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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0)> 선조 18 - 아 !!! 인육을 먹는 풍조라니
일본군이 한양을 뜬 것은 4월이지만 선조는
환도를 계속 미루다 10월에야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다시 올라올까 걱정했나?)
전쟁의 참화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전쟁과 굶주림, 역병 등으로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들판마다 수없이 널려 있었고, 들개와 산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한양 도성 밖에는 도성 안에서 갖다 버린 시체들이 곳곳에 산을 이루었고, 농토는 황폐화되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굶주림이 극에 달한 백성들 사이에는 인육을 먹는 풍조까지 생겨났습니다.
다음은 선조 27년
1월, 사헌부가 아뢴 내용입니다.
-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인육을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온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정도이며, 심지어는 산 사람을 도살해 내장과 골수까지 먹은 일도 있었다고 하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조정은 백성을 구제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못했고, 군사 역량은 오히려 약화되었습니다.
명의 참전 이전에 이미 자력으로 전세를 반전시켰던 조선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의병, 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조정의
무대책으로 이러한 자발성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 중 일부는 세력을 형성해 약탈을 하는가 하면 더러는
의병의 행세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와중에 의병장 토정 이지함이 참소를 받아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목이 잘려 나가는 일까지 발생하니 의병
운동이 지속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신망 높은 의병장 김덕령마저 약간의 오해가 있자 자세한 조사도 없이 목을 쳐버리니, 이
후 용력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 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게 되었습니다.
담에 이어서~
(참고사항:토정은
이미 그당시에 돌아가시고 의병장은 그의 아들 이산겸이라고 정정한 내용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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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과 이순신(1) ☆
원균이 조선수군 함선(판옥선/거북선) 100여척을 왜수군 유인작전에 말려 말아먹고, 지휘함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가 혼전중에 실종되었던 상황에서, 조선 조정에서는 당시 백의종군 중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했는바, 선조 임금은
내심 이순신 장군도 곧 죽길 바랐다는 심정을 알 수 있는 승정원 일기(조선왕실 사초) 물증이 있다고 합니다.
선조가 이끌던 조선
조정에서 이제 배가 없으니까 수군도 육지에서 왜군 공격을 육탄사수하라(몸으로 싸우다가 죽어라)는 참으로 뭐같은 명령서를 이순신 장군에게
하달했으나, 이순신 장군이 그 명령서를 수령했을 땐, 12척의 판옥선과 함께할 조선수군 장수와 병사들을 이미 수배해 놓고
있었음.
이순신 장군은 "신에겐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죽어도 바다에서 죽겠사오니, 이를 허락하소서!"라며 임금께 탄원서를
올렸고 그것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칠천량 전투 대승리 후에 대규모 함대를 편성했던 왜수군은 일거에 경상도, 전라도 남해안을 돌아서
충청도, 경기도 서해안까지 조선인근의 재해권을 장악할 심산으로 유유히 전진을 시작했어요.
사천 부근에서 판옥선 12척으로 재편성한
조선수군은 여러모로 온전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죠.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 각 지역으로 본진을 옮겼으며, 전투를 피하고 병력과 물자의
보충을 통하여 판옥선 함대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데 몰두했습니다.
이때 선조에 아첨꾼들은 살판났다며, "용감한 원균은 전투하다가
죽었는데(사실은 도망치다가 실종됐음), 이순신은 비겁하다!"고 호들갑 떨었으나, 조선수군은 묵묵히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왜수군 함대의
움직임에 대하여 지속적 정보수집과 그 행동 패턴을 철저히 분석하여 결정적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어요.
명량해전 전날 보름달이
뜨는 야간을 틈타서 왜함선 300여척이 당시 전라우수영에 주둔했던 조선수군을 급습하기 위해서 접근해 왔음. 이순신 장군이 왜수군 움직임을
몰랐을리 없었는데, 조선수군의 움직임은 마치 왜수군 움직임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이른 새벽 미명에 자다가 깨어나 허둥지둥 12척의 판옥선에 겨우
탑승했으나, 어느새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장군함 판옥선 1척은 앞서 나가서 명량해역으로 접근하는 300여척 왜함선들에 단호히
맞섰습니다.
그런데, 새까맣게 몰려드는 수많은 왜함선들을 보며, 뒤쪽에서 쭈삣쭈삣 후퇴할 틈만 노리면서 전진할 의향이 없는 듯한
조선수군 판옥선 12척중 1척의 장수를 향해 이순신 장군이 호통을 쳤어요!
"이 놈~ ㅁㅁ야~ 오늘 여기서 왜적들을 무찌르던가,
아니면 내 칼에 네 놈 목이 잘리던가 결단해라!"
호통을 당한 장수 ㅁㅁ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판옥선을 몰아서 이순신 장군함
옆에 포진하니까, 그제야 12척의 판옥선들이 모두 전열을 가다듬고 왜함선들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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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과 이순신(2) ☆
명량해역에서 한나절 전투가 계속되었음. 전투양상은 왜수군들이 어떡하든지 판옥선에 점프하여 올라타려
하고, 조선 수군은 화살 등으로 저지하면서, 접근하는 적 함선에 각종 함포(?) 포격으로써 응전했어요. 그런데, 당시 포탄은 단순한 철구탄두나
투석탄두를 날려 왜함선에 지속적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게 실제 전투였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폭발하는 포탄은 그후 백여년 후에야 서유럽
전쟁에서 등장했음.)
아무튼, 백병전을 노리며 달려드는 왜함선 한척 침몰시키는데, 평균 한나절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나절
전투가 끝날 무렵엔 왜함선 10여척 가량이 침몰되었음. 그런데, 판옥선의 선체는 매우 높았으며, 어떡해서든 올라타려는 왜수군에 대비가 철저히 된
판옥선에 백병전을 노리며 올라타는 데 성공했던 왜수군 병사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각종 전투 기록들 분석 결과!)
따라서, 용감하게
돌격하여 함상 백병전으로 상대 함선을 제압.장악하는 전술을 구사했던 왜수군들에게 조선수군 판옥선 함대는 마치 철옹성으로 여겨졌을 것임. 왜군들이
무모하게 계속 올라타려다 죽을 것인가, 일단 물러날 것인가 망설이던 즈음에~
한나절 동안 굳건한 수비전(?)을 펼쳤던, (실제론
일방적 살육전이었으며, 명량해전에 조선수군의 피해는 사망자 없이 부상이 약간 정도~) 조선수군 지휘함의 이순신 장군이 총공격 명령을 우렁차게
내렸어요! (아마도 명량해역의 조류가 급격하게 역류하는 타이밍을 노렸음에 분명함.)
멀리 뒤편에 위치했던 작은배들까지 합세하여서,
천지를 진동하는 함성과 일제 포격으로 총공격했던바, 가뜩이나 퇴각을 망설이고 있던 왜함선들은 뱃머리를 돌려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게
그들에겐 지옥과 같은 파멸의 시작이었습니다.
명랑해역의 물살 방향이 급격하게 바뀌는 시점였기에 도망치려던 왜함선들은 서로
부딪히면서, 빠른 물살에 휩쓸려서 전복되는 등 지옥의 아수라장판이 벌어졌고, 다시 전라우수영 쪽으로 선회하자니 거기는 철옹성 조선수군 판옥선
함대가 이삭줍기식으로 왜함선을 쉽게 격침시키고 있었어요!
그날 주간부터 야간까지 계속된 명량해역에서 벌어졌던 지옥의 아수라장판에서
살아서 빠져나간 왜함선은 불과 수10척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명량해역의 대참사는 주변 산 위에서 육안 관찰이 가능했던바, 조선
백성들의 증언은 물론 일본측 사람들의 기록들도 남아있음.)
결론적으로 단 하루동안 전투에서, 세계 해전역사상 최고의 엄청난 대첩을
올렸음. 어두워져서 그날의 전투를 마무리하고서, 역사상 위대한 승리를 거뒀던 이순신 장군은 담담히 전투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천운으로 오늘은 왜적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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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과 이순신(3) ☆
세계 해전사에 유일무이한 대첩에 조선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던바, 선조 임금의 발언이 조선왕실 사초에
기록되어 있는바,
- 왜수군에 큰 배가 있었는가? (원균이 참패했던 해전에 잠시 모습을 나타내곤 사라졌던 멍청이 배, 선회가 안되고
뒤뚱거려서 전투불능!)
- 왜수군에 큰 배가 없었으니까, 뭐 크게 이겼다고 요란들 떨지 마쇼! ㅋㅋ
- 그러나,
수고한 병사들에게 하루저녁 푸짐하게 배불리 먹으라고 임금이 내리는 음식을 하사하는 걸로 마무리합시다! (병사들을 아낀다는 이미지를 심으려는
모션이 너무 드러남. 가증스런 모습~)
- 단, 이번 전투로 품계 올리는 건 절대 불허하겠소! (이런~ ㅉㅉ)
나중에
명 황제가 이순신 장군의 명랑대첩에 최고의 포상을 조선국왕 선조를 거치지 않고 직접 내렸어요!
다소 과장되었을 수 있지만, 위의
선조 임금 발언들은 모두 조선왕실 정식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며, 명량대첩으로 품계가 올라간 조선수군 장병은 없었음. 그 흔한 품계 올리기가
여기엔 너무나도 짠 것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선조가 이끌었던 조선 조정의 이울배반적 태도가 조선 몰락의 먼
원인이었다고 사료됩니다.
명량대첩 다음 날에, 조선주둔 왜군 수뇌부 회의에서 전라도와 충청도를 거쳐 한양 방면으로 진격
작전을 철회하고 기존 점령지에서 신속히 물러나서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전에 대비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회의 결과를 일본 본국의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던 왜군측 문서가 남아있습니다.
선조 임금이 애써 그 전투 성과를 깍아내리려 했지만, 명량대첩이 아니었다면, 선조는 2차로
한양을 버리고 또 북쪽으로 피신했어야만 할 처지였어요. (실제로 왜군의 대대적 공세에 이미 한양에선 임금 피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던바, 갑자기
전체 전선에서 왜군이 물러나서리 그 계획은 중단되었음.)
명량대첩 이후에도 조선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조선수군에 대한
지원은 거의 제로였음.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스스로 농업, 수산업을 통하여 전쟁비용을 마련했고, 백성들이 왜군의 노략질에 보호받는 대신에
조선수군에게 식량 등을 내어놓았기에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허릿띠를 졸라매면서, 큰 재원이 소요되는 판옥선 추가 건조까지
실행했던 조선수군이었으나, 왜란 후 쇠퇴했음. 뭐, 선조 이후 광해군 땐 그래도 괜찮았지만, 인조반정 무리들이 반정이 두려워서 지방 병력을
억압했기 때문에 조선 군사력이 무너지면서, 조선수군도 쇠퇴해 버렸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왜구들이 조선 해안을 노략질하던 건 완전히
사라졌음. 워낙 조선수군에 무참하게 깨졌기 때문에 조선 인근 해역엔 얼씬도 못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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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1)> 선조 19 - 파탄 난 대 사기극
진주성 대학살을 벌인 일본군은 부산 인근
왜성으로 모두 들어갔고, 명나라 측은 진주성 대학살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은 채 강화에 열을 올렸습니다. (명 군대가 조선에서 벌인 약탈, 강간
등 만행은 왜군 못지 않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진주성 대학살에 대한 보복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두 나라가
벌이는 강화 협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화 협상의 두 주인공인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는 죽이 잘 맞았고
형세판단도 현실적이었습니다.
즉, 심유경은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 걸고 계속 싸울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상태로 명나라 정복은커녕 조선 지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와 일본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이 두명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명나라 황제의 강화 조건은 히데요시가
항복하고, 즉시 철군하며, 영원히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명나라가 황녀를 일본 왕의 후궁으로 보내고, 조선 4도를 일본이 지배하며,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면 강화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강화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고, 양국에 강화를 전제로 한 보고(강화를 위한 사실상의 허위보고)와
조치가 계속 이루어진 상태였으므로, 이제 와서 강화가 되지 않을 경우 심유경과 고니시의 목이 떨어질 판이었습니다.
이에
심유경과 고니시는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벌이기로 모의 하였습니다.
즉, 고니시가 히데요시의 항복문서를 가짜로 만들어
심유경에게 전달하고, 심유경은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을 항복사절인 것처럼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양쪽을 속여 일단 강화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1월에 중국을 출발한 명나라 사신이 11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산에 도착할 정도로 나라 간의 연결
고리가 느슨하고, 그럴듯한 통신수단도 없었기에, 이런 사기극의 시도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심유경과 고니시의
위와 같은 사기극은 히데요시의 면전에서 발각되었고, 불같이 화가 난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침략을 결정했으며, 고니시의 목을 베는 대신, 고니시에게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작전권이 없으니 쯧쯧 참으로 한심하네여~^^
담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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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2)> 선조 20 - 이순신을 제거하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 사기극을 벌인 고니시의 목을
베지 않는 대신, 고니시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 지난 원정의 실패는 바닷길과 호남을 장악하지 못한데 있다.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 호남을 장악하라. 그리고 조선 백성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신속히 남해안의 성으로 복귀하라. 그러기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조선 왕이
강화를 애걸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강화가 되어가던 차에 일본이 다시 침략을 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또 다시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조선 수군의 격퇴, 호남 점령이라는 양대 과제를 명 받은 일본군 장수들에게
이순신의 제거는 최우선의 공통 과제였습니다.
히데요시로부터 마지막 기회를 부여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짜기에 골몰했고, 드디어 계책을 마련하였습니다.
조선 침략 당시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이웃한 지역의 영주들로서, 상인 출신인 고니시는 무장 출신인 가토를 "무식한 놈"으로, 가토는 고니시를 "얍삽한 놈"으로 치부하는 앙숙의
관계였습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조선에도 많이 전해져서, 가토는 전쟁광인데 반해 고니시는 강화를 하고 싶어 하므로, 고니시는 괜찮은
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니시가 누구입니까
일본군 제1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성, 동래성에서
조선판 킬링필드를 연출한 살인마 중의 살인마가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입니다.
고니시는 가토와의 관계를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하고, 평소 선이 닿아있던 간자 김응서에게 장계를 올리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 고니시가 사람을 통해
전하기를, “강화가 안 되는 것은 가토때문이니 가토를 제거하면 나의 한도 풀리고 귀국의 근심도 사라질 것입니다. 모월 모일 가토가 가덕도에
정박할 것이니 잠복했다 기습해 처치하시오”라고 하더이다.
일본의 낚시 밥을 덜컥 문 선조는 곧 이순신에게 가덕도로 나아가 가토의
선단을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선조로부터 출정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일본군의 흉계를 단번에 간파하고는 선조의 명을 들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그런데 사실은 이순신에게 가토를 치라는 명령을 내릴 당시 이미 가토는 군대를 이끌고 상륙한 상태였습니다)
담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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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3)> 선조 21 - 이순신 제거되다!
이순신이 일본군의 흉계를 간파하고 가덕도 출전을
거부하던 그 때에 맞추어 원균의 장계가 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 신의 생각으로는 수백 척의 수군으로 질러나가 큰
바다에서 위력을 보이면 해전에서 이기지 못해 겁을 먹고 있는 가토는 필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출정 불가론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하고 이순신을 제거하는 쪽의 의견을 수차례 밝혔고, 조정은 선조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이제는 이순신이 가토의 목을 베어 온다 해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선조)
- 이순신은 성품이 강하고 뜻을 굽힐
줄 모르는데,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해지기 마련이옵니다.(유성룡)
- 위급할 때 장수를 바꿀 수
없사옵니다.(정탁)
뜻을 굽히지 않은 이순신은 곧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고,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정탁의 “군사상 문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니, 살리시어 후일에 대비하여야 합니다”라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다행히도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백의종군의 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조정은 수군이
강력하므로 출전만 하면 뭔가 될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안중에도 없던 이들이 이순신이 연승을 하자, 조선
수군이 원래부터 강군이었던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지요
선조와 조정은 원균에게 가덕도로 나아가 가토의 왜군을 칠 것을 명했으나,
휘하 장수들은 “불가능한 작전입니다. 장수가 전장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며 출정을 반대했고, 원균 자신도 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원균, 출정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그 동안 건조된 전선까지 총 동원된 최대 규모의 출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원균은 척후선, 사전 정보도 없이 강행군을 거듭했고,
적선 몇 척이 보이면 유인선인지도 모르고 전력을 다해 쫒곤 하다가 지칠 대로 지쳐 7월 16일 새벽 칠천량에 정박했습니다.
이
때 1,000여 척의 일본 적선이 포위해 들어오니, 조선 수군은 싸움 다운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무참히 전멸했고, 원균은 육지로 도망가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군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막강 조선 수군은 이렇게 칠천량 바다를 밝히며 사라져 간 것입니다.
담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