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백 살 지혜’ 지닌 22살 종교지도자 ' 까르마빠'
▲ 92년(왼쪽), 2002년(오른쪽)의 까르마빠
까르마빠는 지구상에서 가장 어린 종교지도자다. 현재 나이 22살이다.
티베트엔 달라이라마가 수장인 겔룩(황모)파와 까규(흑모)파,
샤카(석가)파, 닝마파 등 4개의 불교 종파가 있다.
까르마파는 겔룩파에 이어
티베트에서 두번째로 큰 종단인 까규파의 수장이다.
그는 1985년 6월 티베트 동부산악 고원지대에서 태어났으며
일곱살 때 1981년 말 열반한 16대 까르마빠의 환생자인
‘17대 까르마빠’로 결정됐다. 다른 세계에서 봤을 때는
불가사의하거나 믿기 어려운 그의 삶과 망명,
가르침을 담은 책이 처음 출간됐다.
“까르마빠, 나를 생각하세요.”(지영사 펴냄·미쉘마틴 지음)이다.
다큐멘터리식으로 엮어진 이 책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영적 능력으로 다른 환생자가 태어난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 탐사팀이 가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대목이나
그가 바위에 손자국을 내는 장면 등이 그려진다.
그런 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적의 신비가 아니라
인과와 윤회의 법칙이다.
그가 천재성을 보인 것은 그처럼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불과 열네 살에 달라이라마가 있는 인도로 망명을 결정해
중국 공안의 철저한 감시망을 뚫고 히말라야를 넘어 망명했다.
그가 부모 형제와 고국과 사원을 떠나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겨
네팔에 도착한 것이 2000년 1월 3일이었다.
교단이 다름에도 온 마음으로 까르마빠를 환영하며
그를 돌보는 달라이 라마와 다른 교단의 수장을 철저히 따르며
존중하는 까르마빠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나이 어린 망명 지도자’라는 별칭이 붙은
그가 백 여명의 외신 기자들 앞에서 보인 통찰과 유머로 인해
다음날 신문은 “구백 살의 지혜를 10대의 젊은이가 보여주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특히 이 책에선 까르마빠가 한 법문을 싣고 있는데,
여기엔 도저히 10대나 20대로는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느 종교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 없는
놀라운 통찰력과 비전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까르마빠를 히말라야의 노블링카에서 만난 것은 2002년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17살쯤이었을 때였다.
나는 그 때 히말라야 일대를 순례하면서 갤룩파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까규파의 수장인 까르마빠,
샤카파의 수장인 샤카 곰파 린포체, 닝마파의 수장인 민돌링 린포체를
모두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분들을 모두 직접 만나 뵙는
행운을 얻었다. 그 분들 한 분 한 분을 만나 뵙는 것은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에게도 요원한 일일 정도여서
외국인이 그 분들을 모두 만나 뵙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당시 나는 보이지 않는 힘의 도움을 얻은 것처럼
그 분들을 뵐 수 있었다. 그 분들을 반드시 뵐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 것도 아니었고, 불확실한 발걸음이었지만
나는 그 분들이 계시다는 곳을 향해 수십 시간씩 버스를 타고 갔고,
그 때마다 그 분들은 때마침 그 곳에 계셨고, 나는 그분들을 뵐 수 있었다.
까르마빠는 불과 14살의 나이로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고,
여전히 10대의 어린 나이라는 점 때문에 흥미진진했다.
당시 까지만도 티베트의 환생 제도에 대해 흥미 이상의 통찰은 없었기에,
마치 멍청한 왕손이 조상의 후광으로 왕에 올라 왕조시대처럼
그도 티베트의 무지한 전통 속에서 옥좌에 모셔진
마네킹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를 처음 본 순간 그토록 어린 나이임에도 늠름하면서도
화평하고, 마치 사자처럼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서도
고요한 데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친견한 뒤 나는 달라이 라마가 자신의 사후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 차기 지도자로 까르마빠를 내심 꼽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티베트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조계종과 다름없는 갤룩파의 수장이 다스려왔다.
달라이 라마가 열반에 들면 환생 후 자랄 때까지
아미타불의 후신으로 일컬어지는 판첸 라마가 다스리고,
판첸 라마가 열반에 들어 환생 후 장성할 때까지
달라이 라마가 다스린다. 그런데 티베트의 판첸 라마는
환생자로 결정된 직후인 다섯 살 때 중국 공산당에게 끌려가
10년 넘게 소식이 끊겨 지구상 가장 나이 어린 양심수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인들이 정한 판첸 라마를 억류한 채
자신들이 정한 판첸 라마를 꼭두각시로 내세워놓고 있다.
그래서 판첸 라마가 곧바로 달라이 라마의 뒤를 잇기
어려운 사정이긴 하지만 갤룩파가 아닌 다른 교단의 수장에게
티베트를 맡긴다는 것은 통상적 상식으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얘기다.
그러나 까르마빠가 망명한 직후부터 달라이 라마는 그에 대해
한 남다른 배려와 동시에 각별한 신뢰를 내보이곤 했다.
티베트인들은 나라를 잃고 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에 흩어져 있고,
그 결집력도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탁월한 영적 능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 아니면
전 세계에 흩어진 티베트인들을 하나로 묶기 어렵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아는 달라이 라마가 가장 적합한 인물로
까르마빠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적지않은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제자인 청전 스님으로부터도
까르마빠의 비상함에 대해 자주 듣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 분의 법문을 경청하거나 그분의 능력을
세심히 관찰할 기회는 없었기에,
나는 여전히 그 분의 영적 능력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귀국 뒤 1~2년쯤 지나 경기도 남양주 봉인사에서
지산 스님으로부터 까르마빠에게 귀의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은 50살쯤 되었을 지산 스님은
서울대 재학시절부터 구도 써클의 회장을 맡아 구도했고,
송광사로 출가해 여러 선원에서 참선을 하다가
세계 불교의 3대 큰 물줄기인 한국의 참선과 미얀마의 위빠사나,
티베트의 밀교를 모두 공부해 3대 흐름을 회통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미얀마에서 몇년 동안 수행하고 돌아온 뒤였다.
미얀마에 가기 전부터 잘 아는 그가 아직 10대 청소년인
까르마빠에게 귀의해 가르침을 받겠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으론 “그 어린 청년에게?”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흐른 뒤 최근 한국을 찾은 청전 스님으로부터
“까르마빠, 나를 생각하세요.”란 책의 원고를 자신이
모두 감수 했노라며 읽어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까르마빠의 탁월한 깨달음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어져버렸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깨달음과 평정심을 갖고 있는 데
대해 놀랐다기보다는 그런 탁월함이 단지
이번 한 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음은 이 책에 소개된 까르마빠의 법문과 시들이다.
▲ 까르마빠와 달라이라마
-공성(空性)에 대한 법문.(*공성은 불교적 깨달음의 핵심)
우리는 윤회계를 흔히 거칠고 피상적으로 바라봅니다. 시간 개념을 봅시다.
우리는 1년을 하나의 구체적인 단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시간에 관한 다른 단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 하루, 한순간 등 많은 순간들을 더한다면 1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순간의 본질을 고찰해 보면, 내재하는 어떤 시간의 단위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무런 내재적 시간의 단위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체적으로 잡히는 확고한 객체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깨달았다고 해서 현상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새로 발견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공성은 무시 이래로 현존하는 것입니다.
깐규로(경·經)와 땐규르(논소·論疏)에 나오는 많은 불교 교리들은
부처의 가르침과 학자와 명상가였던 그의 제자들의 기록에 의존합니다.
여기에서는 공성, 즉 참 진리의 본질을 밝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공성에 대해 명상할 때는
우리가 우리 것으로 간주하는 소유물 등 외적 객체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간주하는
내적 객체인 ‘나’라고 하는 것 등을 분석하는데 사용합니다.
각종 논리적 분석과 깊은 지식을 사용하여
이들 객체를 분석하여 공성을 확인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과 명상을 통해 직접적으로 깨닫는 공성은 다릅니다.
우리의 깊은 지식을 이용하여 먼저
‘공성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공성이다. 모든 현상은 공하다. 모든 현상은 가고 옴이 없다.
어떤 현상도 자체로서 생기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지도 않으며 등등’
공성을 설명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종류의 서술과 논리를 동원합니다.
이것 모두는 우리 마음속에 생겨난 관념으로서 공성,
즉 우리의 지성이 새로 만들어낸 공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공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만들어낸 것은 우리의 지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듣고 사색함으로써 분석할 때의 공성은 객체입니다.
우리가 공성에 관해 명상할 때는 분석이나 조사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편한 상태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석할 때는 날카롭고 정확한 지성을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명상 시에 일어나면 수행 속에 머물기 어렵기 때문에,
그 때에는 공성을 분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명상을 할 때는 공성의 의미가 우리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마음속에 공성의 본질이 떠오르는 것은 수행의 단계들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공성의 본질을 모른다면 그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일단 안다면 그것과 친밀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명상을 통한 우리 안에 원초적 지혜가 떠오를 것입니다.
마음이 공성을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논리로는 모든 현상의 공성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논리는 현상이 공한 본질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논리적 분석을 한다 하더라도
현상의 본질은 여여하게 존재합니다.
탁자를 보고 우리의 막강한 논리를 적용하여
공성에 대해 숙고해 보는 경우를 예로 봅시다.
비록 탁자가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논리가 그것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논리만으로 모든 현상을 구체적이고 실존적으로 여기는
경향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관념적 사고에의 집착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현상의 공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으로 향하여 우리의 마음에 관해 명상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현상의 본질이
공성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기에는 원만하고 명료한 측면 역시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공성’이라고만 말한다면 단순히
‘존재하지 않음’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무시 이래로 현상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아왔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상의 공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분석해 보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성을 빈 것, 즉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본질 역시 눈부시게 명석한 측면이 있습니다.
즉, 마음은 인식하고 나타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상의 공성을 이해하면 그것은 환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명료함과 공성은 일체로써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공성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도中道에 들어서기
단순성 그 자체인 금강의 마음이라는 태양이
무한한 현상의 공간에 어디에나 스며듭니다.
마음의 원초 본성은 부서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본성은 눈부신 광명 큰 지복, 광할히 펼쳐진 공성입니다.
장막에서 자유로운 앎인 당신의 심오한 지혜가
모든 중생을 위해 떠오릅니다.
복 있는 세대(겁)의 안내자이시여, 당신의 이름 ‘고타마’를 통해
상서로운 꽃비가 내리게 하소서.
-마하무드라를 노래함
(*마하무드라 수행은 마음의 본성에 머무는 것)
세상인 듯한 것은 미혹된 모습이고
마음의 움직임은 인위적인 노력에 매이지 않아야 하니,
행위, 자유, 깨달음에도 변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심오한 마음 안에 머무는 것이
마하무드라라고 이른다.
-분별을 여읨
순수한 현상의 경계 공간에서
깊고 맑은 지혜가 확장된다.
마음의 원초적 본질은 영원히 희론에서 자유롭네.
저절로 일어나는 윤회와 열반에도
일상적 마음에도 현혹되지 않으며
이 확장에, 일체의 분별을 여읨에 나는 절합니다.
-본연의 자각을 노래함
옴 스와스티 자옌투(*모든 것이 장엄하며 선이 승리하리라는 기원)
본원적 순수함. 모든 현상의 확장은 큰 환희
분별하는 마음은 잠들고 여기 여여如如하게 있으니
이 좋은 깨달음의 세상에 삼승의 꿀맛이 있으니
떠오르는 본연 자각의 태양이여 영원하라.
2008. 1. 10.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