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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성의 그물
만약에 당신이 '가을'을 소재로 한 편의 시를 쓴다고 치자. 당신의 머릿속에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가을의 목록은 십중팔구 낙엽·코스모스·귀뚜라미·단풍잎·하늘·황금들녘·허수아비·추석'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만나기 위해 머릿속을 왔다갔다할 것이다.
그러다가 낙엽은 '떨어진다'는 말로 연결되고, 코스모스는 한들한들'이라는 의태어를 만나고, 귀뚜라미는 '귀뚤귀뚤'이라는 의성어와 결합하며, 단풍잎은 빨갛게 물이 들 것이며, 하늘은 '푸른 물감을 뿌리다'는 문장과 조우하며, 황금들녘은 풍요의 이미지를 데리고 올 것이며, 허수아비는 반드시 '참새'를 불러들이고, 추석은 '보름달'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한심한 조합으로 시의 틀을 짜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때부터 당신의 시는 망했다고 보면 된다.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 당신의 시는 상투성의 그물에 스스로 갇힌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마음의 독버섯과 같다. 겉은 멀쩡한데 우리의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상투적이란,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듯, 마치 어떤 기적으로 거듭 나타나는 단어가 여러 가지 이유로 각각의 경우마다 적당하다는 듯, 마치 모방하는 것은 더 이상 모방으로 감각될 수 없는 듯, 어떤 마력도 어떤 열광도 없이 반복되는 단어"라고 말했다.¹³ 동어반복을 지적한 것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의 지겨움을 깨우치지 못하고 그 반복이 진리라고 믿는 게 상투성의 원리다.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을 오규원은 ‘미적 인식’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¹⁴ 아무리 아름다운 소재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인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죽은 인식은 죽은 언어를 불러온다. 시인의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죽은 언어를 구별하여 과감히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다.
연탄 이야기를 잠시 하자.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 앞에 슬그머니 '연탄시인'이라는 말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나무시인'이나 '풀잎시인'이 아니고 하고많은 소재 중에 왜 하필이면 연탄이란 말인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공양」 전문¹⁵
아마도 이 시를 비롯해서 연탄을 소재로 몇 편의 시를 쓴 탓일 게다. 애초에 나는 연탄을 소재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희생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다. 나는 연탄을 내세워 '가을'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니, '가을'을 쓰려고('가을'을 내 방식으로 인식하려고) 연탄을 끌어들였다는 말이 맞겠다. 옛날에는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꺾일 때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연탄이었다. 연탄을 실은 트럭과 리어카가 거리와 골목을 누비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었다.
어릴 적에 내 자취방 부엌에는 늘 연탄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내가 처음 배운 것은 자취방의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고 제때 갈아주는 일이었다. 연탄의 붉고 푸른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구들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나는 자주 바라보았다. 그 불꽃으로 밥과 국과 라면을 끓였고(몇 번이나 라면 냄비를 뒤엎었고), 양말과 운동화를 말렸고, 양은찜통에다 밤새 물을 데워 아침에 머리를 감았다.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연탄을 갈았고, 연탄구멍을 정확하게 맞추려고 잠이 가득 찬 눈을 비볐고, 그리고 연탄가스를 맡지 않으려고 몇 초 동안은 숨을 참아야 했다.
언덕 위에 있던 그 자취방을 나와 학교로 가려면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이면 눈 녹은 물이 비탈길을 빙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침에는 누군가 어김없이 비탈길에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뿌려놓곤 했다. 그 고마운 분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연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선물했다. 하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인식하는 소재로, 또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이미지는 오히려 연탄보다 '촛불'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촛불이 연탄보다 더 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상투성에 굴복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석정을 비못해 이미 많은 시인들이 촛불의 자기희생을 노래했다. 지금 와서 그것을 굳이 시라는 형식에 담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상투적인 동어반복만큼 비시적인 것도 없는 것이다. (2008년 여름, 한국의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은 또 다른 의미 규정을 요한다. 그 수십만의 촛불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관념으로서의 촛불이 아니라 시민들의 위대한 연대라는 문화사적인 의미를 내장한 촛불이었다. '골방/촛불' '광장/횃불' 이라는 고정관념을 '광장/촛불'로 전환시킴으로써 촛불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과 규모로 한국사회에 새로운 분노를 표시하였다. 촛불이 도심 한복판에서 저항의 들불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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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명복 옮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0, 46쪽.
14 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1990, 27쪽. 1
15 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11쪽.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2024. 10. 12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