 표백이다. 위대한 화가의 창조하는 힘으로서의 색채 미학이 시인의 가족사적 내력의 굴곡을 환기시키고 있다. 정진규의 주관적 미의식과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의 깊고 내밀한 대화가 목도되는 장면이다. 동양의 회화미학에서 중요시 여기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필(226-249)이 제기한 도가적 사고에 입각한 <득의망상(得意忘象)> 즉,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리는 창조적 미의식과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한편, 다음 시편은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과 우리 나라 어느 마을의 연못에서 그 주위의 빛, 공기, 하늘 등과 어우러져 있는 “수련”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읽힌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전문
여름날 호수 위에 핀 “섬광처럼” 흰 색조의 “수련”의 이미지는 프랑스의 화가 모네의 “수련” 연작을 연상시킨다. (위 시편이 수록된 작품집 역시 “수련” 연작으로 이루어진 수련이다.) 이 시의 시상의 전개 역시 모네의 인상파의 화법에 따르고 있다. 인상파 화가들은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과 대상의 인상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화면에 옮겼다. 그들은 빛에 따라 바뀌는 사물과 그 주제를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의 시편의 질료 역시 “요동치고” “미끄러지는” 빛의 비늘들이다. 마치 “수련”은 수면과 수면 위에 “사랑의 말들처럼” 미끄러지는 수많은 빛들의 교호 작용의 산물로 보인다. 마지막 행의 “푸른 물위에 수련”을 “섬광”에 비유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수련은 물이 스며들면서 잘 버무러진 빛의 반죽덩어리인 것이다. 형체도 무게도 부피도 없는 빛의 다발과 수면의 파동으로 잉태된 “수련”을 시인은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는 “수련”을 통해 빛의 우주적인 교향악을 직시하고 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동양 회화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징회미상(澄懷味像)>의 미의식 즉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함으로써 사물이 지닌 영묘한 정신 세계를 감지하는 경지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현대 시와 회화의 만남은 서양화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동양화의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다음 시편은 농담과 여백의 화법으로 형상화된 낮고 고즈넉한 수묵정원의 풍경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fp이다.
누가 살던 집인지
둥그렇게 집터가 있고
웃자란 나무들 하늘로 뻗쳤다
사금파리 흩어진
마른 개울 속에 침묵이
콸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마른 노래를
물에 풀며
있었다
무명실 같은
노래를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
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눈감았다 떠도 다시
수묵의 정원 속이었다
―장석남, 「水墨정원 - 序」 전문
장석남은 고요하고 아늑한 “水墨정원”을 은밀하게 가꾸어 놓고 그 곳에 거주하며 즐겁게 완상하고 있다. 수묵정원에는 인기척은 물론이고 “개울”도 메말라서 앙상하다. 그래서 사위는 온통 침묵만이 그윽할 따름이다. 이 텅빈 여백의 정원에서 무엇을 완상한단 말인가. 그러나 화자는 생생하게 울려퍼지는 소리의 파문을 경청하고 있다. 침묵에도 “콸콸콸콸 흐르”는 역동적인 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마른 개울”에도 “마른 노래”가 배어나오는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화자는 이러한 물음을 가슴속에 되새기며 수묵 정원을 거닌다. 그는 여백 속에 내재하는 현묘함의 근원을 묻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에는 화자가 “부둣가에 우연히/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배가 들어와” 배를 매고 그 배를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장석남, 「배를 매며」 일부
부둣가에 배를 매고 그 배를 바라보고 있다.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온종일을 떠 있다”.
빈배의 풍경이 한가롭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배 안에 우주가 그득히 실려서 울렁이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홀로 멀리서 바라보는 한적한 거리를 통해 그 근원의 현묘함을 체감하는 구득기원(俱得其元)의 미의식을 즐기고 있다.
5. 시와 회화의 창조적 대화를 위하여
시와 그림의 대화란 단순히 언어를 통한 시각적 심상의 감각화나 그림을 통한 시적 내용의 묘사의 차원에서 논의될 성질이 아니다. 시와 그림의 올바른 관계는 상호 창조적인 심미적 대화의 장으로 열려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의 회화성이란 시인의 회화에 대한 심미적 주관성에 입각한 만남의 자리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의 회화에 대한 시적 창조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고흐의 그림에 대한 서로 다른 문인들의 수많은 창작품의 산출을 재론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시와 회화의 대화의 심미적 깊이와 창조성에 있다. 그렇다면 시의 화화성의 창조적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오랜 전통을 지닌 동양회화미학의 유현한 흐름에서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미학의 기본 요소에 기대어 살펴본 현대시의 회화성에 관한 몇 가지 실례는 그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회화미학의 심미관을 비롯해서 그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수묵미학의 체현 방식에 대한 미의식, 그리고 우리 나라의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문인화 전통의 높은 경지는 오늘날 현대시와 회화의 대화의 장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라는 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맑은 마음으로 형상을 관조하여 체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심원한 도(道)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 미학의 기본 원리에 대한 깊은 탐구는 오늘날 현대시의 한켠에서 적지않게 나타나는 국적 불명의 경박한 감성과 부유하는 기표의 현란함, 즉 1930년대 모더니즘시 계열을 향해 임화가 비판한 “문화의 외면(外面)”에만 매달리는 “기교주의”와 “관념주의의 환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이에 대한 극복의 한 이정표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홍 용 희
1. 말하는 회화, 말하지 않는 시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세종 29년(1447) 4월 17일 도화서 화원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안견(安堅)을 자신의 처소로 부른다. 그는 안견에게 진중하면서도 신명에 겨운 표정으로 무어라고 한참을 당부하듯 설명한다. 그로부터 3일 후 4월 20일 안견은 안평대군을 찾아오는데, 그의 손에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들려있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지난 밤 꿈에서 본 복숭아 과수원의 황홀한 풍경을 안견에게 실감나게 얘기해 주면서 이를 그림으로 그려 줄 것을 부탁했고, 종 6품 선화(善畵)를 거쳐 정 4품 호군(護軍)에까지 올랐던 천재 화가 안견은 이를 쾌히 수락하고 돌아간 지 3일만에 독특한 자신의 구도와 필법으로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를 완성시켜 들고 온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듣고자 하는 <몽유도원도>에 얽힌 극적인 이야기는 비단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안평대군은 안견이 그려온 <몽유도원도>에 찬탄을 보내면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들인 신숙주, 이개, 최항, 서거정,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과 정인지, 김종서, 고득종을 비롯한 21명의 문신들을 불러모아 각기 여기에 대한 시(詩)․부(賦)․서(序) 등을 짓게 한다. 그는 이들이 지어온 총 68수의 글에 자신이 직접 지은 서시와 발문을 보태어 책을 묶었으니, 그것이 바로 현재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시권(夢遊桃源圖詩卷)>이다. 이상의 일련의 과정을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 → 안견의 <몽유도원도> → 21명의 문사들의 <시(詩)․부(賦)․서(序)> 이다. 이때,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말하는 회화’ 이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말하지 않는 시’라고 지칭해 볼 수는 없을까? <꿈 이야기>는 언어를 통한 생생한 감각적 묘사이고, <몽유도원도>는 감각적 언어의 조형적 표현이다. 문학이 회화의 원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러나 회화와 문학의 이와 같은 관계는 그 역도 성립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해 21명의 문사들이 제각기의 다양한 제화시를 창작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호 연관 구조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감각적 심상의 표현’이라는 공통분모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와 회화의 근친성은 <몽유도원도>의 창작에 얽힌 내용을 통해 비로소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현장감 있는 하나의 실례를 든 것 뿐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문학과 회화는 자매예술로서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앞을 향해 걸어나왔다. 여기에서 호메로스의 아킬레스 방패에 새겨진 무늬에 대한 노래, 단테의 「신곡」에서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수태고지상(受胎告知像), 복카치오의 환영의 사랑에서의 조형적 기술 그리고 이태리의 화가 봇티첼리(1445-1510)나 지오르지오네(1476-1510) 등의 작품이 문학 작품의 깊은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열거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다만, 여기에서는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을 거듭 확인하고자 할 따름이다. 특히 예술 작품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밀접하게 결부되는 경우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는 명제를 승인할 때, 시가 회화와 손잡고 걸어온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시 장르는 시각적 예술의 감각적 심상의 섭수를 통해 예술적 감응력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것이다.
그러나 시와 회화의 근친성을 시 장르에서의 시각적 심상에서만 찾는 것은 지나치게 표면적인 층위에 그친 논의이다. 회화의 본령 역시 감각적 묘사가 아니라 정신이 전해져 절묘한 형상을 얻는 경지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시와 회화는 언어와 색채라는 질료의 차이와 미(味)와 관(觀), 즉 음미하거나 바라볼 수 있는 감상 방법의 차이 이외에는 서로 상통하는 동일성을 지닌다고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시에 나타나는 회화성의 미적 가치 역시 회화미학의 미의식에 입각하여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특히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전통을 강조했던 동양의 회화미학의 미의식에 기대어 우리 현대시의 회화성에 관한 논의를 구체적인 실례가 되는 몇몇 작품을 중심으로 개진해 보기로 한다.
2. 문인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전통
우리에게 시와 그림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미학은 매우 낯익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문화사에는 문인화의 도도한 전통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 중에 그림이 있고 그림 중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소동파가 문인화의 시조에 해당되는 당나라 때의 왕유 (王維)(699-759)의 그림을 평한 유명한 글귀이다. 이러한 평가는 왕유의 그림이 문기(文氣)가 충만하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서․화(詩․書․畵)를 삼절(三絶)이라 하여 하나의 단위 개념 속에서 파악한 문인화의 인식론적 특성과도 연관된다. 시(詩)란 수양한 학문의 절제된 표현이며, 서(書)란 인품이 청아한 경지에 이르러 그 품격을 글씨로 나타내는 것이며, 화(畵)란 주로 산수화를 비롯하여 화훼화나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 사군자와 포도, 소나무, 연꽃 등을 자유자재로 그려냄으로써 시와 서에서 다하지 못한 흥취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송나라 때부터 발흥한 그림과 글씨 속의 각각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제시(題詩) 혹은 제화(題畵)는 문학의 연장으로서의 그림, 그림의 연장으로서의 문학의 위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서 문인화는 조선시대 후기 추사 김정희에 와서 정착된다. 김정희의 수묵은 고도로 축적된 선비의 인품과 학문이 메마른 먹자취의 한 획 한 점에 스며들어 있고 몇 획 되지 않은 단순한 선임에도 불구하고 담묵으로 노니는 난초와 화제가 흡사 선삼매 화삼매(禪三昧 畫三昧)의 경지를 이룬 듯 글씨와 그림이 일체를 이루었다. 김정희의 문인화에 대한 인식은 1848년 제주도에서 서울에 있는 그의 아들 상우(商佑)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는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법(蘭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는 까닭이다.”
추사는 이와 같이 회화의 근간으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하는 심의위주(心意爲主)의 인식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난을 그릴 때에 서법과 화법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지면(紙面)에 그리는 것보다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작품은, 그의 시정(詩情)과 화의(畵意)가 융화된 시․서․화 일치의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한 예에 해당된다.
積雪萬山江冰欄干
指下春風乃見天心
온 산 눈 덮혀 가득하고
강물은 얼어서 난간 되었네
손 잡힐 듯 부는 봄바람에
어찌 하늘 뜻 모르리요.
추사의 수묵화 ≪난맹첩(蘭盟帖)≫ 중의 <흑란도(黑蘭圖)>에 나오는 시편이다. 이 시는 “손 잡힐 듯” 부드럽게 감지되는 바람결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이끄는 자연의 묘리를 직시하고 이에 순응하는 심정을 고담한 어조를 통해 운취 있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적 운취는 고스란히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난초의 상승하는 기운에 전파되어 봄의 촉기를 더욱 선명한 감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특히 <흑란도(黑蘭圖)>의 천상으로 열려있는 여백은 “천심(天心)”이 들어찬 산 공간으로 다가온다. 시와 그림이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우주의 순리에 순응하는 초탈의 정신 세계를 펼쳐 놓고 있다. 수묵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 즉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을 터득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가 이룬 문인화의 경지는 허유, 흥선대원군, 권돈인 등에 의해 계승되면서 산수도나 묵란도 등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그러나 제도화, 합리화, 전문화를 내세운 근대성의 본격적인 출발과 함께 시․서․화 삼절의 총체적 인식이 쇠퇴되어가면서 점차 각기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화되어 간다.
그러나 현대시에서의 회화성 역시 동양회화미학의 근원 요소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섭수하는 것은 시각적인 표현의 층위를 넘어서서 심미적 깊이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토양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일찍이 소식이 “형사로서 그림을 논하는 견해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다” 라고 했던 것처럼 그림이 단순한 형용의 감각적 묘사일 수 없듯이 시에서의 회화성 역시 외양의 시각적인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경(意境)의 터득으로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회화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수묵에 관한 이론은 남조(南朝) 양원제(梁元帝)인 蕭繹(소역)(502-557)을 시발로 잡지만 그러나 이미 위진남북조 시대 때의 정교(政敎)를 위한 예술에서의 심미를 위한 예술로의 전환에서부터 기본 토대가 마련된다. 3-6세기 간의 미학사상들의 주요 내용은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리는 것과 관련된 <득의망상(得意忘象)>, 정신이 전해져 그림으로 드러남을 강조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할 것을 강조하는 <징회미상(澄懷味象)>, 진실된 주제의식과 생동하는 형상을 운위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등으로 정리된다. 7-8세기에 이르면 왕유의 <수묵위상론>이 제기되면서 실제 회화적인 체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오도자(吳道子) 이후의 수묵선담, 파묵, 발묵법 등은 본격적인 수묵화의 경지를 재촉해 나간다. 수묵미학의 전개와 함께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버리고 안으로는 그 심원함을 터득하는 인식론을 강조한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 근원의 현묘함을 터득할 것을 강조하는 <구득기원(俱得其元)>, 물상과 나 모두를 잊는 경지를 일컫는 <물아양망(物我兩忘)> 등의 미학론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회화미학이 우리 나라의 중요 문인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 모더니즘과 시각적 영상의 가치
우리 근대시사에서 시의 회화성이 전면에 뚜렷하게 부각된 것은 1920-30년대 모더니즘시에 이르러서이다. 1)다다이즘 계열 2) 초현실주의 계열 3) 이미지즘 계열 4)네오 클레식 계열 등으로 유형화되는 1920-30년대 모더니즘에서 언어의 감각적 회화성이 표나게 두드러진 계열은 이미지즘이다. 1920-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후견인이며 이론가인 김기림의 전언에 주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말의 音으로서의 價値, 視覺的 映像의 價値 또 이 여러 가지 價値의 相互作用에 의한 全體的 效果를 意識하고 一種의 建築學的 設計 아래서 詩를 썼다. 詩에 있어서 말은 單純한 手段 以上의 것이었다. 모더니즘은 이리하야 前代의 韻文을 主로 한 作詩法에 對抗해서 그 자신의 詩法을 지어냈다.
종전의 작시법을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한 모더니즘 시법의 특징에 대해 말의 “시각적 영상의 가치”를 첫 번째 항목으로 꼽고 있다. 모더니즘 중에서도 이미지즘 계열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이론체계에 가장 상응하는 시인은 정지용, 김광균, 장만영, 장서언 등이었다.
다음 시편은 말의 “시각적 映像의 가치”가 참신한 이국적 감수성과 습합되면서 독특한 분위기의 시적 회화성을 펼쳐 보여 주고 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砲火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帳幕 저 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서정」(1940) 전문
김기림이 지적했듯이 김광균의 시 세계는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과시하고 있다. 조락해가는 가을의 정경과 현대 문명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비애감이 투명하고 참신한 시각적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들을 달”리는 급행차, “세로팡紙로 만든 구름” 등의 시각적 묘사는 낭만적인 도시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시적 자아의 창백한 고독감과 허무의식을 자아내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캔버스의 전반에 걸쳐 배어 나오는 낭만적 우수의 분위기는 응축적 여운을 남기지 못한 채 가볍게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 부분의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가는”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의 형상 역시 소녀 취향의 감상성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근대성의 진행과 함께 출현한 “길/ 급행열차/ 공장” 등의 새로운 문명 풍경이 하염없는 비애를 느끼게 한다는 논법은 어느 누구도 수긍시키기 어렵다. 한 편의 시에서 감상성의 노정은 감정의 분출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매개항의 결핍에서 연유한다. 이 시의 회화성에는 감각적인 묘사의 절묘함이 빛나는 반면에 그 내면의 정신 세계의 간곡함이 미약하다. 이것은 응축된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그림, 즉 동양의 회화미학의 기본 요소에 해당하는 이형사신론(以形寫神論)의 미의식이 결핍된 경우이다.
김광균 시에 표나게 드러나는 회화성은 그의 미술에 관한 관심사의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전라북도 군산(1932-36)을 거쳐 서울에 정착(1936년 초여름)하면서 김기림, 오장환을 비롯한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신홍휴, 최재덕, 김만형 등의 화가들과 사귀면서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었으며, 고호의 수차가 있는 가교가 수록된 근대화집을 접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시는 그림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앞서가는 회화를 쫓아가기에 바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당시 미술에 대한 치기어린 호기심과 들뜬 설레임이 묻어 나온다. “쫓아가기에 바”쁜 수준의 미술에 대한 성급한 미의식이 그의 시 세계의 회화성에도 비슷하게 반사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는 화가 친구들과 인상파의 그림에서 화가들이 소재를 수용하는 태도와 그것을 가공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시적 감각을 발전시킨 것으로보인다.
물론 김광균 시의 회화성이 기교적인 묘사 수준에 그친 주된 원인을 그의 미술적 인식의 초보적인 수준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도시 문명에 대한 비애와 현대인의 단절감을 노래한 대부분의 모더니스트의 시편들이 임화가 비판한 “문화의 외면(外面)”에만 매달리는 “기교주의”와 “관념주의의 환상”을 노정시키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도시 문명의 진행이 현실적으로 시인들에게 내적 충격을 던져줄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점, 설령 어느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할지라도 근대 문명의 이면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시인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발표된 회화적 심상이 두드러진 모더니즘의 작품 중에 근대 문명 속의 단절감과 고독을 노래한 이국적 정서의 시편과 상반된 자리에 놓이는 전통적인 자연 소재의 작품은 어떠했을까?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東海)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順伊),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장만영, 「달․포도․잎사귀」(1936) 전문
달빛으로 농담과 조도가 조절되고 있는 이 시편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시적 화자는 벌레의 울음소리로 감지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 포도, 포도 넝쿨 밑의 어린 잎새가 서로 어우러져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관조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미적 관조의 거리는 순이에 대한 반복적인 호명을 통해 견지된다. 이때, “순이”는 3인칭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의 순정한 내적 자아로 해석된다. 화자는 자신의 순진무구한 내적 자아를 일깨워 맑고 순수한 마음결로 “고풍한 뜰”의 풍경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동양 회화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미상관도(味象觀道)>의 미의식 즉 형상을 음미하여 관조하는 도에 이르는 경지와 근접하게 상응된다. 물론, <미상관도(味象觀道)>의 미의식이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시적 화자가 달, 포도, 잎사귀가 서로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동해 바다 물처럼” 깊은 우주적 신비를 감지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1930년대 이 시편이 도시 문명의 외관에 대한 묘사와 이국적인 우수의 정서에 탐닉하는 창백한 감상성과는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저력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당시의 모더니즘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시인인 정지용의 경우 전반기의 시 세계에서 표나게 드러나는 탁월한 감각적 묘파, 이를테면, “바다는 뿔뿔이/달아날랴고 했다.//푸른 도마뱀같이/재재발렀다.//꼬리가 이루/잡히지 않었다.//흰 발톱에 찢긴/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바다2」) 등에서 보여주는 날렵하고 재기발랄하게 표현하는 탁월한 시각적 심상의 감각화에서 점차 전통적인 동양 정신의 깊이로 나아간 점은(백록담(1941)) 매우 시사적이다. 정지용의 시적 여정의 변화는 회화적 심상의 궁극적인 지향성이 정신세계를 옮겨 절묘함에 이르는 천상묘득(遷想妙得)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보듯, “언어의 영상적 가치”를 강조한 1920-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이미지즘의 계열은 우리 현대시사에서의 회화성이 제 위치를 찾아가는 양상들을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
4. 그림 읽기와 시적 미의식
고흐의 근대 화집 水車가 있는 架橋를 돌려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1930년대 서울 시단의 한 풍경은 이제 아득한 추억의 장막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림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앞서가는 회화를 쫒아가기에 바빴”던 열악한 환경에서는 멀리 벗어났다. 세계의 모든 명화의 화집들이 우리의 손길이 쉽게 닿는 가까운 일상 속에 다가와 있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애호가를 거느리고 있다는 고흐의 화집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소용돌이치는 빛의 역동성을 통해 절대 고독, 영혼의 절규, 죽음에 대한 잠재의식을 처절하게 표출했던 고흐의 미술 세계는 우리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대표적인 분화구로 작용해왔다. 고흐의 그림과 생애를 소재로 한 주요 시편을 모은 시집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하였음은 이를 뒷받침 한다.
다음의 시편은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과 시인의 주관적인 심미성이 만난 창조적인 대화의 장면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불빛 흐린
언제나 불빛 흐린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형만이
언제나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소리들을 꿈 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새벽에는
빛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정진규, 「감자 먹는 사람들 - 삽질소리」 전문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 듯, 네델란드의 화가 반 센트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이 원텍스트이다. 고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 세잔,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된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 붓터치를 살리는 묘법, 전통적인 주제로부터의 탈피 등의 공통적인 특징 위에서 인상주의보다 항구적인 회화적 질서, 자연 속에 내재하는 굳건한 조형적 질서 등을 집중적으로 추구하였다.
위의 시편의 밑그림이 되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5식구가 등장한다. 고흐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해 “농부의 그림에서 베이컨, 담배연기, 그리고 감자 냄새가 풍긴다면 좋다. 그것은 분명 건강한 그림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고흐의 그림이 한국의 시인의 내밀한 시적 상상력으로 옮겨 와 농촌에서 가족들과 함께 “불빛 흐린/저녁 식탁”에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어린 시절을 살려내고 있다. 이 시의 시상에서 또 다시 우리의 눈길을 모으게 하는 것은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회상에서 더 나아가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삽질 소리”가 첨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삽질 소리”의 연원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고흐 그림의 흐린 남폿불의 조도에서 비롯되는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탕색을 가리킨다. 시인은 이 바탕색의 어둡고 칙칙한 색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유난히 무겁고 각지게 드러나는 표정에서 노동하는 삶의 신산스런 현실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타고난 사람이었다”는 진술은 대대로 숙명처럼 이어온 힘겨운 농부의 생애에 대한 처연한 표백이다. 위대한 화가의 창조하는 힘으로서의 색채 미학이 시인의 가족사적 내력의 굴곡을 환기시키고 있다. 정진규의 주관적 미의식과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의 깊고 내밀한 대화가 목도되는 장면이다. 동양의 회화미학에서 중요시 여기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필(226-249)이 제기한 도가적 사고에 입각한 <득의망상(得意忘象)> 즉,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리는 창조적 미의식과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한편, 다음 시편은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과 우리 나라 어느 마을의 연못에서 그 주위의 빛, 공기, 하늘 등과 어우러져 있는 “수련”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읽힌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전문
여름날 호수 위에 핀 “섬광처럼” 흰 색조의 “수련”의 이미지는 프랑스의 화가 모네의 “수련” 연작을 연상시킨다. (위 시편이 수록된 작품집 역시 “수련” 연작으로 이루어진 수련이다.) 이 시의 시상의 전개 역시 모네의 인상파의 화법에 따르고 있다. 인상파 화가들은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과 대상의 인상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화면에 옮겼다. 그들은 빛에 따라 바뀌는 사물과 그 주제를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의 시편의 질료 역시 “요동치고” “미끄러지는” 빛의 비늘들이다. 마치 “수련”은 수면과 수면 위에 “사랑의 말들처럼” 미끄러지는 수많은 빛들의 교호 작용의 산물로 보인다. 마지막 행의 “푸른 물위에 수련”을 “섬광”에 비유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수련은 물이 스며들면서 잘 버무러진 빛의 반죽덩어리인 것이다. 형체도 무게도 부피도 없는 빛의 다발과 수면의 파동으로 잉태된 “수련”을 시인은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는 “수련”을 통해 빛의 우주적인 교향악을 직시하고 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동양 회화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징회미상(澄懷味像)>의 미의식 즉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함으로써 사물이 지닌 영묘한 정신 세계를 감지하는 경지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현대 시와 회화의 만남은 서양화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동양화의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다음 시편은 농담과 여백의 화법으로 형상화된 낮고 고즈넉한 수묵정원의 풍경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fp이다.
누가 살던 집인지
둥그렇게 집터가 있고
웃자란 나무들 하늘로 뻗쳤다
사금파리 흩어진
마른 개울 속에 침묵이
콸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마른 노래를
물에 풀며
있었다
무명실 같은
노래를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
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눈감았다 떠도 다시
수묵의 정원 속이었다
―장석남, 「水墨정원 - 序」 전문
장석남은 고요하고 아늑한 “水墨정원”을 은밀하게 가꾸어 놓고 그 곳에 거주하며 즐겁게 완상하고 있다. 수묵정원에는 인기척은 물론이고 “개울”도 메말라서 앙상하다. 그래서 사위는 온통 침묵만이 그윽할 따름이다. 이 텅빈 여백의 정원에서 무엇을 완상한단 말인가. 그러나 화자는 생생하게 울려퍼지는 소리의 파문을 경청하고 있다. 침묵에도 “콸콸콸콸 흐르”는 역동적인 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마른 개울”에도 “마른 노래”가 배어나오는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화자는 이러한 물음을 가슴속에 되새기며 수묵 정원을 거닌다. 그는 여백 속에 내재하는 현묘함의 근원을 묻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에는 화자가 “부둣가에 우연히/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배가 들어와” 배를 매고 그 배를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장석남, 「배를 매며」 일부
부둣가에 배를 매고 그 배를 바라보고 있다.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온종일을 떠 있다”.
빈배의 풍경이 한가롭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배 안에 우주가 그득히 실려서 울렁이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홀로 멀리서 바라보는 한적한 거리를 통해 그 근원의 현묘함을 체감하는 구득기원(俱得其元)의 미의식을 즐기고 있다.
5. 시와 회화의 창조적 대화를 위하여
시와 그림의 대화란 단순히 언어를 통한 시각적 심상의 감각화나 그림을 통한 시적 내용의 묘사의 차원에서 논의될 성질이 아니다. 시와 그림의 올바른 관계는 상호 창조적인 심미적 대화의 장으로 열려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의 회화성이란 시인의 회화에 대한 심미적 주관성에 입각한 만남의 자리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의 회화에 대한 시적 창조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고흐의 그림에 대한 서로 다른 문인들의 수많은 창작품의 산출을 재론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시와 회화의 대화의 심미적 깊이와 창조성에 있다. 그렇다면 시의 화화성의 창조적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오랜 전통을 지닌 동양회화미학의 유현한 흐름에서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미학의 기본 요소에 기대어 살펴본 현대시의 회화성에 관한 몇 가지 실례는 그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회화미학의 심미관을 비롯해서 그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수묵미학의 체현 방식에 대한 미의식, 그리고 우리 나라의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문인화 전통의 높은 경지는 오늘날 현대시와 회화의 대화의 장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라는 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맑은 마음으로 형상을 관조하여 체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심원한 도(道)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 미학의 기본 원리에 대한 깊은 탐구는 오늘날 현대시의 한켠에서 적지않게 나타나는 국적 불명의 경박한 감성과 부유하는 기표의 현란함, 즉 1930년대 모더니즘시 계열을 향해 임화가 비판한 “문화의 외면(外面)”에만 매달리는 “기교주의”와 “관념주의의 환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이에 대한 극복의 한 이정표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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