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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원 원문보기 글쓴이: 공동체
10 |
강낙중 |
姜洛中 |
경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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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강난희 |
姜蘭熙 |
경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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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강남기 |
姜南奇 |
경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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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강노영 |
姜老永 |
경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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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강대련 |
姜大蓮 |
종교 | ||
15 |
강대철 |
姜大喆 |
관료 | ||
16 |
강덕호 |
姜德鎬 |
경찰 | ||
17 | 강도원 |
姜道元 |
종교 | ||
18 | 강동렬 |
姜東烈 |
군장교 | ||
19 | 강동진 |
姜東鎭 |
판검사 |
20 | 강동희 |
姜東曦 |
중추원 | ||
21 | 강리황 |
姜利璜 |
중추원 | 경찰간부
친일단체 |
|
22 | 강만표 |
姜萬表 |
경찰 | ||
23 | 강면욱 |
姜冕昱 |
경찰 | ||
24 | 강명옥 |
康明玉 |
관료 | ||
25 | 강 번 |
姜 藩 |
중추원 | ||
26 | 강병순 |
姜柄順 |
친일단체 | ||
27 | 강병옥 |
康明玉 |
관료 | ||
29 | 강병준 |
姜炳駿 |
판검사 | ||
29 | 강보형 |
姜寶馨 |
관료 | 경찰간부 |
30 | 강봉서 |
姜鳳瑞 |
관료 | 경찰간부 | |
31 | 강삼정 |
姜尙渭 |
관료 | ||
32 | 강상위 |
姜尙渭 |
관료 | ||
33 | 강상혁 | 姜尙赫 | 경찰 | ||
34 | 강석우 |
姜錫佑 |
군장교 | ||
35 | 강석진 |
康奭鎭 |
관료 | ||
36 | 강성순 |
姜性淳 |
경찰 | ||
37 | 강성인 |
姜性仁 |
종교 | ||
38 | 강성희 |
姜星熙 |
관료 | ||
39 | 강세진 |
康世鎭 |
관료 |
40 | 강신규 |
姜信奎 |
판검사 | ||
41 | 강신영 |
姜信英 |
관료 | ||
42 | 강신창 |
姜信昌 |
관료 | ||
43 | 강영균 |
康永勻 |
친일단체 | ||
44 | 강영철 |
康永喆 |
판검사 | ||
45 | 강영희 |
姜永希 |
친일단체 | ||
46 | 강완선 |
姜完善 |
판검사 | 전쟁협력 | |
47 | 강용건 | 姜龍乾 | 경찰 | ||
48 | 강원달 |
康元達 |
관료 | ||
49 | 강원수 |
姜元秀 |
관료 |
경찰간부 전쟁협력 |
50 | 강익선 |
姜益錫 |
관료 | ||
51 | 강인우 |
姜麟祐 |
관료 | 경찰간부 | |
52 | 강인원 |
姜仁遠 |
관료 | ||
53 | 강재근 |
姜載根 |
경찰 | ||
54 | 강재원 |
姜在源 |
종교 | ||
55 | 강재호 |
姜在浩 |
군장교 | ||
56 | 강정선 |
康正璿 |
경찰 | ||
57 | 강종무 |
姜琮武 |
관료 | ||
58 | 강준배 |
姜駿培 |
관료 | ||
59 | 강중인 |
姜仲仁 |
판검사 |
60 | 강진수 |
姜振秀 |
관료 | ||
61 | 강진풍 |
姜鎭豊 |
경찰 | ||
62 | 강창인 |
姜昌寅 |
관료 | ||
63 | 강창희 |
姜昌熙 |
관료 | ||
64 | 강철모 |
姜哲模 |
판검사 | ||
65 | 강태원 |
姜泰遠 |
관료 | ||
66 | 강필성 |
姜弼成 |
중추원 |
관료(도지사) 전쟁협력 |
|
67 | 강필우 |
康弼祐 |
군장교 | ||
68 | 강 헌 |
姜 憲 |
경찰 | ||
69 | 강흥대 |
姜鴻大 |
관료 |
70 | 경 훈 | 慶 勳 | 관료 | ||
71 | 계광순 |
桂珖淳 (1909~1990) |
관료(정치인) 경찰간부 |
친일단체 |
평북 선천 출생 |
72 | 계난수 | 桂蘭秀 | 경찰 | ||
73 | 계명수 | 桂明壽 | 판검사 | ||
74 | 계병탁 | 桂炳輅 | 군장교 | ||
75 | 계 순 | 桂 淳 | 관료 | ||
76 | 계용각 | 桂龍珏 | 관료 | ||
77 | 계용권 | 桂龍權 | 관료 | ||
78 | 계응규 |
桂膺奎 |
관료 | ||
79 | 계정식 | 桂貞植 | 문화예술 |
80 | 계찬경 | 桂燦謙 | 관료 | ||
81 | 계창업 | 桂昌嶪 | 판검사 | ||
82 | 계철순 | 桂哲淳 | 판검사 | ||
83 | 고관식 | 高灌植 | 관료 | ||
84 | 고광만 | 高光萬 | 교육학술 | ||
85 | 고기범 | 高起範 | 군장교 | ||
86 | 고덕환 |
高德煥 |
친일단체 | ||
87 | 고병권 |
高秉權 |
관료 | ||
88 | 고양필 |
高良弼 |
군장교 | ||
89 | 고영균 | 高永均 | 군장교 | 친일단체 |
90 | 고영준 |
高永準 |
관료 | ||
91 | 고영희 |
高永喜 |
중추원 | 매국
정미칠적 경술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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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고운하 |
高運河 |
판검사 | ||
93 | 고원식 |
高源植 |
중추원 | 친일단체 | |
94 |
고원훈 창씨명 : 高元勳 고우모토 이세오 |
高元勳 (1881 ~ ?) |
중추원 | 관료(도지사)
전쟁협력, 친일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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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 고윤상 |
高允相 |
경찰 | ||
96 | 고윤수 |
高允洙 |
관료 | ||
97 | 고일청 |
高一淸 |
중추원 | 전쟁협력 | |
98 | 고재열 |
高在悅 |
관료 | ||
99 | 고재호 |
高在鎬 (1913~1991) |
판검사 |
대구지방법원장, 대구고등법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서울변호사협 회장, 대한변호사협 회장을 역임 |
전남 담양 출신
경성제대 졸업 高京錫 (고경석·71)씨 |
100 | 고종익 | 高宗益 | 문화예술 | ||
101 | 고준병 |
高俊峰 |
군장교 | ||
102 | 고준열 |
高俊烈 |
군장교 | ||
103 | 고중덕 |
高重德 |
매국 | ||
104 | 고학진 |
高鶴鎭 |
관료 | ||
105 | 고한규 |
高漢奎 |
종교 | ||
106 | 고한승 |
高漢承 (1902(광무 6)∼1950) |
아동문학가 | 전쟁협력 |
제주(濟州) 경기도 開城(개성) 출신 |
107 | 고호명 | 高互明 | 관료 | ||
108 | 고황경 |
高凰京 (1909∼2000) |
교육학술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
전쟁협력 | |
109 | 고흥겸 |
高興謙 |
매국친일단체 |
110 | 고희경 | 高羲敬 | 중추원 | 매국 | |
111 | 고희승 | 高羲升 | 관료 | ||
112 | 고희준 | 高羲駿
창씨명 高島基 |
관료 |
전쟁협력 친일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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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 공성학 | 孔聖學
1879(고종 16)∼1957 |
종교 |
본관은곡부(曲阜). 개성 출생 | |
114 | 공 탁 | 孔 濯 | 관료 | ||
115 | 곽기종 | 郭基琮 | 종교 | ||
116 | 곽법경 | 郭法鏡 | 종교 | ||
117 | 곽병호 | 郭秉護 | 경찰 | ||
118 | 곽을용 | 郭乙龍 | 경찰 | ||
119 |
곽인호 일본식 이름: 保元麟浩 |
郭麟浩
(1893년 12월 ~ ?) |
관료 |
120 | 곽중원 |
郭鍾元 (1915.5.3경북 고령 ~ 2001.8. 27 서울) |
상명여자고등학교교감,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및 총장직무대리를거쳐 건국대학교 총장 [문화예술] |
1946년 조선청년 문학가협회 결성, 한국문인협회 이사 1941년 일본대학 문과를 졸업 1946년부터 조선청년문학가 협회 결성준비위원,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간부, 한국문인협회 이사, 예술원 회원, 한국문화예술 진흥원 원장, 유네스코 한국본부집행위원, 문화공보부 영화위원등을 역임 1955년~1968년 숙명여대 교수 |
호는 춘파(春波) |
121 | 곽 진 |
郭 瑨 1568년(선조 1)∼ 1633년(인조 11) |
조선 중기의 학자 |
25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 (金誠一)의 초유문 (招諭文)을 읽음. 둘째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화왕산성 (火旺山城)에 들어가 왜적과싸움.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 1605년광릉참봉으로 임명.1618년(광해군 10) 아들 영(瓔)이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주참하자고 상소하였다가 투옥되어 죽자.1621년그 자신이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탄핵하는 상소문을 써올림. 장현광(張顯光)· 이준(李埈)· 정경세(鄭經世) 등과 사우관계를 맺음 |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정보(靜甫) 호는 단곡(丹谷) 아버지는 생원 한(瀚) 어머니는 평해황씨 (平海黃氏) 딸, 참봉언량(彦良) |
122 |
곽진근 일본식 이름 牧野道雄 |
郭塡根 (1897년 전북 김제~ 1941년) |
장로교 목사 |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 부위렴의전도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됨.1924년 만경보통학교, 전주 농업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 졸업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완주의 삼례읍교회, 김제의 금산교회, 원평교회 등에서 시무,1937년 정읍의 신태읍교회, 화호교회,옮김.1938년 화호교회 당회장으로 재직,전북노회에 신사참배결의안을제출, 제27회 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 참배를 결의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신사 참배 결의선언문을 낭독 1939년 전북 노회장으로 선임, 총회 서기직도 연임. 1940년열린 제29회 총회에서는 일약 총회장으로 선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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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 곽한탁 | 郭漢倬 | |||
124 | 곽화태 | 郭化泰 | |||
125 | 구 강 | 具 岡 | |||
126 | 구동욱 | 具東旭 | |||
127 | 구본웅 |
具本雄 (1906년서울∼1953년) |
문화예술 |
기독교계통인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입학. 1923년경서양의새로운 회화방법을 교수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 1928년 더욱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에 들어가 1년간 석고데생으로기초를다짐.1929년 니혼대학 전문부 미학과에 적을 두었으며, 1930년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 들어갈 때까지 미술이론을 수학1933년 다이헤이요미술학교 본과를 졸업1934년 이종우·이병규(李昞圭)· 이마동·공진형(孔鎭衡)·임용련(任用璉)·백남순 (白南舜)·장발(張勃)· 길진섭(吉鎭燮)·김용준 (金瑢俊) 등과 함께 서양화가단체인 목일회(牧日會)를 조직,회원 전을가짐,1935년이마동·김응진 (金應璡) 등과서양화가단체인 백만회(白蠻會)를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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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 구연수 |
具然壽 (? ~ 1925년 5월 6일) |
을미사변 관련자 이며 일제강점기에 경찰간부 |
1895년을미사변 당시 살해된 명성황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서 불태우는 작업을 감독. 사건 후 같은 을미사변 관련자들인 이두황, 우범선 등과 함께 체포령을피해일본으로피신, 히로시마, 교토로 도망쳤다가, 명성황후 시해 주범인 미우라고로등이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오자 도쿄로 이동하여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망명 생활,1906년 한성부에통감부가설치, 대한제국 순종의 즉위로특사가 단행되면서 명성황후 시해범들도 사면,귀국후,통감부 경시, 조선총독부 경무관, 경무국 칙임 사무관에 차례로 임명. 경찰 최고 직급인 경무관에 임명,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 |
송병준의 사위. 아들은 한국은행초대 총재를 지낸 구용서 |
129 | 구연직 |
具然直 일본식 이름: 具道信夫, (1891년7월 9일 ~ 1967년) 충청남도 부여 |
한국의 장로교 목사 |
1891년 충남 부여에서출생 하시어 7세부터 10여년간 수학. 1910년17세부터1922년까지 12년간 교원 생활. 한일병합 조약체결 무렵인근 서천군의 석촌장로교회 만동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기독교에 입문 1920년 기독교에 입교, 27세에세례받음1926년 군산노회전도사가 되어 충남 서천과 보령,부여,전라북도군산,이리 지역에서 전도 활동. 1927년 전도사로 피임되어 전북 노회에서 4년간 시무.1932년충남 노회에서 3년간 시무. 1934년 평양 신학교를졸업부흥사로 전국 각지에 초빙을받아 부흥회를인도.1934년 전북 노회에서목사 안수를 받음.193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전북노회의 황등교회에 부임.1938년11월, 청주제일교회로 부임. 1940년 충북노회장 13년간 역임해방후 시협의원 13년간 역임. 군정 고문관2년간 역임 국민회 도 지부장3년간 역임.1945년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출범 성결교의 이명직과함께 충북교구장.1946년 신설된 충북노회의초대 회장에 피선총 9차례 충북노회장을 역임1949년충북노회승인을 얻어 세광재단을 수립, 세광학교를설립이사장. 1950년 장로교단이 김재준파면 파동을 계기로예장과 기장으로 분열.김재준의 한국 기독교장로회 1953년 세광고등학교를 세우고 재단법인 세광학원의 초대 이사장 1957년 대한기독교 장로회 총회장 역임 20년간 본교회 시무중 그 업적. 헤아릴 수 없으나 그중에도 일본인이교회를 적산으로 취급하고 빼앗으려할때 총독부와 2년간 투쟁하여 교회를 찾아낸 후 300여평이나 되는 지금의 이 건물을 세우기에 고심초사1927년부터 현재까지 31년간 교역에종사 |
능성 구씨 호는 영남(英南) |
130 | 구연춘 | 具然春 | |||
131 | 구자경 |
具滋璟 (1888.5 전남 나주 ~ ?) 일본식 이름: 竹山淸 |
경찰 간부 출신의 일제 강점기 관료 |
대한제국말기인1909년 나주경찰서순사로 시작 경찰계에투신.한일병합 조약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소속의 통역생이 되어 해남경찰서근무. 1915년 경부로 승진. 해남경찰서나주경찰서, 광주경찰서등 전남지역에서경찰로일함.1922년 경시로 승진.전라남도 경찰부의 보안과장과 위생과장을역임.1929년 전남영암군 군수가 되면서 관계로이동이후 장흥군과 순천군 군수 1935년일본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받는등 정6위 훈5등에 서위. 총독부가 펴낸 <조선공로자명감> "두뇌가명석하고사무에 정통"인물평과 함께 수록.1945년태평양전쟁 종전당시 조선인경시는 21명에 불과했을 만큼 조선인으로올라가기 어려운 직급.1949년 생존해 있다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체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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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 구자록 | 具滋祿 | |||
133 | 구자옥 |
具滋玉 (1890년~ 1950년) 일본식 이름: 具家滋玉 |
대한민국의 정치인 |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 신자로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인 유명 인사. 1925년흥업구락부결성. *흥업구락부는경성부와 경기도 지방의기독교계 지도자들인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이갑성,유억겸 등이 이승만 노선에따라 조직.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와 감리교 교회를중심으로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 1927년 이상제 사망. 1938년 발생한 흥업구락부 사건을계기로 전향하여 황도학회에 참여.1944년 <매일신보>에 <필승은 신의명령> 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태평양 전쟁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전쟁지원을촉구하는 등 친일 활동.임전대책 협의회와 경성정동연맹 등 친일단체에도 가담 광복 직후 백남훈, 김도연, 허정, 장덕수 등과 함께 정치 세력을 형성한뒤 우익세력 연합으로 한국민주당을 창당.1950년 미군정 시기.초대 경기도 도지사를 역임.YMCA에서는 증경 총무.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북조선으로 갔다.전쟁 초기 대통령 이승만이 비밀리에 피신할때 도지사와 경찰간부들도 대부분 몸을 피했으나 도지사 가운데 구자옥만이 서울에서 피랍. 북행길에 강계 부근에서 사망 |
서양화가 구본웅의 숙부 |
134 | 구종명 | 具鍾鳴 |
일제강점기 경찰 경무서(警務署) 소속 경찰로 당시 직책이 총순(總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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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 구희서 |
具羲書 (1871년<고종8>∼ 1919년) |
대한제국의 관료,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 |
본적,광주군 서부면
감일리(甘一里, 현재의 하남시감일동)246번지, 본관-능성(綾城) | |
136 | 국순옥 | 鞠淳鈺 | |||
137 | 궁사청 | 弓士淸 | |||
138 | 궁하일 | 弓河一 | |||
139 | 권갑중 | 權甲重 |
140 | 권만주 | 權萬注 | |||
141 | 권병선 | 權丙宣 | |||
142 | 권병수 |
權秉洙 (경인(庚寅) 1830년~ ?) |
자 - 희서(羲瑞) 본관 - 안동(安東) 부- 권종흠(權鍾欠) | ||
143 | 권병필 | 權丙弼 | |||
144 | 권부용 | 權芙蓉 | |||
145 | 권상로 |
權相老 <1879(고종 16)~1965> |
한국 승려·불교학자, 교육계·언론계 등에서 활동 |
1896년(건양 1)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서진(瑞眞)을 은사로 삼아 출가,10년 동안 김룡사 불교전문강원 에서 불교학을 연구,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대교과(大敎科)를 이수, 1906년(광무 10) 경흥학교(慶興學校)와 성의학교(聖義學校) 강사, 1909년(융희 3) 원종(圓宗)의 종무편집부장으로 활동,1912년 조선불교월보사사장에취임, <불교월보>를6년 동안 발행,2월25일'한일 합방'을'일본천황의 성덕'이라 하고, *사찰령의 반포를 '총독의 밝은 정치' 노골적인 친일발언. *전등사 주지 김지순(金之淳)"성은(聖恩)" 으로사법인가 (寺法認可) 라는글에서 사찰령 시행을"천황의 성은"으로각본산법의 인가를'총독의공격으로 치하하는'몰지각하고 반민족적인 발언. <조선불교월보>제10호 발표1923년부터1931년까지 불교사 사장으로 있으면서<불교>를 발간,1931~44년동국 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후학을양성, 1940년국민총력조선 연맹참사,1943년임전의 "조선불교"간행.1953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 1962년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 대한민국문화훈장, 저서<조선불교약사> <조선불교사><삼국 유사역강>등이 있으며, 불교관계 사료를 모아 <고려사불교초론> <한국불교사료> <한국사찰전서> <한국지명연혁고>등을 편찬,1965년 조계종으로부터 대종사의 법계를 받음 |
호는 퇴경(退耕) 아버지-찬영(贊泳) |
146 | 권순구 | 權純九 | |||
147 | 권승록 | 權承祿 | |||
148 | 권영석 | 權寧錫 | |||
149 | 권영세 | 權寧世 |
150 | 권영옥 | 權寧玉 | |||
151 | 권영택 | 權寧澤 | |||
152 | 권영한 | 權寧漢 | 관료 | ||
153 | 권영한 | 權寧漢 | 군장교 | ||
154 | 권오용 | 權五鎔 | 경찰 | ||
155 | 권완주 | 權完周 | |||
156 | 권우섭 | 權友燮 | |||
157 | 권익채 | 權益采 | |||
158 | 권중원 |
權鍾原 (1889년11월 경북예천 ~ ?) |
일제강점기의관료 |
예천초등학교의 전신인 예천읍의 사립융명 학교를 졸업,한일 병합 조약체결후인1913년에 예천군 남읍에서면서기로 임명,조선총독부가 근대적토지제도를확립,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서기를 맡는 등 약4년동안 근무,1918년충청북도 단양군 군서기로 이동,1927년충북제천군 재무주임,1931년고등관 8등에 봉해지면서 충북 음성군 군수로 승진, 1933년 고등관 7등으로승서.1933년기준으로 종7위에 서훈,1935년 총독부가 353명의 조선인 공로자를 선정, <조선공로자명감>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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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 권준상 | 權俊相 | 경찰 |
160 | 권중만 | 權重萬 | |||
161 | 권중명 | 權重明 | |||
162 | 권중수 | 權重洙 | |||
163 | 권중식 |
權重植 <일본식 이름: 山本重夫 또는 山本昇佑> (1892년 7월 경북 달성군 ~ ?) |
일제강점기의 관료, 조선총독부중추원 참의 |
1913년문관보통시험에
합격,1915년조선총독부 군서기에 임용되어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서기로 재직,1921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발령,1926년조선총독부 군수로 승진,전라북도구례군 군수,1929년 도이사관으로 승진 충청남도 산업과장 1932년다시 군수가 되어 평북삭주군에서 근무.1933년 경기도 산업부장에임명.경성부 이사관을 거쳐 일제 강점기말기인1941년에 중추원이 개편될때 참의로 발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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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 권중익 | 權重翼 | |||
165 | 권중철 | 權重喆 |
일제강점기의경찰간부. 공주와 대전 등 충청남도 지역에서 경찰 간부로 근무 |
1923년예산경찰서에서 경부보로 근무.1925년 강경경찰서 경부로승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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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 권중철 | 權重轍 | |||
167 | 권중현 |
權重顯 (1854<충북영동> 음력10월 8일 ~ 1934년 양력 3월19일) |
조선 후기의 관료,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 |
일찍부터 일본어를 익혀서 개화파에 가담하면서 친일개화관료의 길,1883년동래감리서 서기관 발령,이어 일본 주재 서기관 등을 거쳐 1891년인천항방판통상 사무를지냄,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을때 참가.한성부윤, 의정부 참찬,표훈원 부총재등을거쳐1899년 법부대신,1904년러일 전쟁에서 일본군 위문사로 파견.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대수장.1901년 군부대신 임시 서리. 1902년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장 임시 서리.1903년육군법원장에임명.1904년대한제국육군부장.철도원 총재 임시 서리.1905년농상공부대신으로을사 조약에 찬성, 을사오적으로서 오명을 남김, 1907년나철의을사오적 암살단과 강원상의암살 기도에노출.군부대신을 지내면서 의병진압 명령을 내리며 의병 운동을 탄압. 1908년일본정부가내린 훈1등 욱일대수장. 1910년한일병합조약이 체결10월16일일본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받았고,은사공채 5만원을 수령.일제 강점기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과 조선 사편수회의고문.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받고 정5위 서위.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이 서훈.1918년 종4위로 승서 |
초명은 재형(在衡), 호는 경농(經農), 본관은 안동. 아들,권태환 權泰煥, (1876년음력 10월20일~1947년 양력4월14일) 본관은 안동이며 초명은 권창현(權昌鉉) 당시 고미술협회.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 작위 |
168 | 권중형 | 權重衡 | |||
169 | 권중환 |
權重煥 (1891 ~ ?) |
일제 강점기의 관료 경찰간부 |
170 | 권창섭 | 權昌燮 | |||
171 | 권태소 | 權泰韶 | |||
172 | 권태영 | 權泰泳 | |||
173 | 권태용 | 權泰容 | |||
174 | 권태전 |
權泰銓 (1887년 ~ ?) |
대한제국의 관료일제 강점기의 법조인 |
1904년한성부에 있던 관립한성일어학교입학. 1906년졸업.모교의 후신인 관립한성외국어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교사로 근무.1906년 말부터 평리원에서 주사로 근무사법분야에 종사하기 시작.1910년 8월22일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조선총독부소속 판사로 임용.1910년 경성지방법원 판사 이후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판사, 경성 지방법원 예심괘와 해주지방법원 검사등을 지냄.1918년 기준으로 정7위에 서위.해주지방법원 검사를마지막으로 1918년관직에서물러난 뒤 변호사를 개업. 변호사로 일하던 1929년에는경성부에서 집을팔고 계약금을받은 뒤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이유로 고소를 당한 일이 있다 |
본관은 안동 |
175 | 권태한 |
權泰翰 (1871년음력 11월 13일 ~ ?) |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군인. 전보국 주사. 대한제국육군참령/ 일본군 대좌 |
1895년 사관양성소 학도로 선발선발되어 일본에 유학.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8기 특별과정으로 졸업. 1896년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교관 1904년육군무관학교 학도대 중대장에 임명되고 군제의정소 위원. 참령으로 승진.육군 무관학교 교관으로 계속 근무.1907년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군대가 해산.군대 해산 후에도 일본 제국 측은 옛 대한제국군 고급 장교들로 구성된 친위부에 일본육사출신 무관을 배치시켜 완충 역할.친위부에 소속. 1910년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뒤 조선주차군 사령부에서 계속 근무. 1923년일본군보병대좌.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수여 |
본관은 안동 |
176 | 권태형 | 權泰珩 | |||
177 | 권태환 |
權泰煥 (1876년음력 10월 20일~1947년 양력 4월14일) |
일제강점기에 조선귀족 작위.일제 강점기 동안 고위관료및 기업인으로 활동.사회단체 활동 |
1902년부터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후에는 한일항밥 공로자로
인정받아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수여. 한일병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부찬의로 들어갔다가 1921년부터는 참의로 승격.염전 기업인 조선관염판매 사장으로도 근무.1914년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후원을 위해 결성된 경성군인 후원회에 후원금 2원을 지원.권중현의 자작 작위를 물려받을아들로 1914년 이미 인정 받아 종5위에 서위.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해 1915년 개최된 경성물산공진회를 지원하기 위한 경성협찬회 참여.1926년 훈6등 서보장.1927년 소화기념대례장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기록. 1934년권중현 사망 후 습작 |
본관은 안동. 초명은 권창현(權昌鉉)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정치인 권중현의 양자 |
178 | 권한상 | 權漢相 | |||
179 | 권혁병 | 權赫秉 |
180 | 권현섭 | 權賢燮 | |||
181 | 권형선 | 權衡善 | |||
182 | 권형철 | 權瀅哲 | |||
183 | 금낙순 | 琴樂淳 | 의령·합천경찰서 경부 | ||
184 | 길옥련 | 吉玉烈 | 고등계형사 | ||
185 | 길용일 | 吉龍一 | |||
186 | 길원봉 | 吉元鳳 | |||
187 | 길태홍 | 吉泰弘 | |||
188 | 김갑명 | 金甲明 | |||
189 | 김갑수 |
金甲洙 일본식 이름: 金宮允, (1912년 3월 7일 ~ 1995년 1월 26일) |
한국의 법조인이며 정치인 |
1912년경기도안성출생. 1935년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고등 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1937년평양지방법원 판사.1941년평양 복심법원 판사.1945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교수.1949년 6월 ~ 1950년 3월대한민국 법무부 차관.1950년 대한민국 내무부 차관. 1952년동국대학교 법정대학 학장.1953년 6월 ~ 1960년 6월 대한민국의 대법원 대법관. (만 41세) 1960년5월 ~1960년6월 대법원장 직무대리. 1960년 7월~1961년5월 대한민국 제5대 국회 국회의원.1960년변호사 개업.1973년헌법위원회 위원.1974년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장. 1981년 1월 27일 신정당 총재. 1982년 ~ 1985년 신정사회당 의장 |
190 | 김갑순 | 金甲淳 |
중추원, 전쟁협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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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 김 건 |
金 健 (1912년 경성부 ~ ?)본명은 김창기 (金昌基) |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극작가 |
일본에서 연극을공부한 뒤 귀국,1930년대 중반부터 신파극의 작가로 활동.1935년상설극장인 동양극장이개설.극장의 전속 작가로 채용. * 동양극장 전속극단인 호화선과 청춘좌가 공연한 대중 연극의 대본을 썼다. * 연출부에 안종화, 이서향, 한노단, 홍해성 등이포진한 동양극장은 많은 인기. * 동양극장 전속작가인 김태진, 박영호, 박진, 송영, 이서구, 이운방, 임선규 등과 함께 대중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1943년열린 제2회 대회 출품작으로 식량증산을통한 애국을주제로삼은 <신곡제(新穀祭)>를 집필.1945년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관제연극경연대회가 열림.광복 후에 좌파 연극인들이구성한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에가담.막심고리키 원작의<어머니>를 각색해공연,좌익계열에 잠시 몸담음.1946년 극장을설립.운영에실패하여 경제적인어려움을 겪게되면서 상업연극의 극작가로 많은 작품을 쓰며 활동,1950년한국 전쟁 개전 초기에 실종되어 납북,작품으로 조혼 풍습을 풍자한 일본어 단막 희곡<박> 동양극장 전속작가 사절 발표.동양극장의 희극전문 극단인 희극좌가 공연한<쌍동이 행진곡>(1936)광복 후 창작한<눈물의 38선> <섬색시(1935)> <거리의 등불><쌍둥이 행진곡><눈물의38선> <한강물은흐른다> <술이냐?눈물이냐?> 희극성과 대중적인 멜로성이 특징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192 | 김건영 |
金健永 (1909 ~ ?) |
일제 강점기의 평양지역 유지이며 기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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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 김경림 |
金敬林 일본식 이름: 吉原敏吉 |
일제 강점기의 승려 |
경상북도 지역에서 석굴암과분황사,천곡사 주지를역임.1937년 경주군의대본산 기림사 제9대 주지.9월조선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11월에는진산식을거행. 1937년 9월부터1940년 8월까지는 중일 전쟁 기간.진산식 전에 이미 일본군 위문금 50원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통해 납부하는등헌금을 계속1938년4월1일까지 총110원의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기림사 본·말사에서모아일제에 헌납,7월 7일중일전쟁발발1주년,일본군 전사자를 추도를 위한 대법요를 봉행,신도 등 200여명이참석한 행사. 산하말사에서도 법요를 동시에 행하도록 하여 영일군, 경주군,영덕군, 부산의 22개 사찰과 포교소에서 일제히 전몰장병 추도 법요가 봉행.1938년 경북 지역에서 제4회째 실시된 일본불교 시찰단에 포함되어 일본의신사와 사찰을 둘러보며 궁성요배를 행함.이후 계속해서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헌납,1939년 김경림의 지도아래 승려들이 인근 농촌 지역에서 탁발을 하여 모은 금액을 국방헌금으로 낸 일.1940년창씨개명정책에따라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바꾸고 황기2600년을축하하는 국방헌금도 경주경찰서를 통해 헌납.주지 선거에서 최상문에게 밀려 낙선한 뒤 행적을 알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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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 김경배 |
金景培 (1911 ~ ?) |
일제강점기의 관료 | ||
195 | 김경배 |
金莖培 (1885 ~ ?) |
경찰 출신의 일제 강점기 관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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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
김경승 |
金景承 일본식 이름: 金城景承, (1915년 ~ 1992년 2월 16일) |
한국의 조각가 |
유학한 형을 따라 김경승도1934년 도쿄 미술학교에 유학, 유화과에 다니는 김인승과는 달리 조각과에 입학.최초의 조선인,1937년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1943년 추천 작가.총 다섯 점의 인물 조각 작품을 출품. 마지막 작품인<제4반>(1944)이 애국반원인 조선 여성을묘사하는 등 작품전부가 일제의 구미에 맞는 시국성을 띠고 있다는 평가.관변 조직으로 결성된 친일미술인 단체조선미술가 협회에서조각부평의원, 광복후에는 비슷한 경우로 친일혐의가 뚜렷하던 김은호등과 더불어 조선미술건설본부결성 때 제외,형 김인승도 같은 이유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빠짐.1950년대부터 이순신안중근,더글러스 맥아더 등과 현직대통령인 이승만의 동상을 제작하면서 동상 제작 전문가로서활동을재개, 5·16 군사정변이후로는 좀더정부와유착한행보, 수유리의 사월학생혁명기념탑을 건설하여 3·1문화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수많은동상을 제작,불국사의다보탑과 석가탑을 복원하는 일, 이화여자대학교와 홍익대학교교수로,대한민국예술원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으로 활동.제5공화국 때는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은관 문화훈장(1982)을 수상 |
아호는 표천(瓢泉) 경기도 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 친일 화가. 서양화가 김인승이 친형, 김인승과 김경승 형제는 어릴때부터 미술에 재능 |
197 | 김경신 | 金慶愼 | |||
198 | 김경재 |
金景哉 (1899~?) 적성(赤星)· 김광우 (金光宇)· 가네자와 히데오 金澤秀雄 |
1899년황해도황주출생. 황주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수원농림학교 (서울대학교농과대학의 전신)를졸업.1920년6월 황주신흥청년회를 결성하고회장,1922년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기자. 1923년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후 석방. 이후 사회주의 운동을 벌여 화요회(火曜會)와 북풍회(北風會)의 간부가되는한편,최남선(崔南善)이 창간한 <시대일보>와 월간지 <개벽>에 사회문제에 관한 글도 발표.1925년 12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1926년 조선공산당에입당.6월제2차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2년6개월을 선고,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사회주의 운동가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화요회와북풍회의 간부로도 활약.,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 후 검거 복역하고 난 후, 친일파로 변절.1927년 5월 신병으로 보석을 신청하였으나 기각, 1929년 8월 출감 후 사회주의 운동의 일선에서물러나 사회운동에 관한글을발표,1940년대 초기에 가네자와히데오[金澤秀雄]라고 창씨 개명,상하이로 건너가 친일신문상해시보 上海時報사장을 지내는 등 친일파로 변절 |
황해도 황주 사회주의 운동 | |
199 | 김경주 |
金敬注 일본식 이름: 金山敬注, (1896년~ ?) |
한국의 불교 승려 |
경상남도 동래군 출신, 1908년동래범어사에서 출가하여불교승려가됨. 범어사재적중 경성부에 유학,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당시 범어사 주지인 김용곡의법맥을 상속받고 일본 도쿄의 도요 대학 철학과진학, 1921년여름에도쿄조선 불교청년회 전선순강단이 여름방학을이용하여 경남지역에서 순회강연을하다가 경남경찰부에 불온사상 선전 혐의로 적발된사건,도요 대학 재학 중이던 김경주도 전선순강단의 일원으로 "종교와 문화적 사명" 등의강연,김경주는공산주의사상을 소개했다는 혐의를 받았고,1심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 1923년도요대학을졸업. 귀국하여 범어사 명정학교 교장에 취임,불교 교리의 새로운 해석과 전파에노력,1931년중앙불교전문학교강사로 채용, 1934년 이학교의 학감에 취임,학감은 부교장 또는 부학장에해당, 조선총독부가 불교와 유교계열을 동원해 심전개발 운동이라는 관제 황민화 운동,경성방송국의 라디오프로그램에출연. <매일신보>에석가모니나 불경과 심전개발을 관련짓는 강의,1937년 중일전쟁,전쟁에협력한행적,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8월 5일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서울의 개운사에서황군 무운장구 장병안태 기원제라는행사를개최, 시국강연회를열었을때, 김경주는"나라를위하여 몸을돌보지 않는다 (?國不?身)"이라는 제목의강연.1938년 신년초에는<불교시보>를통해<시국인식과 거국 일치의 신념> 이라는 제목으로 시사문을 발표 |
속성은 김해 김씨. 법명은 영담(瑛潭). |
200 | 김경진 |
金慶鎭 (일본식 이름: 金子慶鎭 또는 金子典幹, 1893년 ~ ?) |
일제 강점기의경상남도지역 유지이며 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 주요 임무는 보국정신 보급과총후생활의개선. 지원병제도와같은 전시총동원체제를선전하고, 국방헌금이나 일본군 위문을 장려하는 일. 전시체제 하에서 각 지역의 갑부 등 전쟁 지원에 가담할수있는 인물 |
중국에유학해 북경협화대학교를다니다가 중퇴하고 고향에서면서기로 근무.1923년부터김해면 면장을 5년 동안 지낸것을 시작으로 차츰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지로 떠올림.형평사 김해분사가설립.김해와 창원 지역에서장기간에 걸쳐 경상남도 평의회 의원,경상남도도협의회 의원을지냈고,경남도회 부의장까지역임.김해의 유력자로활동할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전시체제가 수립.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전국적으로펼쳐진 순회시국강연회에 경남대표로 참가해 전쟁 지원을역설.193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종으로 박희도와 박춘금 등이 결성한 조선보국회에 핵심 발기인으로 참여. 1940년에는 경남도 의원들과함께 상하이를 직접 방문해 일본군을 위문.중추원에김경진도 참의로 임명.1941년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김경진은"2400만 전 민중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적성(赤誠)의 헌금을 다하여 대헌납운동을추진"해야한다고 주장.태평양 전쟁 종전 때까지 순회강연을통한 징병제 선전에참가하고 애국기헌납운동을주도, 중추원 참의로 임명. 사회교화 시설을 강화해야한다고주장,징병제 실시가 "큰 기쁨이요, 감격할 일"인 동시에 반드시 동참해야할 중대한 임무라면서 참전을종용한 강연회의 발언,1944년 총독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음. 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처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특별검찰부로 송치 되었으나, 반민특위의 활동이조직적인 방해를 받아 결국 해체되면서 처벌을 받지 않음 |
경남 김해의 진영읍 출신 |
201 | 김경태 |
金慶泰 (1889년 - ?) |
일제 강점기의 관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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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 김경호 | 金卿鎬 |
대한제국 말기에일진회 회원.일제 강점기에 만주보민회에서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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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 김경희 | 金暻羲 |
일제 강점기의 관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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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 김계현 | 金啓賢 | |||
205 | 김 관 |
金 管 출생일 불명, 1903년 경기도 개성 사망일 불명 1950년 일본식 이름: 金澤竹一郞 -신설령은 <중앙신문>당시 기사와 동향 출신 인사들과의인터뷰를 근거로 1909년또는1910년 개성에서태어나1945년말에서1946년초사이에 30대중반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보고있다 |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음악평론가. <동아의 신정세와 음악문화의재출발>(1940), <국가의 신체제와 신음악의 건설>(1940), <음악획기의 년>(1940), <국민·문화·음악>(1941) |
송도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 니혼 대학에서 수학 하여, 지역 명문고와 경성부의 전문학교, 일본 유학을 거치는 당시의일반적인 엘리트 코스,귀국한 뒤 음악 평론가로활동하며 잡지 <음악평론>을발행, 초기에는 카프 계열의 경향파음악운동에동참, 1933년<외국음악의 소화와 조선음악의 창조>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전쟁시국과관련된 친일 음악평론,<매일 신보>에발표.서울 명동에서다방에리사를운영, -'엘리사'로도 불리는 이 다방은 일종의 음악 다방으로, 당시 서울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드는 장소,1930년부터 1941년까지왕성하게 발표한 평론글로음악적 자취는 남겼지만 생몰 연대조차 분명치 않을 만큼 개인사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본명은 김복원 (金福源) 김관은 필명 |
206 | 김관국 | 金觀國 | |||
207 | 김관수 |
金寬洙 (일본식 이름: 岸本寬, 1908년 ~ ?) |
한국의 연극인 |
1934년조선극장에서 황금좌가 공연한 <세방 든 여자>를연출. 일제 강점기 동안 상업 연극계의 중심 역할. 동양극장에서 근무. 조선총독부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여러 극단및 연극관련단체를 가맹시켜 조직한 단체 조선연극협회에서 상무이사,단체는 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연극 공연을통제국민연극'을 공연하여 친일 사상을 전파하는 일을담당, 1941년 일종의 근로 봉사단인 문화인 성추부대에 조선연극협회 대표로 참가한기록, 연극계에서함께 참가한 사람은 유치진, 박진, 이서구, 김태윤 등 |
첼리스트 김인수의 동생 |
208 | 김관식 |
金觀植 |
목사(장로교)일제 말.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형성 |
1938년9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던 한국 장로교 총회가 강압적 분위기아래에서 신사참배를결의,1938년 9월9일부터 16일까지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제27차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개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이하 ‘조선교단’)은1945년7월 19일창립된 한국의 교파합동 단일교회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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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 김관현 |
金寬鉉 일본식 이름: 金光副臣, (1877년?~ ?) |
대한제국의 무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의 관료,총독부가 1935년편찬한<조선공로자 명감>에 일제의 통치에 공을 세운 조선인353명 중 한명으로 수록,"항상 대국(大局)을 달관하여 일본과 조선의 융화 공영에 진력한 바가 두터웠으며,그의 공(功)과 노고는 다대하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라는 평가가 실려 있다 |
1894년일본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의숙에서 수학,일본육군사관학교입학,보병장교로교육을 받음.1900년 일본육사 제11기생으로 졸업, (노백린,어담,윤치성 등)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한 뒤, 육군 도야마 학교에서 수학하던중 만주로 발령을 받아 보병 정위로 러일 전쟁에참전,공을세우고 일제로부터 종군기장과 전공금1천5백원을받음, 1905년유길준등과함께 역모혐의를 받았으나 곧 풀려남.석방 후 대한제국군대의 장교로 일하고,내부의참서관과 서기관, 광제원장, 내부 회계국장, 위생과장, 남양군 군수 등의 행정 관료직,1910년한일병합 조약이 체결,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장악하자 경기도 수원군 군수에 임명,이후 도 참여관과 지사,친일 관료로서 활동,1917년 함경남도 참여관을 시작,1918년 전라남도참여관,1921년 충청남도 지사,1924년 함경남도 지사,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서훈 받는 등 공로를인정받음,1926년 퇴관과 동시에중추원의 칙임참의,관직에서 물러남,이후로는토지의 개량을통한 산미증식을 추진하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고문으로근무, 1934년부터는 조선 총독부중추원의참의직, 1937년중추원에서 조직한 화북장병위문대에 가담하여장직상등과 함께 중국전선의일본군 위문,1945년까지 여러차례 참의직을 중임 |
경기도 또는 충청남도 연산군 출신 |
210 | 김관호 |
金關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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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 김광근 |
金光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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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 김광엽 |
金光燁 <1561(명종16)~1610(광해군 2)> 상주(尙州)출신 |
임꺽정의 난을 평정한 할아버지 순고(舜皐)한테서 글을배움.<귀허집歸虛集,1582>40여권을 저술,<국조 문과 방목>
김광엽(金光燁)선조 (宣祖)23년(1590년), 증광시(增廣試) 을과4(乙科4), |
1589년(선조22) 서울,상주 등지에서 공부를 하다가하리쇠실로옮겨, 1590년(선조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 (乙科)로 급제,승문원(承文院)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된 후 승정원 (承政院)의주서(注書)를 지내고 청환직(淸宦職) 만을 15, 6년간 역임, 풍기(豊基)의 우곡서원 (愚谷書院)에제향(祭享) |
하리면 금곡리 쇠실 (金谷)마을.조선의문신. 자는 이회(而晦), 호는 죽일(竹日),본관은순천. 좌의정 승주(承?)의 6세손,침(琛)의 아들, - 인적사항 - * 생년(生年) 1561년,신유 *자(字):이회(而晦) *호(號) 본관(本貫)순천(順天)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諡號, 封號 - 가족사항 - *부(父):김침(金琛) *생부(生父)*조부(祖父) 김용(金墉) *증조부(曾祖父) *김수징(金粹澄) *외조부(外祖父) *원수장(元壽長) *처부(妻父) *이인수(李仁壽) - 이력 및 기타 - *소과(小科)1590(경인) 생원시/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병절교위(秉節校尉)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좌랑& (吏曹/佐郞&), 홍문관/정자$ (弘文館/正字$) |
213 | 김광일 |
金光一 (1891년 - ?) |
일제 강점기의 관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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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 김광현 |
金廣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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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 김광호 |
金光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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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 김교명 |
金敎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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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 김교성 |
金敎聲 (1904년 8월 5일 ~ 1961년 2월 2일) |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장르 트로트, 신민요활동시기 1932년 ~ 1950년대 |
한성부에서 광산업을 하던 가정에서 출생.
어릴때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합창단과성극을 접하면서 음악에 관심을갖게되었다.중동학교에 다니던 학창 시절 독학으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기 시작,편곡에도 재능을 보인것으로 알려짐, 초년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알려짐,1930년 배우이자가수인나품심, 결혼했다가 이혼,정식으로 작곡가로 데뷔, 1932년빅타레코드에서 강석연이 부른<영객>, <서울행진곡>발표, 이후 이애리수의<처녀 행진곡>강홍식의<삼수갑산>선우일선의<능수버들>최고의 히트작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백난아가부른<찔레꽃>이다. 고향을 그리는 가사 내용은 매우 애틋하지만 곡조와 창법이 포근하고 따뜻한느낌을 주는 곡으로, "한국인이 언제어디서나 가장즐겨 부르는민족의노래"라는평이있을 만큼 오래 사랑받았다.태평양전쟁종전 후<울고넘는 박달재>와<자명고 사랑>195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하면서 인기를유지,태평레코드시절콩쿠르의심사위원을 맡으며 백난아와 태성호를 발굴했고, 박재홍과 박경원도 김교성에게 발탁되어 가수가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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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 김교억 |
金敎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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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 김교익 |
金敎翊 |
220 | 김교철 |
金敎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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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 김교필 |
金敎弼 <1867(고종 4) -1944 > |
1894년(고종 31) 갑오혁신(甲午革新)에 가담하여 활약 1910년 (융희4)일본에게국권을 강탈당하자, 숙부 김영원이조직한 성문회(聖門會)에 가담, '성문회'의 조직위원 으로 많은 동지를 규합하며,<운무지(雲霧誌)>를 발간,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함,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 때에는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3월 15일 봉통산(蜂桶山)3월18일선순봉(仙筍峯)봉화를 올림. 1939년 천도교 구파의 독립운동 모의에 가담, 체포되어 옥고 |
경주(慶州)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운암면(雲岩面) 화암리(化菴里) 출신, 자는 만산(萬山) 호는 화암(化菴) 부친 김학원(金學遠) 김덕원(金德遠) | |
222 | 김구연 |
金龜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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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 김구하 |
金九河 (1872년 양력 5월 7일 ~ 1965년 양력10월3일) |
한국의 승려구하는 법호이며, 법명은 천보(天輔),경남 양산의 통도사에서 동승생활을 하다가 1884년13세때 양산 천성산내원사에서 출가하여 승려 |
1910년한일병합조약이 체결,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내림.30대본산 중 1등지인 통도사의 초대주지,조선시대동안 탄압 받았던 불교계는 불교에 우호적인 듯한 일제의총독정치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임,주요 사찰주지들이 조선총독관저를 여러차례 방문하여 교분을 나눔,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가까이 지냄,1916년 데라우치가 식민통치를 잘 수행한 공으로 원수 칭호를 받았을 때 승려 수백명을동원해 축하식을 거행,1917년불교계 수장격인 삼십본산연합 사무소 제3대 위원장 으로 선출,<조선불교 총보>에 글을발표,총독 정치 이후 조선승려는 국가의 은총을 입어 종교인의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는 주장,8월부터는 일본불교시찰단 단장.약 3주간 일본 각지를여행,일본수상은 초대 조선총독을역임한 데라우치,메이지천황의 묘를참배"천황의권속인 우리들"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축문을읽었다. 여행을마친뒤에는 일본에서 천황의 행차를 목격한 일을 적은<천은(天恩)이막대>라는글을 <매일신보>에 기고, 3·1운동 직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대한승려 연합회 선언서>라는 불교 승려들의 문건에 김취산이라는 가명으로 서명을 한일이있어 행적에 대한 평가, 통도사의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했다는 주장과 함께 유흥비로 탕진했다는 설,통도사 주지직을 다섯 차례나 연임,삼십본산 연합 사무소 위원장도 2년간 연임, 1925년 통도사 주지직에서 불명예퇴진,이후 10여년이 지난 1937년 31대본산주지회의에서 총본산 건설고문4명 중 한 명으로 선정,1939년 중일전쟁하의 전시 체제 속에서 경남3본산종무협회 고문,1941년 총본산 태고사 (현 조계사) 종무 고문 추대,일본군 위문 등의 전쟁협력 행위에 가담, 대한민국 정부수립후인 1949년에도 조선 불교 제3대 총무원장에취임, 1965년 94세로 사망. |
경상남도 울주군출생, 갓난아기때 절에버려진 아이였다는 설, 자호는 취산(鷲山) |
224 | 김구현 |
金龜鉉 (1867 ~ ?) |
대한민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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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 김귀배 |
金龜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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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 김귀순 |
金龜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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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 김귀열 |
金龜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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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 김규대 |
金圭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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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 김규목 |
金圭牧 |
230 | 김규승 |
金奎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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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 김규연 |
金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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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 김규주 |
金奎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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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 김규창 |
金奎昌 |
대한제국 말기에 일진회 회원 |
1904년송병준과이용구가 결성한 친일단체 일진회의평의원,일본은 일진회 출신들을관료로 중용,1905년 경기도 파주군 군수에 임명, 1907년전라남도관찰사, 전남 관찰사로 근무 하면서의병운동을탄압, 일진회의 총대위원, 총무원 등으로한일병합 조약 체결을 위한 합방청원운동에 참가,한일병합 직전에는 합방이 성사되면 내각을일진회 회원,<황성신문>보도, 이용구가 천도교내부의 민족주의세력과 갈등을 일으켜 출교당한 끝에 창설한 시천교에서 1911년 봉교(奉敎)를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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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 김규태 |
金奎泰 (1902~1966) |
조선 후기의 학자. 서예가,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저술활동, 주요작품<고당집> 서학(西學) 등 ‘이단(異端)’을 배척, 성리학적 정통을 수립 |
전남 구례 출생 본관 - 서흥,호 - 고당 정기(鄭琦)의 문인.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그의 세계관은 저술에 강하게 반영,자녀 9남 1녀 중 7남인 창동이 서예가로 활동. | |
235 | 김규현 |
金圭鉉 을유(乙酉) 1825년 |
한량(閑良) |
본관 - 김해(金海) 거주지- 철원(鐵原) 父-김장손(金長孫) 관직 - 출신(出身) | |
236 | 김규호 |
金奎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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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 김극일 |
金極一 (1890년4월9일~ ?) |
일제 강점기의 경찰 출신 관료 |
안창호가 세운 평양의 대성중학교를1909년에 졸업,고향에 돌아가 교원으로근무한지식인, 한일병합 조약체결 직전인1910년2월 평북신의주경찰서순사, 한일합방과 함께 조선총독부 소속의 순사로 소속이 바뀜,1912년 순사 신분으로 한국 병합기념장 받음, 1914년 조선판임문관 시험에 합격,1916년 경부로승진,1917년부터 3년간 신의주경찰서 에서 경부로 근무, 3·1운동을 전후한 이시기에 신의주지역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드나들던 지역,1920년 대한독립단의 장지흥을 속여서 암살한뒤 시신은압록강 얼음물속에 던져버리는 등, 독립운동가 체포와 살해에많은공을세웠다. 신민회 출신의 홍성익이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가짜 편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기관원 여러명을 더 유인해 모두 체포, 홍성익은 결국검거직후 신의주형무소에서옥사.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김극일이 극악하고 치가 떨리는 인물,1921년평북경찰서와 의주경찰서 경부로 잠시 발령,경남순사교습소장 겸 경남경찰부 고등과및 보안과경시로 승진,1927년까지 부산경찰서와 경남경찰부, 강원도경찰부 보안과 경시,16년간의 경찰 생활을 마치고, 강원도 김화군 군수로발령받아 관료로 전직,1928년 양양군 군수,1930년 인제군 군수,훈6등 서보장 받음,1931년 정6위에 서위되고퇴관, 1945년광복 후 발간된 《반민자죄상기》라는 책에는 "3·1 운동 당시 수많은 애국자를 살상" 한 악의 화신,1949년 "왜경의 원로"로서 반민특위에 체포, 반민특위 활동무산으로 처벌받지는 않음 |
본적지 평안북도 의주군 |
238 | 김근식 |
金根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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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 김기득 |
金箕得 |
240 | 김기범 |
金基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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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 김기선 |
金基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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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 김기수 |
金基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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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 김기수 |
金琪洙 (1917. 11.12 서울~1986. 10.21 서울) |
국악인·작곡가·교육자 |
경성농업학교에 입학,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포기하던 중 이왕직아악부에서 국비로학생을 모집,15세에국악의길에 들어섰다.대금을 전공한 후, 이왕직에 근무, 아악(雅樂)을 오선보로 채보하기 시작,1939년 12월 이왕직 공모 선곡, <황화만년지곡 皇化萬年之曲>이 당선,신국악 창작을시작,태평양전쟁 1942년 12월 만주로 도피해 동광국민 우급학교를 세움,1945년 금강귀국단 부단장으로 귀국,상명여고에서잠시 교편을 잡다가 1950년 구왕궁아악부에 들어가 다시국악과인연을맺음, 1955년부터 국악사양성소에서 후진양성, 1958년문교부전문위원, <한국민요50곡집>과 국악관계서적을 출판, 1962년 국립국악원 악사장겸 국악사양성소 부소장으로임명,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종묘제례악기·예능 보유자로 지정,1971년 처용무 예능보유자로 지정,1973년 국립국악원장에 취임,1977년 퇴임과 동시에국립국악 고등학교장에 취임, 1983년 정년퇴임 후 국립국악원 원로로 있다가 사망 |
호는 대마루[竹軒]. 김영제와 전주이씨의 셋째 아들 |
244 | 김기영 |
金璣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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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 김기완 |
金基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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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 김기원 |
金基元 (1878년양력11월9일 ~ 1934년 양력7월14일)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군인,대한민국 공군의 초대 참모총장,대한제국육군참령/일본군 중좌,복무기간, 1903년 ~ 1920년대 |
21세이던 1898년에 일본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15기로 졸업,일본 육사를졸업한 이듬해에 러일 전쟁이 발발,근위 보병대에서 견습사관 으로 복무,육군 보병 참위로러일전쟁에참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대한제국 무관으로 복무,일본 정부는 군대 해산 전인1906년에 김기원에게 훈5등 서보장을 수여, 1907년대한제국 군대 해산 때까지 육군 공병 참령과 시위공병대장 등을 역임,1908년에는 러일 전쟁 때 정찰 활동 등에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훈5등 쌍광욱일장과함께 은사금 350원을 하사,1910년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공병 참령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 소속,한일 병합 후인 1912년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1920년 훈4등 서보장,1922년공병 중좌로 승진,은퇴한 뒤에는 만주사변직후인 1931년에 조성근이 주도해 설립,만몽재주동포협의회 평의원을 지낸기록,운현궁의농장 관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
본적지는 한성부 개화파 관료의아들 동생 김준원 조카 김정렬 |
247 | 김기준 |
金基俊 <계축(癸丑) 1853년 ~ ? > |
[생원진사시]고종(高宗) 25년 (18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生員) 3등(三等) 175위 |
광산(光山) 자 - 응삼(應三) 거주지 순흥(順興) | |
248 | 김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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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鎭 <일본식 이름 金村八峯, 1903년 6월 29일 ~ 1985년5월 8일> |
한국의문학평론가,시인이자 소설가,<백조> 동인으로시<애련모사>(1923)를 발표등단, 파스큘라와 카프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경향파 시와 소설,수필등을 활발히 창작,대표 평론으로는〈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문예사상과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 <붉은 쥐>(1924), <젊은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일제 강점기 말기친일 행적, 1940년부터1945년까지 <매일신보>,<조광> <신시대>를 통해 친일저작물도 발표,<님의 부르심을 받들고(1943) 등 총 친일 작품 수는 17편,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대표적인 반공주의문인으로 활동, .<경향신문> 주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와 한국문인협회등에서 고문 |
배재고등보통학교졸업,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 대학영문학부에서수학, 박승희, 이서구와 함께 토월회를조직하여활동,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매일신보,시대일보> <중외일보>등에서 기자로 근무,1923년 배재고보동창인 박영희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조직,파스큘라가 1925년카프로 발전 하면서 박영희와더불어 카프의 지도자 역할, 1936년<청년김옥균>을 발표,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결성위원으로 참석, 1944년열린 제3회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 조선문인부국회와 조선언론보국회에도 가담 하여 박영희와 함께 카프의 지도자에서 친일 문학계의 중추로 변신,광복후에는출판사인 애지사를 설립해 경영,<통일천하>(1954~1955),<군웅》(1955~1956),<초한지>(1984) 등 역사소설을 많이 발표,한국전쟁때 서울이 조선인민군에 점령되자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된뒤 즉석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김, 대한민국 육군의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참전,5·16군사정변직후 관제 조직인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 1978년대한민국예술원 회원,사망 후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전7권의 <김팔봉문학전집>발간 |
호, 팔봉(八峰)이라 김팔봉 형 - 조각가 김복진 출생지 충청북도 청원군 |
249 | 김기천 |
金基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