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차
비유, 다른 사물에 빗대자
1. 감각적 심상
현대시에 있어서 심상의 문제는 과거의 시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음악적인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심상의 사용은 꼭 현대시에서만 사용했던 기법이 아닙니다.
중국이나 우리의 옛 시를 보면, 과거의 시들은 주로 언어의 규칙적 반복인 리듬을 선택하였으나, 언어의 형상적 특성을 살려서 심상을 사용한 경우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은 파래서 새는 더욱 희고
산은 푸르러 꽃은 더욱 불탄다
올 봄은 어느새 또 지나가니
언제 돌아갈 해가 오려나⁶³⁾
두보가 48세 이후 처자를 이끌고 방랑길에 올라 지은 「절구」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두보는 조상부터 유명한 학자 집안이었지만, 그는 진사시험에 여러 차례 떨어져 합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종에게 문재를 인정받아 작은 벼슬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 여러 차례 전란으로 자리를 옮겨 다녔고, 그를 비호하던 엄무가 죽자 상강에서 유랑하다가 배 안에서 59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생계 때문에 관리의 지위를 얻기 위해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서글픈 심정을 읊은 시로 보입니다. 파란 강과 흰 새, 푸른 산과 붉은 꽃들의 색채 심상이 한 폭의 그림처럼 강렬하게 대비됩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는 밤 시간의 한 가운데를 ‘허리’ 라는 심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봄바람 이불” “베어내다” “서리서리 넣다” “구비구비 펴다” 등의 감각적 언어들은 모두 사물의 구체성과 정서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심상입니다.
마음의 그림이란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 아니라 과거의 감각상의혹은 지각상의 체험을 지적으로 재생한 것입니다. 즉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감각기관을 통하여 경험한 모든 감각체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시와 고전에서 심상을 배워 심상주의(이미지즘) 운동을 전개한 에즈라 파운드⁶⁴⁾는 수많은 작품을 쓰는 것보다 단 하나의 뛰어난 심상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루이스(C. D. Lewis)는 “심상은 말로 만들어진 그림이다. 한 개의 형용사, 한 개의 은유, 한 개의 직유로 심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⁶⁵⁾고 한 것은 물론, 심상의 역할이 시의 “신선감, 강렬성, 환기력”⁶⁶⁾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심상, 즉 이 ‘언어로 만들어진 그림’은 독자가 시를 읽으며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어떤 영상을 떠올려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경지입니다. 참신하고 대담하고 풍부한 심상이야말로 현대시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시의 생명은 심상의 창조에 있다고 할 정도로 심상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심상이’ ‘심상은 시의 생명이다’라는 정의까지 나왔습니다. 심상은 우선 참신한 것이어야 하며 반드시 감각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심상주의자 선언’(1915)을 보면 심상의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① 일상어를 사용하되 적확한 말을 고르며, 모호한 말이나 장식적인 말 배척
② 새로운 정조의 표현으로써 새로운 리듬을 창조
③ 재제의 선택을 자유롭게 할 것
④ 명확한 심상을 제시할 것
⑤ 눈에 명백히 보이는 시를 쓰고, 멍하고 흐릿하고 막연한 시를 쓰지 말 것
위 주장의 핵심은 시를 쓸 때 표현이 적확하고 명료하고 새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관념어로 서술하는 것을 금지하고 감정의 미묘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심상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현대 시인들은 심상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심상을 공부할 때 대개 심상주의자인 흄의 시가 자주 인용됩니다.
가을밤의 싸늘한 촉감
나는 밖을 걸으면서 얼굴이 붉은 농부같이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를 넘보는 것을 보았다
나는 멈춰 서서 말을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둘레에는 도시의 아이들처럼 흰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었다
ㅡ흄, 「가을」 전문
시를 창작할 때는 사물의 정확한 표현을 위해 밑줄처럼 감각적 심상의 활용이 필요합니다.
한국문학사에서 1930년대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과 세련된 언어 및 김기림의 이론이 닦아놓은 테두리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적 창작방법에 있어서 기술상의 일대 발전을 이룩하여 말을 다듬어 쓰는 솜씨나 정교한 이미지의 조형이나 깔끔하고 억제된 구성에 있어서 고도의 세련에 이르렀습니다.⁶⁷⁾
특히 정지용은 그 이전의 모든 시인들이 한탄과 슬픔 등으로 가득찼던 한국시단과 ‘시적 결별’을 하고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감행한 한국 최초의 시인입니다.⁶⁸⁾ 그의 초기 시는 바다 소재를 통한 회화성에 집착하다가 후기에는 산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지용 시에 대하여 이론적이며 분석적인 평가를 처음 내린 사람은 김기림입니다. 김기림은⁶⁹⁾ “가령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거진 천재적 민감으로 말의 음의 가치와 ‘이미지’, 청신하고 원시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발견하였고 문명의 새 아들의 명랑한 감성을 처음으로 우리 시에 이끌어 들였다.”고 극찬했습니다.
물론 정지용에 대한 비판적 입장도 있습니다. 임화⁷⁰⁾는 모더니즘이 고의의 논리적 기교이거나 지식계급의 완전한 주관적 환상이라며 정지용은 김기림, 김영랑, 신석정 등과 함께 기교파이며, 기교파는 시의 내용과 사상을 방기한다고 공박하였습니다.
정지용은 시 창작에 있어서 바다와 산을 제목으로 한 시를 많이 창작하였습니다. 그의 초기 시집인 『정지용 시집』에는 ‘바다’를 제목으로 한 연작 형태의 시가 11편이나 되며, 바다를 소재로 했거나 바다심상을 드러내는 시는 20여 편에 이릅니다. 이는 초기 시에 있어서 바다에 시선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에 정지용은 다수의 바다 시를 썼습니다. 바다 시에서 감정을 철저히 감각화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재기 발랄한 심상들에서 감각적 선명성을 볼 수 있습니다.
고래가 이제 횡단한 뒤
해협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흰 물결 피어오르는 아래로 바둑돌은 자꼬 자꼬 나려가고,
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종달새……
한나절 노려보오 움켜잡아 고 빠알간 살 뺏으려고.
미역 잎새 향기한 바위 틈에
진달래꽃빛 조개가 햇살 쪼이고,
청제비 제 날개에 미끄러져 도-네
유리판 같은 하늘에.
바다는―속속들이 보이오.
청댓잎처럼 푸른
바다
봄
- 정지용, 「바다 6」 부분
첫 연에서 고래가 횡단한 뒤 바다의 움직임을 ‘퍼덕이는 천막’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바다에 대한 새로운 심상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파도가 밀려와 물에 부딪치는 모습을 ‘흰 물결 피어오르는’으로 표현하여 시각적 심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파도가 밀려나갈 때의 모습을 ‘바둑돌이 자꾸 자꾸 내려가는’것으로 표현하여 그 정경을 선명하게 시각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경 한쪽에는 빨간 살을 빼앗기 위해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종달새가 있습니다. ‘은방울 날리듯’ 가볍게 떠오르는 ‘바다종달새’, ‘천막처럼 퍼덕이는 바다’, 물살에 휩쓸려 자꾸자꾸 내려가는 ‘바둑돌’은 흰빛, 은빛, 빨간빛의 색채와 어우러져 한 폭의 선명한 풍경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자꾸 자꾸 내려가는’, ‘퍼덕이오’, ‘은방울 날리듯’은 동적인 언어로, 시적 공간의 깊이와 높이를 확대하여 하강과 상승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 풍경을 이루고 있는 소재는 ‘진달래꽃빛 조개’, ‘청제비’ 그리고 ‘미역 잎새 나는 바위’와 ‘유리판 같은 하늘’, ‘청댓잎처럼 푸른 바다’ 입니다.
유리판같이 투명한 하늘, 밝은 햇살 속에 빛나는 진달래꽃빛 조개, 청댓잎처럼 푸른 바다는 봄 바다의 한 풍경으로 투명하고 밝은 심상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미역 잎새 향기한 바위 틈’의 표현으로 후각적 심상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바다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으며 ‘진달래꽃빛’, '청―‘, ’푸른‘이라는 색채어가 함께 쓰여 맑고 청신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정지용의 또 하나의 시집 『백록담』(1941)에는 산수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앞의 시집이 바다나 평지에 관련된 심상을 보여주는 반면 『백록담』은 산과 관련된 심상을 많이 보여줍니다.
감각적 심상 구성에 있어서 정지용은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선명한 심상과 절제된 언어로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정지용이 감정을 감각화하는 방법은 그 스스로 철저히 인식했던 언어에 대한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심상의 방법은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인들이 두드러지게 사용하였던 창작방법입니다.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 김광균, 「뎃상」 전문
위 시는 언어로 한 폭의 그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을 형성하는 시어를 찾아보기 바랍니다. 또 실감을 주기 위해 사물에 시각적인 색감을 가미한 시어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심상의 종류는 감각적 심상, 비유적 심상, 상징적 심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각적 심상은 정신이나 마음에 나타나는 감각적 경험만을 강조하는 심상입니다. 외부의 사물에 대한 직감적 반응을 일으키는 감각기관, 즉 시각, 촉각, 후각, 미각, 근육감각, 기관감각 등을 통하여 지각할 수 있는 직감적인 사물이거나 상상적인 사물을 말합니다.(홍문표, 323쪽 참조)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피아노」 전문
피아노를 뛰어난 솜씨로 세련되게 치는 음율의 심상을 묘사한 작품이지요. 피아노 건반 위를 민첩하게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열 손가락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피아노가 내는 소리를 비유한 것이며,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은 음률 중 가장 매혹적인 대목을 비유한 것입니다. 어떤 관념이나 세계관이 끼어들지 않은 순수한 감각적 심상입니다.
감각적 심상의 이상적인 방법은 공감각에 있습니다. 공감각은 시각, 청각, 촉각이 동시에 이루어져 정서적 환기를 이루는 일입니다. 현대의 이시영도 이런 방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 이시영, 「봄 논」 전문
이 시에는 청각, 촉각, 시각이 어우러져 마른논에 물이 들어가는 시골 봄 논의 정경을 확연히 떠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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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江碧鳥逾白 山靑化欲燃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64) 에즈라 파운드는 중국 고전과 역사에 심취하였다. 처음에 이태백의 시를 번역하고, 나중에 『논어』 『대학』 『중용』 『시경』을 번역하여 자유롭게 인용하고 언급했다고 한다. 자신은 기독교도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던 그는 자신이 두 번이나 번역하기도 했던 『대학』의 몇 줄을 서양 사람들이 배웠더라면 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환갑노인이 되었을 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방송을 통해 미국 군인들에게 반전을 선전했다가 미군에 체포되어 대역죄로 미군징벌구치훈련소에 수감되기도 한다. 프로스트, 엘리엇, 헤밍웨이가 구명운동을 하여 석방되었다.
65) 홍문표, 317쪽.
66) 이지엽, 152쪽.
67) 염무웅, 『민중시대의 문학』, 창작과비평사, 1979, 75쪽,
68) 김윤식 ·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73, 202~203쪽. 이곳에서 김현은 “정지용은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감행해 본 한국최초의 시인”이며, “그 이전의 거의 모든 시들이 한탄, 슬픔 등의 감정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에 대한 하나의 저항으로 그의 시”가 시작한다고 하였다.
69) 김기림 『김기림 전집 · 2 · 시론』, 심설당, 1988, 57쪽.
70) 임화,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37, 625쪽.
2024. 2. 2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