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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안사회의 경제철학*
- 기존 ‘좌파 운동’과 ‘지속 가능한 진보’의 등장과 연관하여
곽 노 완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논문개요]1)
‘좋은정책포럼’의 대표인 김형기 교수는 기존 좌파 운동과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지속 가능한 진보’를 주창한다. 김형기 교수의 테제는 기존 좌파의 정치경제학과 노동운동의 혁신을 추구하는 그의 시도와 맞물려 있다.
하지만 그의 ‘새정치경제학’과 ‘노동운동혁신 테제’는 기든스와 블레어의 “제3의 길”을 뒤쫒아 좌파와 노동운동을 절충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새정치경제학은 대안 경제체제 모델을 구성하면서, 맑스의 이론을 주류경제학 담론인 ‘지식기반경제론’과 중립적인 ‘시민사회개념’을 통해 확장하고 있다. 이 글은 현대 좌파의 담론인 ‘시민사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다중’, 고진의 ‘생산-소비 협동조합’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면서 김형기 교수의 중립적 ‘시민사회’의 절충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나아가 ‘시장’과 ‘계획’의 근원적 변화 없이 중간에 ‘시민사회’나 ‘꼬뮨’을 배치하는 대안 경제체제는, 정세에 따라 신자유주의와 전통적 사민주의 사이를 진동하는 ‘지속 불가능한 체제’임을 밝히고자 했다.
나아가 새로운 대안사회의 경제체제는 공동소유에 기초하여 ‘능력에 따라 일하고, 성과와 필요에 따른 분배’를 중심축으로 할 때 확대재생산 될 수 있음을 밝혔다. 이는 맑스가 꼬뮨주의의 2단계에 맞춰 ‘성과에 따른 분배’와 ‘필요에 따른 분배’로 이원화한 원리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두 가지 원리가 하나로 통합되면, 후기 자율주의자들의 ‘기본소득제도’를 넘어서서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분배원리가 됨을 보였다.
한편 노동운동은 김형기 교수의 ‘시민적’ 혁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중’과 새로운 가능성들을 여는 접속을 통해서 ‘지속 가능한 진보’가 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 주제분야:경제철학, 정치경제학 비판, 참여계획경제, 대안 경제체제
* 주 제 어:새정치경제학, 생산-소비 협동조합, 기본소득, 시민사회, 성과와 필요에 따른 분배, 노동운동
1. 들어가기
2006년 들어 새 진보단체들이 출범했다. ‘새희망포럼’(대표 이덕희), ‘좋은정책포럼’(대표 임혁백, 김형기), ‘세교연구소’(이사장 최원식)가 그것이다. 이처럼 새 진보단체들이 등장함으로써, 작년 11월 8일에 창립된 ‘뉴라이트 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 목사)과 올해 3월 20일 공식활동을 개시한 이들의 싱크탱크 ‘바른정책포럼’과 더불어 ‘시민사회’영역에서 좌우의 대칭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진보단체들의 지향은 점차 구체화될 것이고 아직은 추상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지만, 이중 ‘좋은정책포럼’은 가장 탄탄한 이론적‧철학적 기초를 갖고 있으며 포괄적인 지향점을 보여준다.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와 현재의 신자유주의 모두를 넘어서는 대안적 발전모델을 추구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진보”라며 ‘참여‧연대‧생태’를 기본 가치로 하는 대안 찾기를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좋은정책포럼’은 “기존의 진보 노선은 실패로 끝났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좋은정책포럼’이 실패했다고 보는 “기존의 진보 노선”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를 뜻한다. 곧 ‘좋은정책포럼’은 계급지향적이고 분배중심적이었던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와는 달리 민중보다는 시민을, 분배중심보다는 성장과 분배를 기반으로 하는 성장촉진형 분배를 지향한다. 김형기 교수와 임혁백 교수 모두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좌파지향성을 염려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노무현 정부를 한국적 사회민주주의 정부로 보고 있다. ‘좋은정책포럼’은 이미 시들어가고 있는 영국 블레어 정부의 ‘제3의 길’과 이미 패퇴한 독일 슈뢰더정부의 ‘새로운 중도’의 한국판 모습 곧 ‘비판적 지지’의 현재적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이광일 2006, 174 이하 참조). 따라서 ‘뉴레프트’라는 세간의 명칭은, 그들 스스로 거부하고 있듯이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기존 진보=사회민주주의’로 본다고 해서 ‘다양한 사회주의(들)’에 면책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적 차원에서건 한국에서건, 꼬뮨주의 정치세력을 현실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이광일(2006, 176)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무시는 다양한 사회주의자들, 곧 기존(현재) 좌파를 고립시키는 효과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광일이 그리는 ‘현재(기존) 한국 좌파의 상’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민노당 + 노동자의 힘 + 희망사회당 + 초록정치연대’를 현재 한국의 주요 좌파로 보고 있다. 물론 이광일은 현재 한국 좌파의 “‘조합주의적 자족정치’의 한계”(이광일 2006, 163)를 넘어서며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이분법”(이광일 2004b, 226 이하)을 극복하고 “다차원의 연대”(이광일 2004b, 230)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는 현재의 주요 좌파에 매여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일은 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도 이미 현재(기존) 좌파는 직접적인 정치조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민주노조, 장애인 등 소수자운동, 진보적 지식인과 학술단체, 진보적 문화인과 문화운동단체, 진보적 여성운동단체, 진보적 인터넷모임, 진보적 출판사, 진보적 공동체 등은 이미 현재(기존) 좌파(정치)의 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정치는 이미 선거와 비합법 조직을 포함한 전통적 정치운동조직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현재(기존) 좌파이론’도 이미 그 외연이 확장되어 있다. ‘현재(기존)의 좌파이론’이 공유하는 것은 현실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 김일성주의에 대한 사회주의(내지 꼬뮨주의)적 비판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기존)의 좌파이론’은 정통 맑스주의라고 할 수 있는 맑스주의, 레닌주의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등 고전적 맑스주의 이론체계, 그리고 들뢰즈 맑스주의, 가타리의 소수자운동이론, 네그리 등의 후기자율주의, 평의회 맑스주의, 지역공동체주의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좌파이론의 흐름은 주로 ‘철학적 논의’를 매개로 이루어진 ‘현재(기존) 좌파이론 현황’이라고 한다면, ‘경제학적 논의’를 매개로 한 현재의 좌파이론은 ‘시장사회주의’, ‘기본소득제도론’, ‘참여(계획)경제론’, ‘기금사회주의’, ‘공공부문과 주식회사 사회화이론’, ‘생태사회주의’ 등으로 확장되어 있다.
어쨌든 ‘비보수‧비좌파’의 ‘대안적 발전모델’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좋은정책포럼’과 이를 주도하는 김형기 교수, 임혁백 교수의 이론적 시도는 낡은 ‘제3의 길’과 ‘새로운 중도’적인 색채에도 불구하고 ‘기존 좌파운동과 이론’에 커다란 자극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논문은 특히 김형기 교수의 경제철학적 논의 곧 ‘새정치경제학(방법론)’ 등과 비판적으로 대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좌파이론적 시도이다. ‘새로운’이라는 형용사가 첨부된 것은 앞서 밝힌 ‘현재(기존) 좌파이론들’과도 비판적으로 대결하면서 나름의 대안사회경제이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형기 교수의 글을 따라가면서 논평하기 보다는, 김형기 교수와는 다른 독자적 대안 경제체제의 상과 경제철학을 제시하면서 김형기 교수와 비판적으로 대결할 것이다.
여기서 이론적 출발점은 맑스의 자본에 대한 내재적 비판과 변혁이다. 자크 비데가 밝힌대로, “철학자들은 자본을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Haug 2005b, 575에서 재인용) 이 논문의 ‘새로운’ 좌파이론은 맑스 이론체계의 ‘비판’과 ‘변혁’을 내재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나 네그리의 외재적 맑스 비판과는 ‘차이’를 갖는다.
2. 정치경제학의 확장 vs. 주류경제학적 수정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또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대상은 잉여가치론의 다양한 해석과 변형을 거쳐 외연적으로 생태와 환경‧젠더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어 왔다. 또한 내포적으로도 맑스에게서 제기되는 난점과 그러한 난점이 기반하고 있는 ‘이론틀’1)에 대한 논쟁과 비판을 거쳐 변혁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계급론과 다중론의 충돌, 산업자본 중심주의와 금융자본 중심주의(이른바 금융화론)의 대결, 새로운 대안사회 모델을 둘러싼 논쟁 등이 포함된다. 물론 이러한 외연적 확장과 내포적 변혁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따라서 ‘기존’의 맑스주의 사회이론을 자본에 대한 과거 소련 교과서적인 이론체계로 한정한다면, 이는 현재의 맑스주의 이론현황을 20년 전의 지형으로 착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맑스의 이론이 폐기되기 보다는 외연적‧내포적 확장을 둘러싸고 논쟁되는 이유는, 하인리히(Heinrich 2006)가 지적하듯이 무엇보다 맑스 이론의 ‘이중성(Ambivalenz)’에 있다. 그에 따르면 맑스의 이론은 초기와 후기의 긴장이나 단절만이 아니라, 후기의 ‘정치경제학 비판’ 안에서조차 근대의 ‘이론적 장’(theoretisches Feld)과 맑스 고유의 독자적인 ‘이론적 장’의 충돌과 긴장을 포함한다(Heinrich 2006, 25 이하). 이러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갖는 이중성은 이후 다양하고 때론 모순적이기도 한 해석들과 재구성, 그리고 변형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을 외연적‧내포적으로 확장하여 ‘새정치경제학’을 구성하려는 김형기 교수의 시도도 그러한 흐름들의 일부로 보인다. 김형기 교수는 맑스의 이론에 공백으로 남아있는 임노동론을 구성하고(김형기 1997), 정치경제학의 대상을 제도와 개인까지 외연적으로 확장하며 나아가 생활양식(문화)와 생산조건(자연)까지 내포적으로도 확장하려는 시도이다(김형기 2005a, 18).
물론 김형기 교수의 시도에는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한계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깔려있다. 예를 들어 “자연을 목적의식적으로 변형하는 인간의 활동을 제약할 자연적 한계란 그의 이론에는 별달리 고려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따라서 “마르크스의 관점은 오늘날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하는 생태위기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김형기 2005a, 22)는 것이다. 분명,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체계에는 ‘자연 또는 생태계의 재생산’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는 김형기 교수의 전공영역, 곧 ‘임노동자 관점에서의 개인적 소비과정 내지 임노동자의 재생산과정’에 대해서도 타당한 말이다(앞의 책, 21).
하지만 김형기 교수는 맑스가 고찰하지 않은 영역과 맑스가 배제하는 영역을 혼동하는 듯이 보인다. 곧 김형기 교수는 맑스가 고찰하지 않은 영역을 곧바로 배제하는 영역으로 해석하면서 맑스를 외연적‧내포적으로 확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할 수 있다.
첫째는 그는 동일한 영역을 다루면 상이한 ‘이론틀’에 서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이론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지식과 잉여가치의 관계에 대해 상충된 ‘이론틀’과 상충된 이론적 분석들이 가능한데 이러한 차이가 김형기 교수의 시도에서는 간과된다. 따라서 지식이 잉여가치의 주요 원천으로 전환된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상충되는 이론들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기반 경제’라는 보수 이론의 담론을 맑스주의 이론의 확장을 위한 개념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그 예이다(앞의 책, 24). 지식이 가치와 잉여가치의 주요원천이 되는 경향은, 이미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다루고 있다. 이를 노동가치론 확장의 출발점으로 삼는 좌파적 기획중의 한 흐름은 후기 자율주의의 ‘인지자본주의론’에서 체계화된다(전병권 2006 참조). 후기 자율주의의 테제는 사회전체성원이 사회적 노동자이며, 직접적인 물질노동(자)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성원의 대중지성은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가치론을 확장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보수적 기획은 ‘지식기반 경제’라는 개념을 통해 지식의 소유자만이 잉여가치 또는 이윤을 생산한다고 하면서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담론으로 제출된다. 이러한 상충성이 김형기 교수의 시도에는 분별되지 않고 절충적으로 조화롭게 통합되어 있다.2)
둘째의 문제점은, 하인리히의 말처럼 ‘화폐론’‧‘공황론’‧‘신용이론’ 등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강점에서 오히려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중성’이 체계적으로 간과된다는 점이다. 정치경제학을 내포적‧외연적으로 확장하여 ‘새정치경제학’을 구성하려는 김형기 교수의 시도는 맑스의 내포적‧외연적 공백을 확인하고 메우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21세기에 현재성을 갖는 대안적 경제학을 구성하려는 정당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첫걸음의 향배가 문제이다. 앞에서 지적한 첫 번째 문제점은, 상충되는 다양한 이론들을 변별하지 않은 채 절충적으로 통합하여 맑스의 공백을 메우는 데 사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점은 맑스가 이미 체계적으로 다룬 영역에 대해서는 거의 ‘무비판적’이라는 점이다. 곧 김형기 교수는 맑스의 ‘이중성’을 거의 변별하지 않은 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맑스의 난점이 발생하는 이론적 원천을 간과하며, 다른 한편으론 맑스 이론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보지 못하는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점들이 결합되어, 김형기 교수의 ‘새정치경제학’은 ‘과거의 일면적 맑스 해석 + 정치경제학 영역의 절충적 확장’이라는 모습을 띠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도는 근원적으로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과거의 절충적 통합’이다. 사실 김형기 교수도 자신의 시도를 “한국형 제3의 길”이라고 부른 바 있다. 더구나 그가 말하는 “한국형 제3의 길”은 기든스에 의해 이론화되고 블레어에 의해 정책화된 “제3의 길”도 아니다. 그는 서구적인 “제3의 길”로 가기에는 아직 한국 사회와 한국의 노동운동 및 시민운동이 미발전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서구의 “제3의 길”보다 보수적인 길, “제3의 길”이 아니라 이를 뒤따라가는 길을 제안한다(김형기 2005b, <명제6>). 이처럼 서구와 한국의 동시대적 차이를 시계열적인 앞섬과 뒤처짐의 관계로 보는 문제점은 차치하고, 이미 몰락해가고 있는 “제3의 길”을 이상적 목표로 볼 때 ‘새정치경제학’의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한다.
3. 시민사회와 다중, 그리고 꼬뮨
김형기 교수가 생각하는 대안 경제체제는 국가 또는 중앙계획, 시민사회, 그리고 시장이 결합된 체제이다(김형기 2001, 586 및 2005a, 25). 그는 이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경제체제”(2005, 16)라고 본다. 나아가 그는 “시민사회의 발전은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2001, 587)고 본다. 따라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는 시장사회주의에서의 시장실패를 방지할 수 있다”(2001, 587)고 주장하면서 시장사회주의와도 거리를 둔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경제체제” 모델을 ‘자주관리 사회주의’라고 부른다(2001, 586).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주관리’는 유고의 자주관리에서 나타났듯이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과 관리를 책임지는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소유의 “기업에 대해 노동자통제와 국가통제 그리고 시민사회에 의한 통제가 결합된”(2001, 586) 체계를 지칭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실사회주의=중앙계획’, ‘시장사회주의=중앙계획+시장’, ‘신자유주의=시장’으로 보는데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모델 모두 ‘국가의 실패’나 ‘시장의 실패’를 야기하기 때문에 ‘새로운 경제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민사회’는 민주적 통제를 통해 ‘국가의 실패’와 ‘시장의 실패’를 모두 막아낼 제3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김형기 교수의 ‘새로운 경제체제’ 모델에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내용들이 절충적으로 혼합되어 있다. 특히 자신의 모델에서는 노동력이 상품화되지 않는다고 하는데(2001, 586), 이는 기간산업(만)을 국유화한다는 그의 말에 입각할 때 모순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의 모델은 사적인 대기업의 존재를 허용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정부가 독점가격방지를 위해 가격통제를 실시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앞의 곳). 사적인 대기업이 존재하면서 노동력이 상품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사적인 대기업이 존재한다면, 이는 이윤의 존재를 허용한다는 것이고 그 대립쌍으로서 임노동 곧 노동력의 상품화를 전제하는 것 아닌가?
김형기 교수의 ‘새로운 경제체제’ 모델에서 나타나는 이론적 절충성은, ‘시민사회’ 개념에 대한 그의 비노동운동적인 ‘시민운동적’ 이해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우선 김형기 교수가 모호하게 사용하고 있는 시민사회 개념부터 살펴보자. 흔히 무차별적으로 ‘시민사회’로 번역되는 맑스의 부르주아사회(bürgerliche Gesellschaft) 개념에서 시작하자. 맑스의 부르주아사회 개념은 3단계에 걸쳐 변화와 단절을 겪는다.
첫 번째 단계는 헤겔의 ‘부르주아사회’와 외연적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는 헤겔 법철학비판(1843)까지의 사용법이다. 여기서 ‘부르주아사회’는 사적 욕구들이 충돌하며 각자가 타인을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제 또는 시장영역을 지칭한다(MEW I/203 및 354). 맑스가 헤겔과 다른 점이 있다면 헤겔과는 거꾸로 부르주아사회를 본질로, ‘국가’는 그 본질의 소외된 형태 또는 자립화된 형태로 본다는 점이다. 이 때 ‘국가’는 헤겔과 달리 중립적이고 도덕적인 인륜을 실현한다는 가상을 벗고, 부르주아사회에 걸맞는 형태 곧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태를 취해야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두 번째 단계는 여전히 경제영역으로 이해되는 ‘부르주아사회’ 자체 안에서의 대립과 분열을 포착하면서 부르주아사회 자체의 변혁을 지향하는 단계이다. 이는 「유대문제에 관하여」(1843)이후 나타나는 견해이다. 「헤겔법철학비판 서설」(1843-4)은 이러한 변화를 좀 더 명확히 보여준다. 곧 부르주아사회는 계급대립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포착되며 맑스는 이제 사적소유의 철폐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지향한다(MEW 1/388 이하).
세 번째 단계에서는 ‘부르주아사회’가 더 이상 경제영역으로 국한되지 않고 국가를 포함한 사회전체영역을 포괄한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 이후 ‘부르주아사회’는 이러한 용법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서 ‘부르주아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와 동의어로 사용된다3).
그런데 현대의 이론적 논의에서 등장하는 ‘시민사회’는 맑스의 ‘부르주아 사회’ 개념과는 달리 주로 그람시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람시는 '시민사회(società civile, Zivilgesellschaft)'를 명확히 정의하지는 않지만, 좁은 의미로는 대체로 ‘사적이고 자유의지에 따른 결사체들’을 지칭한다(Gramsci 1929-35, Heft 6, §136-137 참조). 여기에는 자연적인 결사체나 국가적 결사체, 그리고 영리적 결사체가 제외된다. 이렇게 볼 때, 좁은 의미의 ‘시민사회’의 예로 정당, 교회, 학교, 노조, 사회단체, 소비자단체, 동호인 모임 등등을 들 수 있다.4)
하지만 그람시의 ‘시민사회’ 개념은 가변적이다. 국가가 인륜적(ethisch)으로 전환될 경우, 그는 국가전체를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로 본다(앞의 책, §88).
그람시에 따르면, “특정 사회에서 조직되지 않거나 무당파적인 사람은 없다.”(앞의 책, §136). 따라서 이처럼 가변적인 ‘시민사회’는 중립적인 결사체가 아니라 설득과 동의를 통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헤게모니의 대결장이기도 하다. 곧 복수의 ‘시민사회들’은 지배계급 헤게모니의 재생산을 위한 장치(‘헤게모니장치’)가 되거나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재생산하는 조직체가 된다(Gramsci 1931-32, Heft 8, §179 참조).
이러한 그람시의 ‘시민사회’론이 함의하는 것은, ‘시민사회들’을 꼬뮨주의로 이행의 주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다. 우선 알뛰세르적인 비판은, ‘시민사회’ 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설득과 동의뿐만 아니라 ‘억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시민사회’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압도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속에 계급투쟁을 배치함으로써, 계급투쟁의 공간을 확장하는 것은 필요하긴 하지만 승리의 가능성이 이미 제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광의의 국가 곧 광의의 ‘시민사회’에 포섭되지 않는 꼬뮨주의 조직체(꼬뮨, 소비에트, 또는 꼬뮨주의 정당)의 필요성을 함의하는 말이다(Balibar 1982, 80 이하).
하지만 알뛰세르는 단일한 중심을 갖는 단일 정치조직으로서의 전통적 혁명정당의 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그러한 정치조직이 갖는 위계적 질서에 대한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알뛰세르에 대한 반향으로 크게 두 가지 조류의 대안적 운동체와 이에 대한 이론이 발전해왔다. 하나는 '다중(multitude) 내지 소수자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공동체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다중’에 대한 담론은 탈근대 시대 노동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잉여가치론과 관련되어 있다. 네그리는 노동(자)의 외연적 확장을 통해 새로운 잉여가치론을 전개하면서 ‘다중’에 대한 논의를 체계화시킨다. 그는 사회성원전체를 ‘사회적 노동자’로 확장한다. 나아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을 기각한다. 따라서 직접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회성원전체는 모두 부를 생산한다고 본다. 그가 이렇게 보는 데는, 인터넷 등 쌍방향매체의 획기적인 발전과 더불어 소통을 통한 ‘대중지성’ 또는 ‘일반지성’의 발전이 노동과 생산을 변화시켰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제 ‘일반지성’은 직접적으로 잉여가치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네그리는 노동의 헤게모니는 산업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본다. 곧 정보통신의 발전과 더불어 산업노동자는 자본주의 생산과정에 철저히 종속되고 포섭됨에 반해 지식인, 정보통신 전문가, 대학생 등을 중심으로 하는 비물질노동자가 부의 생산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변혁의 주도세력이라는 것이다(Negri/Hardt, 2004, 108 이하). 비물질노동은 경제적 영역을 넘어서서 정보, 지식, 아이디어, 이미지 등을 생산하면서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재생산에 개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네그리에게서 사회적 노동자의 다른 이름인 ‘다중’은 각기 다른 ‘특이성’을 갖고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접속 속에서 더욱 커다란 공통적 실천, 행동, 욕망을 형성하는 한편 동시에 특이성을 확장해나간다. 이러한 ‘다중’은 중앙통제 없이도 소집단 사이에 그리고 소집단 안에서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함으로써 뭉쳐지고 흩어짐을 통해 형성되는 주체이며, 이는 이미 국제적 네트워크(예를 들어 대안세계화 운동)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가타리(Guattari 1972)와도 겹치는 이러한 ‘다중론’은 노조와 노동운동을 오히려 자본주의체제에 갇힌 체제순응적 운동으로 폄하하는 데서 커다란 이론적, 정치적 난점을 포함한다. 곧 맑스를 넘어서서 노동자의 주체형성을 극대화시키려고 시작한 논의가 오히려 노동자의 비주체로의 전락을 진단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주체화를 가로막는 논의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는 지식인과 대학생이 주도하고, 노조와 노동자는 부차적인 역할을 했던 유럽의 68운동, 그리고 70년대 이탈리아의 운동과 현재까지 경제조직으로 법제화되어 있는 유럽의 노조에 대한 진단을 절대화시킨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Negri/Hardt, 앞의 책, 136 이하 참조).
어쨌든 네그리나 가타리는 ‘시민사회’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등 자본주의 안에 갇힌 공간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한 반자본주의적 ‘다중’의 주체형성을 검토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윤수종(2006, 40 참조)은 노조들을 사회운동과 결합함으로써 사회운동적 노조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는 네그리에 매몰되기 보다는 그의 장점을 통해 노조와 노동운동의 확장을 제안하는 것이다. 또한 윤수종은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는 ‘가족’과 ‘교육’에 비해 부차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는 ‘커뮤니케이션’ 영역(Althusser 1970, 90 및 98 참조) 내지 ‘여론’이 탈근대 시대에 갖는 중요성도 정당하게 지적하고 있다(윤수종 2006, 앞의 곳).5) 이 때, 여론은 “대표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앞의 곳)고 하면서 “거대기업들이 매체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여론의 장은 매우 비대칭적인 장”(앞의 곳)이라는 점이 동시에 지적되고 있다. 이는 ‘공론장’(Öffentlichkeit)과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경제적‧기술적‧관료적 체계가 침식한 결과로만 보는 하버마스와는 달리 ‘여론장’의 자본종속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시민사회’론이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론의 함의가 갖는 한계를 넘어서서 대안사회를 추구하는 또 다른 시도의 하나로 ‘지역공동체운동’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과 그를 수용‧확장하는 심광현의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칸트를 통해 맑스를 재해석해내는 고진은 2001년에 발간한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맑스 넘어서기에서 ‘순수이성 비판’과 ‘정치경제학 비판’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비판’은 비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가능성과 조건을 해명함으로써 ‘가능성의 중심’을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柄谷行人 2001, 18 참조). 이러한 ‘비판’ 개념은, 맑스의 ‘서술을 통한 비판’을 칸트의 ‘가능성의 한계와 월권을 구분하는 비판’ 개념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성‧일시성과 한계를 밝히며 ‘대안’에 대한 사고의 출발점을 주는 맑스의 ‘비판’이 인간지성의 영원불멸한 한계를 밝히며 ‘대안’에 대한 사고의 불가능성을 함의하는 칸트의 ‘비판’으로 어떻게 환원가능한 지에 답하지 않는 이러한 시도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6) 하지만 오히려 중요한 것은 고진의 시도가 어떤 새로운 가능성과 전망을 열어주며 또 어떤 한계를 드러내는지를 밝히는 점일 것이다.
고진이 맑스의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찾아낸 것은 협동조합이다. 맑스는 거기서 꼬뮨주의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이다. 맑스는 협동조합의 한계도 보았지만, 이는 맑스가 협동조합을 생산협동조합으로만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협동조합이 ‘생산-소비 협동조합’이 된다면 이는 자본주의를 대체하고 넘어서서 꼬뮨주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상품을 “사는 입장”은 이니셔티브를 갖게 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해 능동적이고 주도권을 갖는 것은 노동력 상품을 “사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본의 ‘가치형태론’에 대한 재해석에 기초하여 이런 해석을 이끌어 낸다. 이렇게 볼 때, 노동자가 자본가에 대해 주도권을 갖게 되는 조건은 노동자가 다른 측면에서는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어진다. 노동자가 자본의 생산물을 사지 않는 것, 이것은 노동의 능동적인 저항이며 노동자가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는 조건이다.
그는 ‘화폐-상품-더 많은 화폐’라는 자본의 회전형식을 벗어나 생산과 소비가 결합된 ‘생산-소비 협동조합’을 창출하는 것은 자본에게 치명적이며, 자립적이고 확대재생산 가능한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연합’(맑스)을 만들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생산-소비 협동조합’이 개별적인 차원을 넘어서 지역적, 전국적, 국제적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자본으로 전환되지 않는 화폐, 곧 이자를 갖지 않는 화폐시스템이 형성되어야 한다. 고진은 이를 린턴이 고안한 ‘지역교환거래제도(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에서 찾는다. 이 공동체 내에서 교환은 성원 각자가 발행하는 통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성원은 소속했던 공동체를 떠날 수도 있고 다른 공동체에 중복해서 속할 수도 있다. 고진은 이러한 ‘생산-소비 협동조합’이 자율주의의 ‘자본가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원리와 간디의 ‘자본의 상품을 사지 않는다’는 원리를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심광현 2006, 45쪽 참조). 고진의 말대로 이러한 비자본제적 ‘공동체’가 지속가능하다면, 분명 자본제 내에서의 투쟁을 촉진하며 자본제적 기업이 ‘생산-소비 협동조합’으로 재편성될 것이다.
하지만 고진의 ‘생산-소비 협동조합’은 얼핏 보기에 21세기형 유토피아로 보인다. 이러한 반론에 대응하듯, 고진은 그러한 공동체가 하나여서는 안 되며 처음부터 복수로 출발하여 공동체간의 네트워크와 동일통화에 따른 교환과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미 특정개인이 복수의 공동체에 중복 소속되는 것을 전제하는 데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깔려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 곧 ‘공동체들간의 연합’이라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한다(柄谷行人 2001, 503). 이러한 중심이 전통적 맑스주의의 당과 다른 점은 ‘익명의 선거+제비뽑기’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다(같은 책, 507). 또 이러한 공동체는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통과한 뒤에만 나타난다고 한다. 곧 현실적으로 이러한 공동체의 출발은 자본주의에 의해 포위된 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와 경쟁하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시기적으로도 자본주의 이후에나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고진도 고려하고 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진의 ‘생산-소비 협동조합’이 여전히 유토피아의 요소를 내포한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심광현은 이러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와 윤리의 결합에 의존한 고진의 모델에 덧붙여 미적-문화적 내지 생태문화적 만족을 동반해야만 지속적 확대가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심광현 2006, 53 이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진도, 심광현도 여전히 유토피아의 지형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미 공동체의 화폐가 공동체성원 각자에 의해 발행된다는 대체화폐 원리의 필연적 귀결이다. 각자가 이자를 지불하지 않는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 각자는 자기가 가진 물품의 화폐가치 이상으로 화폐를 발행하게 될 것이다. 심광현도 수용하고 있는 고진의 ‘지역교환거래체제’는 이러한 것을 조정할 어떠한 기제도 갖고 있지 않다. 더구나 공동체 성원의 자유로운 귀속과 탈퇴는 대규모 부채를 진 성원들의 탈퇴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고진의 ‘생산-소비 협동조합’은 게으름뱅이와 사기꾼들의 천국이 될 것이며 지속 가능하기는커녕 파산이 보장되어 있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에 불과할 것이다. 심광현이 제안하듯이 미적-문화적 내지 생태문화적 만족감이 충족된다고 해도 이는 막지 못할 필연적 경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진과 심광현의 논의가 대안사회경제체제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대안사회경제체제가 자립적인 확대재생산의 기제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사실 ‘노동시간의 감축 → 자유시간의 확대 → 개인의 능력과 생산력의 증대 → 노동시간의 추가적 감축’이라는 요강과 자본, 그리고 네그리의 선순환 테제는 확대된 자유시간과 소비시간이 자본주의에 포획되는 한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이 고진과 심광현의 문제의식에 깊게 깔려 있다. 이는 노동시간이 세계최저이며 자유시간은 세계최대인 독일 등 몇몇 유럽국가 노동자들의 경우를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자유시간과 소비시간이 자본주의 문화에 포획되어 있는 한 노동시간보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시간으로 되기 십상이다.
이상 앞에서 그람시의 ‘시민사회’론과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론을 통해 우리는 잠재적 노동자를 형성하는 어린 학생들에 대한 학교교육이 얼마나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강하게 만드는 지 보았다. 그리고 네그리나 가타리의 ‘다중’론을 통해 매스미디어가 학교보다 더 강력하게 사회전체성원을 자본주의로 포섭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고진을 통해 매스미디어를 넘어 ‘소비과정’ 자체가 자본주의에의 포섭과정일 수도 있음을 따라서 이로부터의 단절과 비자본주의적인 독자적 소비과정이 대안사회경제체제의 필수요소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를 넘어서려는 그들의 시도에 내포되어 있는 한계와 유토피아도 동시에 감지할 수 있었다. 이는 김형기 교수의 대안 경제체제에도 타당한 지적이다. 왜냐하면 김형기 교수처럼 기존의 계획과 시장사이에 ‘시민사회’를 첨가하든, 고진처럼 ‘생산-소비 협동조합’을 집어넣든, 계획과 시장의 획기적인 변화를 전제하지 않는 한 그러한 대안사회경제체제는 일시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정권이 바뀌는 추세에 따라 언제든 신자유주의적인 시장중심주의와 케인스주의적인 계획중심주의를 왔다 갔다 하는 진자운동을 계속하게 될 것이고, 양자가 동시적으로 거대한 실패를 보여줄 때만 아주 잠정적으로 가능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형기 교수가 대안경제체제로 제안하는 ‘계획+시민사회+시장’ 모형(김형기 2001, 593)은 현실에 이미 존재하며 아주 쉽게 보이는 요소들의 결합인 한에서 ‘실현가능성’이 높은 듯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가장 절충적이며 따라서 언제든 손쉽게 기존의 신자유주의체제나 고전적 사민주의체제로 회귀할 수 있는 불안정한 모형일 수 있다.8)
더구나 그가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보는(김형기 2001, 587 참조) ‘시민사회’ 또는 ‘비정부기구(NGO)' 혹은 ’비영리기구(NPO)'(앞의 책, 593)는 그람시적인 ‘헤게모니 재생산의 장’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김형기 교수는 ‘시민사회’를 국가보다도 더 보편적인 공익을 추구하며 완전한 민주주의의 체현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시민사회’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재향군인회’든, ‘자유총연맹’이든, ‘경실련’이든, ‘환경운동연합’이든, ‘참여연대’든, ‘문화연대’든 또는 다양한 ‘지역공동체’든 ‘시민사회들’은 공평무사한 민주적 결사체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시민사회’가 국가부문과 시장부문의 경제활동을 민주적으로 통제한다는 김형기 교수의 모형은(앞의 곳), ‘시민사회들’간의 대립과 특정 ‘시민사회’ 안의 갈등을 간과하며 나아가 ‘시민사회’가 특정 이익집단으로 활동하지 않는다고 볼 때만 가능한 모형임을 알 수 있다. 곧 ‘시민사회 물신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가 ‘통제’하는 영역으로 김형기 교수가 들고 있는 예는 국영기업 내지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앞의 책, 586)이다. 곧 ‘사적 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모형이 사실상 사민주의 우파의 모델인 “제3의 길” 또는 “새로운 중도”에 가깝다는 것을 함의한다.
하지만 <한국 노동운동의 혁신을 위한 '10대 명제'> 중 6번째 테제에서 나타나는 그의 주장은 “제3의 길”도 아닌 듯이 보인다. 그의 <명제 6>은 “사회코포라티즘 전략과 시민사회 전략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테제로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의 전환을 주장해온 논의들”을 크게 2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를 지향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결합하려는 경향“이라고 한다.
곧 이어 서구의 경우 “대량생산경제에 기초한 포디즘(Fordism) 시대의 노동운동에서는 사회코포라티즘이 비교적 유효하였으나, 분권, 네트워크, 자율의 조직원리를 가진 지식기반경제에 기초한 포스트 포디즘(Post-Fordism) 시대의 노동운동에서는 사회코포라티즘(거시 코포라티즘) 전략의 효과성이 떨어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서구의 노동운동은 점차 시민사회 전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기업별 노조체제에 있고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의 초기 단계에 있기 때문에 사회코포라티즘 전략 강화의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사회코포라티즘 전략과 시민사회 전략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주장한다(김형기 2005b).
이렇게 되면 그의 절충적 ‘대안 경제체제’ 모형이 ‘후진형 제3의 길’과 가깝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김형기 교수의 <명제 8>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 시민이 불편한 것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기 위해 소모적인 파업을 한다고 배척당하고 있다.” “이는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직업적 이익에 집착한 결과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대립시키고 있는 데 기인한다.”(앞의 곳)
이는 노동운동이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하향평준화함으로써 시민과 함께하라는 충고이다. 그럼 노동자들은 시민이 아니란 말인지, 시민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불분명하다.
마치 <조선일보> 사설이나 칼럼에서 봄직한 명제들이 맑스 등의 이름으로 동원되는 절충이 어떻게 가능한 지 놀라울 뿐이다(앞의 곳).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이미 몰락중인 “제3의 길”을 뒤따라가는 한에서 한편에서 시대착오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생태문제와 젠더문제 등의 해결을 통합하려는 그의 ‘대안 경제체제’ 모형이 이렇듯 정반대의 테제들과 섞이면서 공문구가 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4. 대안사회의 경제체제 - 시론
‘비판’이 흠잡기가 아니라 맑스의 말대로 대안적 ‘서술’인 한에서, 김형기 교수의 대안 경제체제 모형에 대한 비판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비판은 그의 대안을 뛰어넘는 다른 대안사회의 경제체제 모형을 ‘서술’함으로써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안의 출발점을 확보하려면, 김형기 교수의 말대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포함되어 있었던 공상적 요소들과 비민주적 요소들을 철저히 밝혀낼 필요가 있다.”(김형기 2005a, 17)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 외에도 ‘대안적 서술’의 출발점은 몇 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 우선, 21세기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대안사회의 경제체제는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현재의 계기들을 이용할 때만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현대의 자본주의 이론과 대안사회경제 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다. 대안사회의 경제체제에 대한 이론의 확장은 기존의 연구를 변별하여 가장 앞선 이론적 성과와 대결함으로써 기존의 연구성과를 진전시킬 때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확장하려는 이 글의 ‘기획’은, 맑스의 경제학과 여러 상이한 ‘이론틀’을 무비판적으로 혼합하는 것을 ‘확장’으로 이해하는 김형기 교수의 “연구프로그램”(앞의 책, 9)과는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능력과 지면상의 제약 때문에, 서술범위를 대안사회 경제체제의 외연적 확장보다는 내포적 확장에 국한할 것이다. 물론 대전제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절하고 공동소유로 전환하는 것이다. 나아가 대안 경제체제는 김형기 교수의 말대로 지속가능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확대재생산될 기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1) 대안사회의 경제체제 1: 생산‧투자‧성과의 사회화
대안사회의 경제체제를 확대재생산하기 위한 다음의 요건은 생산‧투자‧성과를 모두 사회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에 기초하여 사회전체의 회계를 하나의 자산으로 일원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곧 생산수단과 모든 기업자산 및 예금을 통일된 하나의 사회자산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을 사회화한다는 것은 맑스의 말처럼 모든 생산자들이 전체생산을 사전적으로 계획하는 것이 아니다(MEW 25/272 참조). 사실 이러한 전면적 계획생산은 계획의 조정을 위해 거대한 사회적 시간을 소모할 것이며, 생산품목이나 생산방법의 혁신을 가능케 한다는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생산자들이 계획에 필요한 동일한 지식이나 의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계획을 위한 기초자료가 모두에게 완벽히 주어진다 해도, 각자 판단이 다를 것이므로 복잡한 의견조정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창의적 발상 중 일부는 억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단계로 위계지워져 있는 계획단위들의 대표들의 회의를 주장하는 데바인(Pat Devine)의 ‘참여계획경제’ 모델은 ‘중앙명령계획’의 비민주성은 일정정도 제거할 수 있지만, 거대한 시간낭비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9) 물론 사회전체적으로 중요한 의제는 인터넷과 통신망을 이용해 사회전성원의 토론과 회의를 거치는 ‘참여계획’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참여계획’은 ‘만사’가 아니라 일반적 관리영역을 벗어나는 ‘중대한 사안’에 국한할 때 최대의 참여를 촉진할 것이다.
생산의 사회화란 오히려 생산자들이 자기가 생산하는 단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지며 권한을 갖는 기제가 되어야 한다. 곧 기업별로 생산자들이 경영자를 직접 선출하며 그에게 일상적인 관리를 위임하며 특히 신제품과 새로운 사업영역에 대해 모두가 동등한 권한을 갖고 결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생산자금은 모두 사회의 공동자산에서 공여되는 체계를 뜻한다. 이는 사회전체의 자산인 기업의 모든 결정권을 직접생산자들이 위임받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직접 생산자들의 정치적 능력과 생산력이 크게 고양될 것이다.
투자의 사회화란 모든 투자자금이 사회자산으로부터 공여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성과를 사회화한다는 것은 생산물을 사회의 중앙계획기구에 귀속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각 기업은 생산물을 자기 책임 하에 판매하고 단지 매출액만 모두 사회자산으로 귀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김형기 교수의 제안처럼 매사에 시민사회나 국가의 통제나 공동결정을 허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김형기 2001, 593). 오히려 기업별 노동자들에게 철저하게 자주관리를 권장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물론 생태계 재생산의 파괴를 수반하는 생산방법이나 생산물에 대해서는 사회적 통제기제가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한 노동자들의 완전한 자주관리를 보장한다. 매사에 대한 시민사회와 국가의 통제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자주권과 창의성을 침해하는 비민주적 기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러한 통제는 사회적 시간을 거대하게 낭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대안사회의 경제체제 2: 능력에 따른 생산, 성과와 필요에 따른 분배
대안사회 경제체제를 재생산하기 위한 다음의 요건은 능력에 따른 생산, 성과와 필요에 따른 분배체계이다. 이는 맑스의 꼬뮨주의 분배원리를 변형한 것이다. 맑스는 꼬뮨주의를 2단계로 구분하여 저차 단계에는 성과에 따른 분배를, 고차 단계에는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꼬뮨주의를 이렇게 2단계로 구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고차 단계에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것은 ‘유토피아’의 재현으로 보인다. 필요에 따른 분배가 균등분배를 뜻하든, 아니면 각자 원하는 대로 분배받는 것을 뜻하든 사정은 매한가지다. 왜냐하면 균등분배든, 원하는 대로 분배받는 것이든 이는 게으름쟁이와 이기주의자의 천국일 뿐이다. 이는 능력에 따른 생산과 상충되며 따라서 재생산 불가능한 체계이다(곽노완 2006d, 49 이하 참조).
그러나 꼬뮨주의를 2개의 단계로 구분하지 않고 처음부터 성과에 따른 분배와 필요에 따른 분배를 통합하여 ‘성과와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하나의 체계로 만든다면 이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체계를 뛰어넘어 연대와 창의성을 동시에 촉진하는 훌륭한 체계가 될 수 있다. 곧 ‘매출액에서 생산비용이 공제된’ 사업성과의 일정비율(예를 들어 40%)은 필요에 따라 사회전체성원에게 연령별로 균등분배하고, 일정비율(예를 들어 40%)은 기업별 사업성과에 따라 성과소득으로 분배하며, 나머지 비율은 기타기금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연대와 창의성’을 모두 촉진하게 될 것이며 능력에 따른 생산을 극대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생산자는 성과소득을 많이 얻기 위해 열심히 노동했는데, 결과적으로 자신의 성과소득과 필요소득뿐만 아니라(직접생산자는 필요소득과 성과소득을 중복해서 받는다) 다른 사회성원의 필요소득도 증대시키며 나아가 지속적으로 성과소득을 많이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전체성원에게 필요소득(이를 ‘사회연대소득’이라고 하자)이 주어져야 할 근거는 충분하다. 사회전체성원은 의도하지 않아도 소비과정을 통해서 생산자에게 정보와 지식 등을 제공하게 되어 사회의 생산력을 높이는데 기여하게 되며, 또 자신의 잠재생산능력을 제고하면서 자신이 접속하는 타인의 생산능력도 같이 올리기 때문이다. 이는 이글이 후기자율주의 등의 ‘인지자본주의론’과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전병권 2006 참조). 뿐만 아니라 ‘사회연대소득’은 주부의 독립적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성별경제학이 제기하는 젠더문제를 일정부분 해결해줄 것이다(홍태희 2005 참조). 더구나 ‘사회연대소득’은 소득 격차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소비수요의 안정적 증가를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총소득이 일정할 경우 총소비는 소득불균형이 적을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회연대소득’은 ‘성과소득’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후기 자율주의자들이 말하는 ‘기본소득’보다 훨씬 더 확장된 대안의 가능성을 갖는다. 후기 자율주의자들이 주창한 ‘기본소득’은 그 기금의 원천을 묻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기본소득’은 세금의 인상을 가져오고 게으른 자의 천국을 만든다는 생산자들의 반발에 부딪쳐 당위적 주장으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통일된 사회적 자산의 단일회계를 전제하는 ‘성과와 필요에 따른 분배’는 오히려 생산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것이다. 이 모델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MEW 4/482)는 맑스의 꼬뮨주의가 당위를 넘어 철저히 실현가능한 기획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5. 나가며: 이행의 경제적 계기들 - 주식회사제도
고진은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내부의 적극적 지양인 반면, 주식회사는 ‘소극적 지양’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분명 주식회사는 자본의 극대화된 형태이다. 맑스도 밝히고 있듯이 주식회사는 신용과 결합하여 소수의 자본가가 사회적 재산을 수탈하는 극단의 형태를 보여준다(MEW 25/456 참조). 곧 주식회사는 압도적으로 사회적 재산으로 구성되지만 이윤은 철저히 사유화하고 손실은 최대한 사회화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주식회사는 대안사회 경제체제로 이행하는 경제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곧 연기금 등을 통해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되어 배당을 없애고 주가를 폭락시켜 주식회사 전체를 공공의 소유로 전환하는 것이 용이해지는 것이다. 실제 한국의 경우만 해도 2005년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은 이미 164조원이나 축적되어 있다. 이는 같은해말 상장 주식시가총액 655조원의 25%에 이르는 금액이다. 이것만 해도 충분하지만 주식회사가 진 은행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한다면, 은행은 이미 공적자금이 투자되어 사실상 공공소유이므로 주식회사를 공공 소유로 전환하는 것은 생각보다 용이한 일이다.
이처럼 연기금을 통한 자본의 사회화가 한국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이미 연기금의 주식소유 비율은 1996년에 26%에 이르며, 영국의 경우도 1994년에 연기금의 주식소유 비율이 27.8%에 달했다(장석준 2002, 15 참조).
가능성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최근까지 실제 그러한 시도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1975년 스웨덴의 좌파 사민주의자였던 마이드너는 임노동자기금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대기업의 최대주주로 등장하는 안을 만들었고 실패하긴 했지만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1995년 미국노동총동맹-산별노조회의도 산별노조가 집단적으로 계약을 맺고 있는 민간연기금들과 대기업의 기업연금을 통제하여 친노동자적 방향으로 기금투자가 이루어지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Bernstein 1997 참조). 유사한 시도가 1997년 8월 UPS 파업에서도 있었고, UPS 기업연금을 운수산별노조인 팀스터가 통제해야 한다는 노조의 요구가 관철되었다. 물론 이들의 지향은 자본을 폐기하기보다는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자본에 압력을 가하는 시도였지만, 주식회사의 발전과 신자유주의적인 연기금 주식투자 확대는 꼬뮨주의로의 이행의 가능성과 계기도 동시에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영국의 블랙번은 공적 투자기금형 연금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면서 연기금의 주식장기보유를 통한 공공부문이나 주요 대기업들에 대한 전 사회적 자주관리 구상으로까지 나아간다. 블랙번은 연기금을 통한 사회화가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지역차원의 연합민주주의의 구축 등과 결합하여 ‘복합 사회주의’라는 레이몬드 윌리암스의 구상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한편 공공부문은 시장과 더불어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두 축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시장과 계획을 모두 필연적인 구성부분으로 갖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Bidet 2002, 266 참조). 나라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공공부문은 신자유주의시대의 사유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OECD 국가들에서 40-50% 대에 달한다. 공공부문의 사회화‧민주화는 이글에서 제시한 대안사회의 경제체제로 가는데 주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기업에서 낙하산 인사가 아니라 생산자들이 경영자를 직접 선출하고 사업의 성과를 한데 모아 먼저 하나의 통일된 사회자산 회계에 귀속시켜 일단 공기업 노동자 가족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성과와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방식’을 선취해서 실시하는 것도 이행전략의 일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공공부문 노조는 특히 공공성으로 인해 지역사회와 더 맣은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들을 창출할 수 있다.
노조와 노동운동은 네그리가 얘기하듯이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되었고 자본주의를 넘어설 가능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노조와 노동운동은 다중의 가장 큰 부분이다. 또 꼬뮨주의로 이행의 주요 계기들에 가까이 있으며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이행의 주체이다. 그러나 노조와 노동운동은 다중과 접속하면서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서로가 공유하는 더 많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물론 김형기 교수의 명제에 따라 시민의 훈계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노조는 진보도 아니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노동운동도, 다른 다중들의 운동도, 누가 누구를 훈계할 수는 없다. 노동운동과 다중의 접속이 더욱이 확장되어야 할 이유도, ‘진보가 지속가능한’ 이유도, 더 많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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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tschaftsphilosophie der alternativfähigen Gesellschaft des 21. Jahrhunderts
- Im Bezug auf die bisherige Linkebewegung und den Auftritt des nachhaltigen Fortschritts
Kwack, No-Wan
Hyung-Ki Kim vertritt über die bisherige Linkebewegung und Neoliberalismus hinaus den nachhaltigen Fortschritt. Sein Versuch bezieht sich auf seine Innovation der marxschen politischen Ökonomie und Arbeiterbewegung.
Seine neue politische Ökonomie und These zur Innovation der Arbeitsbewegung enthält die eklektische Revision der Linken und Arbeiterbewegung zugunsten des dritten Wegs von Giddens und Blair. Seine neue politischen Ökonomie kontituiert das alternative Modell, indem sie die marxsche Wirtschaftstheorie durch den konservativen Diskurs "Ökonomie aufgrund des Wissens" erweitert. Ich habe in dieser Arbeit versucht, den Eklektizismus seiner eigenen neutralen Zivilgesellschaftkonzeption zu zeigen. Und sein alternatives Wirtschaftssystem als Summe von Markt, Plan, und seiner eigenen "Zivilgellschaft" ist sehr instabil, und schwankt zwischen dem Neoliberalismus und der Sozialdemokratie.
Darüber hinaus habe Ich herausgestellt, dass das neue alternativfähige Wirtschaftssystem durch das Prinzip "Arbeit nach Fähigkeit, Verteilung nach Leistung plus Bedürfnis" reproduktionsfähig ist. Das ist eine Zusammensetzung des 2 verschiednen Verteilungsprinzipen in den marxschen 2 verschiednen Phasen des Kommunismus.
Andererseits habe ich versucht, dass die Arbeiterbewegung nicht durch das neutrale zivilgesellschaftliche Innovation bei Hyung-Ki Kim sondern durch das Vernetzwerken mit der Multitude und die Öffnung der neuen Möglichkeit der s. g. nachhaltige Fortschritt werden kann.
영문 주제어: neue politische Ökonomie, Grundeinkommen, Zivilgesellschaft, Verteilung nach Leistung plus Bedürfnis, Arbeiterbeweg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