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자마이카)에서는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 1887~1940) 이전부터 '라스타파리 운동'(Rastafari movement:=라스타파라이)의 탄생에 비옥한 토양이 될만한 두 가지 주요한 환경이 존재했다. 하나는 [북미, 중미, 남미 등에서 도망친 노예 출신들인] 마룬 족(Maroons)으로 대표되는 저항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워드주의(Bedwardism: 정식명칭-'자메이카 원주민 침례 자유교회'[Jamaica Native Baptist Free Church]) 같은 종교운동들의 보급과 함께 퍼져나간 아프리카 중심주의(Afrocentrism 혹은 Afrocentricity) 성향의 에티오피아(Ethiopia)적 세계관이 형성된 일이다. '베드워드주의'는 1890년대~1920년대 사이에 번성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훗날 밥 말리(Bob Marley: 1945~1981)가 "체제에 대한 저항"(resisting against the system)이라고 부르게 될 전통을 오랜 기간 지속시켰다.
4.2. 마커스 가비와 라스타파리 운동
* 이 부분의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 항목을 참조하라. [☞ '한국어판 항목']
[자메이카의 정치인이자 언론인]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 1887~1940, 우측사진)의 사상은 '라스타파리 운동'의 근본적인 틀을 형성시켰다. 라스타(Rasta:=라스타파리 신봉자)들은 그를 예언자(선지자)로 여기며, 초창기 라스타들 중 많은 이들이 가비주의(Garveyism 혹은 Garveyites) 활동부터 시작했던 이들이다.
종종 그를 재림한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가 제시했다는 유명한 예언들 중에는 [에티오피아 황제이자 '라스타파리 운동'에서 하느님(=자[Jah])으로 여기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Haile Selassie I: 1892~1975)의 즉위(1930년)를 1927년에 선언해뒀다는 것도 포함된다. 가비의 측근 중 한명인 제임스 모리스 웹(James Morris Webb)이 이미 1921년부터 대중 연설에서 유사한 발언을 했다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가비는 1927년에 "아프리카를 보라. 그곳에서 흑인 왕이 즉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커스 가비는 흑인 민족주의(Black Nationalism: BN), 흑인 분리주의(black separatism), 범-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를 표방했다. 이 신념은 모든 흑인들이 형제애로 동참하여 당시까지도 여전히 유럽 열강들의 치하에 놓여 있던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20년대~1930년대 사이에 '흑인의 긍지'를 주창했고, 이 운동은 자메이카의 하층 흑인들과 농촌 사회를 중심으로 특별한 성공을 거뒀다.
그의 사상은 라스타파리 운동의 문화가 발전하는 데 대단한 영향을 주었지만, 가비 자신은 '라스타파리 운동'과의 일체감을 단 한번도 표시한 적이 없다. 오히려 파시스트 정권의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그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에티오피아를 탈출했던 일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까지 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흑인들이 족쇄를 차고 태형을 당하는 국가의 통치자이다. 그는 자국을 달아난 대단한 겁장이라고 역사에 기록돼야만 할 것이다.(주63)
게다가 마커스 가비가 이끌던 만국 흑인 진보연합(=세계 흑인지위 향상 협회)(Universal Negro Improvement Association: UNIA)은 [라스타파리 운동 최초의 정도사들 중 한명인] 레너드 하웰(Leonard P. Howell: 1898~1981)이 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구세주(=메시아, the Messiah)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타파리 운동'은 '가비주의'의 연상선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스타파리 초창기의 전승에서는, 자신들을 고향인 아프리카로 데려다줄 존재가 바로 '블랙 스타 라인'(Black Star Line)이었다. 실제로 '블랙 스타 라인'은 [가비가 흑인들의 본향이라고 여겼던] 라이베리아(Liberia)로 흑인들을 귀환시키기 위해 가비가 설립했던 해운회사이다.
(주63) E. David Cronon, Black Moses,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Madison, (1955) 1966, p.162.
4.3. 여타 초창기의 문헌적 토대들
엄밀하게 "라스타파리" 문헌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1920년대에 [서인도 제도(West Indies)의 영국령] 앵귈라(Anguilla, 앙귈라)의 로버트 아틀리 로저스(Robert Athlyi Rogers)가 저술한 <성스러운 피비>(Holy Piby)에 대해, 많은 라스타들은 이 경전이 자신들의 형성에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자료라고 주장한다.
로버트 아틀리 로저스는 1920년대 미국 및 서인도 제도에 '아프리카 중심주의'를 표방하는 '아틀리주의'(Athlicanism: 정식명칭-'Afro-Athlican Constructive Gaathly')라는 종교를 창립했다. 로저스의 종교운동은 '에티오피아인들'(성서적 의미로는 '모든 흑인 아프리카인'을 가리킴)을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여겼고, 저명한 흑인 민족주의자 마커스 가비를 '사도'(apostle, 使徒)로 보았다. 이 교회는 아프리카인들의 자존과 자결을 설교했다.
1920년대에 피츠 밸린타인 피터스버그(Fitz Balintine Pettersburg)라는 전도사가 저술한 <흑인 지상주의에 관한 제왕의 양피지 두루마리 문서>(Royal Parchment Scroll of Black Supremacy)는 의식의 흐름에 따른 기법을 이용하여 백인 식민주의 권력구조에 대한 초현실적 비판을 가한 책이다. 이 책 역시 아프리카 중심주의적 사고관 형성에 기반을 제공한 팰럼시스트(palimpsest)로 여겨지고 있다.
1930년대 초, 레너드 하웰이 '지지 마라그'(G.G. Maragh: '공 구루'[Gong Guru: 저명한 지혜의 스승])라는 힌두교적 필명으로 저술한 <약속의 열쇠>(The Promise Key)는 참다운 라스타파리 문헌으로 간주될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이다. 하웰은 이 책에서 자신이 1930년 11월 2일 에티오피아의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에서 거행된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및 그의 부인 메넨 아스파우(Menen Asfaw: 1891~1961) 황후의 대관식에 참석했었다고 주장하면서, 라스 타파리 공(=하일레 셀라시에 1세)은 '피조물들의 참다운 수장'이며 '영국 국왕은 가짜 왕'이라고 선언했다. 이 소책자는 하웰이 폭동 선동 혐의로 감옥에 수감돼 있는 기간 중에 저술됐다.
4.4. 라스타파리 운동의 출현
하일레 셀라시에 1세(위의 사진)는 1930년 11월 2일 아디스 아바바에서 거행된 대관식에서 "왕들 중의 왕"(King of Kings), "하느님의 선택받은 자"(Elect of God), "유다의 종족을 정복하는 사자"(Conquering Lion of the Tribe of Judah)라는 존호를 추존받았다. 이 대관식은 자메이카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특히 <타임>(Time) 지는 이 대관식에 관해 2차례의 연속 기사를 실었고, 1935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로 선정하여, 그를 이 부문에 등재된 사상 최초의 흑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내셔날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역시 같은 기간 중에 2편의 연속 기사를 실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신'(God: 하느님)인 동시에 '왕'(King)으로서 자메이카의 빈곤층 사이에서 금새 지지자들을 획득했다. 그들이 바로 라스타파리안(Rastafarian)이라 불리게 됐고, 자신들의 성경들에 기대를 걸면서 <요한계시록>(Book of Revelation)의 많은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라 믿었다. [미국계 이민자들(주로 해방 노예들)이 정권을 잡고 독립을 선언한] 라이베리아를 제외하고는 에티오피아만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식민통치를 받지 않은 독립국이었고, 유럽의 국왕들이나 여왕들이 유일하게 인정했던 아프리카 지도자가 바로 하일레 셀라시에 1세였기 때문에, 초창기의 라스타들은 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대단히 숭배했다.
대관식 이후 2년 동안, 대관식 당시 모두 해외에 체류했던 자메이카인 3인이 각각 귀국하여 각기 독자적으로 거리의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새롭게 즉위한 에티오피아 황제가 재림한 그리스도(=예수)이며 신성을 갖고 있다고 선언했다.(주64) 그것은 성경의 예언에 대한 그들의 독자적인 해석에서 나온 주장으로서, 부분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완전한 독립국가 군주이자 "왕 중의 왕"이자 "정복하는 유다의 사자"(Conquering Lion of Judah)(요한계시록 제5장 5절)라는 칭호를 지닌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위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먼저, 1930년 12월 8일 전직 선원이었던 아치발드 던클리(Archibald Dunkley)가 포트 안토니오(Port Antonio)에 상륙하여 곧장 자신의 목회를 시작했다. 1933년, 그는 수도 킹스턴(Kingston)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 '왕 중의 왕 에티오피아 전도회'(King of Kings Ethiopian Mission)를 설립했다. 1931년에는 조셉 히버트(Joseph Hibbert: 1894~1986)가 코스타리카(Costa Rica)에서 귀국하여, 세인트 앤드류 관구(Saint Andrew Parish)의 베노아 군(Benoah district)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교단 '에티오피아 콥트 신앙'(Ethiopian Coptic Faith)을 조직한 후,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신성에 관한 자신의 확신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히버트 역시 이듬해에는 킹스턴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것은 유사한 시기에 귀국해 이미 많은 부분 동일한 교리들을 가르치고 있던 레너드 하웰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3번째 전도사인 로버트 힌즈(Robert Hinds)는 과거엔 베드워드주의자였고, 이 무렵에는 가비주의자가 돼 있었다. 이들 3인 및 레너드 하웰을 포함한 전도사 4인방은 얼마 안 있어 자메이카의 빈곤층 민중들 사이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러한 빈곤층들은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정신적 지원을 기대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주64) Leonard E. Barrett, The Rastafarians, pp.81~82.
4.5. 레너드 하웰
* 이 부분의 보다 상세한 내용은 '레너드 하웰'(Leonard Howell) 항목을 참조하라.
레너드 하웰(Leonard Percival Howell: 1898~1981, 우측사진)은 "최초의 라스타"(First Rasta)로 불리며,(주65) 라스타들 가운데 최초로 박해받은 인물이기도 하다(총 50회 이상 체포됨). 그는 대영제국의 국왕 조지 5세(George V)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여, 폭동 교사 혐의로 기소됐다.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에서 하일레 셀라시에 1세에 대한 충성심이 자라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하웰은 1939년 자메이카의 세인트 캐더린 관구(Saint Catherine Parish)에 '피나클'(Pinnacle: '첨탑'이란 의미)이라 불리는 정착지를 건설했다. 총 500에이커(2 km2) 면적의 '피나클'은 많게는 4천명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주66)(주67)
얼마 안 있어 라스타들이 주변 공동체들에 정부에 세금을 내지 말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보도들이 표면화됐다. 1941년, 경찰이 '피나클'을 덥쳤고, 하웰과 추종자들은 감옥으로 가야만 했다. 이들이 출소한 후, 그 중 몇몇은 '피나클'을 재건하려 했지만, 사법당국이 계속해서 이 공동체를 단속했다. 식민 당국 및 독립 이후의 자메이카 당국의 보안군은 피나클을 파괴했고, 재산을 몰수당한 라스타파리 추종자들을 자메이카의 빈민가들로 흩어지게 만들었다.(주68)
(주65) The First Rasta: Leonard Howell and the Rise of Rastafarianism by Helene Lee, 1999.
(주66) Rastafari: From Outcasts to Culture Bearers by Ennis Barrington Edmonds, p.37.
(주68) Rhythms of Resistance: Histories of Musical Opposition and Affirmation from Around the World, composed by David McMurray, edited by Tom Tucker, p.46.
4.6.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자메이카 방문
(동영상) 1966년 4월 21일에 시작된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자메이카 국빈방문 기록물. 전용기의 공항 착륙 및 시가행진, 각종 참석행사들, 귀국 환송식 등이 담겨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엄청난 환영 군중의 규모에 잠시 멈칫하기도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환영 인파가 몰렸고, 일부 행사에서는 막대한 양의 대마초 흡연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이미 1961년에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몇몇 라스타 장로들을 접견하고 황금 메달들을 하사한 바 있다. 또한 1950년대에는 [아디스 아바바에서 남쪽으로 약 240 Km 떨어진] 샤샤마네(Shashamane 혹은 Shashemene, ሻሸመኔ)에 위치한 자신의 개인 영지를 내어주어, 서인도 제도의 아프리카계 후손들이 이곳에 와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실제로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라스타파리 신봉자는 1965년 9월에 도착한 노엘 다이어(Bongo Papa Noel Dyer: 1927~2000)로서, 그는 영국에서 이곳까지 히치하이킹을 통해서만 이동했다.
1966년 4월 21일,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자메이카를 방문했다. 셀라시에 황제가 자신들을 방문한다는 발표가 있자, 킹스턴 공항에는 자메이카 전역에서 대략 10만명 가량의 라스타들이 모여들었다.(주69) 그들은 공항에서 엄청난 양의 대마초(cannabis)를 흡연하고 드럼(북)을 두들기면서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도착을 기다렸다. 셀라시에 황제는 전용기가 착륙한 후 [드러머이기도 한] 유명한 라스타 장로 모타임 플라노(Mortimer Planno: 1929~2006)가 개인적인 영접을 할 때까지 한 시간 동안 기내에 머물렀다. 이후 그의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밥 말리의 아내 리타 말리(Rita Marley: 1946~ )도 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만난 후 라스타파리 종교로 개종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성흔(stigmata, 聖痕)을 보았고 그의 신성을 즉각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주70)
라스타파리 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셀라시에 황제의 자메이카 방문이 지난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되선 안 될 것이다. 라스타들은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고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서야 최초로 일시적이나마 사회적 존중을 받았다. 라스타들이 사회적으로 보다 인정받는 분위기가 되자, 레개(reggae, 레게) 음악의 상업화를 위한 문호가 열렸고, 레개 음악의 국제화와 더불어 라스타파리 운동 역시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자메이카를 방문한 날이 4월21일이었기 때문에, 라스타파리는 이 날을 '그로우네이션 데이'(Grounation Day)라 부르는 축일로서 매년 기념을 하고 있다. 셀라시에 황제가 라스타파리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먼저 자메이카 국민들을 해방시키기 전에는 라스타파리 지도자들이 에티오피아로 이주해선 안 될 것"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이 말은 이후 "선 해방 후 귀환"(liberation before repatriation)이란 격언으로 알려졌다.
1968년, 가이아나(Guyana) 출신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서인도 대학(University of the West Indies: UWI)의 교수였던 월터 로드니(Walter Rodney: 1942~1980, 우측사진, [역주] 폭탄테러로 암살당함)가 <나의 형제들과 함께 하는 기초교육>(The Groundings with My Brothers)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이 책은 간추린 아프리카 역사를 비롯한 여러 주제들과 함께, 로드니 자신의 라스타파리에 관한 체험도 서술했다.
이 책은 카리브해 지역(Caribbean)의 '블랙 파워 운동'(Black Power movement: 흑인권력운동)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됐다. '블랙 파워' 정신은 라스타파리 종교의 가르침과 결합되면서 가이아나,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 도미니카 연방(Dominica), 그레나다(Grenada) 등 카리브해 지역의 여러 국가들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타파리(Tafari)는 로드니가 추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드니는 '블랙 파워'라는 강력한 [논리적] 종합을 통해, 인종(race), 계급(class), 문화(culture)의 새로운 이념적 삼위일체 속에 라스타파리안들과 맑시스트들을 함께 데려다 놓았다. 즉, 백인 제국주의의 거부(인종), 흑인 대중들의 권력 장악(계급), 흑인들의 이미지 속에서 사회를 재정의하는 것(문화)이 바로 그것이다.
5. 세계 각지의 라스타파리 현황
5.1. 보츠와나
[아프리카 남부의] 보츠와나(Botswana)에는 상당한 규모의 라스타파리 공동체가 존재하며, 그들의 생활 모습은 다큐멘터리 영화 <도망친 노예>(Runaway Slave)에 담겨 있다.
5.2. 콩고 민주 공화국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콩고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DRC)에는 상당한 수의 라스타들의 공동체인 '콩고 라스타 연맹'(Federation des Rastas du Congo: FERACO)이 존재하며, 이 공동체가 수도 킨샤사(Kinshasa)의 트샹구 구(Tshangu district), 느질리 동(Ndjili 혹은 N'Djili)을 구성한다.(주71)
(주71) YouTube. "콩고의 라스타들".
5.3. 코트디부아르 (상아 해안)
상아 해안(Ivory Coast), 즉 지금의 코트디부아르(Republic of Côte d'Ivoire)에 거주하는 알파 블론디(Alpha Blondy: 1953~ )는 아프리카 출신으로는 가장 유명한 라스타파리 뮤지션 중 한명이다.(주72)
(동영상) 무슬림 아버지와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알파 블론디는 어려서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며 "만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고교 시절부터 학업보다는 학생운동에 전념했고, 아버지의 권유로 중퇴한 후 이웃 국가인 라이베리아로 영어 유학을 떠났다가, 이후 미국의 영어 학교로 옮겨갔다. 그는 뉴욕에서 여러 번 싸움에도 휘말렸지만, 그곳에서 최초로 라스타파리안들을 접했고, 버닝 스피어(Burning Spear: 1945~ ) 같은 자메이카 뮤지션들의 콘서트도 접하면서 20대를 보냈다. 뒤늦게 코트디부아르로 귀국한 그는 1982년 자신의 수감 경험을 주제로 한 데뷔 앨범 <자 글로리>(Jah Glory)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모국어인 줄라어와 더불어 프랑스어와 영어를 주로 사용해 작사를 하며, 때로는 아랍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주제는 대부분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다. 2001년의 쿠데타에 이어 코트디부아르에서는 극심한 정치적 분열 현상이 나타났다. 알파 블론디는 2005년에 '유엔 코트디부아르 평화 명예대사'를 맡기도 했으며, 2007년에 이뤄진 코트디부아르 평화협정의 성사에도 기여했다. 그가 1986년에 발표한 <신은 하나다>(God is One)나 <제루살렘>(Jerusalem: 예루살렘)은 모든 종교들의 일치를 노래한 것이다. 이 동영상은 '시편' 제23절을 소재로 한 노래 <제루살렘>의 실황공연이다. [크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소규모이긴 하지만 일본에서도 라스타파리 공동체가 성장했다.(주73) 도쿄와 오사카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는 라스타파리 방식의 자연식, 레게 음악 레코드판, 그리고 라스타파리와 관련된 여타 용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재팬 스플래쉬스"(Japan Splashes)라는 제목의 야외 콘서트들이 일본 전역의 다양한 장소들에서 개최됐다.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남동쪽의 해안도시 포트 다우핀(Fort Dauphin)은 여러 비치(해변)들과 서핑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에서는 라스타들이 매우 자주 눈에 띈다. 하지만 이곳의 라스타들은 이 도시의 여타 사람들에 비해 보다 보수적인 관점에 확고한 토대를 두고 있고, 마치 어떤 서브-컬처(subculture: 하위 문화)로부터 성장해나온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5.6. 말라위
말라위(Malawi)에도 라스타파리 공동체가 존재한다. 말라위의 대중음악계에선 레개 음악이 인기를 얻고 있는데, 라스타들은 이 나라의 음악 산업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말라위의 레개 밴드 블랙 미셔네리즈(Black Missionaries)는 음악을 통해 라스타파리 문화와 말라위의 현안에 관한 의견을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말라위에서 진행되는 국제적인 음악 축제인 말라위 호수 뮤직 페스티벌(Lake of Stars Music Festival)에는 국제적인 아티스트들과 많은 수의 말라위 레개 아티스트들이 출연하는데, '블랙 미셔네리즈'도 이 음악 축제에 출연했다. 이 밴드는 또한 미국 등 해외 공연들을 통해 말라위 스타일의 레개 음악을 국제 음악계에 소개하고 있다.
레개 가수 루시어스 반다(Lucius Banda: 1970~ )는 말라위 최고의 인기 가수 중 한명으로 꼽히곤 한다. 그는 특히 [영국에서 의사 생활을 했던 지식인 출신이자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해이스팅스 카무주 반다(Hastings Kamuzu Banda: 1898~1997, [집권] 1966~1994) 대통령의 독재정권('일당독재'를 공식 선언했던 체제임)에 공개적인 비판 발언들을 했다. 그는 이후 민주화된 말라위에서 잠기 동안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할 말은 하고 사는 말라위의 또 다른 레개 뮤지션으로는 "선지자"(The prophet: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에비슨 마타패일(Evison Matafale: 1974~2001)이 있다. 그는 2001년 정부에 일련의 항의서한을 써서 보낸 이후 경찰에 체포됐다 사망했다(고문사 의혹 존재).(주74)
말라위의 라스타파리는 정치적 활동에도 참여한다. 특히 말라위에서 '참바'(Chamba)라고도 불리는 대마초의 합법화 노력에서 더욱 더 그러하다. '참바'의 정식명칭은 말라위 골드(Malawi Gold)인데, 아프리카에서 최고로 강력한 대마초 잎사귀 중 하나이며, 그 품질에 관해서는 국제적 악명이 높다. 라스타파리는 종교적 이유에서 대마초를 사용한다. 말라위에서 참바는 여전히 불법화된 상태로 남아 있다.
2001년 영국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잉글랜드-웨일즈(England and Wales) 지역에는 약 5천명 정도의 라스타파리 구성원들이 살고 있는데, 특히 런던, 맨체스터, 버밍햄 등지는 더욱 그러하다.(주76) 영국 라스타들의 다수는 런던에 거주하며, 자메이카 출신들이다.
영국에서 대마초는 B급 마약(Class B Drug)으로 분류되며, 대마초의 종교적 사용 역시 금지돼 있다.
2000년, 찰스 깁슨(Charles Gibson) 판사는, <유럽 인권보호조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ECHR)에 맞춰 영국 국내법이 일관성을 지니도록 한 <1998년 제정 인권법>(Human Rights Act 1998) 제9조에 규정된 영국의 의무가 <1971년 제정 약물 오용에 관한 법률>(Misuse of Drugs Act 1971)과 양립 불가하다는 불합치성 선언(양립불가의 선언)(Declaration of incompatibility)을 고등법원이 판결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일은 종교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제공하고, 종교 및 예배와 신앙적 관행에 관한 표현의 권리를 제공했다.(주77)
2008년 유럽연합(EU) 고등법원은, 라스타파리 종교가 마리화나(marijuana: 대마초)를 성찬(sacrament)으로 여기기 때문에, 일부 라스타파리 신자들이 엄청난 양의 대마초를 흡연한다는 점을 감안하는 가운데 그 신자들에게 개인적 사용을 위한 적절한 양의 대마초 소지가 허용돼야만 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이탈리아 법원에서 한 라스타파리 뮤지션에게 언도된 징역형을 무효화시켰다.(주78)(주79)
런던에서는 세인트 아그네스 플레이스(St Agnes Place)에 라스타파리 종교의 예배 장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상주하던 이들은 2006년에 퇴거당했다.(주80)
배스(Bath)에 위치한 페어필드 하우스(Fairfield House)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5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던 곳인데, 이곳에 라스타파리 공동체 하나가 존재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정원을 가꾸고 행사를 개최한다. '페이스북' 상의 단체인 '페어필드 하우스의 라스타파리안들과 친구들'(Rastafarians and Friends of Fairfield House)은 회원들이 최근까지도 모일 수 있도록 결집력을 유지하고 있다. 행사에는 영국 전역의 라스타파리 신자들이 모이지만, 핵심 멤버들은 브리스톨(Bristol) 거주자들이 주력이다. 브리스톨의 세인트 폴스(St Pauls)에 거주하는 자메이카 교민 사회에서는 라스타파리 신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2011년, '라스타마우스'(Rastamouse)라는 어린이 대상 TV 프로그램이 등장했다.(주81)
첫댓글 결론적으로
뭔가 "독립운동 시대의 동학운동" + "흑인 환빠" + "반-제국주의 혁명"
+ "여호와의 증인 스타일의 착한 평화주의" + "성가대 선봉 선교교단" 등등이
전부 합쳐진 거 아닌가도 생각되고 말이죠..
하여간
이 종교 역시 기독교의 한 분파인데요..
"문선대"를 선봉에 내세운 교단으로는..
이보다 더 강력할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되네요.
흥미롭습니다..
미래의 주류 종교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되네요
기존의 개신교 교단들이
자파의 젊은이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음악을 앞세운 감각적 종교를 지향한다면
아마도 그렇게 성장한 젊은이들이
결국엔 여기에 가서 안착할 것 같은 느낌이네요
특히 사실상 라스타파리 종교의 CCM에 가까운
'레개'나 '스카' 음악이 미국 '힙합'에 미친 영향과
현재 '힙합' 음악이 가진 주류 음악으로서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지 않나도 싶습니다만서두..
하지만
우리 '크메르의 세계' 같은 "맨 정신"의 관점에서 보자고 하면..
뭔가 좀 애뜻한 느낌이 들긴 합니다..
"왕 중의 왕"..
그들의 구호가 왠지 "뽕 중의 뽕"이란 느낌도 주고..
하여간 흥미롭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것만을 주장하라!"
이것이 '크메르의 세계'가 주장하고자 하는 제1의 언명입니다만..
그래도 다채로움이 주는 즐거움,,
그것이 참 세상을 흥미롭게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라스타파리 뮤지션들의 "참여 정신" 하나만은 높이 평가할 수 밖엔 없네요..
진지한 예술가들이 자신의 신념을 음악에 담는 일..
그것에는 무한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노랫말에 툭하면 "혁명"(레볼루션)이 등장하는데요..
이렇게 쿨하게 혁명을 노래한다는 거..
참으로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