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표현의 이해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 빠지기 쉬운 좋지 못한 관습적 표현들
8. 형식과 리듬
한 가지만 더 검토하고 지나가도록 하자. 형태적 형식으로 본다면 시는 단어 · 구 · 행 · 연으로 되어 있다. 이런 구조를 갖춘 언술을 우리는 일단 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표현은 어떤가.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학물.
순수한 상태에서는 냄새는 없고
빛깔도 없고 맛이 없는 투명한 액체.
동물과 식물체의 70% 내지 90%를 차지하며,
생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온 지표면적의 약 72%를 차지하고
[하략]
-「물」
「물」은 국어사전의 낱말풀이 일부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시의 형태적 구조에 맞추어 운문화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물」은 과학적으로 탐구되고 실증된 사실을 근거로 하여 물의 속성소[H₂O]와 필요성, 그 존재 양태를 설명expositon이라는 언술 형식을 사용하여 정의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의 내용은 수사학적 언술 형식으로는 설명이며, 언어의 기능적 분류상으로는 의사 진술pseudostatement이라고 리차즈가 부르고 있는 정서적 표현emotive utterance과 구분되는, 과학적 진술이다.¹⁹
과학적으로 진실이 실증된 이 정의를 두고 시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최소한 시적 진실에 둔감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심리적·정서적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본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얼마나 오묘한가. 앞의 예문 내용이 과학적 진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예문을 담고 있는 구조적 형식 어디엔가 시의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예문 내용이 시적 진실이 아닌 과학적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울린다. 느낌의 차이는 앞의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에게 각각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울림을 의식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이 울림은 시라는 한 예술 양식 자체가 우리의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를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식의 구조는 그것이 아무리 시대에 뒤지고 상투화되었다고 해도 한 양식의 탄생을 현실화시킨 예술적 에너지를 어떤 형태로든 최소한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물」은 과학적 진실 때문이 아니라 시라는 한양식이 지닌 본래의 생명 감각인 시행의 리듬[律圉構造] 때문에 시적으로 울린다.²⁰
시인은 이 생명 감각인 리듬을 사랑한다. 초보자의 대부분은, 그러나 이것 대신 외형적 그 형식에만 기댄다. 이 점을 알기까지만 해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행(行)이며 연(聯)이라는 형태적 형식은 시적 진실이 살아 움직여 생긴 율동감이 아닐 때, 그것은 한갓 기계적 울림 또는 관습적 울림일 뿐이다. 결국 진정한 리듬은 시인이 발견한 시적 진실의 힘, 그 힘에 의하여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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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L. A. Richards, Poetries and Sciences, Routledge and Kegan Paul, 1970, p. 58.
20 「시의 구조와 행 · 연」 참조.
『현대시작법』 오규원
2024. 5. 2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