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의 탄생지이자 소년 시절을 보낸 대금동 마을은 대대로 창원 황씨의 세도가 크게 떨치던 곳으로 말끔하게 단장돼 서있는 황씨 문중 사당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바로 그 문중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 터가 남아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는 흔적도 없고 다만 길게 자란 잡초와 갈대 사이로 약간의 공터만이 그 자취를 짐작케 해준다.
그 동안에는 황사영의 강화도 생가설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 왔으나 서울 아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는 서울 아현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기경의 <벽위편(闢衛編)> 기록에 황사영의 결안(結案) 즉 판결문에 그의 태생에 관한 부분 "부모가 그를 서부 아현에서 낳았으므로(胎生於西部阿峴)"라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그 주장의 일부이다. 영·정조 때의 '서부 아현'은 주로 지금의 마포구 아현동 지역에 있던 넓은 마을을 지칭한다.
황사영은 1790(정조 14)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시 부분 1등)에 합격하였다. 이때 정조가 그의 손을 잡아 주기까지 하였으므로 이것을 표시하기 위해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바로 이 해에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命連, 마리아, 일명 蘭珠)과 혼인한 뒤 정씨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교리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교리에 관해 더욱 깊이 연구하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 직후 신해박해가 발발하자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천주교를 배척하였지만, 그는 천주교가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이라고 확신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함으로써 세속의 영광을 뒤로하는 등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의 집을 그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를 위한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약종 등 지도층 신자들의 활동을 도우면서 신자들을 가르치거나 가족과 친지들에게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고,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널리 전하였으며, 조선 교회의 전교사 영입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그는 이미 높은 교리 지식과 적극적인 교회 활동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1801년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하고 황사영 역시 몸을 피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충북 배론에 있는 토굴에 몸을 숨겼다. 조정에서는 그를 서학의 주요 지도자로 간주했고 박해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김 대왕대비는 특별히 그를 10일 내 시한부로 잡아들이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 교회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이를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황사영은 마침내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교회에 대한 박해와 앞으로의 전교를 위한 근본 대책 등을 적었다.
이 백서는 같은 해 10월 동지사 편으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져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 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순교 후 친척들이 황사영의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던 가마골(현 경기도 남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안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무덤은 1980년 현지에서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한편 순교 이후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숙부 석필은 경흥으로, 모친 윤혜는 거제로, 부인 명련(난주 마리아)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두 살짜리 아들 경한(景漢)은 어린 탓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되었다. 이때 명련이 유배를 가던 도중 추자도 예초리의 바닷가 바위 위에 남겨 놓은 아들 경한은 예초리의 오씨 집안 사람에게 발견되어 그 집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명련은 1838년에 사망하여 대정읍 모슬봉 북쪽의 한굴왓에 묻혔으며, 경한은 사망 후 예초리에 안장되었다. 현재 제주교구에서는 명련의 무덤이 있는 '대정 성지'와 '예초리의 경한 무덤'을 순례지로 조성해 놓고 있으며, 생전에 그녀가 거처하던 대정의 김씨 집안에 의해 명련이 1839년 예초리의 경한에게 보낸 두 통의 서한이 전해지고 있다.
◆ 황사영 백서
백서는 비단에 씌어진 글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문서이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어진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청국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에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국이 종주권을 행사하여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청국의 감호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아 보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 6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어서 그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규칙을 지킬 수 없음을 호소하며 대소재(大小齋)의 관면을 청하는 내용의 글로 백서를 끝맺고 있다.
황사영은 “천주교 신앙이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반드시 금지시키고자 하니, 천주교를 힘써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邪學罪人嗣永等推案)로 이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해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남기어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철저히 기록해서 전달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재건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본론’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안제시’의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 주었다. 1801년 당시 조선의 사회에서는 청나라의 정통성과 문화를 부인하는 북벌론적 배청감정과 함께, 청국의 문물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북학론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을 청국에 종속시켜 보고자 하였다. 그의 이 발상은 북벌론자는 물론이고 북학론자에게도 수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또한 그는 서양 선박과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발상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서양 선박과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한 바 있었던 초기 교회의 경험에, 박해라는 극한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무력의 요소가 결부되어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회에 널리 유행되고 있던 해상세력의 조선침략에 관한 위기의식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황사영의 신앙은 생전의 활동과 문초 기록, 그리고 그의 <백서>에 잘 드러난다. 이들을 통해 본다면, 황사영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굳게 간직하였으며 바로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그는 '순교자의 피는 천주교의 씨앗'임을 굳게 믿었고, '주님을 위해 진실로 남은 힘을 다하고자 한다'는 소명 의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앙심으로 교회 재건을 위한방책을 <백서>에 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서>는 내용상 국가에 해를 끼치려는 방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위정자들에게는 천주교 신자들의 양박(洋舶) 청래운동과 일장 판결(一場判決)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단서가 되었으며 ,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블뤼 주교가 초기의 순교자 약전을 기록하면서 황사영을 시복 추천 대상자에서 제외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 죽음으로 비밀의 문 열고 (황사영 생가터에서) <김영수> ▒
빈 터에는 햇살 가득 고여
향기 진한 바람소리 깊습니라
눈 밝은 소년 하나
대지 누르는 비바람을 뚫으며
죽음으로 비밀의 문 열고
겹겹 여울진 골짜기에다
새 숨결을 펴고 있습니다
어느 사랑인들 슬픔 아닐까만
또한 어느 슬픔인들 사랑 아닐까만
푸르게 예비된 하늘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뜨거운 노래입니다
내가 새로이 상처를 입어
목숨 뜨거워지는 기도 그리워하며
빈 터에다 얼굴 비춰봅니다
나는 다만
어느 고독에서 숨쉬는 것입니까
어느 침묵에서 깨어나는 것입니까
상한 갈대들 사이에서
둥지를 트는 바람들이나 새들의 아침은
더욱 빛나게 눈을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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