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충격(입교수기)
(이 입교수기는 1981년 '이웃 전교의 해'를 맞이하여
부산교구 괴정동 성당 신우회에서 공모한 신앙수기 공모에 입상했던 글이다.)
오빠가 남겨 놓은 교회서적을 내가 가져다 읽기 시작한 것은
오빠의 장례식이 있은 지 한 달쯤 지난 뒤였다.
철난 후 처음 당해 본 혈육의 죽음 앞에서
허탈감을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살아 생 전 오빠의 고통에 무심했던 내 잘못이
비로소 뼈저리게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때는 늦어 버렸지만 오빠가 애지중지 하던 책들을 통해서
오빠의 내면세계를 이해 해 보는 것이 오빠에 대한
속죄의 길일 것 같았다.
막내 동생인 나를 유난히도 사랑해 주었던 작은 오빠가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을 오빠 나이 23세 때부터였다.
서울 농대를 졸업하고 A읍에 있는 가축 위생연구소에
근무 하고 있을 때였다. 천성이 외곬이었던 오빠는
밤을 낮으로 삼아 연구에 골몰하였다. 과로가 신체의
저항력을 약화시켰고 결국은 결핵균의 침범을 받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약을 복용하던 중 6.25 동란을 맞았다.
전쟁통에 치료와 안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그러는 동안 병은 계속 진행 되었다.
섬세하고 자상하며 강직했던 오빠의 주위에는 불우하고
외로운 직장 동료와 이웃 주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언제나 그들 편에 서서 고통을 함께 하고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곤 했다.
오빠는 그 마을에서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가족들 틈에서는 늘 외톨이었고 괴팍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오빠가 집에 있을 때 집안 분위기는 긴장되고 불편해졌다.
오빠가 살아가는 방식을 가족들은 이해 해 주지 못하였고
오빠는 가족들의 염려와 관심, 충고를 받아 들이지 못했다.
오빠가 병을 키워가면서도 가족에게로 돌아오기를
한사코 거부하였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직장을 쉬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부모님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기침 미열, 각혈에 시달리며 홀로 외롭게 투병하던 중
오빠는 천주교에 귀의 하였다. 오빠 나이 33세 때였다.
그 당시 폐에는 크고 작은 동공이 여러 개 생겨 있었고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폐 절제 수술도 신체 쇠약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빠는 결국 고집을 꺾고, 웃으면서
그러나 깊은 절망을 안고 가족들에게로 돌아왔다.
모질게도 긴 병상의 삶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한 번 자리에 눕자 두 평짜리 작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 보지 못하고 18년을 보냈다.
절대 안정을 해야 된다 하여 식사도 누워서 했고
대소변도 받아내었다. 전염의 우려가 있다며
가족과도 격리되어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집으로 옮겨졌다.
늙으신 어머니가 그 모든 시중을 홀로 드셨다.
시간이 감에따라 자연 오빠를 찾는 주위의 발길도 뜸 해졌다.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 진 채 계속 누워만 있어야 했던
오빠는 오직 신앙생활에만 몰입하게 되었다.
적막하고 단조로운 나날 가운데서도 철저하게 규칙적으로
살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다.
오빠는 한 이름 없는 수도자였다. 오빠는 점점 정화되는 듯
보였고 환자 특유의 짜증도 점차로 없어졌다.
어느 날, 오빠의 방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들어가 보니 오빠가 성모상을 쓰다듬으면서
울고 있었다. 오빠의 말인 즉 책상 위에 모셨던
성모상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오더니 머리맡에 있던
접시 모양의 상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그러한 오빠를 보면서 통곡했다. 오빠가 이제는
정신 이상 까지 온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오빠는 곧 진정하여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
가족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오빠의 행동이 오빠가 복용하고 있던
싸이크로세린 (결핵 2차약으로 신경독이라는 부작용을
갖고 있음)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정신착란증이었는지
또는 오빠가 앞으로 겪어야 할 지독한 고통에 대해
힘과 위로를 주기 위한 초자연 현상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오빠도 다시는 그 때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빛이 들어갔다는 접시 상본을 내게 주면서 잘 간직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빠가 그토록 소중해 하며 내게 맡긴 상본을
하찮게 생각 해 함부로 굴렸고 며칠 후 한 쪽 귀퉁이가
깨어진 채 어느 구석으로 들어갔는지 찾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는 일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오빠는 약복용과 섭생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루의 생활이 규칙적이었다.
삶을 단축시키기 위해 치료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등바등 더 살려는 집착도 보이지 않았다.
기적을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위독한 순간을
몇 번이나 넘기면서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져 가는 목숨은
비록 완쾌되지는 못하였어도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없었다.
1978년 7월 17일, 8순 노모의 애끓는 통곡 속에서
오빠는 괴로운 일생을 끝냈다.
임종하기 전 두 달간의 오빠가 겪었던 고통은
심한 호흡곤란과 요통으로 극에 달했다.
오빠의 인내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오랜 병상생활이었지만 침상에 침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정갈했고 용의주도했다.
오빠의 나이 53세, 병을 얻은 지 30년,
자리에 꼬박 누워서만 18년이었다.
물론 결혼을 해 보지도 못하였고 재산이라고는 고상과 성모상,
그러고 수십 권의 책을 남겼을 뿐이다.
장례미사 때 젊으신 보좌신부님은
현세의 고통과 인내를 보상 받을 수 있는
내세의 영원한 삶에 대한 강론을 하셨다.
오빠의 책에서 내가 찾으려 했던 것도 바로 내세의 삶이었다.
불쌍한 오빠를 위해서 반드시 그것은 있어야만 한다는
열렬한 바람으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펼쳤다.
지나간 학생시절에도 오빠의 권유로 한두 권의 서적을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오빠가 건네어준 책 중에는
성녀 소화 데레사의 삶을 쓴 ‘갈멜의 소화’도 있었다.
오빠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참 좋았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오빠의 감동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천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과장되고 부자연스럽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외로 몇 권의 책을 더 읽어보려 했으나
딱딱한 영성 서적들이 잘 읽혀지지 않았었다.
그 때로부터 15년도 더 지난 오늘날, 대 가족 큰 살림살이에 파묻혀
월간 여성잡지나 신문을 제외하고는 독서와 담을 쌓고 지내던
내가 그 옛 날 팽개쳐 버렸던 책들을 다시 손에 잡은 것이다.
오빠에 대한 의무감에서였을까,
아니면 이 세상 것이 주는 즐거움의 단명함과 공허함을
깨닫기 시작할 나이에 와 있었던 때문일까,
그 딱딱하고 두꺼운 책들을 단숨에 읽어 갔고
다음 순간 설렘과 놀라움으로 가슴을 떨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 한 곳에 좌정하지 못하고
온종일 서성거렸으며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주무르면서도
머릿속은 간밤에 읽은 책의 내용들로 가득 차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떤 신비하고 강한 힘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그 당시 내가 읽었던 책은 ‘종교의 근본 문제’, '동서의 피안',
‘억만 인의 신앙’, ‘교부들의 신앙’,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등이었다.
신약성서도 함께 읽었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볼 틈도 없이
바쁜 나날이었지만 밤을 새다시피 하여 독서에 몰입을 했다.
그러는 사이, 하느님의 존재하심과 영혼의 불멸함을 믿게 되었고
오빠를 위해서도 이러한 발견이 기뻤다.
오빠가 살아 있을 때 왜 진작 알려 하지 않았던가 한스럽기도 했다.
영신의 눈이 열리기 시작하자 만물이 새롭게 보이던
그 당시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겨우내 마른 가지로 있던 영산홍 가지에서 꽃잎이 하나 벌여졌을 때
생명의 신비 앞에 넋을 잃고 바라본 일, 하늘을 쳐다보아도,
시장에서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보아도, 곳곳마다 하느님의
풍요로우심과 자비하심이 충만해 있었다.
술에 취해 있는 듯 황홀하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의식은 명료하여 자면서까지도 깨어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성당을 나가지는 못 하고 있었다.
종갓집 맏며느리고서 민속신앙에 젖어계신 시부모님께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말씀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빠의 죽음 후 불과 몇 달 사이에 내 안에서 일어난
영혼의 변화를 설명 드릴 재간은 더더욱 없었다.
오빠에 대한 죄책감과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뜨거움이 내 안에 없었다면
나는 이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을지 모른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내 영혼의 충격’,
영세 전 몇 달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뜨거운 열병을
인간적인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 후 2년 안에 남편과 시부모님, 그리고 형제들까지 진리에
눈을 뜨고 세례를 받은 것도 신비롭기만 하다.
시부모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살아생전 슬프고 고독했던 나의 작은 오빠,
오빠는 그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였고
수많은 세월 동안 부모형제를 위하여 희생을 바치었으며
세상을 뜬 후에도 천상에서 지상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있는데서 온
은총이었다는 것 밖에는 설명한 길이 없다.
첫댓글 유현진 : 1979년 6월에 영세를 하고 뜨거운 가슴을 주체 못하고 있을 무렵,
가톨릭신문에서 입교수기를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1981년도 였다.
그 때 수기를 제출하여 입선을 했고 책을 몇 권 받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내게는 한권도 남아 있지 않아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중
언니로 부터 누렇게 변한 그 책 을 우편으로 받았다. (2012.01.03 20:22)
유현진 : 수기를 모집한 성당이 어느 시골 본당인 줄 알고 있었는데 지금와서 보니 부산 주교좌 성당인 괴정동 성당 신우회에서 모집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수기를 읽어 보니 어설픈 구석이 눈에 띄지만 되도록 수정하지 않고 그 당시의 글을 그대로 싣기로 한다.
첫사랑 처럼 순수했던 그 시절의 마음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2012.01.03 20:28)
법계화 : 현진아 귀한 글을 올렸네 네 젊은날의 편린을 보는것 같아 흥분될만큼 반갑다. 녹슬지 않은 네 글재주도 좋구 (2012.01.05 12:57, IP : 124.80.96.168)
Young Yon : I knew that your brother was instrumental for you becoming a catholic, but this is the first time to know you wrote an essay about it .
I remember the excitement when we found each other that both us became catholics,
even though we lived apart, one through a brother, another through a husband (2012.01.06 15:29, IP : 67.170.121.246)
유현진 : 너는 사랑하는 배우자를 통하여, 나는 오빠의 오랜 세월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 (2012.01.06 20:56)
Young Yon : realizing our Lord's mysterious work and thanking the blessings given to us to tie with the same religion.
I'll try to be a good catholic with your support and also through the spirit of your brother.
I knew the story of your brother, not in detail ,only piece by piece, but never tired to hear about (2012.01.06 15:37, IP : 67.170.121.246)
유현진 : 책에 있는 것을 옮겨 쓰기가 왜 이렇게 어려웠는지 모른다. 차라리 새로 쓰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2012.01.11 15:34)
Young Yon : It's new discovery to me that your road to becoming a catholic was such extraordinary experience and could be comparable to suffering of the childbirth labor.
I 'd like to hear more about it ,when we have chances. (2012.01.14 16:12, IP : 67.170.121.246)
법계화 : 종교입문기를 제대로 잘 표현했네 글로 표현하기가 힘든 얘긴데...
너도 언니의 글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을 쓰네 문학수업을 받았으면 너도 대성 할뻔했다 지금도 안늦었다. 시작해봐! (2012.01.17 13:38, IP : 124.80.88.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