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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대중 속의 부처
-영원히 살아 중생과 함께한 스님 범일국사-
平常心是道(평상의 마음 이것이 도이다.)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는 신라시대 승려로 강릉에서 태어나 중국에 가서 도를 터득하였다. 나중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굴산사(崛山寺)라는 절에서 평생을 마쳤다. 신라의 고승 중 한 분으로 몇 번에 걸쳐 국사를 제안 받았으나 사양하고 평범한 중으로 일생을 마친 분이다.
그의 일생은 그렇게 평범한 스님으로 살았지만, 실상 그의 행적을 보면 정말 신이로 가득하다. 지금은 세계의 이목을 받으면서 최고의 세시풍속이며 민속신앙의 주인공으로 자리하고 있다. 바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강릉단오제의 주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범일국사를 따라 여행을 해보자.
범일국사를 만나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범일국사가 평상시에 머물고 있는 대관령으로 가는 것이고, 둘째는 강릉단오제가 열리고 있는 현장으로 따라가는 것이며, 셋째는 남대천 옆에 마련한 상설전시 및 공연을 하고 있는 단오관으로 가면 된다. 모두 그 나름의 특색을 띠고 있어서 셋 다 새롭다. 추천을 하라고 하면, 모두 하고 싶다. 여기서는 앞의 두 곳을 소개한다.
그래도 범일국사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려면 대관령으로 가는 것이 좋다. 이것이 대관령 국사성황사의 매력이다. 대관령은 영동과 영서를 가로지르는 가장 핵심이 되는 태백준령이다. 그 때문에 태백준령 어디를 가나 느낄 수 있는 매력 외에 동해바다와 넓게 펼쳐진 산맥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것도 찬바람을 몸으로 맞으면서 말이다. 그런 일상의 자연이 주는 느낌 외에도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대관령에 있다. 바로 범일국사와 김유신 장군이 죽어서 신이 되어 이곳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두 신이 계신 산신각과 성황당이 양쪽으로 버티고 있고, 입구에는 수구당이 있어 부정을 막아준다. 그리고 두 제당 가운데 뒤로는 용신당이 있어 일 년 내내 샘이 솟아나고 있어 신비를 더한다. 여기를 오르면 어느 누구도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산과 신당이 주는 기운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유신 장군은 죽어 대관령 산신이 되어 강릉을 수호해 주고, 범일국사는 죽어 대관령 성황신이 되어서 역시 강릉을 수호해 주신다. 옛날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싸울 때 도움을 주신 분도 범일국사이다. 강릉 태수 왕순식이 대관령을 넘을 때 승사(僧祠), 곧 스님을 모시는 사당이 있어 제사를 지냈더니, 태조의 꿈에 나타나 현몽을 하고 실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했단다.
범일국사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복을 받으려면 이무래도 단오제의 현장을 찾는 것이 좋다. 강릉단오제는 신주미(神酒米)를 모으면서 시작한다. 신주미는 강릉사람들이 정성을 바치는 쌀이다. 그것이 모여 2010년에는 무려 200가마를 넘었다. 음력 4월 5일에 신주를 빚는다. 이 신주는 단오 때 신에게 올릴 술이라 그 정성이 대단하다. 부정을 물리치고 한지를 입에 물어 합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한다. 단오신주를 마시면 복을 받고 건강하다고 한다. 술이 익을 때를 기다려 4월 15일이 되면 드디어 대관령으로 가서 산신제를 지내고 성황제를 지낸다. 강릉단오제는 강릉시장이 제관이 되어 온 강릉시민이 함께 하기에 그 규모가 엄청 크다. 이날 사람들은 성황제를 지내고 신목(神木)에 성황신을 모시고 대관령 옛길을 따라 내려온다. 신을 모시고 내려오는 행로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꾸불꾸불 길을 따라 수많은 인파가 줄을 잇는다. 위패를 모시고, 신목을 들고, 구경꾼과 무당과 제관들이 한데 어우러져 신의 행차를 따라 무리를 짓는다.
반정이라는 곳에 이르면 도로에 큰 트럭이 준비하고 있어 거기서부터는 신께서 트럭을 타고 내려온다. 신의 행차는 곧바로 남대천 단오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다가 가장 먼저 머무르는 곳은 구산서낭당이다. 이곳은 대관령 성황신과 여성황신이 만나 낳았다는 작은 아들이 성황신으로 있는 곳이다. 큰 아들이 머물고 있던 큰 서낭은 새마을운동을 할 때 대통령의 명으로 미신이라고 철거했단다. 많이 아쉽다.
구산서낭당을 지나면, 성산초등학교 교정에 와서 점심을 먹고 노래자랑도 하면서 한바탕 논다. 신을 즐겁게 하는 행위이다. 그 다음 범일국사가 태어난 곳인 학산서낭당으로 온다. 이곳에 신의 행차가 당도하면 <영산홍>이라는 신맞이노래를 노인들이 서서 부른다. 아주 독특하다. 이 노래는 범일국사를 맞이하는 노래이다. 이 마을에서 전승하는 <오독떼기>라는 민요도 범일국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 그 과정을 따라 부르는 민요이다. 학산서낭당은 솔밭이 우거진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노천서낭당이다. 이곳에 이르면 준비한 제물을 차리고 서낭제를 지내고 역시 무당들이 한 바탕 굿을 하면서 논다. 학산서낭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범일국사의 어머니가 물을 마시고 햇빛을 받아 범일국사를 잉태했다는 석천(石泉)이 있고, 학바위도 있다. 역시 굴산사도 이곳에 있다.
이어서 여성황이 있는 성황당에 도착하면 두 신을 합위 시킨다. 이곳에서는 행사가 꽤나 여러 개 열린다. 이곳에 두 신을 모셨다가 5월 3일이 되면 남대천 단오장으로 신을 모셔 단오행사를 치른다. 5월 8일 송신제를 지내기까지 이곳에서 굿과 난장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신의 행차가 내려올 때 횃불을 든 사람들이 줄을 이어서 마치 영산홍이 활짝 핀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축제의 포인트는 뭐니 해도 난장이다. 신과 인간이 함께 어울려 질펀하게 놀아야 한다. 신을 강림시켜 즐겁게 해드려야 안녕과 복락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굿과 관노가면극을 비롯한 각종 행사를 하면서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흥겹게 노는 것이다.
이처럼 강릉단오제는 강릉사람들의 축제이다. 신과 인간이 어울려 난장을 벌리며 일상을 벗어나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노는 행사이다. 강릉사람들에게 안녕과 복락을 주고 외침으로부터 보호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러면 이런 단오행사는 어떻게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여태 전승이 되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범일국사의 생각이 강릉사람들에게 전이된 까닭이다. 아니면 범일국사처럼 어디 얽매이지도 않고 평상심을 누리고자 하는 마을일 게다. 범일의 행적은 조당집(祖堂集)(998년)에 전한다. 그 중의 핵심은 스승 제안대사와 나눈 선문답이다.
염관제안 대사를 뵈니 대사가 이렇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선사께서 대답하였다. “동국에서 왔습니다.” 대사께서 다시 물었다. “수로로 왔는가, 육로로 왔는가?” “두 가지 길을 모두 밟지 않고 왔습니다.” “그 두 길을 밟지 않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가?” “해와 달에게 동과 서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 대사께서 칭찬하였다. “실로 동방의 보살이로다.” 선사께서 물었다. “어찌해야 부처를 이룹니까?” 대사께서 대답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나니 그저 더럽히지 말라. 부처란 견해, 보살이란 견해를 짓지 말라.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니라.” …어떤 이가 물었다. … “어떤 것이 대장부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했다. “부처의 계급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 하지 말라.”
이 말은 요약하면,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다. 사람은 모두 개성이 있다. 남을 따라 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스스로 진실함을 따라 가면 그것이 도이니, 왜 이것저것 얽매이는가. 이미 나는 부처인 것을 말이다.
***************<전체 자료>
진정한 대중 속의 부처
-영원히 살아 중생과 함께한 스님 범일국사-
平常心是道
1. 범일국사설화
범일국사(梵日, 810~889) 설화는 삼국유사(1281), 증수 임영지(1933), 명주6호(1957), 강릉의 역사 변천과 문화(1961), 임영지 강릉․명주지(1975), 태백의 설화(1977) 등에 실려 전하고 있다.
<鶴바위와 泛日國師>
옛날 한 양가의 처녀가 굴산(崛山)에 살고 있었다. 나이 많았는데도 마땅한 혼처가 없어 시집을 못가고 지냈다. 하루는 이 처녀가 석천(石泉)에 물을 길러 갔다가 표주박에 햇빛이 유난스럽게 비쳐오기에 아무 생각 없이 그 물을 떠 마시었다. 그런 후 날이 갈수록 몸이 달라지더니 14삭 만에 뜻밖에도 한 옥동자를 낳았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그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부모들도 놀라 이는 집안을 그르칠 큰 변고라고 하여 부끄럽고 당황한 끝에 그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몰래 바위 밑에 버렸다.
죄 없는 한 어린 생명을 버리기에는 어미 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버린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버린 곳에 가 보았다. 죽었어야할 아이는 포대기에 싸인 채 그냥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이에 놀란 어머니는 하룻밤을 새워 가면서 어린애의 둘레를 살피고 있었다. 차가운 눈 속에서 밤을 새우며 기다리는데 자정이 되어갈 무렵, 백학 한 마리가 날아와 두 날개로 아이를 덮어주면서 하룻밤을 재워 주고는 새벽이 되자 붉은 열매 세 알을 넣어주고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 신비로운 사실을 본 어머니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대로 돌아와 그 다음날 다시 지켜보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이는 제대로 자라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집안에까지 알게 되었다. 이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닐 것으로 알아차리고는 곧 다시 데리고 와 집에서 기르기로 하였다.
자라는 동안 이 아이는 종종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서러움을 받곤 하였다.
7세가 되던 어느 날 어머니께 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물었다. 어머니는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말을 듣던 아이는 어머님께 말씀을 올리길 “불효자 반드시 어머니를 위하여 큰 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이니 근심 하시지 마시고 또 나를 찾지도 말아 주십사.”고 일렀다.
그는 경주로 떠났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늙고 그 아이는 국사(國師)라는 승가(僧家)의 최고위를 갖고 돌아와 어머니를 다시 봉양하면서 강릉에 굴산사(崛山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이 기른 바위를 학바위라 했고 이 아이가 곧 범일국사인데 범일(泛日)이란 해가 떠 있는 바가지의 물을 마신 데에 연유된 것이라 한다.
이 범일국사는 강릉에 살았는데 마침 왜란이 일어났다. 국사가 대관령에 올라 술법을 쓰니 산천초목이 모두 군인으로 변해 왜군이 감히 접근치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렇게 강릉을 수호한 범일국사는 죽어서 대관령의 성황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굴산사가 융성했을 때는 승려가 2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태백의 설화)
<정씨집 딸- 대관령 국사 여성황>
강릉에 정씨라는 성을 가진 집에 과년한 딸이 있었다. 혼처가 마땅치 않아 나이 차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있었다. 하루는 정씨가 꿈을 꾸었는데 대관령 성황신이 나타나 내가 이 집에 장가를 오겠노라고 청했다. 정씨는 이 말을 듣고 사람 아닌 성황신이 내 딸을 달라니 나는 사위를 삼을 수 없노라고 거절했다.
그런 후 어느 날 정씨집 딸이 노랑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뒷마당에 앉아 있는데 난 데 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이 처녀를 업고 달아났다. 처녀를 업고 달아난 호랑이는 대관령 성황신이 보낸 사자로서 그 처녀를 모셔 오라는 분부를 받고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대관령 성황신은 정씨집 딸을 데려다가 자기의 처로 삼았던 것이다. 딸을 졸지에 잃어버린 정씨 집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져 온갖 방법으로 딸을 찾기에 힘을 썼다.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집 딸이 없어지던 날 밤에 호랑이가 와 색시를 데리고 가는 것 같더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정씨는 전일의 꿈도 있고 해서 대관령 국사 성황신 계신 곳에 갔다. 거기에 찾던 딸이 국사성황신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몸은 죽어있었다.
그러나 처녀의 시신은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처녀의 화상을 그려 성황신 옆에 붙이면 어떻겠냐고 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세웠더니 성황신 곁에 있던 처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이가 곧 대관령 국사 여성황신이다.
그리고 전해 오기로 정씨가는 현 최돈목 씨 집이라고 한다.(태백의 설화上)
<범일국사의 이변>
굴산조사(崛山祖師) 범일(梵日)이 태화(太和, 당나라 문종의 연호)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왼쪽 귀가 없어진 중 하나가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한다. “나도 또한 고향 사람으로, 내 집은 명주(溟州)의 경계인 익령현(翼嶺縣, 강원도 양양)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다음 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 내 집을 지어주어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는 총석(叢席, 많은 승려들이 모여 있는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 중국의 승려)에게서 법을 얻고, 회창(會昌, 당나라 무종의 연호) 7년(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崛山寺)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다.
858년 2월 보름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한다. “옛날에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와 함께 약속이 있어 이미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어 수십 명 사람을 데리고 익령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래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 하고 한다. 그 여인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나이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께 말한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어서 꺼내보니 왼쪽 귀가 끊어져 있고 전에 보던 중과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이었다. 이에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洛山) 위가 제일 좋다고 하므로 여기에 불전(佛殿) 세 칸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삼국유사<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2. 범일국사의 생애
범일국사에 대한 최고의 기록은 998년에 나온 조당집(祖堂集)에 있는 내용이다. 이곳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염관(鹽官)의 법을 이었다. 휘는 범일(梵日)이며, 계림의 호족인 김 씨였다. 조부의 휘는 술원(述元)이며, 벼슬이 명주도독에까지 이르렀는데 청렴 공평하게 시속을 살피고, 너그러움과 용맹으로 사람을 대하니, 밝은 소문이 아직도 민요에 남아있고, 그 밖의 것은 전기에 갖추어 전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문 씨는 여러 대를 내려오는 호귀한 씨족으로서 세상에서 부녀의 모범이라 불렀는데 태기가 있을 무렵에 해를 받아드리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원화 5년 경인 정월 10월에 태속에 있기 열석 달만에 탄생하니, 나계가 있어 특수한 자태이며 정수리에 구슬이 있어서 이상한 모습이었다.
나이 15세가 되어 출가할 뜻을 품고 부모에게 사뢰니, 양친이 함께 이런 말을 하였다. “전생의 좋은 인연을 심은 결과니, 그 뜻을 굽힐 수 없다. 네가 먼저 제도를 받거든 나를 제도해 다오.” 이에 속복을 벗고 부모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았다. 나이 스무 살에 서울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청정한 행을 두루 닦되 부지런하고 더 부지런 하여 출가인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동학들의 모범이 되었다.
태화 연간에 이르러 혼자서 맹세하기를 “중국으로 들어가 구법하리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조정에 들어 왕자 김의종 공에게 그 뜻을 펴니 공이 선사의 착한 포부를 소중히 여기는 뜻에서 동행하기를 허락함에 그 배를 빌려 타고 당나라에 도달하였다.
이미 숙세의 원을 이루었으므로 곧 순례의 길에 올라 선지식을 두루 참문하던 끝에 염관제안 대사를 뵈니 대사가 이렇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선사께서 대답하였다. “동국에서 왔습니다.” 대사께서 다시 물었다. “수로로 왔는가, 육로로 왔는가?” “두 가지 길을 모두 밟지 않고 왔습니다.” “그 두 길을 밟지 않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가?” “해와 달에게 동과 서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 대사께서 칭찬하였다. “실로 동방의 보살이로다.”
선사께서 물었다. “어찌해야 부처를 이룹니까?” 대사께서 대답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나니 그저 더럽히지 말라. 부처란 견해, 보살이란 견해를 짓지 말라.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니라.” 선사가 이 말씀에 활짝 깨닫고 6년 동안 정성껏 모시다가 나중에 약산에게 가니 약산이 물었다. “요즘 어디서 떠났는가?” 선사께서 대답했다. “강서에서 떠났습니다.” “무엇하러 왔는가?” “화상을 찾아왔습니다.” “여기는 길이 없는데 그대가 어떻게 찾아왔는가?” “화상께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신다면 저는 화상을 뵙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에 약산이 찬탄하였다. “대단히 기이하구나. 대단히 기이하구나. 밖에서 들어온 맑은 바람이 사람을 얼리는 구나!”
그 뒤로 마음대로 행각을 다니다가 멀리 서울에 들리니 때마침 회창 4년의 사태(844년 중국 무종이 불교를 박해한 법난)를 만나 중들은 흩어지고 절은 무너져 동분서주하여 숨을 곳이 없었다. 때마침 하백의 인도를 따라가다가 산신의 마중을 받아 상산에 숨어서 홀로 선정을 닦는데, 떨어진 과일을 주워 배를 채우고 흐르는 냇물을 마셔 목마름을 달래니, 행색이 바짝 마르고 기력이 부쳐 감히 걸을 수가 없게 된 채로 반 해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꿈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이제 떠나시지요.” 이에 억지로 걸으려 했으나 도저히 힘이 미치지 못하더니 어느 결에 짐승들이 떡과 먹거리를 물어다가 자리 옆에다 던지니 일부러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주워 먹었다. 나중에 맹세하기를 “소주에 가서 조사의 탑(혜능의 탑)에 예배하리라.”하고 천 리를 멀다 않고 조계에 다다르니, 향기 어린 구름이 탑묘 앞에 서리고, 신령한 학이 훌쩍 날아와 누대위에서 지저귀니 절의 대중이 모두 이렇게 수근 거렸다.
“이러한 상서는 실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필시 선사께서 오신 징조일 것입니다.” 이때 고향에 돌아와 불법을 펼 생각을 내어 회창 6년 정묘 8월에 다시 뱃길에 올라 계림정에 돌아오니, 정지 위를 비치는 달빛은 현토의 성에 흐르고 교교한 여의주의 빛은 청구의 경계를 끝까지 비쳤다.
대중 5년 정월에 이르러, 백달산에서 연좌하고 있으니, 명주의 도독인 김공이 굴산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여 한 번 숲 속에 앉은 뒤로는 40여 년 동안 줄지은 소나무로 도를 행하는 행랑을 삼고, 평평한 돌로써 좌선하는 자리를 삼았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했다. “6대에도 잃은 것이 없느니라.” “어떤 것이 대장부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했다. “부처의 계급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 하지 말라.”
함통 12년 3월에는 경문대왕이, 광명 원년에는 헌강대왕이 모두 특별히 모시는 예를 다하여 멀리서 흠앙하였고, 국사에 봉하기 위해 모두 중사를 보내어 서울로 모시려 했으나 선사께서 오랫동안 곧고 굳은 덕을 쌓았기에 끝내 나아가지 않더니, 갑자기 문덕2년 기유 4월 끝에 문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먼 길을 떠나련다. 이제 너희들과 작별을 고하니 너희들은 세상의 감정으로 공연히 슬퍼하지 말라. 다만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종지를 추락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5월 1일에 오른 겨드랑이를 대고, 발을 포개고 굴산사의 상방에서 입멸하시니, 춘추는 80세, 승람은 60세, 시호는 통효, 탑호는 연휘였다.(한글대장경, 조당집제17권, 동국역경원 역, 1986.)
3. 범일국사와 단오제
강릉단오제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제 제13호로 단오제의 중심신격은 대관령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와 대관령국사여성황신인 정 씨녀이다.
강릉단오제는 강릉사람들이 봉정한 신주미(2010년 200가마 모임)로 음력 4월 5일 신주를 빚으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단오는 음력 4월 15일 대관령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를 모시고 내려오면서 시작한다. 이날 강릉시장을 비롯한 각 기관장과 무당들이 대관령에 올라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신에게 제를 올리고, 이어서 성황신인 범일국사 신께 제를 올린다. 제를 지내면서 신대를 꺾어 오색 천과 소원지를 걸어 앞세우고 산을 걸어서 반정이라는 곳까지 내려온다.
반정부터는 트럭을 이용하여 내려온다. 내려오면서 처음 들리는 곳은 대관령 밑에 있는 구산 서낭당이다. 구산서낭당에는 범일국사와 정씨녀의 작은 아들이 구산의 성황신이 되어 머문다고 한다. 큰 아들은 구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을 할 때 없앴다고 한다. 옛날에는 횃불을 들고 큰서낭에서 제사를 지내고 시내로 줄을 이어 들어갔다.
이어서 구산서낭당에서 한바탕 굿을 하면서 놀고는 이동을 해서 성산초등학교 교정으로 간다. 이곳에서는 범일국사성황신께 점심을 드리고 노래자랑을 하면서 신을 즐겁게 해드린다.
성산초등학교에서 점심을 먹고는 학산서낭당으로 향한다. 학산은 범일국사의 생가가 있던 곳이고, 석천의 물을 마시고 그의 어머니가 범일국사를 잉태한 곳이다. 아울러 굴산사를 지어 불법을 전한 곳이기도 하다. 학산서낭당으로 범일국사의 신위를 모신 일행이 오자 마을 노인들이 몇 명 나와서 신맞이 노래인 영산홍을 불렀다. 이곳 서낭에서도 범일국사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면서 한바탕 놀았다.
학산서낭에서 행사가 끝나고, 이어서 여성황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두 신을 합위 시킨다. 무당들의 연행이 한동안 진행되었다.
음력 5월 3일 남대천 단오장으로 신을 모시는 영신제를 지낸다. 이어서 정씨가인 여성황의 생가에서 제를 지내고, 남대천 단오장으로 두 신을 모시고 가서 단오를 행한다. 5월 8일 송신제를 지내기까지 매일 시장이 참여해서 조전제를 시작으로 하루종일 굿을 하면서 신을 즐겁게 대접한다.
4. 강릉인이 생각하는 범일국사- 대중 속의 부처, 강릉을 불국토로 현세의 극락세계를 만들고자 함, 범일국사에 의지함
●신라 말 고려 초의 범일국사 이적
태조가 신검을 토벌할 때 순식이 명주로부터 그 군사를 거느리고 회전하여 이를 격파하니 태조가 순식에게 말하기를 “짐이 꿈에 기이한 스님이 갑사(甲士) 3천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이튿날 경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는 그 꿈의 보응인가 하오.” 순식이 말하기를 “신이 명주에서 군사를 데리고 출병하여 대관령에 이르렀더니 이상한 승사(僧祠)가 있어 제를 올리고 기원했습니다. 주상께서 꿈을 꾸신 것은 반드시 이것일 것입니다.” 태조가 기이하게 여겼다.(고려사열전 권5, 왕순식 조.)
<관노가면극>
강릉단오제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민속연희로 관노가면극은 춤과 동작을 위주로 한 국내 유일의 무언가면극이다. 옛날에는 관노라는 특수한 계층에 의해 연희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민관이 공동으로 치루어 온 단오제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내용도 다른 지역과 달리 풍자보다는 풍요와 공동체의 질서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2명, 장자마리 2명이며, 그 외 악사들이 있다.
놀이 내용은 모두 다섯 마당으로 연희되고 있다.
첫째마당은 배불뚝이 장자마리가 장난스럽게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놀이판을 연다.
둘째마당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가 등장하여 점잖지만 능청맞은 양반광대와 수줍은 소매각시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아름답게 이어진다.
셋째마당은 험상궂은 시시딱딱이가 등장하여 한바탕 놀이를 끝내고 양반광대와 소매각시 둘만의 사랑을 훼방하고 강제로 소매각시를 빼앗는다.
넷째마당은 소매각시의 자살소동이다. 양반은 빼앗겼던 소매각시를 다시 찾아오지만, 소매각시의 정절을 의심하자 억울한 소매각시가 양반의 수염에 목매어 자살을 시도한다.
다섯째마당은 화해의 마당이다. 소매각시가 다시 살아나 정절과 사랑을 확인하고 모든 사람들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관노가면극 소개 팸플릿)
<오독떼기>
학산리는 전형적인 농촌으로 학산오독떼기라는 모심기부터 타작소리까지 이어진 민요가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 노래는 신라시대 때부터 전승되었다고 한다. 1988년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사람들은 오독떼기 민요를 전승하는 것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에 가면 전수관도 있고, 농사일로 바쁜데도 불구하고 틈틈이 전수관에 나와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다. 강릉 특유의 민요가락이 오독떼기에 담겨 있다.
오독떼기는 민요의 이름인데요. 디지털강릉문화대전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오독떼기’라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째로 옛 신라 때 화랑의 무리들이 부르던 노래가 곡조만 살아서 전하는 것이란 설이 있으며, 둘째로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독(五瀆, 다섯 개의 강 또는 도랑)을 ‘떼기[開拓]’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셋째로는 ‘오’는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뜻이고, ‘들떼기’는 들판을 개간한다는 뜻에서 생겼다는 설이 있으며, 넷째로 다섯 번을 꺾어 부르기 때문에 오독떼기라 했다는 설과 다섯 곡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곡떼기’라 하던 것이 오독떼기로 정착했다는 설 등이 있다.
동해 동천 돋는 해는 서해서산으로 넘어간다.
점심 참이 진다 말고 일심 받아서 매어주오.
머리 좋고 실한 처자 줄뽕남에 걸 앉았네
줄뽕 참뽕 내 따주마 백년언약 나와 맺자
술 맛좋고 딸 둔 집에 아침 저녁 놀러가세
너로구나 너로구나 오매불망 너로구나(하략)
<영산홍, 산유화가>
단오제를 지낼 때 강릉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구산서낭당부터 학산서낭당까지 따라 걷는다. 그리고 영산홍 꽃을 바치며 신을 맞이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불교의 산화공덕(散花功德, 꽃을 뿌리며 부처의 공덕을 닦는 일 )과 같은 의미이다. 이때 횃불을 든 사람이 3천여 명 이상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횃불의 모양이 꽃밭과 같았다 한다. 일제가 이를 금했다.
이야에 에헤야 에이야 얼싸 지화자자 영산홍
이야에 에헤야 에이야 얼싸 지화자자 영산홍
영산홍로 봄바람에 가지가지 꽃피었네 지화자자 영산홍
꽃밭일레 꽃밭일레 사월 보름날 꽃밭일레 지화자자 영산홍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마라 지화자자 영산홍
여태까지 왔다는게 이제 겨우 반쟁이냐 지화자자 영산홍
국태민안 세화연풍 성황님께 비나이다 지화자자 영산홍
먼데 사람 들기 좋게 힘차게 불러주소 지화자자 영산홍
졑에 사람 보기 좋게 덩실덩실 춤을 추소 지화자자 영산홍
구산 금산 다 지나서 여서황이 저기로세 지화자자 영산홍
<굿>
무당들은 단오장에 신을 모시고 5월 4일부터 5월 8일까지 매일 단오굿을 한다. 단오굿은 문굿, 청좌굿, 부정굿, 하회동참굿, 축원굿, 조상굿, 세존굿, 군웅장수굿, 심청굿, 천왕굿, 지신굿, 성주굿, 산신굿, 손님굿, 제면굿, 칠성굿, 지탈굿, 용왕굿, 꽃노래굿, 뱃노래굿, 등노래굿, 환우굿 등을 한다.
<난장>
마시고 놀며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신을 즐겁게 하는 행위이다.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다. 사람은 모두 개성이 있다. 남을 따라 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스스로 진실함을 따라 가면 그것이 도이니, 왜 이것저것 얽매이는가. 이미 나는 부처인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