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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스무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20 이석영 -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주춧돌을 놓다. 건국훈장 애국장 1991년
출생 - 사망
1855년 ~ 1934년
《동아일보》193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부고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렸다.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석영(李石榮)이 금일(2월 16일) 오후 2시 상해 불조계 아이배로(亞爾培路) 서가고교우(徐家庫僑寓)에서 사망하다.”
이어 3월 1일자 기사에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한 이석영의 장례식이 2월 20일 상해에서 거행되었는데 유해는 상해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에 안장되다.”는 내용을 전했다.
독립운동 끝에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도 안타깝지만,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80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두부찌꺼기인 콩비지로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삼한갑족의 후예로 만여 석의 대자산가로 이름을 날렸던 이석영이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서간도로 망명한 것은 망국 직후인 1910년 12월이었다. 이때 이석영은 50대 후반 초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잘 알려졌듯이 이석영의 6형제들은 넷째 이회영(1867∼1932)의 건의에 따라 일가권속 60여 명을 이끌고 망명을 단행했다. 이들은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혈성으로 가문 차원에서 집단 망명한 것이다.
이석영은 1855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석영의 호는 수석(漱石)이며, 이명으로 이영(李永)을 사용하기도 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이들 가문은 300여 년 동안 8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한 삼한갑족의 명문가였다. 생부 이유승(1835~?)은 이조판서와 우찬성, 궁내부특진관 등을 거쳤으며, 양부 이유원(1814~1888)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정치적으로 흥선대원군과 맞서 개항을 주장했던 정계의 거물이었다.
이석영은 30세가 되던 1885년 4종숙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막대한 전장(田莊)을 상속받았다. 이유원은 경기도 양주 가오실(嘉吾室) 출신으로 전답이 1만여 석에 달했다. 양주에서 서울까지 80리 길을 거치는 동안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명문자제가 그렇듯이 이석영은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섰다. 탄탄대로에 섰던 이석영은 승지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에 머물렀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중추원 의관 등이 내려졌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광무황제(고종)의 부름이 있었지만 정치에 몸을 담지 않았다.
6형제 중에서도 이석영과 이회영은 각별한 사이였다. 이석영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혁신적인 이회영을 굳게 신임했고,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 형제 모두가 망명한 것과 관련해 여러 자료 및 기록들에서는 1910년 8, 9월 무렵 형제회의에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간의 연구들에서도 1907년 신민회의 해외독립군기지 개척 계획에 의해 1908년 해외로 나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난 뒤 1910년 7, 8월 서간도 답사 이후 1910년 8, 9월 경 형제회의를 통해 해외망명을 결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 이회영의 행적을 살필 때, 이들 형제가 추진한 해외 망명의 배경과 과정을 새롭게 살필 필요가 있다. 이석영을 비롯한 이들 형제의 그 많은 재산을 불과 서너 달 만에 처분할 수 있었는지도 의아스럽다. 또 한 번의 회의를 통해 일가권속 60여 명에 대한 망명을 결정했다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삼한갑족의 후예인 이들 일가가 한마음 한뜻으로 망명을 단행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망명 계획이나 준비, 결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비밀리에 이뤄져야 했으니 그 어려움도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일사불란하게 험난한 망명길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을사늑약을 결사반대하던 이회영은 을사오적처단의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우는 일에도 깊게 관여하고,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파견의 배후 조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회영이 헤이그 특사 파견을 막후 조정하는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1906년 봄 해외로 떠나는 이상설(1870∼1917)과 함께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할 것을 논의한 사실이다. 이 자리에는 이동녕, 여준, 유완무, 장유순 등도 참석했다. 이때 논의된 내용은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워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자는 것이었다. 용정은 일찍부터 한인사회가 발달한 곳이었다.
이회영은 1908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이상설을 찾아가 독립군기지 건설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회영은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상설을 찾아가 독립운동 방략을 숙의했다. 이때 이회영과 이상설이 결의한 내용은 1) 지사들을 규합해 국민교육을 장려할 것, 2)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할 것, 3) 비밀단체를 조직할 것, 4) 운동자금을 준비할 것 등이었다. 그리고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이 일본을 경계하므로 전운이 일어날 때를 기해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로 맹세했다. 이때의 계획은 1906년 서전서숙을 세울 때보다 구체적이었으며, 신민회의 전략보다도 실천적인 것이었다.
우당의 독립군기지 개척은 그만큼 선구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자금 마련과 관련해 든든한 후원자인 형 이석영과 충분히 의견을 나눴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사이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독립군기지 개척을 미룰 수가 없었다.
이석영의 재가를 받은 우당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간도 답사에 나섰다. 우당은 이동녕, 장유순, 이관식 등과 옷감 장수 차림으로 꾸미고 초산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압록강을 건너 안동에서 5백여 리 떨어진 횡도천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뒤 남만주 일대를 시찰하고 독립군기지 터를 물색하고 한 달여 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1910년 9월 형제들과 최종 뜻을 모은 뒤 수년간에 걸쳐 진행한 망명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서간도라 하면 압록강 너머 중국의 단동, 관전, 환인, 통화, 흥경, 유하, 임강, 장백, 무송 등을 아우르는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원래 청나라와 문화 교류의 창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연행사를 비롯해 청나라와 국경 무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청나라가 실시한 ‘봉금정책’으로 인해 200여 년 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는 구역을 묶여 있다가 1860년대 이래 한인의 이주가 시작됐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땅으로 그 자취가 남겨져 있는 관계로 한국인들에게 전연 낯선 곳은 아니기도 했다. 이들은 삼원포에 일단 정착한 후 향후 실행 방침을 논의하기 위해 1911년 4월 추가가 마을 뒤편 대고산에서 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노천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결의된 실행 방침은 먼저 민단적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할 것과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해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할 것’ 등의 내용이었다.
경학사(耕學社)란 이름은 농사하며 공부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었다. 여기에서 공부란 단지 지식을 익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뜻도 담겨져 있었다. 그런 의지는 “경학사 취지문”에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경학사의 사장은 이상룡, 재무부장은 이동녕, 교무부장 유인식, 농무부장 장유순, 그리고 우당이 내무부장을 맡았다. 경학사는 한인사회를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으며, 그 살림을 우당이 맡은 것이다. 그러나 경학사는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신흥학교는 1911년 6월 추가가 마을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이때 신흥학교의 공식 명칭은 ‘신흥강습소’였다. 신흥이란 나라를 새롭게 일으킨다는 뜻을 지녔고, 강습소라 이름한 것은 중국 당국의 감시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실제로는 군사훈련을 통한 독립군 사관 양성이 주된 교육 내용이었다.
신흥학교의 첫 학생은 40여 명 정도였다.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았으며, 학교 유지비와 식사는 학생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것을 포함해 부담했다. 멀리서 오거나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주로 독립운동가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래서 이석영을 비롯한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집에는 많은 학생들이 머물렀다. 흉년이 겹쳐 생활이 어려운 중에서 학생들은 노동을 해 비용을 부담했다. 새 교사를 신축할 때도 학생들이 흙을 고르고, 돌을 날라 노동으로 역할을 맡았다.
신흥학교는 1년 후 합의 하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해, 1912년 3월 공사를 시작해 강당과 교무실을 비롯해 내무반 · 사무실 · 숙직실 · 식당 등 무관학교로서 격식을 갖춘 교사를 지을 수 있었다. 18개의 교실이 산허리를 따라 큰 병영사처럼 세워졌다. 학년별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고, 내무반 내부에는 사무실, 숙직실, 편집실, 나팔반, 식당, 취사장, 비품실 등이 갖추어졌다. 복도에는 생도들의 성명이 부착된 총가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완비한 건물이 완성되자, 7월에 100여 명이 모여 성대하게 낙성식을 가졌다.
이 무렵 서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의 수는 2만여 명에 달했다. 한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은 통화현을 비롯해 관전현, 환인현, 집안현, 임강현 등지였다. 이들의 이주는 첫째 일본이 가혹한 통치를 피해 피난한 것, 둘째 빈곤을 이겨내기 위해 농업 이민한 사례, 셋째 정치적 망명, 넷째 중국에 의지하기 위한 것 등이었다. 만주지역이 부여,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었던 점도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만주가 부여, 고구려, 발행의 옛 땅이고 단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것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만주는 한국인이 살아가야 할 땅이었고, 독립군의 기지였던 때문이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이석영이 교장을 맡았다. 타고난 성품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지만, 신흥학교가 세워지기까지 이석영의 공이 워낙 지대했으므로 주변의 권유를 물리칠 수 없어 맡은 것이었다. 이석영이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신흥학교는 1911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이석영이 주춧돌을 놓은 이래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3 · 1운동 이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며 혁혁한 전과를 세우면서 독립전쟁사에서 찬란한 자취를 남겼다
이석영의 독립운동과 관련해 짚고 넘어갈 것이 독립운동과 재정적 문제이다. 독립운동에서 재정적 기반은 사람 못지않게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독립군과 같은 무장투쟁에서는 특히나 그랬다. 독립군도 싸우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자고, 입고 또 무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독립군의 재정적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했다. 어쩌면 독립군의 재정문제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고난과 시련이었을지 모른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독립군 가운데는 재정적 문제로 해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1920년대 기준으로, 독립군 1인의 생활 경비는 한 달에 최소 15원 정도 들어야 했다. 100명의 독립군이면 한 달에 1,500원, 1년이면 15,000원의 군자금이 필요했다. 이 무렵 쌀 한 가마니가 대략 15원이었으니, 독립군 100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년에 1천 석의 비용이 들어야 했다. 거기에 무기 구입 등의 비용을 보태면, 100여 명의 독립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에 수 천석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독립군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투에 앞서 군자금 확보는 생존의 전제가 됐다. 군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독립군 조직이 해산되는 경우는 그런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보더라도 북간도 한인사회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모자라 함경도 일대에 국내 지단을 설치하고 수백여 명의 단원이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만큼 독립운동에서 재정적 기반은 절박한 현실의 문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보더라도, 1919년 5월 도산 안창호가 미주에서 2만 5천 달러를 가져오면서 비로소 가동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독립전쟁은 독립운동의 최고의 방법과 전략이었다. 1920년 전후 서 · 북간도와 연해주에는 5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활동하고, 독립군의 병력도 1만 여명에 달했다. 1907년 군대해산 당시 대한제국의 군인은 고작 7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제 침략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무너져 갔던 것이 대한제국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3 · 1운동 직후 1만 여명의 독립군이 생겨나며 독립전쟁을 전개해 갔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순수 민병(民兵)이었다. 자발적으로 독립군에 나선 이들은 무기를 비롯해 생활까지 스스로 해결하면서 독립전쟁을 벌여 나갔다. 이것이 진정한 한국 독립운동의 힘이었다. 독립군 양성의 초석이 됐던 이석영의 독립운동은 그래서 더욱 빛나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이석영 [李石榮] -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주춧돌을 놓다. 건국훈장 애국장 1991년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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