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에세이】
어느 전직 경찰의 걱정스러운 시선
― 대청호수에서 바라본 ‘안보 홍보물’의 추억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경우회 홍보지도위원
그 옛날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간첩신고’를 강조하는 표어를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1950~1960년대 ‘간첩신고’와 ‘반공(反共) 표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불온 삐라를 보면 곧바로 경찰관서에 신고합시다’,
‘빠른 판단 빠른 신고, 대남 간첩 일망타진’,
‘휴전선 넘는 기밀, 포탄 되어 다시 온다’
▲ 자료사진(출처 =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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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공 기관 담벼락에는 ‘간첩을 신고하면 상금 20만 원 준다’라는 현수막도 붙어 있었다. 당시 20만 원은 쌀 30여 가마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내가 경찰관이 되어 일선 파출소에서 근무할 때다. 어린 학생들이 불온 전단을 주어 오면 노트나 필기구 등 학용품을 상품으로 주었다.
일선 경찰서 정보보안부서에서 근무할 때도 그랬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각종 인적 · 물적 요소를 신고하는 학생이나 주민들에게 줄 선물이 캐비닛에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간첩 신고자’가 과연 있을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각종 요소나 대상을 신고하는 학생이나 지역 주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지난 휴일, 공무원인 아들이 모처럼 점심을 사준다기에 풍광 아름다운 대청댐으로 향했다. 대청호 주변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호숫가를 산책했다.
▲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에 호수의 물결도 잔잔하고 아름다웠다. (사진 = 필자, 2025.1.19. 오후 대청호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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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는 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오랜 세월 근무했던 대덕경찰서 관할(管轄)이다.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가 이곳 주변에 있다. VIP가 이곳으로 여름휴가를 오면 밤샘 비상근무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대전시민들의 식수원이다. 엄격하게 수질 관리하는 보호구역이다. 이 지역을 담당하는 경찰관들에게는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 시설이다.
대청호 산책길에서 반가운 홍보물을 만났다. 대덕경찰서에서 세운 ‘안보 홍보물’이다. 아,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내가 현직에 있을 때 만들어 세운 홍보물 아닌가. 아직도 여기서 볼 수 있다니 놀라웠다. 퇴직한 지 15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색이 변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들이 말했다.
“퇴색하여 사진을 다시 산뜻하게 제작한 것처럼 보여요.”
▲ 대청호에 세워진 <안보 홍보물> -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홍보물이다. ※ <간첩신고 전화번호>를 주목하게 된다.(사진=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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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설치했던 위치도 변경됐지만 ‘홍보 문구’나 ‘신고 전화번호’는 그대로였다. 이 홍보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간첩 신고’ 전화번호다.
그림 디자인이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경을 감추기 어려웠다.
아들에게 말했다.
“이 안보 홍보물을 보면 많은 추억이 떠오른다. 과거 대덕경찰서에서 근무할 때 홍보물에 들어갈 사진이며 문구며 내가 선택하여 세운 거야. 위치는 변경됐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똑같다. 그런데 요즘 누가 간첩을 신고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들이 말했다. 서울 종로에서 의경으로 군 복무했던 아들도 아비 못지않은 투철한 애국심과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
“요즘 시대가 많이 변했어요.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는 뉴스가 잇따라 나와도 긴장하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안보 의식이 그만큼 느슨해진 것 같아요.”
그렇다. 일선 치안 부서나 안보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국민의 안보 의식이 과거보다 느슨한 것이 현실이다. 국내에서 암약하는 간첩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래서 전직 경찰관들이 모이면 ‘나라 걱정’하는 분들이 많다. 어느 경찰 선배는 유튜브 영상을 자주 보내준다. 우리의 안보 현실을 걱정하는 유튜브다.
뜻이 통하는 선후배 전직 경찰들과 누리 소통망을 통해 대화하면서 내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다.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 첫째가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국가 안보 의식이다.
▲ 둘째는 윤리 도덕과 미풍양속이다.
▲ 셋째는 사회 기본질서와 인격 존중이다.
여기서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국가 안보’를 <첫 번째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것은 다름 아니다.
사상과 이념이 달라도 국익과 안보를 위한 것에는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할 이유가 없다.
각자 추구하는 정치성향은 달라도 국가 안보를 바탕으로 한 애국 애민 정신이 온 나라 구석구석에 강물처럼 흐른다면 사회적 갈등도 녹아들 것이다.
국토가 두 동강 난 나라에서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져 질시하고 갈등하고, 심지어 적대감을 품는 현실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모처럼 부자(父子)가 대청호수를 산책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건실한 사고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 키워드는 ‘애국심’이다.
▲ 대청호 <안보 홍보물> -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폰카에 담았다. (사진=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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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신고’ 전화번호가 새겨진 추억의 ‘안보 홍보물’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폰카로 사진을 찍으니 아들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참,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 인상 깊은 장면을 보면 꼭 폰카에 담잖아요. 평생 정보관이라니까요. 오늘은 대공 형사 역할도 하시네요.” ■
2025. 1. 19.
윤승원 대청호수 산책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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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전수필문학회 박영진 수필가님
네이버 블로그 '청촌수필'에서 박노욱 교수님
'올사모 카페'에서 정구복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