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夷九曲歌 / 朱子 (朱憙 1130~1200)
제1곡 승진동(升眞洞)을 시작으로 제2곡 옥녀봉(玉女峯), 제3곡 선조대(仙釣臺),
제4곡 금계동(金鷄洞), 제5곡 무이정사(武夷精舍), 제6곡 선장봉(仙掌峯),
제7곡 석당사(石唐寺), 제8곡 고루암(鼓樓巖), 제9곡 신촌시(新村市)까지
아홉 구절로 되어 있지만 서시(序詩)까지 포함하면 십수(十首)가 된다.
武夷九曲歌(무이구곡가)
武夷山上有仙靈(무이산상유선영) 무이산 위에는 신선의 혼이 서려 있고
山下寒流曲曲淸(산하한류곡곡청) 산 아래 흐르는 찬 시내 굽이굽이 맑아라
欲識箇中奇絶處(욕식개중기절처) 그 가운데에 빼어난 곳 알고자 하니
棹歌閑聽兩三聲(도가한청양삼성) 뱃노래 두세 가락 한가로이 들리네.
第一曲 승진동(升眞洞)
一曲溪邊上釣船(일곡계변상조선) 일곡이라! 시냇가 낚싯배에 오르니
幔亭峯影潛淸川(만정봉영잠청천) 만정봉의 그림자 맑은 물에 잠겨있네
虹橋一斷無消息(홍교일단무소식) 무지개다리는 한번 끊어진 후 소식이 없고
萬壑千岩鎖翠煙(만학천암쇄취연) 절벽 가득한 바위는 비취 빛 안개에 묻혀있네.
第二曲 옥녀봉(玉女峯)
二曲亭亭玉女峯(이곡정정옥녀봉) 이곡이라! 우뚝 솟은 옥녀봉은
揷花臨水爲誰容(삽화임수위수용) 꽃을 꽂고 물가에서 누구를 기다리시나
道人不復陽臺夢(도인부부양대몽) 도인은 양대를 다시 꿈꾸지 않으리
興入前山翠幾重(흥입전산취기중) 흥에 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겹겹이네
第三曲 선조대(仙釣臺)
三曲君看架壑船(삼곡군간가학선) 삼곡이라!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不知亭櫂幾何年(불지정도기하년) 노 젓기 멈춘 지 몇 해 인지 알 수 없는데
桑田海水今如許(상전해수금여허) 상전벽해 지금은 어떠한가
泡沫風燈堪自憐(포말풍등감자련) 포말과 풍등이라 감히 저절로 슬퍼지네.
第四曲 금계동(金鷄洞)
四曲東西兩石岩(사곡동서양석암) 사곡이라! 동서에 마주한 두 바위산이 있는데
岩花垂露碧㲯毿(암화수로벽람삼) 바위에 핀 꽃이슬 머금어 푸르게 드리우네.
金鷄叫罷無人見(금계규파무인견) 금계(金鷄) 울음 그치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月滿空山水滿潭(월만공산수만담) 달빛 빈산에 가득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구나.
第五曲 무이정사(武夷精舍)
五曲山高雲氣深(오곡산고운기심) 오곡이라! 산이 높고 구름 기운도 두텁고
長時烟雨暗平林(장시연우암평림) 오랜 시간 안개비는 숲을 덮어 어둑어둑하네
林間有客無人識(임간유객무인식) 숲 사이에 객 있으나 아는 이 없고
欸乃聲中萬古心(애내성중만고심) 뱃사공 노 젓는 소리에는 만고의 근심이 서렸구나.
第六曲 선장봉(仙掌峯)
六曲蒼屛繞碧灣(육곡창병요벽만) 육곡이라! 병풍 같은 절벽은 푸른 물굽이를 둘러있
茅茨從日掩柴關(모자종일엄시관) 띠 집의 싸리문은 종일토록 닫혀있구나
客來倚櫂巖花落(객래의도암화락) 객이 와서 노를 맡기니 바위 절벽의 꽃은 지고
猿鳥不驚春意閒(원조부경춘의한) 원숭이와 새들도 놀래지 않아 봄뜻이 한가롭네.
第七曲 석당사(石唐寺)
七曲移船上碧灘(칠곡이선상벽탄) 칠곡이라! 배를 저어 푸른 여울에 올라가서
隱屛仙掌更回看(은병선장갱회간) 은병봉과 선장암을 다시 보게 되었구나
却憐昨夜峯頭雨(각련작야봉두우) 가엾어라 어젯밤 산봉우리에 비 내린 비가
添得飛泉幾道寒(첨득비천기도한) 폭포수에 더해지니 얼마나 차가울까.
第八曲 고루암(鼓樓巖)
八曲風烟勢欲開(팔곡풍연세욕개) 팔곡이라! 바람 안개 개이며 하니
鼓樓岩下水濚匯(고루암하수영회) 고루암(鼓樓巖) 아래에는 물결이 돌아드네.
莫言此處無佳景(막언차처무가경) 이곳에 아름다운 경치 없다고 말하지 말지니
自是遊人不上來(자시유인부상래) 즐기는 사람들 스스로 올라오지 않는구나.
第九曲 신촌시(新村市)
九曲將窮眼豁然(구곡장궁안활연) 구곡이라! 다다르니 눈앞이 훤히 트이는데
桑麻雨露見平川(상마우로견평천) 뽕나무 삼나무에 이슬비 맺힌 평천(平川)을 보네
漁廊更覓桃源路(어랑갱멱도원로) 사공은 무릉도원 가는 길 다시 찾지 말라
除是人間別有天(제시인간별유천) 이곳이 인간 세상의 별천지라네
원천석(元天錫 1330~미상)
개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정용별장(精勇別將) 원열(元悅)이며,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원윤적(元允迪)이다.
元州 元氏 中始祖 ( 耘谷系)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해 1360년(공민왕 9)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원천석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원천석이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이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
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문집에 실린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있다.
대표적인 시로는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린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前摠宰六道都統使崔瑩)」과
우왕·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해 읊은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 있다.
이 시에서 원천석은 만일 왕씨 혈통의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느냐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