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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짙은 그림자
비록 이혼한 건 맞지만,
기로는 '이혼' 그 자체가 본인에겐 꼭 나쁘달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자기 스스로 원했던 이혼이 아니라, 그러니까 기로 자신은 가정에 충실했음에도 상대방의 분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이혼이었기에(본인은 그저 당했을 뿐이라는 입장이어서), 결국 자신의 전체적인 삶에도 진한 오점으로 남은 건 속일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지금처럼 혼자 사는 건 너무나도 홀가분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자유'만을 따지고 본다면,
' 차라리 이혼을 한 게, 어떻게 보면 둘 모두에게 잘한 일일지도 몰라......' 하는 생각도 하곤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혼의 원인이 전처 '송 선희'의 분륜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그런 '밝힘증'이 있던 년과(심지어는 '화냥년'이란 표현까지 썼던 기로였다.) 결혼을 했던 내가 잘못이었지!' 하기는 하면서도, '그런 년과 평생해로를 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고......' 하면서,
나름 합리화를 시키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런 사실이 세상에(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상, 어쩌면... 기로 자신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본인 스스로도 드는 생각 뿐만 아니라, 세간에서도 그렇게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에, 더욱 분노가 치솟고 한편으론 심신이 위축되면서도 괴로워했던 그였다.
'허기야 애 둘까지 그런 부정을 저지른 년한테 넘겨주고 말았는데......' 하는 자식들에 대한 떳떳하지 못했던 아빠로서의 고통도 이겨나가야만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어린 아이들이 지 에미를 따라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했겠느냐고? 어차피 내 인생은 파탄 난 거, 아이들 만이라도 에미와 함께 살게 해 준거지......' 하면서,
'아, 내 인생이... 어느 한 순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 버린 거지......' 하고 혼자서 그 괴로움을 삭혀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쉽게 잊혀질 일이던가.
본인 스스로는 그 일로부터 한 시라도 자유롭고 싶어서 몸부림을 쳐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비참해지는 자신을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고,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어쩌면 자신의 몸에 새겨진 '문신'과도 같은 흔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로는 아직까지도 그 년(송 선희)과의 이혼은 자신의 인생 전반에 오점만을 남겨주었다는 진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성(性)적으로 만족하지 못한 년이 바람나서 나간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아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그 뒤에 붙는 ‘그 남편’이란, 이젠 기로 자신의 인생 전체적으로도 떼어버릴 수 없는 남자로서의 치욕의 굴레에서는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자괴감과 피해의식에 휩싸여 살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우대 멀쩡한 기로를 주변에서는 내버려두지를 않고도 있었다.
여전히 기로가 좋다고 쫓아와 성가시게 하는 여자도 있었고(차 순애), 또 주변(형제와 지인들)에서는 기로에게 여자를 붙여주려는(?) 의도거나 끈이 이어지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또 이혼한 채로 몇 년을 혼자 살다 보니, 조금씩 여자에 대한 겁(거부 반응)이거나(?), 그럴 바엔 차라리 이렇게 혼자 사는 게 훨씬 자유롭다는 생각이 굳어져가고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여자 문제는 기로에게 이젠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다만, '여자를 성(性)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해 바람나게 했을 거'라는, 주변 사람들(세간)의 눈총이거나 입방아가(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수근 댈 것 같다는 자조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결과적으론 어쩌면 자신의 콤플렉스(열등감)로 굳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쳐버릴 순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마저도 웬만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스스로 인지는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내가 어디 특별하게 이상이 있는 건 아니잖은가 말이다. 바로 그 년이 그렇게 색(色)을 밝혀서 그런 거지......" 하고,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기로는 혼자서 중얼대기까지 했다.
"에이, 이 행복했던 순간에... 하필이면 내가 왜, 또 그런 생각까지 하는지......" 기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노를 저었다.
기로는 전처 송 선희와 대학 시절에 연애로 만나 결혼에 이른 캠퍼스 커플이었다.
같은 사범대학에 다니던 기로는 ‘미술 교육과’의 4학년 복학생이었고 ‘수학 교육과’의 꽃이라던 송 선희는 현역 3 학년 학생으로,
그들이 만난 건 학교 내 동아리 ‘000’에서였다.
원래 대외 활동을 잘 하지 않던 기로였지만, 거기엔 같은 고향(군산)에다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유 병선에 끌려 반 강제적으로(?) 들어갔던 게 인연이 되어... 어딘가에 한 번 속하면 성실한 자세로 일관하는 기로의 특성 상 군대를 제대한 이후까지 동아리 활동이 이어졌던 것으로,
물론 그 동아리에서 ‘국어 교육과’의 동기인 구 병태와 ‘생물 교육과’의 2년 후배인 서 창모를 만났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는 했다.
그러니까, 기로가 다소 촌스런 모습으로 군대에서 제대한 뒤 곧바로 복학한 상태로 000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런 기로에게 반했던 게 바로 ‘수학과의 꽃’이라던 (아니, 사범 대학 전체적인 꽃이기도 했던) 송 선희였다.
그저 대학에 다니면서 두어 차례 미팅의 경험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애인이랄 수 있는 여자는 없었던 기로였기에, 같은 동아리 내의 구 병태 등으로부터도 심한 질투(?)와 시기를 받기도 했던 연애사건이었었는데,
게다가 여자에게 늘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던 기로에게 그렇게 대학의 한 꽃으로 불리던 여자로부터 구애를 받게 될 줄은 본인은 물론 주변에서도 다들 놀라는 일이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이혼 4 년차인 기로도 나름대로는 떠들썩했던 캠퍼스의 연애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것인데,
그 연애에서도 주체는 바로 송 선희였다.
물론 기로는 눈에 띄게 잘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건장한 체구를 자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보통 키에 언뜻 보기엔 외모로 사람을 끌만한 어떤 특징이나 요소는 없어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로에겐 묘한 매력이 있었던 듯, 그것도 송 선희에게는 뭔가 꼼짝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던 듯, (허긴, 기로가 군대 가기 전에는 없었던 여학생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 송 선희는 기로에게 꽂혀서(콩깍지가 씌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나름대로는 갖출 건 다 갖추었다던, 그래서 ‘퀸카’라던 송 선희와의 연애로 주변 동료들로부터 숱한 부러움과 시기까지를 받던 기로는,
송 선희가 대학을 졸업한 그 이듬해에 바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결혼 초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둘도 행복했었다.
사실 기로는 대학을 졸업한 1년 뒤에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임용이 되었다.
그러니까 송 선희가 4학년 막바지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도 성적인 면에서는 송 선희가 늘 적극성을 띄었지만, 상대적으로 기로는 심드렁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었는데,
송 선희가 대학을 채 졸업하기 전에 둘이 첫 관계를 가질 때에도, 송 선희의 유혹에 기로가 넘어갔던 것으로,
그런 다음 송 선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순위고사에 합격을 하면서 둘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것 역시 따지고 보면, 기로는 책임감 때문에 송 선희에 끌려 다니다가 결혼을 하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처음 3년 간은 부부교사로 나름 풍족한 생활을 했다.
그 사이에 애가 두 살 터울이로 생겼는데,
기로의 특성상 교사의 역할보다는 작가의 길을 가야 할 것이란 걸 깨달은 송 선희는, 기로를 교직에서 그만 두게 했고, 집안의 경제 생활은 본인이 책임을 지면서 기로에게는 본격적인 작가로의 길로만 매진하도록 내조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정도로 송 선희 역시 어떤 면에선 헌신적이기도 했다.
그랬던 송 선희가 결혼 7년 정도 되면서는 슬슬 성적인 면에서 불만을 드러내더니,
어느 날 바람이 나서 10년이 되면서는 이혼 요구까지를 해 왔던 것으로...
송 선희의 낌새가 이상해지고(그런 쪽엔 무심하기까지 한 기로는 그 사실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알게 된 일인데), 잠자리에서 늘 불만이던 송 선희가 어느 시기부터인가는 좀 뜸해지는가 싶어,
기로 역시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미적대고 있었는데,
나중에 송 선희가 기로에게 이혼을 요구해 왔을 때도,
기로의 입장에서는 가급적 이혼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루한 이혼 요구의 결정적인 요인이, 이미 기로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부부간의 잠자리 문제였던 것이고(기로는 그것에 대한 건 감내를 하려고 했었다.),
송 선희가 어느 놈과 눈이 맞아, 이미 부정을 저지른 몇 달이 지나고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면서 눈이 뒤집혔던 기로는,
'이 두 연놈을 죽여버려야겠다!' 는 생각까지를 했다가,
너무나 떳떳하게 이혼을 주장하는 송 선희의 고백에,
기로 스스로 무너지면서... 모든 걸 포기하게 되었고, 이혼에 합의해 줬던 것인데......
그리고 이제는 그 일에선 웬만큼 자유롭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아, 이 산골로 들어와서 이렇게라도 뭔가 재미를 느껴가고 있던 참에, 그러니까 나에게 마치 해가 다시 떠오르는 것 같던 기분에, 짙기만 하던 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너무 행복해 하고 있을 때, 그 순간을 골라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있으니, 아! 인생이란... 뭐든 좋기만 한 건 없는 거 같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배를 기슭에 대고 기로가 '夢想?'에 돌아오니 격이 난리였다.
구름이 껴서 오늘은 조금 쌀쌀했다. 그리고 이따금 비 몇 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기로는 군불을 지피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도,
'그래, 어디 그런 문제가 완전히 잊혀지겠어? 그러니... 조금씩이나마 내 자신에게 관대해지기로 하자. '세월이 약'이란 말도 있잖은가 말이다!' 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북돋고도 있었다.
그리고 통나무집으로 가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오니 추워서 보일러를 켰는데, 잠깐 작동하는 듯싶더니 어째 아무 소리도 나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니 전원 자체가 꺼져있었다.
'이게 또 무슨 일이지?' 하면서 밖에 나가 보일러 본체를 들여다보았더니, 거기도 전원이 꺼져있었다.
'이거야 원... 상범이 놈은 이 보일러 하나 제대로 해주지 않고, 이렇게 나를 골탕먹이나?' 하며 화가 났지만,
기로는 상범 대신 일단 박 만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방에, 보일러가 안 되네요......" 하자,
"그려? 근디, 내가 알 수가 있어야지?" 하더니, "그 때 봉게... 중고를 써서 잘 안 되든디, 그것 땜시 그런 거 아녀?" 하고 박 만석이 물었지만,
"글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알 수가 있어야지.' 기로도 박 만석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니 하는 수 없었다. 나무를 때고 잘 수밖에.
그렇게 밖으로 나가 추위를 느끼면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 다음, 마지막으로 두꺼운 나무를 밀어 넣은 뒤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기로는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아니, 빚에 대한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만 되었지, 오늘이라고 어떤 마땅한 해결책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 책을 냈다고는 해도, 뭐 달라진 게 없다. 지금 당장 내 한 몸 헛돈 쓰지 않고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것은 해결해주었지만, 내가 떠맡고 있던 빚을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돼주질 않는 상황이다. 화가는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하는데, 지금의 내 상황으로 보면 ‘언감생심’이다. 그러니, 이 구덩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 빌어먹을......'
그렇게 몸을 움츠리며 멍청하게 앉아 있는데, 방이 조금씩 따끈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아, 이제야 몸이 조금 녹아나는 것 같구나......' 하면서도, '홈페이지 작업은 조금 있다가 하지, 뭐......'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집안이 어수선했다.
밤새 격이 토방을 사정없이 파 놓아서 난리였다. 그리고 물어 뜯은 빗자루는 이제 형태도 없이 긁혀서 버려야할 지경이었다.
'개가 멍청한 건가? 어떻게 해야 저 버릇을 고친담? 한바탕 패야 하나?' 하다가, 기로는 마음을 잘라 버렸다. 그런데 이상스레 마음이 무거웠다. 개한테 실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산책도 시키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해서 호숫가로 나가기도 걱정스러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새벽에 안개가 자욱하더니 날은 밝게 시작됐다.
'오늘도 낮에는 더울 것 같구나......'
하는 수 없어서 아침나절에 기로는 산장에 전화를 걸어, 박 만석에게 보일러 문제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박 만석이 온다더니, 기로가 통나무집에 들어가 씻는 사이에 왔나 보았다. 언뜻 머리를 닦으며 보니 박 만석이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그래서 얼른 문을 열고,
"산장아저씨! 저 여기 있는데요." 하고 여전히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나갔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가려던 참이었는디..." 하는 것이었다.
"말씀 드린 대로, 어제 저녁에 와 보니 보일러가 먹통이 돼서요... 에이! 그 놈의 보일러 때문에 못 살겠네!" 기로는 마치 투정이라도 부리듯 그런 말을 했는데,
"근디, 유씨(상범)는 왜, 맨날... 중고만 쓴디야?" 여전히 박 만석도 그 상황을 보면서 탐탁잖다는 얘길 하는 것이었다.
보일러에는 뭔가 문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박 만석도 그 문제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아무튼 이 집에 멀쩡한 건(특히 기계) 없다. 그런 집에 내가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 자신도 멀쩡하지 않은지 모른다... 그렇지, 그것 역시 사실이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려고 해서, 또 얼른 생각을 지워버리기로 하면서,
'그렇다고 냉방에서 잘 수는 없으니, 남아 있는 장작을 때면서 또 며칠을 보낼 수밖에 없다.' 하면서, 박 만석의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기로는 매화나무 쪽으로 가보았다. 그러면서도 이사 온 초기에 있었던 보일러 문제가 다시 살아나다 보니, 기로에겐 상범에 대한 불신 역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보일러 하나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서, 와서 살라는 게... 무슨 친구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배가 고팠다.
그래서 12 시가 되기 전에, 기로는 서둘러 밥을 하기 시작했다. 어제 산장 집에서 준 상추에다 또 어제 먹다 남은 돌미나리만 있어도 점심 메뉴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기로는 상추와 쑥갓 등 쌈을 좋아했다. 많은 푸성귀가 있는 것도 좋겠지만 두세 가지만 있어도 쌈으로 먹는 사람이었기에,
'이제 비가 오고 날이 풀리면 그런 채소들이 조금 더 흔해지리라. 이런 시골에 사는 이점을 충분히 살려 이런저런 푸성귀들을 많이 먹으리라......' 하면서 점심을 먹고,
'이제 배나 타 볼까?' 하고 나가려는데 산장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뭘 먹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보니 식목일을 맞아 전주에서 지난 번 이름을 지어줬던 막둥이 아들 종혁이가 와 있었다.
"저 화가 선상님 헌티 인사 드려! 니 이름 져 주신 분잉게..." 하고 박 만석이 말하자,
"안녕하세요?" 하고 통실통실한 녀석이 인사를 했다.
"아, 그래... 니가, 종혁이로구나..." 하고 기로는 새로 붙였을 ‘종혁’이란 이음을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나 시방... 국수를 먹을라고 허는디... 같이 먹지 않을 텨?" 하고 박 만석이 잡아 끌었다.
그래서 기로도 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서울에서였다면 그런 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는데, 여기선 집에서 점심을 먹고 왔는데도 국수 한 그릇을 해치우는 식욕이 생겼던 것인가 보았다.
어쨌거나 기로는 그 녀석(종혁이)과 배를 타러 나갔다. 기로 딴에는 좀 친해보자고 했던 시도였는데, 애는 활발한 성격이 아닌지 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기로 쪽에서 말을 시켜 보려고,
"종혁이 넌, 학교에서 무슨 과목을 좋아하냐?" 고 물으니,
"‘수학’요..."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나이에 수학을 좋아하는 애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커서는 뭐가 되고 싶은데?" 하고 물으니,
"의사요." 하고 역시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번엔 본인 스스로, "근데, 자연은 잘 못해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면 ‘파블로 곤충기’는 읽어 보았냐?" 고 물으니,
"아니요." 했다.
그런데 반장집 정미와는 달리 종혁이는 기로와 얘기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자기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빼 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녀석도, 예를 들어... 나와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하려면, 몇 달이거나 몇 년은 걸려야(?) 가능할 일일지도 모르겠네......' 하는 생각도 스쳤던 것이다. 마치 박 만석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튼, '여자 애와 남자 애의 차이점인가?' 하는, 뭔가, 그런 차이가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기로는 호수를 다 건널 생각이었는데, 아직 노를 젓는 것이 썩 자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남의 집 귀한 외아들 녀석을 태웠기 때문에,
"아저씨가 호수를 건널 생각이었는데, 아직은 노 젓는 게 초보거든? 니네 아버지처럼 그렇게 잘 젓지 못해서 너를 태우고 가기가... 좀, 겁이 나서 그러니, 다음에 함께 가는 걸로 할래?" 하고 슬쩍 녀석의 의향을 떠 보니,
"텔레비전 볼 게 있었어요." 하고, 다소곳이 종혁이가 배에서 스스로 내렸다.
'이런 모습도 산장 아저씨와 닮은 것 같네? 그런 얘긴 또 하는 걸 보면......' 하고 혼자 피식 웃으면서도,
"그래, 자유롭게 놀아라!" 하고 마치 인심을 쓰듯 녀석을 놔주었다.
그러면서 혼자 노를 저었는데,
사실, 기로 스스로 생각해도 그런(호수를 건넌다던지..) 것에 별 두려움은 없었다. 남들도 그러는지는 몰라도, 기로는 호수를 건너면서 물결이 조금 높아 배가 흔들리는데도 전혀 두려움 같은 걸 느끼지 않는 자신이 이상하기도 했으니까.
호수 반대편에 있는 버드나무엔 벌써 푸른 싹이 돋아나고 있는지 한껏 생생한 색으로 봄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 카메라에 몇 컷 담았다. 그리고 호수 둔덕에 내려, 둔터니 마을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오늘은 어제 보다 바람이 조금 세서인지 물결이 출렁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로는 호수 복판에다 배를 띄워놓고 하모니카도 불었다.
'내 하모니카 소리가 마을이나 또 저쪽 건너에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들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이제 기로는 마을 사람들에게 상당히 대담해져 있다는 자신을 느꼈다. 아니, 산장 아저씨인 박 만석의 눈치가 보여지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산장 아저씨와 가까워져 있었고, 또 얼굴이 두꺼워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배를 타는 것마저 별로 겁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박 만석의 아들 종혁을 내리게 했던 건, 정말... 남의 집 귀한 외아들을 태우고 갔다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지, 배를 탄다는 그 자체엔 겁이 없었던 것이다.
배는 물결에 밀려 어느덧 마을 반대편 절벽 쪽에 닿고 있었다.
절벽엔 분홍색의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열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기로의 마음은 너무 편했다. 어쩌면 조금 뻔뻔해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빚이고, 이혼이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 이젠 그런 것들도... 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스쳐지나가는 한 얘깃거리에 불과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나는... 나 대로 살자. 그 길 뿐이다! 살다 보면, 나아질 수도 있는 거니까......' 하면서,
바쁠 것 하나 없는 사람처럼(사실, 바쁠 건 없었다.), 기로는 천천히 노를 저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와 인터넷을 하는데, 밖에 차를 대는 소리가 나더니 몇 사람의 말소리도 들렸다.
이럴 땐 짖어도 될 것 같았는데 격은 이럴 땐 또 잠잠하기만 했다.
그래서 다소 불만스런 생각으로 기로가 문을 열어보니, 웬 낯선 젊은이들 대 여섯이 차를 '夢想?' 앞에 세워놓고(거기가 터가 넓으니까) 낚시대를 챙기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마루에 나가,
"여보슈! 여기는 ‘일급상수원지역’이라 낚시 금지구역이니 돌아가세요." 라고 하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가며 보는 것 같더니... 낚시대를 넣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돌아가나 보다 했더니, 반장집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쪽으로 가봐야 나가는 길이 없어, 다시 나와야 하는데요." 하고 얘길 해주었는데도 그 쪽으로 가더니,
충분히 나올 시간이 가는데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기로가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나가 모퉁이를 돌아보니, 역시 서너 명이 다시 호수가에서 낚시대를 물에 넣고 있었고, 어떤 한 놈의 낚시대엔 반짝이는 고기가 한 마리 물리던 순간이었다.
"이 봐요, 들! 왜 말을 안 들어요? 다른 사람들은 한 번 말하면 돌아가던데, 왜 젊은이들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바로 코앞에서 그러고 있는 거요?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야단을 쳤다.
그러자 그들은 불만이 있는 듯,
"아저씨, 보트를 타고 낚시하는 사람들한테는 왜 아무 말도 않고, 왜 우리들에게만 그러세요?" 하고 마침 건너편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노랑 물을 머리에 들인 녀석이 따지는 것이었다.
'웃기는 녀석들...' 기로는 화가 나서,
"왜, 저 사람들 핑계는 대고 그래? 당신들만 똑바로 살면 될 것이지, 왜 남들까지 끌고 들어가느냐고?" 아예, 말을 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머리는 노랑 물을 들여 가지고... " 기로에겐 그 노랑물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그러자 그들은 낚시대를 챙겨 나오기는 하는데, 기로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아니꼽다는 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로는 '夢想?' 쪽으로 돌아왔다.
곧 이어 그들의 차가 마을을 빠져나갔다.
기로는 말도 안 들으면서 불만을 가진 놈들이기에, 만약을 위해 그들 차량 번호까지도 적어 두었다. 서울 차였다.
"떳떳치 못한 놈들!" 하면서도,
'허기야 나도 그놈들에게 욕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놈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가 않다. 최소한 내가 처음 경고했을 때 물러갔다면 내가 이러지는 않는다. 내 앞에선, "야, 가자!" 해 놓고 모퉁이만 돌아 다시 낚시대를 챙기는 양아치들......'
그런 놈들일수록 이런 곳에 쓰레기만 버리고 도망칠 놈들이라, 기로는 그들을 잘 쫓아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 하늘을 보다가 매화 쪽에 시선이 갔다.
그러고 보니, 매화가 어제만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제가 절정이었나?' 하게 되었고, 조금 자세히 관찰을 해 보니,
아직도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있긴 한데, 먼저 폈던 꽃은 꽃잎을 떨구어서 나무 전체적으로도 하얀 색이 어제보다는 환하고 밝아 보이지가 않았다.
그걸 바라보는 기로의 가슴 한 구석도 허전하기만 했다.
'너는 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지는구나......'
# 개와의 갈등
아침에 일어나 나가보니, ‘격’이 밤새 토방을 파 놓은 흙으로... 난리였습니다.
개가 어제 오후부터 시멘트 콘크리트 사이를 발로 파 놓기에, 야단을 쳤더니... 눈치를 보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그러던 게 밤새 제법 많은 흙을 파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토방을 쓸던 비 한 자루를 갉기에,
"이러지 마!" 하면서 그 빗자루로 주둥이를 두어 대 때려주었더니, 내가 보는 앞에선 안 하면서... 꼭 밤에는 그 것을 갉아 마당을 온통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역시 주둥이를 두어 번 때리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한동안은 빗자루에는 관심도 안 갖는 척하더니, 꼭 자고 일어나면 물어뜯어 놓곤 하네요.
벌써 나흘 째......
그래서 나도 개의 버릇을 고칠 겸, 일부러 그 자리에 그대로 비를 놓아두고 있거든요?
그러는 사이에,
아, 그 비는 이제 거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개와 내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내가 밖에 나갔다 오는데, 집에 돌아오면 반겨줄 개가 있다는 사실에 약간은 설레는 마음이었는데(오히려 내가 반가운 마음으로)...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개가 날 보더니 짖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아니, 이럴 수가!
나는 잠깐, '착각했나 보다.' 하고,
"격!" 이름을 두어 번 부르면서 다가갔는데도,
녀석은 꼬리를 뒤로 내리며 도망가면서 짖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평소에 짖기를 잘 하는 개라면 또 모를까, 평소에도 거의 짖지 않는 녀석이 주인을 못 알아보다니요......
나는 순간적으로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너를 왜 키우는데?'
그래서, 갑자기 화도 치밀어... 발로 한 번 걷어 차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도망가면서 더 짖어대더군요.
점점 화가 치밀기 시작했던 나는,
"주인도 몰라보는 놈!" 하면서, 다시 한 번 차려는데...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개는 180도로 모습을 바꾸면서... 땅에 벌벌 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도 미안했던지, 어쩔 줄을 모르면서 내 눈치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화가 났던 나는, 발길질은 멈췄지만... 정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런 게 있어? 멍청하기 짝이없는 녀석 같으니라구!"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면서는, 갑자기 정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너, 또 한 번만 그랬다간... 다시 군산으로 보낼 거다!" 하고 화풀이라도 하듯 말해 버렸지요. 개한테......
아니, 다른 건 몰라도 주인을 몰라보는 놈은 키울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날마다 저에게 밥을 주는 사람인데... 그 것도 보통 신경을 써가며 밥을 주는 것도 아니고, 또 산책도 시켜주고 배까지 태워주는데... 그렇게 정성을 드리지 않아도 주인에게 순종하는 게, 개의 특성인데, 그래 주인도 몰라본다면? 아무래도... 생각해 봐야할 문제지요.
그리고 이 녀석은 어찌나 멍청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와도 짖지를 않는 겁니다.
아니, 지가 개라면...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담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짖기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별로 짖을 일이 없는 사람에겐, 느닷없이 한두 번 짖기도 하는... 아주 띨띨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겁니다.
'도대체 얘가 제 정신인가?' 하는 생각도 두어 번 했었거든요......
아무튼 난 개에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개에게 조금 상처를 받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릅니다.
'똥개'라도 영리한 놈은 상당히 영리하기도 한데, 명색이 '진돗개'란 녀석이......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이런 멍청한 개를 왜 키우나?' 하는, 후회도 들고 또 약까지 오르드라구요.
그러면서도 개를 때린 게 후회스러웠습니다.
말도 못하는 짐승을, 지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을 내 맘에 안 든다고 매질이나 하고......
(물론 그 것은 약이 올라서 세게 몽둥이 질을 한 것이 아니라, 빗자루를 개 주둥이에 갖다 대면서... 목소리만 높이면서 교육용으로 살짝 갖다 댄 것에 불과한데요... (그런데 이것은 어쩐지 내 자신의 궁색한 변명으로 여겨지네요.))
아, 그런 내 자신이 싫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말 못하는 개에게, 마치... 절대 군주나 폭군처럼 절대 복종을 강요하다니요. 반항하지 못하는 짐승이라고 발로 걷어차다니요......
그런 기분은 묘했습니다. 사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아, 나에게도 그런 '폭력성(?)'이 있다니......
그렇게,
내가 개 때문에... 스스로 반성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마저도 낯선 일이네요......
그리고 또,
내가 때릴 땐 변명도 못하고 정말 몸을 땅에 기다시피 꼼짝 없이 당해야만 하는 무저항의 개가 안타까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내 마음이 보통 아팠던 게 아니었답니다.
사실 따져보면, 뭐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개의 본능이고, 또 나에게 짖은 일은(주인을 잘 못 알아본 것은), 그 것도 환경이 바뀐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인데......
글쎄요,
개가 여러 마리인 형 집에서, 어릴 적 내내 별 관심 없이 집 마당 한 구석에 묶어놓고 키워서 개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아닌지......
그런데 이 개(격)는,
'이리 오라'고 해도 도망가고, 또 내버려두면 어느새 와 있고......
좌우간 주인과 커뮤니케이션은 빵점인데다 천방지축이기까지 합니다.
애당초 새끼 때부터 내가 길을 들이면서 키웠더라면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닐 텐데, 이미 몇 개월(3개월 여)을 그런 교육조차(?) 없이 자란 녀석이라, 이제 와서 길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내가 져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개에게, 사사건건 많은 걸 요구하진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내가 부르면 바로 나에게 달려오고, 또 이것저것 물어뜯을 때 하지 말라고 두세 번 주의를 주면, 하지 않는 것만을 기대했던 것이지요.
이 번 빗자루 사건을 보면, 그런 일은 요원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일이 있을 때마다 개에게 물리적인 체벌을 강요한다면... 개도 안 됐고, 또 나 역시도 마음이 아파서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져주기로 한 것이지요.
그렇게 맘먹으니, 어째... 처음에 개에게 기대했던, 그래서 정을 주었던 것에선 많이 후퇴한 상황입니다.
그 것도 그리 바람직한 건 아닌 것 같으니......
이래저래 갈등입니다.
개를 키우면서 일어난 내 마음의 변화도 이렇습니다.
4 . 5
저녁 무렵 기로가 옆집에 들러 보니, 할머니는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장 기로는 부엌에 들어가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 며칠 불을 몇 번 땠더니 나무가 제법 줄어든 것 같았다.
'그러면 어떠랴? 할머니를 올 겨울에 춥지 않게 해 드리면 될 것 아닌가?' 기로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불을 거의 다 때고 나가보니 방이 잠잠했다.
기도가 끝난 것이라서, 방문을 두드리니 할머니가 문을 열어보라고 했다.
문을 여니,
할머니는,
"지금 안약을 넣고 있는 중여..." 하더니, "이자... 불을 때지 마. 날씨가 많이 풀렸응게... 불 안 때도 될 거 같응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미 거의 다 땠거든요?" 하니,
"아까... 배타고 저쪽 편에 간 게, 집이여?" 하고 물었다.
'아, 내가 배를 탈 때 보셨던 것이리라......'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예, 할머니. 근데, 그게 보이셨어요?" 하고 묻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은, 어쨌거나 할머니가 그 정도의 시력은 회복하고 있다는 얘기인 것 같아... 기로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동안은 할머니의 난방 문제에 많은 보탬이 되리라는 것에, 나름의 안도감을 느끼고도 있었다.
어차피 서울에서 두 명의 후원회원(?)이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오늘은 저녁을 먹은 뒤에야 겨우, 늦으감치 일기를 썼는데...
거의 다 마칠 무렵, 노트북을 잘 못 건드려 텍스트가 다 날아가 버렸다.
기분도 썩 좋지 않았던 데다가, 다시 쓰기도 싫어서... 오늘 일기는 없는 걸로 한다.
4. 6
그렇잖아도 요 며칠은 홈페이지에 일기를 올리지 못하고 있던 기로였다. 우선은 몇 가지 일이 한꺼번에 다양하고 장황하게 벌어져서, 그 많은 내용을 다 적어 올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컸다. 그렇지만 바빴던 것도 사실이었고, 나름 고민스러운 것도 있어서... 이래저래 일기를 쓰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안 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모처럼 긴 일기를 썼고, 거의 다 채워질 무렵... 뭔가 잘 못 클릭하는 바람에, 작업해 놓았던 게 다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허망했다. 그리고 아까운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상실감은 어디 가서 보충한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을.. 에이! 컴퓨터와 인터넷 세상이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냐!' 기로는 혼자서 투덜투덜 화를 삭히기까지 했다.
*
어째, 날씨가 쌀랑쌀랑하다.
그래서 인터넷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이 지역엔 비가 온다는 표시다.
'해가 희뿌옇게 떠오르는데, 무슨 비?'
기온은 0도 조금 넘게 표시가 돼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춥구나...... 아직은 완전한 봄은 아니지......'
보일러도 고장 나고, 어제 밤에 군불도 많이 때지 않았었는데... 어쩐지 불안해진다.
정말 이 집은 뭐 하나 완벽한 것이 없다.
산책을 갈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격만 줄을 풀어주었더니... 이리저리 뛰고 난리다.
요로법을 위해 나는 통나무집에 들어갔고, 개만 혼자 이 부근을 뛰다니며 뭔가 킁킁대며 먹을 걸 찾는 기색이다.
'배가 고픈 건가? 하필이면 쌀이 떨어지니, 더 그러네......'
어제 저녁에 쌀이 떨어졌다.
아직은 쌀이 남아있을 줄 알았던 나는 당황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차가 있어 바로 사러 나갈 수가 있나?
더구나 어제 저녁은, 점심을 빵으로 때워서 밥을 해 먹었는데, 개 밥을 주느라 내가 양도 차지 않게 먹었었는데......
보일러 문제로 오늘 상범이 온다기에, 오기 전에 전화가 오면, 쌀 좀 사오라고 하려했는데... 그는 아무 소식도 없다.
나 역시도 그에게 전활 걸지 않았다.
꼭 밥을 먹지 않아도 되니, 어떻게든 견뎌낼 수는 있다. 다만, 격의 먹이가 문제다.
그래서 점심엔 수제비를 해 먹었다.
그러면서 밀가루도 다 털었다.
'저녁은 뭘로 할까?'
'또르띨랴'로 해 먹으면 될 것이다. 개에게도 또르띨랴 한 쪽을 주면 될 터였다.
밥을 먹으나 그 걸 먹으나 양이 차는 건 마찬가지니까.
4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