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운여정>
별이 빛나는 밤(1)
-아를의 두 남자-
-표 민웅-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를 안고 길 떠나는 나그네는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풍류가 넘치기도 한다. 먼 길에서 돌아 온 여행객들은 한결 성숙해 보이고 의욕에 찬 삶의 모습과 정겨운 내적 충만감도 맛보게 한다.
우리는 중국의 유명한 두 시인 이태백(李太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통하여 감동적인 여정(旅情)을 느끼곤 한다. 특히, 바람과 같이 중국 각지를 주유하고 달을 쫓다 죽어간 이 태백을 우리는 최고의 풍류시인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는 詩仙, 酒仙이라고 부를 만큼 찬란한 명성을 남겼다.
바이마르 공국 총리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37세 때 2년여의 이태리 여행을 통하여 그의 예술과 문학 생활에 새로운 전기를 이루었다.
"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 나왔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탈출은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이 여행을 통해 괴테는 자신의 다양한 예술적 체험과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고 낡은 관습의 틀을 벗고 진정한 예술가로 변모해 가는 내적 성숙을 이루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동서의 훌륭한 선현(先賢)들은 이러한 여정을 통하여 자기실현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우리의 인생은 기나긴 여정이다. 출생과 더불어 여행이 시작되고 죽음과 더불어 또 다른 여행을 떠난다.
모닥불 가에서 춤과 노래로 사랑을 갈구하는 집시의 생활이 그리워진다. 마차를 타고 떠도는 집시의 피가 나의 혈관에도 한 방울 섞여 있지 않을까?
내 영혼에 담겨 있을 이 그리움의 마음을 언제나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훌훌 떠난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듯 세월이라는 열차를 타고 그리움을 향하여 달려간다.
63년 전 고교시절 미술시간에 윤재우 선생(한국의 렘브란트 공재 윤두서의 8대 손)이 서양 회화책을 보여 주면서 후기 인상학파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설명해 주었다. 그때 고흐를 처음 만났다. 프로방스의 ‘별이 빛나는 밤’, 특유한 ‘해바라기’와 고뇌에 찬 푸른 두눈의 ‘자화상’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나는 기회가 있는 대로 그가 활동한 지역을 다녀 보고 싶었다.
두 번의 암을 수술한 1년 여 후 2007년 3월, 42일 간 스페인, 포르투갈과 남프랑스를 여행할 때 4월 10일 고흐의 꿈이 서린 아를을 방문했고, 2015년 4월 28일부터 7일 간 파리 북서쪽을 여행할 때 그가 마지막으로 불꽃을 태우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다녀왔다.
1853년 네델란드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16살 때 중학교를 중퇴하고 화상과 서점 직원, 전도사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다가 뒤늦은 27살 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후 10년 간 그림에만 몰두하여 유화 900여점을 포함한 많은 작품을 남기고 1890년 37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작품 활동 시기를 살펴보면 (1)초기시절(1880-1886.2) (2)파리시절(1886.2-1888‘2) (3) 프로방스(아를과 생레미) 시절(1888.2-1890.5) (4)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절(1890.5-7. 29)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초기에는 네델란드와 벨기에 안트워프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주로 밀레나 렘브란트, 루벤스등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익혔다. 특히 농민화가 밀레의 ‘만종‘과 ‘씨뿌리는 사람‘등을 열심히 습작하며 밀레의 예술적 아름다움 뿐 만아니라 숭고한 정신에 감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농촌 마을과 가난한 농부들을 어둡고 침울한 색조로 그렸다.
1886년 2월 드디어 고흐는 예술의 도시 파리로 진출한다. 몽마르트 언덕에는 예나 지금이나 청운의 꿈을 꾸는 새내기나 유명한 미술가들이 모여 대망의 꿈을 안고 그림을 그린다. 이때 처음으로 고흐는 마네와 모네 등의 인상파화가 작품을 대면하였다. 그 영향으로 지금까지의 어두운 색조를 탈피하고 밝은 색을 택하기 시작했다. 몽마르트 언덕의 카페에서 여러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고흐의 그림 주제가 다양해졌다. 그러나 이 기간 뚜렷한 작품을 내 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도시 생활의 무절제와 심신의 피로 때문에 그의 그림은 우중충해졌다. 나는 몽마르트 언덕에 가면 반 고흐가 다녔던 Le Consult 카페에 꼭 들려 와인 한잔을 들며 당시의 고흐 모습을 그려본다.
‘봄이 되면 프랑스 남부 푸른빛과 눈부신 땅으로 갈 생각이네.’ 그의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화상畵商인 테오는 형 고흐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 후원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8년이 되던 고흐는 인상파 그림과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이때까지 그리던 렘브란트나 밀레의 어두운 화풍을 버리고 밝은 색채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활동했던 파리를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음이 맞는 화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 날 ‘남부 화실’을 구상하였다.
프로방스 시절
프랑스 프로방스 남쪽 론강 하구에는 ‘갈리아(프랑스)의 작은 로마’라고 불리 우는 아를(Arles)이 있다. 기원전 1세기 줄리어스 시저가 프랑스를 정복하면서 건설한 도시로 로마시대의 원형 투기장과 고대 극장 그리고 공중목욕탕과 같은 오래된 유적이 잘 보존되어있다. 그래서 이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있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나는 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프랑스 작가 ‘알폰스 도데’ 단편과 비제의 희곡 ‘아를의 여인’의 마을이 아닌가, 또한 비운의 화가, 고흐의 고통과 열정에 찬 삶의 여정을 볼 수 있어서이다.
끝없는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 연보라 빛 라벤더 밭과 분홍의 체리 꽃이 펼쳐진 이 마을로 오는 길은 영화 ‘마농의 샘’에서 보았던 그런 풍경이다. 언덕이 많고 그 위에 집들은 주황색타일의 지붕과 흰색의 벽, 그리고 푸른 숲이 어우러져 있다. 프로방스 특유의 강렬한 햇살과 자연이 뿜어내는 빛과 색의 조화로 모든 이를 매료시킬만한 곳이다. 이곳을 채색의 마술사 반 고흐가 미친 듯이 심취했던 ‘고흐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ey...'
<별이 빛나는 밤! 너의 화폭에 푸른색 회색을 칠해보자...>
1972년 영국가수 돈 멕클린이 고흐의 그림을 영혼화해서 부른 감동적인 노래다.
약간 붉거나 황토색의 페인트를 칠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는 좁은 골목길로 가니 고흐가 자주 다녔던 카페가 나온다. 특히 밤이 아름다워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별이 빛난 ‘밤의 카페 테라스’(1호)가 나온다. 늦은 밤 카페에서 나오는 가스등의 진한 노란색과 카페 벽의 초록색이 파란색 밤하늘에 펼쳐진 아를의 별들과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잘 어우러진 그림이다. 반 고호 특유의 양식이다.
고흐는 밤늦게까지 혼자서 상념에 빠지거나 고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속내를 들어 내놓고 토론도 하고 언쟁도 벌인 곳이다. 고흐는 이곳을 ‘밤의 카페(Cafe la Nuit)’라고 이름 지었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나도 일행과 함께 그가 즐겨 마신 Arles의 와인을 들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예술을 불꽃처럼 불태운 비운의 천재화가를 생각한다. 지금은 ‘반 고흐 카페’로 이름이 바뀌었다. 반고흐 카페에서 한잔을 한 후 론강으로 가본다. 이국적인 곳의 하늘 밤은 별빛이 유난히 맑다. 이곳이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2호) 배경이 된 곳이다.
고흐가 본 별은 저 하늘로 그리움을 향하여 달려가는 영혼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폴 고갱과의 만남과 헤어짐
1888년 2월 20일 고흐는 아를역에 도착한다. 이곳에 와서 그는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를에 머물었던 2년 여간 400여 작품을 완성하여 10여 년 간 그림을 그린 기간 중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이글거리는 밝은 태양, 빛나는 별, 삼나무 숲, 카페, 강과 다리, 맑고 밝은 아를의 풍광에 사로잡혀 건강도 돌보지 않은 채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화가 폴 고갱을 초청한다. 고흐같이 생활비를 대주는 동생도 없는 고갱은 몹시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청을 받아들인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아침 기차 편으로 도착한다. 고갱과의 활동에큰 기대를 건 고흐는 노란 집을 빌리고 그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 그림으로 실내를 정성껏 꾸몄다. 비전을 실현하려는 고흐는 고갱과 함께 ‘미술가 마을’을 추진코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일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두 사람의 의견은 자주 충돌하였고, 고갱의 오만한 성격은 반 고흐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했다. 이들이 만난 지 두 달이 되는 12월 23일 밤 사소한 일로 반 고흐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광기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린다. 다음 날 고갱은 그의 곁을 떠나고, 고흐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몸과 정신이 쇠약해져서 아를 시내 시립 병원에 입원한다. 지금도 이 병원에 가면 그가 두 달 간 입원했을 때 그린 작품 ‘정원’의 모사품이 걸려 있다.
퇴원 후 다시 정신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 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1889년 5월3일 아를에서 30여km 떨어진 Saint Remy de Provance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하였다.
폴 고갱(1848-1903)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리고 아를의 옆 마응 액상 프로방스 출신 폴 세잔느(1839-1906)를 우리는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부른다. 후기 인상파는 모두 프로방스의 그림에서 일어나 세계적 화풍을 일으켰다.
고흐는 친구 이상으로 고갱을 사랑하였다. ‘미술가 마을’을 만들어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랑했던 고갱에 실망이 컸고 그와의 활동에 감동이 사라짐에 따라 미술가 마을을 만들어 작품 활동을 해 보겠다는 미래의 희망이 사라져 버리고 고갱과 헤어지는 슬픔을 안게 된다.
나는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를 본다. 그의 고통과 비애가 작품 속에 그대로 묻어난다. 고개 숙인 해바라기들은 고흐의 마음과 언어를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계속)
그림입니다.
사진1호:'Cafe terrace 1888'
그림입니다.
사진 2호: ‘Starry night over the Rhone'(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