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1~19)
일탈은 고수하던 자리를 확연하게 벗어나는 어떤 행위이다. 부정적으로는 이기적 욕망을 쫓아 벗어나는 것이지만 긍정적 의미로는 부당함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긍정적 의미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오히려 옳지 못한 자리에 길들여져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더 심각한 상태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에서는 생명을 표방하지만 죽음으로 인도하는, 복음을 강조하지만 율법화시키는 일이 있다. 일탈해야 하는 상황이다. 바울이 사울일 때, 옳은 것을 표방하면서 죽음을 추종하며 행동하였다. 그 죽이는 일을 위해 다메섹까지 원정을 마다하지 않은 매우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다메섹은 크리스천의 도피처 같은 곳이었지만, 사울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열정’을 명목으로 ‘살기(殺氣)’를 부렸다.
사울은 그 다메섹에서 일탈했다. 파괴당했다.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거기에서 그의 일탈은 그의 존재를 재건축하기 위한 파괴의 과정이다. 그의 존재 변화는 전인격적인 것이었다. 홀연한 빛(3절)과 더불어 소리로 빚어지는 인격적 변화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역은 존재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존재가 변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존재 변화 없이 사명에 치중하게 되면 그 사명은 파괴의 원인이 된다. 다메섹 도상에서 일탈이 시작되었다면, 사울이 겪은 3일 동안의 묵상의 시간(9절)은 그 완성이다. 사울은 그동안 알았던 모든 것이 새롭게 해석, 재탄생되는 경험을 한다. 존 거스트너는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죄가 아니라 빌어먹을 ‘선행’이다.’라고 했다. 선행이라는 그럴듯한 일이 존재의 변화를 가로막는 것을 빗대은 말인 것으로 이해된다. 오히려 죄는 문제를 직면하게 할 개연성이 높다. 목사님의 설교 중에 앞에서와 같은 비유를 선행 그 자체를 폄훼하는 이해가 되지 않기를 개인적으로 바라게 된다. 선행 자체보다 선행의 동기가 문제로 이해한다. 자연스럽게 비행보다 선행을 행하는 자체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것은 좋은 생활의 일부이다. 존재의 변화 필요성을 여기지 않을 만큼 강한 선행의 장막으로 갇혀 있는 동기가 문제가 된다.
극렬한 사울이 변화하는데 고작 3일이면 충분했다. 어느 독일 공동체의 묘지에는 ‘The seed’라는 표지가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의 의미를 내포한 글이다. 이 사울을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인물은 ‘아나니아’이다. 악명 높은 사울에게 가기를 처음에 꺼려했던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를 만났다. 그리고 안수를 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수도 있었지만 사울에게 한 명의 피해자가 되는 아나니아가 가해자를 향해 안수를 베푼 것은 의미가 있다. 영적인 것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은혜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 교회를 떠난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신앙을 멀리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신앙을 위하여’, ‘회개를 위하여’라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일탈이 무엇보다 ‘맑게 내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되어야 한다. 경험, 상식, 관성, 대세와 같은 것을 찢고 더 적나라하게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사울의 만남을 준비하셨다. 사울의 존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는 다메섹에서 그 역사를 경험했고 아나니아는 피해자 정서를 딛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울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있게 하신 자리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향하여 서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맑은 눈과 소리를 바라보고 소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