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면 오금리
강동면 오금리(五琴里)
2008년 01월 14일(월) 13:56 [경주신문사]
경주의 젖줄인 형산강은 백운산, 단석산, 마석산 등에서 흘러내린 물이 내남에서 기린내를 이루고, 토함산에서 발원한 남천과 오봉산을 중심으로 건천, 서면지역에서 흘러드는 모량천이 합수해 서천내가 된다. 또 동대봉산 황룡골에서 발원한 알천(북천)이 합류하면서 형산강을 이루어 북쪽으로 곧장 흐르다가 안강의 칠평천과 기계천이 합수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동쪽으로 물길이 급선회하면서 형산과 제산 사이에 난 좁은 물길을 거쳐 포항 앞바다로 빠져나간다.
오금(吾琴)은 형산강이 기계천과 합수하면서 동쪽으로 급하게 돌아드는 지점에 자리한 마을로 형산강을 가로질러 놓인 강동대교의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오금산에 의지해 펼쳐져 있다.
경주에서 7번국도를 따라 포항으로 가다가 호명리를 지나 형산강변을 따라 오른쪽으로 급하게 굽어진 도로를 돌아들면 저만치에 형산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과 함께 형산강을 가로질러 놓인 강동대교가 나타나고 그 오른쪽으로 산기슭에 의지해 옹기종기 펼쳐진 마을이 오금이다.
본래 안강현 지역으로 낙산과 오금, 가창골의 3개 마을로 나누어져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병합해 강동면 오금리로 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인동, 양동과 인접해 있으며, 동쪽은 국당, 서쪽은 호명, 남쪽은 왕신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시청에서 16km, 19분 거리.
낙산 오금 깐창골 3마을 병합
형산강변에서 현재 경신공업이 들어선 곳까지가 낙산(오금1리)으로 ‘석두말’, ‘못골’, ‘노방골’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경주공원묘원 가는 길을 따라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금’이 있고, 오금은 다시 ‘용당’(오금2리)과 ‘샘골’(오금3리)로 나뉘고, 가장 안쪽 왕신과의 경계지점에 ‘깐창골’(오금4리)이 자리하고 있다.
오금은 마을 뒷산의 다섯 골짜기가 마치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하여 ‘오금(吾琴)’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형산강이 휘어져 안으로 굽어드는 모양이 마치 오금(무릎 안쪽) 같다고 하여 ‘오금’ 또는 ‘오구미’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는 신라시대 5각간(角干)이 동시에 배출된 곳이라 ‘오각골’ 또는 ‘오박골’이라고 부른던 것이 ‘오금’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지막히 길게 늘어선 오금산을 따라 산기슭에 길게 늘어선 이 마을은 오금1리에서 오금4리까지 모두 합하면 약 200가구정도이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는 이 마을은 정구지와 사과 등 과수를 재배하고, 한우도 약 200두 정도 기른다.
오금1리는 60가구에 153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고, 오금2리 44가구, 95명, 오금3리 69가구, 155명, 오금4리 45가구, 114여명 등으로 총 200여 가구에서 5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유복수(96 안오댁), 김상금(96 이동댁) 할머니로 두분이 동갑나기이다.
동제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1리에서 4리까지 당나무도 한 그루도 없다고 한다.
신라 때 5각간 배출한 ‘오각골’
낙산(落山 오금1리) 형산강변의 7번국도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다. 오금 서북쪽 산 밑에 자리하고 있다. 형산강에 인접한 마을로 옛날 이 마을의 뒷산이 형산강 때문에 떨어져 나갔다고 하여 ‘낙산(落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석두말, 못골, 노방골을 합해서 낙산이라고 한다.
석두말 옛날에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는데 그때 이곳에 나루터가 만들어지고 그 머리쪽이 된다고 하여 ‘선두골’, ‘선두마을’, ‘선두곡(船頭谷)’이라 부르던게 변하여 ‘석두말’, ‘석두마을’ 또는 ‘석두머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적비가 있는 자리로 약 30가구가 살았는데 1977년도에 지금의 못골로 모두 이주했다.
노방골 옛날에 노씨(盧氏)와 방씨(方氏)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노방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은 노씨, 방씨는 한 집도 없다.
오금(吾琴, 五今) 오구미, 오각골, 오박골이라고 하며, 낙산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의 다섯 골짜기가 거문고처럼 생겨 ‘오금’이라 했다는 이야기와 형산강이 안으로 굽어드는 곳이라 ‘오금’ 또는 ‘오구미’라 했다고도 한다. 또 5각간(角干)이 배출하여 ‘오각골’, ‘오박골’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윗마을을 ‘상오(上吾, 上五)’, 아랫마을을 ‘하오(下吾, 下五)’라고 부른다.
용당(龍堂, 龍塘 오금2리) 마을 뒷산이 용의 형상같이 생긴 것에 유래했다 하며, 또 용이 승천했다는 용못이 있어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하오(下吾, 下五)라고도 하며, 오금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
샘골(오금3리) 새미골이라고도 하며, 오금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위쪽에 샘이 있어 ‘샘골’ 또는 ‘새미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우물이 많았다. 상오(上吾, 上五)라고도 하며, 오금 위쪽에 있는 마을.
깐창골(오금4리) 샘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관에서 지은 곡식창고가 있었으며, 가죽나무가 우거져 있어, 가죽나무 가(柯)자와 창고 창(倉)자를 써서 ‘가창(柯倉)’이라 부르던 것이 ‘깐창골’, ‘작동(鵲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창고가 신라 때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가죽나무도 많았다고 한다. 창고가 있던 곳은 지금 논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기와, 주춧돌 등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깐창골의 윗마을을 ‘웃각단’, 깐창골의 아랫마을을 ‘아릿각단’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마을어귀에 못이 있는 곳이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영천최씨 집성촌으로 45가구 중에 영천최씨가 30가구에 이른다.
단지수혈로 부모 봉양한 효자
사미정(思美亭)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사미헌(思美軒) 최달장(崔達章)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깐창골에 세운 정자이다. 공은 영천인으로 효성이 지극해 부모님 병환에 단지수혈했고, 3년 시묘살이를 했다. 조선 정조 15년(1791)에 정려(旌閭) 받아 정려각을 세웠으나 6.25 때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정자를 다시 세웠다. 정자에는 금호정사(琴湖精舍)라는 현판도 붙어있다. 금호정사 기문은 여강 이채원(李綵源)이 썼다. 정면4칸에 측면 2칸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배치했다. 팔작지붕인데 현재는 수리해서 오른쪽 기둥 하나를 갈았다. 골기와를 벗겨내고 강판기와를 새로 이어놓았다.
졸암정(拙庵亭) 경주 손씨들이 선대를 추모하기 위헤 1975년에 지은 정자로 기문은 손석원(孫錫遠), 상량문은 남병기(南炳基)가 썼다. ‘拙庵’의 두 글자는 조선 정조 때의 대학자 변암 채제공이 손수 쓴 글씨라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 양쪽은 방을 배치했다.
금명정(琴土 鳥亭) 경주손씨 금초공(錦樵公)이 수학하던 곳에 후손들이 1976년에 지은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가운데 2칸은 마루, 양쪽은 방을 배치했다. 기문은 남병기(南炳基)가 썼다. 내부에 붙어 있는 삼희재(三希齋) 기문은 3종질 손후익(孫厚翼)이 썼다.
설단비(設壇碑) 조선 인조 때 통정대부를 지낸 동래인 정영백(鄭永伯)을 제향하는 곳이다. 공의 무덤이 황해도 천덕산(天德山)에 있어 수십 년 동안 망배(望拜) 행사를 해오다가, 1989년 후손들이 초혼(招魂)하여 낙산에 단비를 세우고 해마다 제향을 한다. 공의 자는 석윤(錫胤)으로 조선 인조 때 안악군수, 의주부윤에 이어 통정대부를 지냈다.
죽하고 바꾼 ‘죽도가리’
오금산(五琴山) 오금마을 뒷산으로 그 밑에 오각동(五角洞)이 있다. 신라 때 이 마을에서 다섯 명의 각간(角干)이 나왔다고 전한다.
단지산삐알 가창골 서쪽 못 옆의 산. 매밧골 서쪽에 있는 단지처럼 생긴 산으로 이곳에서 옛날 토기가 많이 출토됐다고 한다.
속등 큰골 위쪽의 산 속에 있는 등성이.
섶밭 깐창골 뒷산으로 옛날에 섶이 많았다고 한다.
갈대밭골 옛날에는 갈대가 우거져 있던 골짜기로 지금의 깐창골 못안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금도 갈대가 일부 자생하고 있다.
강막골 샘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칡바우골 어귀에 있다.
구신암골 매밧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우와골 앞에 있다. 소가 누운 형국의 우와골 앞에 있어 구시(구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너굴골 너구리가 살던 굴이 있는 골짜기로 샘골마을 서쪽 큰골에 있다.
놋방골 낙산 뒤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 노장군이 살았다고 한다. 또 노씨와 방씨가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밭골 대나무가 울창한 골짜기로 깐창골 남쪽에 있다. 왕신과 경계지점이다.
도둑골 옛날에 도둑이 숨어 있었다고 하는 깊은 골짜기로 큰골 남쪽에 있다.
도청골 용당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매밧골 깐창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골 안에 있다.
버뭇골 원당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 골짜기 너머가 호명리의 범우골이 된다.
번덩골 강막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샘골과 깐창골 사이에 있다.
붕에골 큰골 안 주칫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마치 붕어처럼 생겼다고 한다.
길 밑에 있는 ‘지랄골’
비단바우골 샘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비단바우가 있다고 한다.
삼밭골 옛날 삼밭이 있던 골짜기로 칠밭골 동쪽에 있다.
샘이난골 오금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샘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손대밭 손(좁은) 대나무밭이 있었던 용당 서쪽의 골짜기이다.
안풍젯골 새미골 안쪽 골짜기이다. 강막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
약물탕골 옛날 속병에 좋은 약물이 났었던 골짜기로, 큰골 서북쪽에 있다.
우와골 소가 누운 형국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깐창골 뒤산 골짜기이다.
웅굴골 강막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웅굴(우물)이 있다.
원당골 손대밭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원당(院堂)이 있었다. 시원하고 경치가 좋아 고을의 원님이 지나가다가 이곳에서 쉬었다고 한다. 지금도 경치가 좋다.
적은골 깐창골 서남쪽의 작은 골짜기.
적은 붕에골 붕에골의 작은 골짜기로 큰골 안에 있다.
주칫골 주치(지치)가 많았다고 하는 골짜기로 큰골 동쪽에 있다.
지랄골 옛 길(경주에서는 ‘질’이라고 한다)의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큰골 서쪽에 있다.
집골 큰골 서쪽에 잇는 골짜기로 집이 있었다고 한다.
채봉골 옛날에 주검을 임시로 보관하던 채봉(초빈)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강막골의 서북쪽에 있다.
칠밭골 갈대밭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칡이 많이 난다.
큰골 샘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이 깊어서 99골짜기라고 한다. 8만4천여 평에 이른다고 한다.
흐리거나 비오면 배 짜는 소리
비단바우 큰골 안 비단바우골에 있었다고 하는 바위로, 바위가 비단처럼 고왔는데, 6.25때 굴러 떨어져 부서져 버렸다고 한다. 푸조장을 오가는 길이 있었는데 흐리거나 비가 오면 배 짜는 소리가 났는데 누가 그것을 깼다고 한다.
석두머리 석두말 부근에 있는 들로, 선두머리라고도 한다.
굼논 깐창골 북쪽에 있는 낮은 논으로 바닥이 깊고 물이 늘 괴어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지금은 돋우어서 논을 하고 있다.
깐창골못 깐창골 서쪽에 있는 못으로 ‘작동지(鵲洞池)’라고도 한다.
뒷들 낙산에서 용당까지 이어진 들이다. 샘골마을 뒤에 있는 들.
모사릿들 깐창골 서북쪽에 있는 들로 못의 밑이 된다. 옛날에 창고가 있던 자리이다. 깐창골 못에 물을 이용한다고 해서 모사리들이다.
바댓들 새골 동쪽에 있는 들로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는 이야기와 들이 바다같이 넓어서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해평(海坪)’이라고도 한다.
방구배미 모사리들에 있는 논으로 고인돌로 추정되는 커다란 바위가 박혀 있다. 현재는 바위 일부분만 논바닥에 드러나 있다.
밖들 깐창골 북쪽에 있는 들로 안들 바깥쪽이라 외평(外坪)이라고도 한다.
안들 밖들 안쪽에 있는 들로. 내평(內坪)이라고도 한다.
웅굴배미 죽도가리 동쪽의 논으로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깐창골 마을 산 아래에 있다.
죽도가리 옛날 흉년이 들었을 때, 죽 한 동이와 맞바꾸었다고 하는 깐창골 서쪽에 있는 논. 500평 정도인데 수십 도가리가 되었다고 한다.
쥐논 모사릿들에 있는 논이다.
큰대밭 강막골 서쪽 골짜기로 손대밭 옆에 있다. 큰 대나무밭이 있었다고 한다.
낙산 배수로, 안들 농수로, 깐창골못 여수로
오금은 형산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7번 국도에 인접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고, 대체로 넓은 들판을 끼고 있어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오금4리의 경우 경로당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어 인근마을(왕신리) 사람들까지 놀러 온다고 한다.
이 마을 주민들의 경우 특별한 숙원 사업은 없고, 마을 배수로 준설과 농로, 농수로 정비를 바라고 있었다. 낙산마을의 경우 지난해 내린 비로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배수로가 토사로 많이 메워져있어 이를 준설해야한다. 그리고 오금 안들에 농로와 농수로가 정비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또 깐창골 못의 여수로가 훼손되어 있어 이에 대한 보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최정석(83·전 경상북도교육위원회 의장), 손경호(79·전 경상북도의회 의장), 정수성(62·전 1군사령관 예비역 대장) 등이 있다.
마을 취재에 협조해주신 손철익(오금1리) 이장과 전경산(80·깐창골)님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