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출애굽기 15장 2~3절, 요한복음 20장 28절, 욥기 42장 5절, 에스겔 34장 15절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하고, 주님이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련다. 주님은 용사이시니, 그 이름 주님이시다. <출애굽기 15장 2~3절, 새번역>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요한복음 20장 28절, 새번역>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기 42장 5절, 새번역>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4장 15절, 새번역>
사실 조금 늦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출애굽기 15장이었습니다. 이미 이런 고백은 10가지 재앙을 통해 출애굽한 순간에 목소리 높여 찬양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는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후에야 이런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열가지 재앙을 보여주셨던 것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만큼 홍해 사건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분명 10가지 재앙보다 홍해 사건을 거친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이라는 단어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출애굽기 14장 31절, 새번역>
10가지 재앙도 물론 이집트를 치신 사건이었지만, 이집트 백성을 완전히 멸하신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0가지 재앙 이후에 아직 나오지 않았던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그들은 하나님을 그냥 신들 중 한 존재가 아닌 진짜 하나님으로, 그리고 바로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하고, 주님이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련다. <출애굽기 15장 2절, 새번역>
'나의' 라는 단어는 정말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신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란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과 앎을 통해 저 멀리 나와 상관없는 신이 아닌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입니다. 나와 관련이 있고, 내가 소유하고, 내가 바라는 분이 된 것입니다. 도마의 고백이 그래서 의미있던 것 아니겠습니까?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고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고백이었습니다.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요한복음 20장 28절, 새번역>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엇인가와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신도 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짜 신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신들 가운데서 주님과 같은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과 같이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우시며, 찬양받을 만한 위엄이 있으시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그런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15장 11절, 새번역>
그렇다면 왜 10가지 재앙 직후가 아닌 홍해를 건넌 후에야 이렇게 고백했을까요? 두 가지 의미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직접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10가지 재앙이 대부분 간접적인 경험이었다면, 홍해를 건넌 것은 직접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지켜만 보던 10가지 재앙과는 달리, 직접 자신들이 참여해야 했고, 움직여야 했고, 믿어내야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체험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체험이야말로 어떤 것이든 일반적인 경험이 아닌 주관적인 경험으로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길고 길었던 고난 속에서 욥이 결국에는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귀로 듣는 하나님이 아닌 눈으로 본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기 42장 5절, 새번역>
요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귀로만 듣고 계십니까? 눈으로 주님을 뵙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계십니까? 이 체험은 결코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닙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매 순간 나에게 있음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결코 과거형이 아닙니다. 당연히 미래형도 아닙니다. 지금 체험하고 있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멀뚱멀뚱 서서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간접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우리 앞에 있는 홍해를 직접 건너야 합니다. 직접 믿어 내고, 발을 내딛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홍해 가운데에 들어가서 홍해를 지나온 것이 경험되어져 나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직접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10가지 재앙은 대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고, 모세와 아론은 10가지 재앙을 이집트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라는 통로를 예비하셔서 서서히 이스라엘 백성과 간극을 좁히셨습니다. 그리고 홍해 사건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진두지휘하십니다. 이미 모세의 입으로 고백된 대로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 새번역>
물론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야 했지만, 홍해를 건너는 일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이 직접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임재하셔서 밤새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내시는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수많은 역사를 직접 행하셨습니다. 그 모든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이 목도했습니다. 정말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수 구원하신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으로 그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출애굽기 15장 13절, 새번역>
이 단어가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손수' 손수 직접 행하셨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손수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일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멀리 떨어져 말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시키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직접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직접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직접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었던 죄악의 벽이 무너졌고,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은 찢어졌습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4장 15절, 새번역>
오늘의 찬양은 단지 모세만의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하여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43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이제 다시 신앙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JQvn_gxZtw
https://www.youtube.com/watch?v=kwFW0zE80UU
https://www.youtube.com/watch?v=y3q7sg-2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