毛利家가 邊境 하기(萩)로 쫓겨간 사연
성밑거리를 둘러본 뒤에 毛利씨의 200년 居城인 하기城으로 올라갔다. 진입로 삼거리에 큼직한 동상 하나가 보인다. 동상의 주인공은 육군대장 정장 차림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이다. 다나카 기이치는 야마카다 아리토모-가쓰라 다로-테라우치 마사다케로 이어지는 조슈 軍閥의 후계자로서 1927년 4월 총리대신이 되었지만, 조슈벌의 독점·독주에 대한 軍·政界의 광범위한 반발과 그 자신의 무능·부패에 의해 1929년 7월 퇴임했다.
그 후 일본 육군에서는 유럽 유학파 영관급 장교들을 주력으로 하는 「昭和(쇼와)군벌이 대두해 조슈군벌은 퇴조했다. 정계에서도 패전 후인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총리대신에 오를 때까지 조슈 출신 총리대신은 나오지 않았다.
垓字(해자) 앞에 대절 택시에서 내려 높이 143m인 시츠키(指月)山 기슭에 하기城과 마주 섰다. 하기城은 살찐 오리의 머리 부분처럼 東海(동해: 일본에선 日本海라고 부름)를 향해 돌출해 있다. 지금은 「시츠키 공원」이라 불린다. 1604년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防·長 2州 36만 석의 영주로서 축성한 것이다. 현재는 돌담과 해자의 일부가 남아 있다.
하기(萩)라는 땅에 毛利씨의 居城과 城下町이 형성된 것은 세키가하라 싸움 후였다. 이 전투에서 모리 테루모토는 도요토미家를 받드는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의 권유에 의해 西軍의 총대장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섰다가 패전 후 領地와 石高(세키다카)가 80% 삭감되었음은 지난 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히로시마(廣島)에 居城을 두고 120만석을 지배했던 모리家는 혼슈의 서쪽 끝으로 오그라들어야 했다. 이에 테루모토는 防·長 2州의 중심인 야마구치(山口), 또는 山陽道와 연결되고 세토內海의 요충지이기도 한 防府에다 새로운 성지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막부는 굳이 교통이 불편한 하기에다 새 성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했다. 山陰 지역에 가만히 처박혀 있으면서 다시는 중앙에 진출하려는 꿈은 꾸지도 말라는 속셈이었다.
東·西 일본의 지역감정
다리를 건너 하기城에 入城해 天守閣(천수각)이 있었을 나지막한 指月山에 올랐다. 이제는 주춧돌 따위만 나뒹굴고 있다. 일본의 중심에서 보면 조슈번은 변두리 중의 변두리다. 그런데도 조슈번은 왜 明治維新의 진원지가 되었을까? 여기서 일본사에 있어서 東西문제를 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잔잔한 세토內海를 교통로로 삼는 西일본과 태평양이라는 大海에 접해 있는 東일본은 古代로부터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대체로 西일본은 개화·선진 지역이었고, 東일본은 후진·미개 지역이었다.
히데요시의 죽음 후, 東·西 일본의 충돌은 이에야스와 미쓰나리의 內戰으로 나타났다. 일본 천하의 주인을 결정하는 전투는 나고야(名古屋) 평야의 끝인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벌어졌다. 미쓰나리의 패인은 결국 도요토미家의 여러 다이묘(大名)로부터 일치된 후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00여 년간에 걸친 센고쿠(戰國)시대의 난투를 경험한데다 두 번에 걸친 朝鮮 출병에 의해 피로했던 여러 다이묘들은 그냥 이대로 평화를 유지해 기득권의 안정을 꾀했다. 따라서 미쓰나리의 거병은 새로운 분란으로 비쳐 西일본의 다이묘들에게서조차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인 1603년에는 東일본을 대표하는 이에야스가 패권을 장악해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를 세웠다. 일본 전체로 보아 당시의 에도는 東으로 너무 치우쳐 있었다. 도쿠가와는 그 근거지 에도를 수호하기 위해 譜代의 다이묘들을 東海道에 배치하고, 西일본을 누르기 위해 오사카(大坂)라는 大상업도시를 직할지로 삼았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西일본의 대두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럽 해상세력이 뻗어와 규슈를 무대로 활약, 유럽과의 교류에 의해 西일본의 富力이 증대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는 키리시탄(切支丹: 기독교) 禁令을 방패로 삼아 전국에 쇄국을 명령하고, 오직 직할지인 나가사키(長崎) 1개 항만을 열어 네덜란드와의 통상만은 허락했다. 그 이외의 유럽 선박은 연안 접근조차 금지했다.
막부는 參勤交代(참근교대·산킨고다이)도 강행했다. 참근교대라는 것은 전국 다이묘의 가족들은 에도에서 살게 하고, 다이묘 자신은 1년은 領地(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교대로 근무토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참근교대로 국력을 피폐시키면 西일본의 外樣(도자마)다이묘는 영구히 대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막부는 판단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막부의 쇄국령은 西일본의 다이묘들을 해외와 단절시키려는 의도였지만, 되레 쇄국령을 무시하는 다이묘들의 富强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쇄국령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다이묘가 모리氏와 시마즈氏였다.
조슈번의 모리氏는 혼슈의 西端에 위치하고 있는 절호의 조건을 이용해 한반도와의 密무역을 감행했다. 모리氏와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西軍에 가담해 패전했던 사쓰마藩의 시마즈(島津)氏도 유구를 정벌해 그 보호국으로 삼는 한편, 유구를 앞세워 거의 공공연하게 中國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획득했다. 규슈의 최남단에 위치한 사쓰마번에 대해선 거리상의 이유 등으로 막부의 감시가 느슨했다.
이같은 密무역은 막부의 쇄국령이 강화되면 될수록 위험부담이 큰 만큼 그 이익도 커지게 되었다. 모리氏나 시마즈氏는 戰國시대 이래의 다이묘였던 만큼 藩內에 대한 장악력이 강렬해 그 비밀의 누설을 막을 수 있었다.
黃金을 둘러싼 利害관계의 相剋
密무역은 기록상으로 흔적을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 동향만은 짐작 가능하다. 東일본과 西일본은 金·銀의 화폐적 용도에 특색이 있었다. 東일본은 주로 금을 사용하고, 西일본은 은을 사용했다.
이것은 東일본에 금 産地, 西일본에 은 産地가 편재된 조건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지만, 西일본에서는 中國·유럽과의 교통에 의해 銀 사용이 유행했다.
원래 유럽에서는 금의 은에 대한 교환비율이 높았는데, 특히 新대륙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굴된 이래 은값은 폭락하고 금값은 騰貴(등귀)했다. 中國에서는 원래 금은 은에 비해 5, 6배의 高價(고가)를 유지했는데, 그것이 유럽과의 교역에 점차 등귀하는 경향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금에 대한 상대적 가치가 상당히 낮아 은의 3배 정도에 불과했다. 만일 일본이 황금을 수출해 은으로 바꿔 온다면 유럽에 대해서는 물론 중국도 일본 수출업자와 함께 거액의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西일본은 이미 戰國시대로부터 은을 사용하는 풍습이 확립되었고, 이에 반해 경제적 후진지역인 東일본은 幕末까지 주로 금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관계로 東·西 일본 사이의 교역에는 금·은 換錢(환전)이 행해졌다. 東·西 일본의 대표지는 물론 에도와 오사카였고, 오사카에 근거를 둔 환전상은 금융자본가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환전상은 환전수수료만 먹는 것이 아니고, 금·은 시세의 변동에 의한 투기적 이익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었다.
일본에서 보유하는 금·은의 在庫(재고)는 갈수록 감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가사키에서 행해지던 官許무역에 의해 외래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만 유출되는 것이 아니었다.
금·은의 보유고 감소를 보완하기 위해 막부는 질이 나쁜 금·은을 자주 제조, 화폐 改惡을 단행했다. 하지만 改惡 전의 良貨는 충분히 회수되지 않았다. 이것들은 여러 루트에 의해 국외로 유출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사카에 집중되었다가 변경의 다이묘 領地인 나가도(長門: 조슈번 항구)와 사쓰마를 경유해 외국으로 뻐져나갔다.
모리氏와 시마즈氏가 변경에 붙어 있으면서 직령 600만 석의 막부에 대항 가능한 실력을 보유하게 된 것은 그들의 密무역의 규모를 감안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攘夷論의 實相
近世 유럽은 아직 르네상스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 문화가 東아시아에 비해 높은 정도에 달하고는 있었지만, 거리가 먼 만큼 그 실력이 東아시아에 도달하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人들에게 나가사키港 앞바다의 섬인 데지마(出島) 거주를 허용하면서, 그 대표자를 여러 다이묘처럼 에도의 쇼군에게 參勤시켰다. 네덜란드人들은 다소의 굴욕을 감수하는 대가로 對日무역을 독점하는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西歐의 산업혁명은 이런 형세를 일변시켰다. 風力을 이용하던 범선에 대신해 등장한 증기선은 근거지를 출항해 만리의 파도를 건너 東아시아 해역에 진출했다. 일본 근해에는 歐美의 증기선이 출몰해 네덜란드는 이제 對日무역의 독점이 불가능해졌다.
특히 태평양 항로의 개설은 종래의 교역환경을 역전시켜 東일본이 新대륙의 창구로 대두하게 되었다. 이때 네덜란드가 어떤 태도로 나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네덜란드와 영국 간 데지마(出島)에서의 피 터지는 쟁투를 계기로 인해서 일본에 攘夷論이 출현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攘夷論이 사쓰마와 조슈, 두 雄藩에 의해 강력하게 支持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쇄국에 의해 가장 큰 이익을 획득한 것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거론했다. 開國할 경우 두 雄藩은 密무역의 독점적 이익을 상실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부가 200여 년간 실행해 온 쇄국령을 세계대세에 순응해 스스로 철회하겠다는 데 대해 幕藩(막번)체제의 下位조직인 藩으로서는 異議를 제기할 근거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두 雄藩이 開國에 대해 항거하는 데엔 무슨 명분을 내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攘夷論은 뜬금없이 勤王論과 결합된다. 攘夷는 곧 勤王(근왕)이며, 幕府는 幕府보다 더 권위가 있는 天皇의 명령에 복종해 끝까지 攘夷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막부의 開國은 열강에 의해 강제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미국과 가까운 東일본에 유리했다. 범선 시대엔 세토內海를 낀 西일본이 유리했지만, 증기선 시대엔 大洋과 직결되는 東일본의 항만이 優位에 서게 마련이었다. 이로 인해 에도 막부의 지위가 강화될 것이라는 것을 가장 잘 파악했던 것은 해외무역의 맛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었다.
두 雄藩은 어떠한 수단을 구사해서라도 막부 主導의 開國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런 利害관계 속에서 開國論者들은 잇달아 암살되어 쓰러지고, 勤王攘夷論이 時流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막부가 근왕양이론자와 열강의 사이에 끼어 자멸하고, 1867년의 大政奉還 후 사쓰마·조슈번을 중심으로 하는 明治維新 정부가 성립되면 일본의 國是는 갑자기 開國進取로 180도 전환했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 표변은 예상된 행동이었다. 막부의 손에 의한 開國은 거부하지만, 자기들이 책임자가 되는 開國은 실현한다-이는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不倫」이라는 사고방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明治維新의 소위 元勳들은 일본과 외국의 접경지대 출신이었다. 이들은 開國의 이익을 누구보다 잘 숙지했던 만큼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開國의 國是가 결정된 것은 그렇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었다.
하기城에서 내려와 잠시 橋本川邊의 「가이미가리(鍵谷) 골목」을 걸었다. 좌우를 높은 토담으로 둘러싸고 길을 자물쇠 모양처럼 구부려서 만든 迷路(미로)의 골목이다. 이것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사무라이 주택 거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슈 武士의 후예들
대절택시로 東海와 접하는 하기市 북쪽 해변을 달려 조슈번 사무라이 계급의 감옥인 野山獄 터를 거쳐 송본천 위에 걸린 하기橋를 건너면 바로 東하기驛이다. 오후 4시19분에 발차하는 기차를 타려면 아직 한 시간쯤 여유가 있어 역전 카페에 들러 목을 축였다.
발차 시간에 맞춰 역두가 제법 붐볐다. 중·고교생의 하교시간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조슈(야마구치) 청소년」들의 행동거지가 좀 궁금했던 터다. 남녀 학생들이 섞인 기차 안인 만큼 핑크빛 눈길이 마주치는 모습이나 공연히 으스대는 남학생들의 몸짓도 목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학생들은 조신했고, 남학생들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 「사무라이 얼굴」들이었다. 東京의 高官家 도련님으로 태어나 자란 아베 신조의 귀족적 풍모와는 사뭇 다른 야성미가 엿보였다.
「남아」들은 1866년의 四境전쟁 당시 4000명의 병력으로 15만 명의 막부군을 패배시킨 조슈 사무라이들을 연상시켰다. 당시 조슈번의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일본 전체의 인구는 적어도 3000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귀로에도 「나가도(長門)市驛」과 코구시驛에서 다른 기차에 환승해야 했지만, 환승 시간은 각각 12분과 1분으로 往路 때보다 훨씬 짧았다. 어떻든 편도 105.3km의 거리를 가면서 기차를 세 번 갈아타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편한 일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빚어졌다면 「지역차별」이라는 아우성이 터졌을지 모른다.
현재 東海 쪽의 일본은 태평양 쪽의 일본에 비해 시골이다. 山陰線 연변의 사회적 인프라는 우리나라 강원도의 그것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다. 거리를 달리는 승용차는 거의가 소형차였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흙투성이의 농기구를 넣고 다니는 3000cc 이상의 승용차도 심심잖게 발견되고 있다.
日本을 「아름답지 못한 나라로」 끌고 갈 것인가(?)
오후 7시2분, 시모노세키驛에 도착해 저녁밥을 먹은 뒤 「씨몰」 빌딩 4층에 있는 도쿠마 서점 시모노세키店에 들렀다. 눈짐작으론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버금갈 만한 규모이다. 점두의 판매대에는 아베 신조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를 비롯한 아베 신조 관련 신간서적이 무려 7종이나 진열되어 있었다.
그 책 제목은 「도큐멘트 安倍晉三」 「安倍晉三, 이 나라를 지키는 결의」, 「安倍晉三 이야기」, 「安倍晉三와 宰相의 자격」, 「安倍晉三 토론집」, 「安倍晉三―아베家 3代」 등이었다. 과연, 아베 신조의 정치적 홈그라운드다운 모습이다.
필자는 「아름다운 나라로」(安倍晉三 지음·文藝春秋 발행), 「松陰과 晉作의 志」(一坂太郞 지음), 「長州전쟁」(野口武彦 지음), 靖國問題」(高橋哲哉 지음), 「竹島(獨島의 일본 측 표기)는 日韓 어느 쪽의 것인가」(下條正男 지음)」 등을 구입해 숙소로 돌아왔다.
필자는 아베 신조의 유일한 단독저서인 「아름다운 나라로」를 一讀하면서 그의 安保觀 등에 공감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싸우는 정치가」를 거듭 自任(자임)하는 그가 과거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깨닫지 못하고 신념화한다면 결국은 일본을 「아름답지 못한 나라」로 끌고 갈 우려가 있다고 느꼈다.
< 야스쿠니(靖國) 참배에 대해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戰後 일본의 지도자들, 예컨대 고이즈미 총리가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도록 지시했던 일이 있었는가. 他國을 공격하기 위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려고 했던가. 핵무장을 하려고 했던가. 인권을 억압하려 했던가. 자유를 제한하려 했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던가. 답은 모두 노(NO)이다. 지금 일본은 어디로부터 보아도 군국주의와는 無緣한 민주국가이다>
아베 신조는 2006년 4월15일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오전 7시 직전, 도쿄 九段에 위치한 야스쿠니 神社를 은밀히 참배했다. 방명록에 「官房長官 安倍晉三」이라고 기록했음에도 그의 수행비서관은 神社 측에 비밀 유지를 요청했다.
아베 측은 근 4개월 후인 2006년 8월3일 심야, 「아베 參拜」의 사실을 産經(산케이)신문과 NHK에 슬쩍 흘렸다. 다음날인 8월4일 새벽 1시 NHK 뉴스를 시작으로 通信社 및 民放 그리고 각 신문사가 일제히 보도했다.
그런 가운데 아베는 4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가 외교문제화·정치문제화하고 있는 가운데 갔는가, 가지 않았는가, 혹은 참배했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밝힐 뜻은 없다』며 관계사실의 확인을 거부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자극을 최소화하면서 自民黨 총재 경선에서 票心을 모아 총리대신이 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때 駐日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아베氏를 비롯,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분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武士道에 反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응하는 것으로 그쳤다고 한다. 아베는 「A級戰犯을 둘러싼 오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 「A級戰犯」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다. 「A급전범」라는 것은 極東국제군사재판=東京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 및 「人道에 대한 죄」라는, 전쟁 종결 후에 만들어진 개념에 의해 재단된 사람들을 말한다. 국제법상 事後法에 의해 판가름된 재판은 無效라는 議論이 있지만, 그것은 별도로 하고, 지도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A급이라고 편의적으로 부른 만큼 죄의 輕重에는 관계가 없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아베 신조가 外祖父 기시 노부스케 前 총리대신을 의식한 것을 느끼게 한다. 아베 신조에게 「정치적 DNA」를 물려주었다는 기시 노부스케는 「A급전범 용의자」로서 3년 3개월간 투옥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베 신조는 동료 의원과 함께 옛 滿洲國의 수도였던 長春의 한 기념관을 방문했던 때의 해프닝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기념관 측 안내인은 일본어로 기시 노부스케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者가 제일 악질이다』고 브리핑했다고 한다(大下英治 저 「安倍家 3代」에서).
<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極東국제군사재판을 수락하고 있기 때문에 총리가 A급전범이 合祀된 靖國神社에 참배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비판이 있다. …패전 직후 GHQ(연합군총사령부)가 靖國神社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검토했을 때 맥아더 원수의 副官이 駐日 바티칸 공사대리였던 브르노 비타 神父에게 의견을 구한 바 있다. 신부는 동료들과 협의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떠한 국민도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에 대해 경의를 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만약 靖國神社를 불태운다면 그 행위는 美軍의 역사에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汚點으로 남을 것이다. 역사는 그와 같은 행위를 이해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운 나라로」는 서문과 7장, 23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나의 原點, 제2장 自立하는 국가, 제3장 내셔널리즘은 무엇인가, 제4장 日美同盟의 구도, 제5장 日本과 아시아 그리고 中國, 제6장 少子국가의 미래, 제7장 교육의 再生이다.
책의 目次는 책의 전체 내용을 집약한다. 필자는 「아름다운 나라로」의 目次를 통해 아베 신조가 韓國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총 99개의 小제목 중 「韓國」이란 글자가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다. 印度·濠洲 등의 국명이 들어간 小제목은 있다. 본문 중에서도 그는 韓國을 中國의 종속적 위치로 설정하고 있다.
아베 신조의 대외정책에서 강조된 美日동맹
< 自國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의 自助노력, 「자기 나라는 자기가 지킨다는 氣槪가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核억지력과 極東지역의 안정을 고려하면 美國과의 동맹은 불가피하다. 美國의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경제력, 그리고 최강의 군사력을 고려한다면 日美동맹은 베스트의 선택인 것이다>
< 예컨대 他國이 日本에 미사일을 발사할 때 2발째의 飛來를 피하고, 또는 저지하기 위해서는 日本이 아니라 美國의 전투기가 그 미사일 基地를 공격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美國의 젊은이가 日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 다만 조약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들은 자동적으로 그러할 것이라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숨을 거는 병사, 병사의 가족, 병사를 보내는 美國 국민이 무엇보다 그것을 납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키신저 前 국무장관은 『동맹은 「종이」가 아니라 「連帶感」이다』라고 말했다. 신뢰로 뒷받침되는 연대감, 그것이 없는 조약은 휴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군사동맹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필요 최소한의 무력으로써 自國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지혜이다. 집단적 自衛權의 행사를 담보해 두는 것은 그것에 의해 합리적인 日本의 방위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게 된다. 또 그것의 결과로서 일본이 무력행사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兩國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
<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금후도 계속되어 갈 것은 틀림없고, 이 互惠의 관계를 정치문제에 의해 훼손당하는 것은 양국의 마이너스로서 결코 플러스가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 日中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양국 간에 政經分離의 원칙을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이 책의 「兩國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라는 小제목 下의 본문 중 일부이다.
< 나라가 다르면 역사 및 문화도 다르다. 양국 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들을 모두에 파급시켜서 되는 것일까. 서로 다름을 다른 것으로서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들은 서로 문제를 컨트롤하기 위해 頂上이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小제목 「양국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에 기록된 韓國 관련 全文이다.
< 이러한 상황은 韓國과도 마찬가지다. 日韓 양국은 하루 1만 명 이상이 왕래하는 중요한 관계다. 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의미에서 韓流붐은 결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나는 日韓관계에 대해서는 낙관주의자다. 韓國과 日本은 자유와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과 법의 지배라 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日韓관계의 기반이 아닐까. 우리들이 과거에 대해 겸허하고, 예의 바르게 미래지향으로 가는 한 반드시 양국 관계는 좀더 좋게 발전해 가리라 생각한다. 양국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EPA(경제연휴협정)의 체결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베 신조의 아시아 정책은 중국의 대두를 의식한 印度·濠洲와의 유대강화인 것 같다.
< 과거 나의 조부 岸信介가 印度를 방문했을 때 네루 수상이 환영 군중을 향해 『우리는 宗主國인 英國에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본은 日露전쟁에서 러시아에 이겼다. 당시 나도 印度의 독립에 일생을 걸 결심을 했다』고 연설한 일도 있지만, 印度의 여론조사에서 친밀감을 느끼는 국가의 넘버 원은 항상 日本이다>
< 다만 유감스럽게도 日本과의 교류가 미미하고, 경제관계도 희박했다. 이제까지는 「외짝사랑」의 관계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10년 전, 홍콩을 포함한 日中 무역량이 日美를 상회하게 된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10년 후에 日印관계가 日美, 日中을 상회한다고 해서 결코 이상하지 않다>
아베는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데모크라틱 G3+미국」의 동맹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의 목적은 自明하다.
< 親日的인 민주주의 국가 인도와 2006년에 日·美·豪 각료급 전략대화를 개최해 성공시킨 濠洲는 자유,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 법의 지배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日本과 공유하고 있다. …日·美·印·濠 4개국(아시아·대양주 데모크라틱 G3 + 美國)의 頂上 또는 外相 레벨의 회합을 개최해 아시아에 있어서 이러한 보편적 가치관을 다른 나라들과 共有하기 위해 공헌하고, 협력할 것인가에 대해 전략적 개념으로부터 협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日本은 그것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또 중앙아시아와의 관계 구축은 에너지 전략상 대단히 중요하다. 나아가 서양과 동양의 接點에 위치하는 親日國 터키와의 전략적 대화를 視野에 넣는 것에 의해 日本 외교에 새로운 地平이 열리게 될 것이다>
『北朝鮮의 일본인 납치는 국가안보가 걸린 중대 문제』
아베 신조는 제3장 「自立하는 국가」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 등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 나를 (북한이 저지른) 납치문제의 해결로 내몬 것은 무엇보다도 日本의 주권이 침해되어 일본 국민의 인생이 빼앗겼다고 하는 사실의 중대성 때문이었다. 공작원이 우리나라에 침입해 우리나라 국민을 납치해 그들의 對南공작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이 걸린 중대 문제이다>
< 고이즈미 총리와 金正日 국방위원장에 의한 첫 日朝 정상회담으로부터 1개월이 지난 2002년 10월15일 蓮池薰씨 등 5명의 납치피해자가 全日空機로부터 내렸다. 24년 만에 밟는 고국의 땅이었다(이들은 2주 정도의 귀국이었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면 북한에 남겨 놓은 가족들이 보복을 당할까 걱정해 영구귀국의 의사를 밝힐 수 없는 형편이었다)>
< 나는 『그들의 意志를 표출시켜서는 안 된다. 국가의 意志로써 5명은 보내지 않는다고 표명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意志 결정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나의 판단으로 「국가의 意志로서 5명은 보내지 않는다」고 방침을 정했다. 나는 고이즈미 총리의 승낙을 얻어 그것은 정부 방침으로 결정했다>
< 기업의 주재원을 비롯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은 많다. 범죄자 및 테러리스트에 대해 「일본인에게 손을 대도 日本 국가가 침묵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해외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지키는 것에 연결된다.
美國은 한국전쟁에서 5만여의 전사자를 냈지만,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당시의 유골을 최후의 1구까지 수집한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또 해외에서 自國의 인권이 침해당한다면 軍을 전개하는 것도 불사한다>
< 2006년 7월5일, 북조선은 잇달아 미사일을 발사했다. 사실, 우리 정부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 사태가 일어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시퍼 대사가 당일 이른 아침에 (총리)관저를 방문해 나(관방장관―편집자 注)와 방위청장관, 외무대신과 회담을 가졌던 것도 그 일환이다. 또 나를 중심으로 대책팀을 만들어 정보 수집·분석 및 대응책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 협의는 관방장관실에서 거듭되어 검토항목은 여러 부문에 걸친 것이었다. 복수의 마사일이 발사될 가능성, 着彈지점의 想定, 制裁를 포함한 대응책과 그 효과만 아니라 국민에의 周知 방법, 안보회의 및 閣議의 진행방식, 나아가 북조선의 의도 등에 대해서였다. 납치문제에 대해서도 당연히 검토했다.
그리고 미사일 발사 前日인 7월4일에는 검토항목이 늘어나 9항목의 제재조치안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이번 미사일 발사에 대한 일련의 대응을 통해 日美동맹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는지 日本 국민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결과 정부는 당면의 대응으로서 만경봉호의 입항 금지 등의 제재조치를 결정하고, 더욱 엄격한 경제제재 조치의 검토에 들어갔다. 북조선에 대한 경제제재의 목적 중 하나로 정권 中樞의 주변 및 黨·軍에 들어가는 자금을 막는다는 것이다. 정권을 붕괴시키는 결정타는 아니더라도 化學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 북조선에서는 軍 및 黨, 특수기관 등이 海産物 채취 해안을 관리하고, 일반인들이 수확한 모시조개·성게·바지락 등을 일본에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인다고 한다. 벌어들인 외화는 인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軍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경제제재를 시행하면 지배계급이 곤궁하기 전에 서민이 굶주린다는 비판이 있지만, 모시조개의 수출을 막으면 군 및 당의 외화벌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시조개가 서민의 입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게 된다. 경제제재와 동시에 WFP(유엔세계식량계획)을 통한 人道的 식량지원을 한다는 방법도 고려되고 있다. 다만, 진짜 서민의 입에 들어가는 것인지 끝까지 지켜보는 조건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독립 지키지 않으면 열강의 식민지로 되고 만다』
< 당시(19세기 중엽―편집자 注) 日本 지식인이 느낀 위기감의 배경에 있었던 것은 아편전쟁이었다. 1842년의 제1차, 1850년의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에 의해 中國이 배상금 지불에 더하여 홍콩을 할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日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라고 걱정했던 사람들 중에 개명적인 사람―佐久間象山(사구마 쇼잔)을 비롯한 吉田松陰, 勝海舟(가쓰 가이슈), 坂本龍馬(사카모토 료마) 등은 海防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지적했다>
< 1858년, 日本은 日美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英國·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같은 모양의 조약을 체결했지만, 그것들은 가혹한 내용이었다. 來日하는 외국인은 모두 治外法權과 같은 특권을 누린 것에 비해 일본에는 關稅 자주권도 없었다. 또 각국에 대해 최혜국 대우를 부여하는 한편, 일본은 최혜국 대우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실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明治의 일본인은 이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대단히 苦勞했다. 일본이 관세 자주권을 회복해 美國과 진짜로 대등하게 된 것은 日露전쟁에서 승리했던 후인 1911년(明治 44년)의 일이었다>
< 明治 이후의 日本은 西歐 열강이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식민지 분할을 시작하고 있던 중이어서, 통치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인가, 통치되는 쪽이 될 것인가,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美國조차 필리핀, 하와이에의 진출을 개시하려 하였다. 明治의 국민은 어쨌든 독립을 지키지 않으면 열강의 식민지로 되고 만다는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吉田松陰의 말을 인용한 아베의 出馬선언
2006년 9월1일 오전 8시40분, 필자는 아베 신조의 지역구(시모노세키) 사무실을 방문했다. 여자 사무원 둘만 출근해 있었다. 아베는 2006년 8월12일, 시모노세키에서 사실상의 自民黨 총재 출마 선언을 했다.
『사무라이 된 者, 그 志를 세워야 그 뜻한 바, 氣 또한 좇는다』
아베는 사실상 출마 표명의 자리에서 幕末의 사상가 요시다 쇼인의 말을 인용했다. 어린 시절의 아베는 잠자리에서 그의 外祖父 기시 노부스케로부터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기 신사쿠의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오전 9시30분이 지났지만, 아베의 지구당 사무실에는 여직원 둘 이외엔 출근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9월1일은 아베가 東京에서 공식 출마 선언을 하는 날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夫君 아베를 대신해 지구당 사무실을 지킨다는 아키에(昭惠) 여사도 東京에 올라갔다고 한다.
차 한 잔을 대접받은 후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벽면에 부착된 축소형 神社가 유달리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지구당 사무실에 그런 神社를 설치했다면 아베는 신토(神道)의 신자이거나 그 동조자인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신토를 이용한 역사왜곡이나 인국에 대한 멸시 등 부작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남의 나라 고유종교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幕末志士의 物主」 白石正一郞
시모노세키에는 아직도 답사해 볼 곳이 남아 있었다. 아베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운전사에게 「다카스기 신사쿠가 終焉(종언)한 곳」으로 가자고 청했다. 택시는 시모노세키驛에서 북쪽으로 뻗은 국도 191호를 700m쯤 올라간 다음 우회전해 골목 안으로 들어가 웬 사찰 앞에 정차했다. 그 사찰 정문 앞 빈터가 28세의 신사쿠가 폐결핵으로 요절한 곳인 林山九郞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林山九郞의 집터에서 나와 신사쿠의 최대 후원자였던 豪商 시라이시 쇼이치로(白石正一郞·1812~1880)의 옛집 터를 찾아나섰다. 시모노세키驛을 향해 내려오면서 40代 남자 행인에게 위치를 물으니 친절하게 현장까지 동행해 준 후 되돌아갔다.
시모노세키驛으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인 「中國전력 시모노세키 영업소」 건물 바로 옆에 쇼이치의 옛집터임을 알리는 작은 표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쇼이치로는 시모노세키港을 근거지로 한 운송선 업자로서 사카모토 료마 등 志士들에게 사재를 털어 원조한 인물이다. 시모노세키에 들른 사이고 다카모리 등 400명 이상의 「志士」가 그의 집에서 숙박했다. 막말 시모노세키는 일본 상선의 기항지로서 海陸산물이 집산한 「西의 浪華(오사카)」로서 번영해 志士들이 빈번하게 왕래했다.
그는 특히 신사쿠와의 교분이 두터워 奇兵隊는 하쿠세키의 집에서 결성되었다. 동생과 함께 스스로 奇兵隊에 입대해 사무라이 지위를 얻었다. 그의 재산은 奇兵隊 후원 등으로 탕진되었지만, 신사쿠의 요절로 報答을 받지 못했다. 明治維新 후에는 어느 神社의 宮司가 되었다.
시모노세키驛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거리의 가라도(唐戶)에서 하차했다. 가라도에는 답사 첫날 날이 저물어 둘러보지 못한 가메야마(龜山) 포대로 올라갔다. 1863년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던 미국 상선에 제1탄을 날렸던 곳이다.
가메야마 포대는 가메야마 神社 경내에 있다. 호젓한 신전 앞에서 청바지 차림의 처녀가 신전 앞에서 손뼉을 두 번 「탁탁」 치고 난 뒤에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등허리가 보일 정도였지만, 매우 진지해 보였다. 무슨 패션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 허리띠 가방(벨트 색)에는 큰 가위가 비수처럼 꽂혀 있었다.
신사 경내엔 「이토 히로부미 公爵 부처 史蹟(사적)」이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엔 「1865년 초여름, 刺客에게 쫓기던 이토 히로부미가 가메야마 神社 경내에서 찻집 아가씨였던 기타 우메코(木田梅子)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1년 후에 부부가 되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一見하면 매우 로맨틱하게 들리는 일화이지만, 그때 이토에겐 하기(萩)에서 그를 기다리는 糟糠之妻(조강지처)가 있었다. 이토는 우메코와 재혼하면서 조강지처를 버린 인물이었다.
明治정부의 고관대작으로 출세한 이토의 여성 편력을 보면 그가 매우 주도면밀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당시 日本에서는 高官이 지방 출장을 가면 으레 지방장관이 베푼 연회석상에서 마음에 드는 美女를 골라 侍寢(시침)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때 이토는 굳이 제1의 미녀를 사양하고 次上級 미녀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제1의 미녀는 거의 대부분 지방장관의 情人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일까, 이토는 지방장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필자는 한번 크게 웃으면서 안내판의 다음 문구를 보았다.
韓日 關係史에 대한 양국 국민의 정서
「이토 히로부미는 明治 신정부를 수립해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身命을 다하던 중 明治 42년(1909) 兇彈(흉탄)에 쓰러졌다. 우메코는 大正 13년에 77세로 죽었다」
兇彈이라면 하얼빈 역두에서 安重根이 쏜 正義의 총탄을 말한다. 韓日관계사 인식에 있어서 韓·日 양국민의 정서는 「正義의 총탄」과 「兇彈」의 차이만큼 크다.
일본으로선 이토의 죽음이 손해가 아니었다. 이미 결정된 일이긴 하지만, 韓日합병 일정을 앞당기는 구실을 얻었기 때문이다. 韓國人에게 있어 安重根은 民族史에 빛나는 인물이다. 國權 강탈의 치욕을 강박한 이토를 韓國人 중 아무도 쏘아 꺼꾸러트리지 않았다면 韓國史는 너무 쓸쓸할 뻔했다.
필자는 1895년 4월17일 淸·日 양국의 전권대표였던 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던 요정 春帆樓, 시모노세키 영국영사관 터 등지를 둘러보고 오후 6시 귀국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 국제터미널에 도착했다.●
1864년「禁門의 變」에서 幕府軍에게 패전하자 현장에서 자결한 熱血 風雲兒 구사카 겐즈이의 옛집 터. |
그 후 일본 육군에서는 유럽 유학파 영관급 장교들을 주력으로 하는 「昭和(쇼와)군벌이 대두해 조슈군벌은 퇴조했다. 정계에서도 패전 후인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총리대신에 오를 때까지 조슈 출신 총리대신은 나오지 않았다.
垓字(해자) 앞에 대절 택시에서 내려 높이 143m인 시츠키(指月)山 기슭에 하기城과 마주 섰다. 하기城은 살찐 오리의 머리 부분처럼 東海(동해: 일본에선 日本海라고 부름)를 향해 돌출해 있다. 지금은 「시츠키 공원」이라 불린다. 1604년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防·長 2州 36만 석의 영주로서 축성한 것이다. 현재는 돌담과 해자의 일부가 남아 있다.
하기(萩)라는 땅에 毛利씨의 居城과 城下町이 형성된 것은 세키가하라 싸움 후였다. 이 전투에서 모리 테루모토는 도요토미家를 받드는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의 권유에 의해 西軍의 총대장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섰다가 패전 후 領地와 石高(세키다카)가 80% 삭감되었음은 지난 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히로시마(廣島)에 居城을 두고 120만석을 지배했던 모리家는 혼슈의 서쪽 끝으로 오그라들어야 했다. 이에 테루모토는 防·長 2州의 중심인 야마구치(山口), 또는 山陽道와 연결되고 세토內海의 요충지이기도 한 防府에다 새로운 성지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막부는 굳이 교통이 불편한 하기에다 새 성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했다. 山陰 지역에 가만히 처박혀 있으면서 다시는 중앙에 진출하려는 꿈은 꾸지도 말라는 속셈이었다.
東·西 일본의 지역감정
指月山에 자리 잡은 조슈 藩主 모리氏의 하기城. 조슈藩은 도쿠가와 幕府 타도의 주체였다. |
잔잔한 세토內海를 교통로로 삼는 西일본과 태평양이라는 大海에 접해 있는 東일본은 古代로부터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대체로 西일본은 개화·선진 지역이었고, 東일본은 후진·미개 지역이었다.
히데요시의 죽음 후, 東·西 일본의 충돌은 이에야스와 미쓰나리의 內戰으로 나타났다. 일본 천하의 주인을 결정하는 전투는 나고야(名古屋) 평야의 끝인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벌어졌다. 미쓰나리의 패인은 결국 도요토미家의 여러 다이묘(大名)로부터 일치된 후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00여 년간에 걸친 센고쿠(戰國)시대의 난투를 경험한데다 두 번에 걸친 朝鮮 출병에 의해 피로했던 여러 다이묘들은 그냥 이대로 평화를 유지해 기득권의 안정을 꾀했다. 따라서 미쓰나리의 거병은 새로운 분란으로 비쳐 西일본의 다이묘들에게서조차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하기城의 天守閣(하기市 향토박물관 소장). 1869년 기도 다카요시의 주도로 版籍奉還(다이묘의 領地와 人民을 천황에게 바침)이 시행된 직후 이 天守閣은 他藩에 본보기가 되기 위해 자진 철거되었다. |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西일본의 대두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럽 해상세력이 뻗어와 규슈를 무대로 활약, 유럽과의 교류에 의해 西일본의 富力이 증대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는 키리시탄(切支丹: 기독교) 禁令을 방패로 삼아 전국에 쇄국을 명령하고, 오직 직할지인 나가사키(長崎) 1개 항만을 열어 네덜란드와의 통상만은 허락했다. 그 이외의 유럽 선박은 연안 접근조차 금지했다.
막부는 參勤交代(참근교대·산킨고다이)도 강행했다. 참근교대라는 것은 전국 다이묘의 가족들은 에도에서 살게 하고, 다이묘 자신은 1년은 領地(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교대로 근무토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참근교대로 국력을 피폐시키면 西일본의 外樣(도자마)다이묘는 영구히 대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막부는 판단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막부의 쇄국령은 西일본의 다이묘들을 해외와 단절시키려는 의도였지만, 되레 쇄국령을 무시하는 다이묘들의 富强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쇄국령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다이묘가 모리氏와 시마즈氏였다.
조슈번의 모리氏는 혼슈의 西端에 위치하고 있는 절호의 조건을 이용해 한반도와의 密무역을 감행했다. 모리氏와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西軍에 가담해 패전했던 사쓰마藩의 시마즈(島津)氏도 유구를 정벌해 그 보호국으로 삼는 한편, 유구를 앞세워 거의 공공연하게 中國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획득했다. 규슈의 최남단에 위치한 사쓰마번에 대해선 거리상의 이유 등으로 막부의 감시가 느슨했다.
이같은 密무역은 막부의 쇄국령이 강화되면 될수록 위험부담이 큰 만큼 그 이익도 커지게 되었다. 모리氏나 시마즈氏는 戰國시대 이래의 다이묘였던 만큼 藩內에 대한 장악력이 강렬해 그 비밀의 누설을 막을 수 있었다.
黃金을 둘러싼 利害관계의 相剋
密무역은 기록상으로 흔적을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 동향만은 짐작 가능하다. 東일본과 西일본은 金·銀의 화폐적 용도에 특색이 있었다. 東일본은 주로 금을 사용하고, 西일본은 은을 사용했다.
이것은 東일본에 금 産地, 西일본에 은 産地가 편재된 조건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지만, 西일본에서는 中國·유럽과의 교통에 의해 銀 사용이 유행했다.
원래 유럽에서는 금의 은에 대한 교환비율이 높았는데, 특히 新대륙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굴된 이래 은값은 폭락하고 금값은 騰貴(등귀)했다. 中國에서는 원래 금은 은에 비해 5, 6배의 高價(고가)를 유지했는데, 그것이 유럽과의 교역에 점차 등귀하는 경향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금에 대한 상대적 가치가 상당히 낮아 은의 3배 정도에 불과했다. 만일 일본이 황금을 수출해 은으로 바꿔 온다면 유럽에 대해서는 물론 중국도 일본 수출업자와 함께 거액의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西일본은 이미 戰國시대로부터 은을 사용하는 풍습이 확립되었고, 이에 반해 경제적 후진지역인 東일본은 幕末까지 주로 금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관계로 東·西 일본 사이의 교역에는 금·은 換錢(환전)이 행해졌다. 東·西 일본의 대표지는 물론 에도와 오사카였고, 오사카에 근거를 둔 환전상은 금융자본가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환전상은 환전수수료만 먹는 것이 아니고, 금·은 시세의 변동에 의한 투기적 이익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었다.
일본에서 보유하는 금·은의 在庫(재고)는 갈수록 감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가사키에서 행해지던 官許무역에 의해 외래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만 유출되는 것이 아니었다.
금·은의 보유고 감소를 보완하기 위해 막부는 질이 나쁜 금·은을 자주 제조, 화폐 改惡을 단행했다. 하지만 改惡 전의 良貨는 충분히 회수되지 않았다. 이것들은 여러 루트에 의해 국외로 유출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사카에 집중되었다가 변경의 다이묘 領地인 나가도(長門: 조슈번 항구)와 사쓰마를 경유해 외국으로 뻐져나갔다.
모리氏와 시마즈氏가 변경에 붙어 있으면서 직령 600만 석의 막부에 대항 가능한 실력을 보유하게 된 것은 그들의 密무역의 규모를 감안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攘夷論의 實相
近世 유럽은 아직 르네상스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 문화가 東아시아에 비해 높은 정도에 달하고는 있었지만, 거리가 먼 만큼 그 실력이 東아시아에 도달하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人들에게 나가사키港 앞바다의 섬인 데지마(出島) 거주를 허용하면서, 그 대표자를 여러 다이묘처럼 에도의 쇼군에게 參勤시켰다. 네덜란드人들은 다소의 굴욕을 감수하는 대가로 對日무역을 독점하는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西歐의 산업혁명은 이런 형세를 일변시켰다. 風力을 이용하던 범선에 대신해 등장한 증기선은 근거지를 출항해 만리의 파도를 건너 東아시아 해역에 진출했다. 일본 근해에는 歐美의 증기선이 출몰해 네덜란드는 이제 對日무역의 독점이 불가능해졌다.
특히 태평양 항로의 개설은 종래의 교역환경을 역전시켜 東일본이 新대륙의 창구로 대두하게 되었다. 이때 네덜란드가 어떤 태도로 나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네덜란드와 영국 간 데지마(出島)에서의 피 터지는 쟁투를 계기로 인해서 일본에 攘夷論이 출현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攘夷論이 사쓰마와 조슈, 두 雄藩에 의해 강력하게 支持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쇄국에 의해 가장 큰 이익을 획득한 것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거론했다. 開國할 경우 두 雄藩은 密무역의 독점적 이익을 상실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부가 200여 년간 실행해 온 쇄국령을 세계대세에 순응해 스스로 철회하겠다는 데 대해 幕藩(막번)체제의 下位조직인 藩으로서는 異議를 제기할 근거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두 雄藩이 開國에 대해 항거하는 데엔 무슨 명분을 내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攘夷論은 뜬금없이 勤王論과 결합된다. 攘夷는 곧 勤王(근왕)이며, 幕府는 幕府보다 더 권위가 있는 天皇의 명령에 복종해 끝까지 攘夷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막부의 開國은 열강에 의해 강제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미국과 가까운 東일본에 유리했다. 범선 시대엔 세토內海를 낀 西일본이 유리했지만, 증기선 시대엔 大洋과 직결되는 東일본의 항만이 優位에 서게 마련이었다. 이로 인해 에도 막부의 지위가 강화될 것이라는 것을 가장 잘 파악했던 것은 해외무역의 맛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었다.
두 雄藩은 어떠한 수단을 구사해서라도 막부 主導의 開國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런 利害관계 속에서 開國論者들은 잇달아 암살되어 쓰러지고, 勤王攘夷論이 時流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막부가 근왕양이론자와 열강의 사이에 끼어 자멸하고, 1867년의 大政奉還 후 사쓰마·조슈번을 중심으로 하는 明治維新 정부가 성립되면 일본의 國是는 갑자기 開國進取로 180도 전환했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 표변은 예상된 행동이었다. 막부의 손에 의한 開國은 거부하지만, 자기들이 책임자가 되는 開國은 실현한다-이는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不倫」이라는 사고방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明治維新의 소위 元勳들은 일본과 외국의 접경지대 출신이었다. 이들은 開國의 이익을 누구보다 잘 숙지했던 만큼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開國의 國是가 결정된 것은 그렇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었다.
하기城에서 내려와 잠시 橋本川邊의 「가이미가리(鍵谷) 골목」을 걸었다. 좌우를 높은 토담으로 둘러싸고 길을 자물쇠 모양처럼 구부려서 만든 迷路(미로)의 골목이다. 이것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사무라이 주택 거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슈 武士의 후예들
대절택시로 東海와 접하는 하기市 북쪽 해변을 달려 조슈번 사무라이 계급의 감옥인 野山獄 터를 거쳐 송본천 위에 걸린 하기橋를 건너면 바로 東하기驛이다. 오후 4시19분에 발차하는 기차를 타려면 아직 한 시간쯤 여유가 있어 역전 카페에 들러 목을 축였다.
발차 시간에 맞춰 역두가 제법 붐볐다. 중·고교생의 하교시간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조슈(야마구치) 청소년」들의 행동거지가 좀 궁금했던 터다. 남녀 학생들이 섞인 기차 안인 만큼 핑크빛 눈길이 마주치는 모습이나 공연히 으스대는 남학생들의 몸짓도 목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학생들은 조신했고, 남학생들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 「사무라이 얼굴」들이었다. 東京의 高官家 도련님으로 태어나 자란 아베 신조의 귀족적 풍모와는 사뭇 다른 야성미가 엿보였다.
「남아」들은 1866년의 四境전쟁 당시 4000명의 병력으로 15만 명의 막부군을 패배시킨 조슈 사무라이들을 연상시켰다. 당시 조슈번의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일본 전체의 인구는 적어도 3000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귀로에도 「나가도(長門)市驛」과 코구시驛에서 다른 기차에 환승해야 했지만, 환승 시간은 각각 12분과 1분으로 往路 때보다 훨씬 짧았다. 어떻든 편도 105.3km의 거리를 가면서 기차를 세 번 갈아타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편한 일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빚어졌다면 「지역차별」이라는 아우성이 터졌을지 모른다.
현재 東海 쪽의 일본은 태평양 쪽의 일본에 비해 시골이다. 山陰線 연변의 사회적 인프라는 우리나라 강원도의 그것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다. 거리를 달리는 승용차는 거의가 소형차였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흙투성이의 농기구를 넣고 다니는 3000cc 이상의 승용차도 심심잖게 발견되고 있다.
日本을 「아름답지 못한 나라로」 끌고 갈 것인가(?)
아베 신조의 유일한 단독 저서「아름다운 나라로」(文藝春秋·2006.7)의 표지. 그는 일본의 自存을 위해「싸우는 정치가」를 自任했다. |
그 책 제목은 「도큐멘트 安倍晉三」 「安倍晉三, 이 나라를 지키는 결의」, 「安倍晉三 이야기」, 「安倍晉三와 宰相의 자격」, 「安倍晉三 토론집」, 「安倍晉三―아베家 3代」 등이었다. 과연, 아베 신조의 정치적 홈그라운드다운 모습이다.
필자는 「아름다운 나라로」(安倍晉三 지음·文藝春秋 발행), 「松陰과 晉作의 志」(一坂太郞 지음), 「長州전쟁」(野口武彦 지음), 靖國問題」(高橋哲哉 지음), 「竹島(獨島의 일본 측 표기)는 日韓 어느 쪽의 것인가」(下條正男 지음)」 등을 구입해 숙소로 돌아왔다.
필자는 아베 신조의 유일한 단독저서인 「아름다운 나라로」를 一讀하면서 그의 安保觀 등에 공감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싸우는 정치가」를 거듭 自任(자임)하는 그가 과거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깨닫지 못하고 신념화한다면 결국은 일본을 「아름답지 못한 나라」로 끌고 갈 우려가 있다고 느꼈다.
< 야스쿠니(靖國) 참배에 대해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戰後 일본의 지도자들, 예컨대 고이즈미 총리가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도록 지시했던 일이 있었는가. 他國을 공격하기 위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려고 했던가. 핵무장을 하려고 했던가. 인권을 억압하려 했던가. 자유를 제한하려 했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던가. 답은 모두 노(NO)이다. 지금 일본은 어디로부터 보아도 군국주의와는 無緣한 민주국가이다>
아베 신조는 2006년 4월15일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오전 7시 직전, 도쿄 九段에 위치한 야스쿠니 神社를 은밀히 참배했다. 방명록에 「官房長官 安倍晉三」이라고 기록했음에도 그의 수행비서관은 神社 측에 비밀 유지를 요청했다.
아베 측은 근 4개월 후인 2006년 8월3일 심야, 「아베 參拜」의 사실을 産經(산케이)신문과 NHK에 슬쩍 흘렸다. 다음날인 8월4일 새벽 1시 NHK 뉴스를 시작으로 通信社 및 民放 그리고 각 신문사가 일제히 보도했다.
그런 가운데 아베는 4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가 외교문제화·정치문제화하고 있는 가운데 갔는가, 가지 않았는가, 혹은 참배했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밝힐 뜻은 없다』며 관계사실의 확인을 거부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자극을 최소화하면서 自民黨 총재 경선에서 票心을 모아 총리대신이 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때 駐日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아베氏를 비롯,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분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武士道에 反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응하는 것으로 그쳤다고 한다. 아베는 「A級戰犯을 둘러싼 오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 「A級戰犯」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다. 「A급전범」라는 것은 極東국제군사재판=東京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 및 「人道에 대한 죄」라는, 전쟁 종결 후에 만들어진 개념에 의해 재단된 사람들을 말한다. 국제법상 事後法에 의해 판가름된 재판은 無效라는 議論이 있지만, 그것은 별도로 하고, 지도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A급이라고 편의적으로 부른 만큼 죄의 輕重에는 관계가 없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아베 신조가 外祖父 기시 노부스케 前 총리대신을 의식한 것을 느끼게 한다. 아베 신조에게 「정치적 DNA」를 물려주었다는 기시 노부스케는 「A급전범 용의자」로서 3년 3개월간 투옥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베 신조는 동료 의원과 함께 옛 滿洲國의 수도였던 長春의 한 기념관을 방문했던 때의 해프닝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기념관 측 안내인은 일본어로 기시 노부스케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者가 제일 악질이다』고 브리핑했다고 한다(大下英治 저 「安倍家 3代」에서).
<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極東국제군사재판을 수락하고 있기 때문에 총리가 A급전범이 合祀된 靖國神社에 참배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비판이 있다. …패전 직후 GHQ(연합군총사령부)가 靖國神社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검토했을 때 맥아더 원수의 副官이 駐日 바티칸 공사대리였던 브르노 비타 神父에게 의견을 구한 바 있다. 신부는 동료들과 협의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떠한 국민도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에 대해 경의를 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만약 靖國神社를 불태운다면 그 행위는 美軍의 역사에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汚點으로 남을 것이다. 역사는 그와 같은 행위를 이해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운 나라로」는 서문과 7장, 23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나의 原點, 제2장 自立하는 국가, 제3장 내셔널리즘은 무엇인가, 제4장 日美同盟의 구도, 제5장 日本과 아시아 그리고 中國, 제6장 少子국가의 미래, 제7장 교육의 再生이다.
책의 目次는 책의 전체 내용을 집약한다. 필자는 「아름다운 나라로」의 目次를 통해 아베 신조가 韓國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총 99개의 小제목 중 「韓國」이란 글자가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다. 印度·濠洲 등의 국명이 들어간 小제목은 있다. 본문 중에서도 그는 韓國을 中國의 종속적 위치로 설정하고 있다.
아베 신조의 대외정책에서 강조된 美日동맹
< 自國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의 自助노력, 「자기 나라는 자기가 지킨다는 氣槪가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核억지력과 極東지역의 안정을 고려하면 美國과의 동맹은 불가피하다. 美國의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경제력, 그리고 최강의 군사력을 고려한다면 日美동맹은 베스트의 선택인 것이다>
< 예컨대 他國이 日本에 미사일을 발사할 때 2발째의 飛來를 피하고, 또는 저지하기 위해서는 日本이 아니라 美國의 전투기가 그 미사일 基地를 공격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美國의 젊은이가 日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 다만 조약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들은 자동적으로 그러할 것이라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숨을 거는 병사, 병사의 가족, 병사를 보내는 美國 국민이 무엇보다 그것을 납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키신저 前 국무장관은 『동맹은 「종이」가 아니라 「連帶感」이다』라고 말했다. 신뢰로 뒷받침되는 연대감, 그것이 없는 조약은 휴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군사동맹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필요 최소한의 무력으로써 自國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지혜이다. 집단적 自衛權의 행사를 담보해 두는 것은 그것에 의해 합리적인 日本의 방위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게 된다. 또 그것의 결과로서 일본이 무력행사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兩國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
<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금후도 계속되어 갈 것은 틀림없고, 이 互惠의 관계를 정치문제에 의해 훼손당하는 것은 양국의 마이너스로서 결코 플러스가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 日中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양국 간에 政經分離의 원칙을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이 책의 「兩國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라는 小제목 下의 본문 중 일부이다.
< 나라가 다르면 역사 및 문화도 다르다. 양국 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들을 모두에 파급시켜서 되는 것일까. 서로 다름을 다른 것으로서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들은 서로 문제를 컨트롤하기 위해 頂上이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小제목 「양국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에 기록된 韓國 관련 全文이다.
< 이러한 상황은 韓國과도 마찬가지다. 日韓 양국은 하루 1만 명 이상이 왕래하는 중요한 관계다. 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의미에서 韓流붐은 결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나는 日韓관계에 대해서는 낙관주의자다. 韓國과 日本은 자유와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과 법의 지배라 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日韓관계의 기반이 아닐까. 우리들이 과거에 대해 겸허하고, 예의 바르게 미래지향으로 가는 한 반드시 양국 관계는 좀더 좋게 발전해 가리라 생각한다. 양국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EPA(경제연휴협정)의 체결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베 신조의 아시아 정책은 중국의 대두를 의식한 印度·濠洲와의 유대강화인 것 같다.
< 과거 나의 조부 岸信介가 印度를 방문했을 때 네루 수상이 환영 군중을 향해 『우리는 宗主國인 英國에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본은 日露전쟁에서 러시아에 이겼다. 당시 나도 印度의 독립에 일생을 걸 결심을 했다』고 연설한 일도 있지만, 印度의 여론조사에서 친밀감을 느끼는 국가의 넘버 원은 항상 日本이다>
< 다만 유감스럽게도 日本과의 교류가 미미하고, 경제관계도 희박했다. 이제까지는 「외짝사랑」의 관계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10년 전, 홍콩을 포함한 日中 무역량이 日美를 상회하게 된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10년 후에 日印관계가 日美, 日中을 상회한다고 해서 결코 이상하지 않다>
아베는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데모크라틱 G3+미국」의 동맹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의 목적은 自明하다.
< 親日的인 민주주의 국가 인도와 2006년에 日·美·豪 각료급 전략대화를 개최해 성공시킨 濠洲는 자유,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 법의 지배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日本과 공유하고 있다. …日·美·印·濠 4개국(아시아·대양주 데모크라틱 G3 + 美國)의 頂上 또는 外相 레벨의 회합을 개최해 아시아에 있어서 이러한 보편적 가치관을 다른 나라들과 共有하기 위해 공헌하고, 협력할 것인가에 대해 전략적 개념으로부터 협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日本은 그것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또 중앙아시아와의 관계 구축은 에너지 전략상 대단히 중요하다. 나아가 서양과 동양의 接點에 위치하는 親日國 터키와의 전략적 대화를 視野에 넣는 것에 의해 日本 외교에 새로운 地平이 열리게 될 것이다>
『北朝鮮의 일본인 납치는 국가안보가 걸린 중대 문제』
아베 신조는 제3장 「自立하는 국가」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 등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 나를 (북한이 저지른) 납치문제의 해결로 내몬 것은 무엇보다도 日本의 주권이 침해되어 일본 국민의 인생이 빼앗겼다고 하는 사실의 중대성 때문이었다. 공작원이 우리나라에 침입해 우리나라 국민을 납치해 그들의 對南공작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이 걸린 중대 문제이다>
< 고이즈미 총리와 金正日 국방위원장에 의한 첫 日朝 정상회담으로부터 1개월이 지난 2002년 10월15일 蓮池薰씨 등 5명의 납치피해자가 全日空機로부터 내렸다. 24년 만에 밟는 고국의 땅이었다(이들은 2주 정도의 귀국이었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면 북한에 남겨 놓은 가족들이 보복을 당할까 걱정해 영구귀국의 의사를 밝힐 수 없는 형편이었다)>
< 나는 『그들의 意志를 표출시켜서는 안 된다. 국가의 意志로써 5명은 보내지 않는다고 표명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意志 결정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나의 판단으로 「국가의 意志로서 5명은 보내지 않는다」고 방침을 정했다. 나는 고이즈미 총리의 승낙을 얻어 그것은 정부 방침으로 결정했다>
< 기업의 주재원을 비롯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은 많다. 범죄자 및 테러리스트에 대해 「일본인에게 손을 대도 日本 국가가 침묵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해외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지키는 것에 연결된다.
美國은 한국전쟁에서 5만여의 전사자를 냈지만,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당시의 유골을 최후의 1구까지 수집한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또 해외에서 自國의 인권이 침해당한다면 軍을 전개하는 것도 불사한다>
< 2006년 7월5일, 북조선은 잇달아 미사일을 발사했다. 사실, 우리 정부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 사태가 일어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시퍼 대사가 당일 이른 아침에 (총리)관저를 방문해 나(관방장관―편집자 注)와 방위청장관, 외무대신과 회담을 가졌던 것도 그 일환이다. 또 나를 중심으로 대책팀을 만들어 정보 수집·분석 및 대응책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 협의는 관방장관실에서 거듭되어 검토항목은 여러 부문에 걸친 것이었다. 복수의 마사일이 발사될 가능성, 着彈지점의 想定, 制裁를 포함한 대응책과 그 효과만 아니라 국민에의 周知 방법, 안보회의 및 閣議의 진행방식, 나아가 북조선의 의도 등에 대해서였다. 납치문제에 대해서도 당연히 검토했다.
그리고 미사일 발사 前日인 7월4일에는 검토항목이 늘어나 9항목의 제재조치안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이번 미사일 발사에 대한 일련의 대응을 통해 日美동맹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는지 日本 국민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결과 정부는 당면의 대응으로서 만경봉호의 입항 금지 등의 제재조치를 결정하고, 더욱 엄격한 경제제재 조치의 검토에 들어갔다. 북조선에 대한 경제제재의 목적 중 하나로 정권 中樞의 주변 및 黨·軍에 들어가는 자금을 막는다는 것이다. 정권을 붕괴시키는 결정타는 아니더라도 化學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 북조선에서는 軍 및 黨, 특수기관 등이 海産物 채취 해안을 관리하고, 일반인들이 수확한 모시조개·성게·바지락 등을 일본에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인다고 한다. 벌어들인 외화는 인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軍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경제제재를 시행하면 지배계급이 곤궁하기 전에 서민이 굶주린다는 비판이 있지만, 모시조개의 수출을 막으면 군 및 당의 외화벌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시조개가 서민의 입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게 된다. 경제제재와 동시에 WFP(유엔세계식량계획)을 통한 人道的 식량지원을 한다는 방법도 고려되고 있다. 다만, 진짜 서민의 입에 들어가는 것인지 끝까지 지켜보는 조건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독립 지키지 않으면 열강의 식민지로 되고 만다』
< 당시(19세기 중엽―편집자 注) 日本 지식인이 느낀 위기감의 배경에 있었던 것은 아편전쟁이었다. 1842년의 제1차, 1850년의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에 의해 中國이 배상금 지불에 더하여 홍콩을 할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日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라고 걱정했던 사람들 중에 개명적인 사람―佐久間象山(사구마 쇼잔)을 비롯한 吉田松陰, 勝海舟(가쓰 가이슈), 坂本龍馬(사카모토 료마) 등은 海防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지적했다>
< 1858년, 日本은 日美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英國·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같은 모양의 조약을 체결했지만, 그것들은 가혹한 내용이었다. 來日하는 외국인은 모두 治外法權과 같은 특권을 누린 것에 비해 일본에는 關稅 자주권도 없었다. 또 각국에 대해 최혜국 대우를 부여하는 한편, 일본은 최혜국 대우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실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明治의 일본인은 이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대단히 苦勞했다. 일본이 관세 자주권을 회복해 美國과 진짜로 대등하게 된 것은 日露전쟁에서 승리했던 후인 1911년(明治 44년)의 일이었다>
< 明治 이후의 日本은 西歐 열강이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식민지 분할을 시작하고 있던 중이어서, 통치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인가, 통치되는 쪽이 될 것인가,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美國조차 필리핀, 하와이에의 진출을 개시하려 하였다. 明治의 국민은 어쨌든 독립을 지키지 않으면 열강의 식민지로 되고 만다는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吉田松陰의 말을 인용한 아베의 出馬선언
「월간 松下村塾」창간호(2004. 10). 표지의 캐리커처는「幕末志士의 스승」요시다 쇼인. |
『사무라이 된 者, 그 志를 세워야 그 뜻한 바, 氣 또한 좇는다』
아베는 사실상 출마 표명의 자리에서 幕末의 사상가 요시다 쇼인의 말을 인용했다. 어린 시절의 아베는 잠자리에서 그의 外祖父 기시 노부스케로부터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기 신사쿠의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오전 9시30분이 지났지만, 아베의 지구당 사무실에는 여직원 둘 이외엔 출근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9월1일은 아베가 東京에서 공식 출마 선언을 하는 날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夫君 아베를 대신해 지구당 사무실을 지킨다는 아키에(昭惠) 여사도 東京에 올라갔다고 한다.
차 한 잔을 대접받은 후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벽면에 부착된 축소형 神社가 유달리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지구당 사무실에 그런 神社를 설치했다면 아베는 신토(神道)의 신자이거나 그 동조자인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신토를 이용한 역사왜곡이나 인국에 대한 멸시 등 부작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남의 나라 고유종교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幕末志士의 物主」 白石正一郞
시모노세키의 가메야마 神社를 경건한 자세로 참배하는 일본의 新世代 여성. 신토(神道)는 일본 고유의 종교로서 日本 國粹主義의 子宮이 되었다. |
林山九郞의 집터에서 나와 신사쿠의 최대 후원자였던 豪商 시라이시 쇼이치로(白石正一郞·1812~1880)의 옛집 터를 찾아나섰다. 시모노세키驛을 향해 내려오면서 40代 남자 행인에게 위치를 물으니 친절하게 현장까지 동행해 준 후 되돌아갔다.
시모노세키驛으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인 「中國전력 시모노세키 영업소」 건물 바로 옆에 쇼이치의 옛집터임을 알리는 작은 표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쇼이치로는 시모노세키港을 근거지로 한 운송선 업자로서 사카모토 료마 등 志士들에게 사재를 털어 원조한 인물이다. 시모노세키에 들른 사이고 다카모리 등 400명 이상의 「志士」가 그의 집에서 숙박했다. 막말 시모노세키는 일본 상선의 기항지로서 海陸산물이 집산한 「西의 浪華(오사카)」로서 번영해 志士들이 빈번하게 왕래했다.
그는 특히 신사쿠와의 교분이 두터워 奇兵隊는 하쿠세키의 집에서 결성되었다. 동생과 함께 스스로 奇兵隊에 입대해 사무라이 지위를 얻었다. 그의 재산은 奇兵隊 후원 등으로 탕진되었지만, 신사쿠의 요절로 報答을 받지 못했다. 明治維新 후에는 어느 神社의 宮司가 되었다.
시모노세키驛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거리의 가라도(唐戶)에서 하차했다. 가라도에는 답사 첫날 날이 저물어 둘러보지 못한 가메야마(龜山) 포대로 올라갔다. 1863년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던 미국 상선에 제1탄을 날렸던 곳이다.
가메야마 포대는 가메야마 神社 경내에 있다. 호젓한 신전 앞에서 청바지 차림의 처녀가 신전 앞에서 손뼉을 두 번 「탁탁」 치고 난 뒤에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등허리가 보일 정도였지만, 매우 진지해 보였다. 무슨 패션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 허리띠 가방(벨트 색)에는 큰 가위가 비수처럼 꽂혀 있었다.
신사 경내엔 「이토 히로부미 公爵 부처 史蹟(사적)」이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엔 「1865년 초여름, 刺客에게 쫓기던 이토 히로부미가 가메야마 神社 경내에서 찻집 아가씨였던 기타 우메코(木田梅子)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1년 후에 부부가 되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一見하면 매우 로맨틱하게 들리는 일화이지만, 그때 이토에겐 하기(萩)에서 그를 기다리는 糟糠之妻(조강지처)가 있었다. 이토는 우메코와 재혼하면서 조강지처를 버린 인물이었다.
明治정부의 고관대작으로 출세한 이토의 여성 편력을 보면 그가 매우 주도면밀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당시 日本에서는 高官이 지방 출장을 가면 으레 지방장관이 베푼 연회석상에서 마음에 드는 美女를 골라 侍寢(시침)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때 이토는 굳이 제1의 미녀를 사양하고 次上級 미녀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제1의 미녀는 거의 대부분 지방장관의 情人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일까, 이토는 지방장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필자는 한번 크게 웃으면서 안내판의 다음 문구를 보았다.
韓日 關係史에 대한 양국 국민의 정서
「이토 히로부미는 明治 신정부를 수립해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身命을 다하던 중 明治 42년(1909) 兇彈(흉탄)에 쓰러졌다. 우메코는 大正 13년에 77세로 죽었다」
兇彈이라면 하얼빈 역두에서 安重根이 쏜 正義의 총탄을 말한다. 韓日관계사 인식에 있어서 韓·日 양국민의 정서는 「正義의 총탄」과 「兇彈」의 차이만큼 크다.
일본으로선 이토의 죽음이 손해가 아니었다. 이미 결정된 일이긴 하지만, 韓日합병 일정을 앞당기는 구실을 얻었기 때문이다. 韓國人에게 있어 安重根은 民族史에 빛나는 인물이다. 國權 강탈의 치욕을 강박한 이토를 韓國人 중 아무도 쏘아 꺼꾸러트리지 않았다면 韓國史는 너무 쓸쓸할 뻔했다.
필자는 1895년 4월17일 淸·日 양국의 전권대표였던 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던 요정 春帆樓, 시모노세키 영국영사관 터 등지를 둘러보고 오후 6시 귀국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 국제터미널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