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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4:1-10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하나님 백성의 나라 이스라엘과 유다가 없어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성이 파괴되어 백성들이 유린당하고, 왕과 지도자들이 처참한 일을 겪었던 이 강렬했던 모든 일들도 이제는 시간에 의해 덮이고,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멸망시기와는 세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지금 시대 사람들은 이미 옮겨간 그 자리에서 나름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바사 왕 고레스 마음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오랜 멈춤의 시간은, 인간의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물들었던 땅이 쉬며 회복하는 시간이었지만, 정작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던 때이었습니다. 흩어진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흩어져 있었고, 유다는 회복할 수 있을 만큼 나라가 부강해지기는 커녕 멸망 이후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만약 이런 흩어진 백성을 모을 수 있는 다윗 같은 불세출 영웅이 나타난다면 가능할 수도 있으나, 이 또한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그 때에, 전혀 회복의 전조도 없었고, 준비되지 않았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주셨습니다. 이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회복의 언약을 기억하며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고레스 왕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은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주시는 감동을 고레스 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유다백성들에게도 주셨습니다. 흩어져있던 자들에게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덧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마음과 시간과 힘을 들여 살던 곳을 떠났고,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멸망과 긴 포로시기를 거쳐 너무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고, 미약하지만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도 모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좀 편해질 때도 되었을 텐데,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 재건을 위해 모인, 마음을 모으긴 했지만 한 나라의 제대로 된 일원으로가 아니라 주로 포로의 정체성으로 살았던 연약한 사람들의 연약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방해 세력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강력합니다. 그 땅에서 이미 터를 잡고 세력을 유지하며 명성을 얻었던 자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성전 재건 동참 요청과 유다 귀환민들의 거절(1-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면, 이미 약속까지 해 주신 것이면, 그리고 오랜 시간 기다렸던 일이면, 이제는 안 될 일도 잘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렇듯 계속 방해가 생깁니까? 게다가 그 방해가 겉으로 보이는 방해도 있지만, 은밀하게 속이는 방해까지 있습니다.
(1-2)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첫 말은 “함께 하자”입니다. 대적인데 마치 친구처럼 속이며 다가옵니다. 원래는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자리잡고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할 의도이지만 친구처럼 속이며 다가와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유다백성들을 놓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돌아온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이런 유혹을 뿌리치기가 참 어렵습니다. 연약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강력한 압박을 견디는 것보다 오히려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할 때일 수록 자신을 보호해 줄 것들이 없기 때문에 되도록 편한 길, 무리 없는 길, 갈등 없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평탄한 길일 줄 알았던 그 길이 더 안 좋은 길이 되곤 합니다. 이 대적들도 돌아온 유다 백성의 이런 약한 점을 이용하려 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성전 재건 공동체의 리더십은 이에 속거나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지냈다고 하지만 지역신으로서 제사드린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많은 지역의 신들처럼 그 중 하나로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 재건을 통해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공동체가 이런 우상숭배 무리와 한 배를 탈 수 없습니다. 친구처럼 다가오지만 실제로는 방해하려는 속셈을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성전을 같이 지으려 했다 하더라도,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므로 건물 외양이 아닌 마음으로 짓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는 적당히 그들과 성전 짓는 것만 함께 하자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성전도 더 편하고 빨리 지을 수 있고, 굳이 적을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전을 우선 짓고 나서 그들이 다른 마음으로 제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후에 생각하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를 위해서 과정은 적당히 타협하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타협을 하게 되면 그 곳은 이미 성전이 아니게 되어 버립니다. 진정으로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예배는 타협할 수 없는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다는 의미 이상으로 예배 공동체를 다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무너진 이유는 예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성벽이 무너진 것은 그에 대한 결과일 뿐 입니다. 따라서 성전 건물을 위해 예배를 타협하는 것은 유다가 망한 실수를 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잘 알았습니다. 예배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타협하려 하는 것을 과감하게 거절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성전 재건 방해(4-5)
(4-5)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이제 그들이 속내를 드러냅니다. 사실 그들의 관심사와 목적은 하나님도 아니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 땅에서 자신들의 권세와 실리를 유지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은밀히 파고 들어 예배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수법이 먹히지 않자 이제는 압박을 주는 것으로 방법을 바꿉니다. 4절에서 ‘손을 약하게 하다’라는 원어는 ‘의지와 의욕을 감퇴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말로 바꾸면 ‘기를 꺾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건축을 방해하다’에서 ‘방해하다’ 원어는 ‘놀라다, 두렵게 하다’라는 뜻으로 물리적으로 방해했다는 의미보다는 심리적 공포심으로 방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하자며 친구처럼 굴던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고 위축되게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5절에서 보듯이 관리들에게 뇌물까지 주어 성전의 재건을 막았습니다.
이는 실제로 꽤 오랜 시간 성전 재건이 중단되게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레스 왕의 시대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를 세어보면 약 16년이 됩니다. 꽤 긴 시간 성전재건이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공포심을 주고, 외압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성전재건을 이뤘습니다.” 라고 결론이 나면 참 좋았을 것이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고 진행하는 데도 끊임없이 방해가 생기고 중단되기도 하고 일이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모든 일이 돛에 순풍달듯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일이면 적당히 타협하거나 순응하며 진행할 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은 적당히 타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 느리게도 진행됩니다. 때로는 “이게 정말 하나님 일이 맞나! 내가 내 욕심과 의지로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나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느리고 때로는 멈추기도 하지만 결국 이뤄집니다. 성격 급한 우리는 일이 진행이 안 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의심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뜻을 묵묵하게 탱크처럼 밀고 가십니다. 오히려 시행착오 속에서 헤매거나 의심 속에 멈춰있는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유다가 멸망하고 유다백성이 다시 돌아오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도 유다 백성이 기다린 것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이 그들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오랜 죄악의 묵은 때를 벗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말입니다.
성전 재건도 기초가 놓였지만 중단되었습니다. 기초를 놓는 데까지는 기쁨으로 할 수 있었지만, 아직 이들 예배공동체는 연약했습니다. 외압에 의해 성전을 짓고자 하는 손이 약해지고 자신들의 먹고 살기도 바쁘게 되었습니다. 성전재건은 방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멈추었다는 명목으로 긴 시간 방치되었습니다. 이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의 기다림이 느껴지십니까? 좋은 상황을 만들어 주기 보다, 우리가 더 마음을 쏟고 준비되도록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은 느리더라도 건축보다 예배공동체가 제대로 세워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성전은 지어졌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심히 빈약하고 작았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긴 시간이 들어서 결국 성전은 지어졌습니다. 예전의 화려한 성전과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 슬프고 아쉬울 수 있으나 정작 하나님께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화려하게 성전을 지은 솔로몬도 우상을 섬겼습니다. 성전의 화려함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이렇게 까지 신앙생활 했는데, 이런 역사도 일어났는데!” 라며 과거의 영광과 비교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과거 신앙의 영광과 화려함보다는 지금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을 먼저 기억해야겠습니다.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소(6)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6절은 마치 5절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 사이에 시간적 간극이 있습니다. 6절의 아하수에로 왕이 누구인지 대해서는 약간 논란이 있으나 대부분 페르시아의 4대왕 크세르크세스 왕으로 봅니다. 이는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입니다. 크세르크세스의 통치 기간은 B.C. 485년부터 이기에 아하수에로에게 고발한 6절의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된 B.C. 516년보다도 한참 후의 일입니다. 즉 이 사건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고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갑작스런 시간상 간극까지 허용하면서 6절이 들어간 이유는, 방해세력의 집요함과 끊임없는 공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몇 십년 동안 그들은 유다백성을 훼방하고 고발하며 억압했습니다. 그들은 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끈기도 대단하시지만, 방해세력도 결코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방해하여 우리가 포기하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마음을 사이에 두고 영적 전쟁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적 술수와 상황의 변화들일 뿐이지만, 우리를 일으켜 세우느냐 아니면 주저 앉히느냐의 끈질긴 영적 대립이 있습니다. 이는 7절에서 바사왕 아닥사스다 때까지 계속됩니다.
아닥사스다 때에 고소자들의 재상소(7-10)
(7-10)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아닥사스다는 크세르크세스의 아들로 B.C. 464년부터 재위했습니다. 즉 이도 성전 재건과는 무관하며 10절 이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에는 성벽 재건에 대한 고소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나니 이제는 성벽에 대한 방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말씀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로 인해 성벽 재건도 중단되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다 버리고 왔습니다. 자신들의 안정적인 생활터전을 뒤로 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황폐화된 돌아온 땅에서는 먹고 살기도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신앙생활 마저 쉽지 않았습니다. 예전처럼 화려하게 짓지는 못하더라도 작게나마 성전을 지으려 모였는데 큰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단까지 되었지만 결국 완성하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방해는 계속되고 때론 중단도 됩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인생 걸고 하나님께 왔습니다. 나름 다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신의 양명과 안정보다는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누구는 고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쉽게 쉽게 잘도 되는데, 나는 무엇을 해도 이리 힘든지 녹슨 바퀴를 달고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한 때는 신앙적으로도 화려한 때 혹은 큰 은혜로 기적적인 경험을 한 때도 있었지만, 옛날 간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기적이 내 삶에서는 너무 멀어졌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방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셔서 어찌저찌 잠깐 힘을 내기도 합니다. 이런 수없는 인생의 굴곡에서 어떤 분은 하향곡선 중에 있는 분도 있을 것이고 혹은 상향곡선 중에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업 앤 다운 중에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마음에 감동이 되어 예루살렘에 모였지만 방해에 주저앉고 자신들의 삶에만 집중하게 된 인생의 연약함은, “이렇게 모인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자조까지 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방해세력과 동일한 언어입니다. “그냥 포기해. 적당히 해. 힘만 들잖아. 별 소용없어.” 이런 언어들은 집요하며 은밀하게 파고 드는 방해의 언어입니다. 방해받는 것이 두려워서 모이지 않는다면, 중단되는 것이 두려워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방해세력이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지고 중단될 수 있는 우리임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하고, 다시 모이고, 볼품없지만 계속 하고. 이것이 계속 기다리시는 하나님, 겉모양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처음에 모일 때는 큰 일을 이룰 줄 알았습니다. 한국교회를 살리고, 주변 사람들이 살아나고, 친구, 친척 모두 전도하고, 기도하면 기적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하지만 지금 우리는 나 자신을 지키기에도 급급합니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 미미해도 다시 시작해 볼 마음을 오늘 허락하시매 감사드립니다. 방해도 있을 테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저희가 하나님만은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편한 길, 안락한 길이 있더라도 그것들이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옵시며,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만이 유일한 의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게 친근하지만 사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안 될 줄 알고, 하나님께 서원했거나 기도제목인데 중단한 것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3.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기다리시는 것 같은 지 묵상해 봅시다.
4. 억울하게 고소하거나 방해하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자: 윤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