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의 낡고 오래된 파일 한 권. 마음 답답한 날, 하루 날 잡아 서랍장 정리에 나섰다. 뒤죽박죽 널브러진 잡동사니 사이로 눌러 앉은 먼지와 덕지덕지 내 안에 가둔 묵은 먼지가 폴폴 천장 위로 날아갔다. 유별난 속앓이에 발견한 파일, 짙은 초록색
플라스틱 겉장에 눈길이 닿았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손이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내 나이 20대 후반, 부산일보에 게재된 몇 편의 수필이다.
부산일보 애독자가 된 지 올해로 33년. 신문사 내부 문제로 인해 한 차례 신문이 발송되지 않은 날과 집을 비우는 날을 제외하고는 나는 비슷한 시간대에 부산일보를 매일 한 부씩 받아 읽고 있다. 빠른 속도로 변해 가는 이 시대의 부산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소셜네트워크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나른한 오후 따끈따끈한 새로운 기삿거리가 넘치는 신문을 받아들고 지면을 한 장씩 차례차례 펼쳐보는 여유로움을 나는 좋아한다.
"20대 후반 부산일보에 실린 글들
소액환 원고료 받고 외식도 했지
그 추억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서랍장 깊숙이 내팽개친 글들을 우연히 꺼내 읽고 어느 한때, 또 하나의 내가 존재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깊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활기찬 어제의 일들이 수많은 모퉁이를 돌고 돌아왔다. 오래되어 빛이 바랜 신문지 조각 사이로 세월의 통로가 뚫리고 가장 빛나고 분명한 젊은 날이 고스란히 살아 넘치는 감동과 마주했다. 탱탱한 젊음을 풍미했던 한 시절. 볼록한 볼의 싱그러움이 신문 속 내 얼굴
사진에 고스란히 살아 있어 부럽다.
부산일보 독자란에 실린 우리 집 일미(一味) 방아 재첩국. 원고지 5장 분량의 깨알 같은 활자가 빼곡하게
인쇄된 빛바랜 신문지면에 오롯이 담긴 지난 시간, 내 기억 속에 저장된 울림이 파릇하다. 신문지면 네모 선 속에 검게 인쇄된 내
이름 석 자를 내려다보면 뿌듯해서 몇 날 며칠 힘이 솟았다. 시장에서 오백 원 주고 재첩 한 됫박을 샀던 기억도 가물가물 떠오르게 했다.
'재첩국물이 뽀얗게 우러나게 푹 삶아서 껍질과 속을 고른다. 큰 냄비에 국물과 속 알맹이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팔팔 끓는 냄비 속에 부추, 방아, 마늘, 대파를 총총 썰어 넣는다. 미리 걸쭉하게 만들어 놓은 밀가루 물을 엉기지 않도록 천천히 국자로 저어가며 국물에 붓고
소금 간을 한다.'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 위에서 보글보글 잘 끓여낸 국. 시부모님 입맛을 북돋아주었고 취기가 남아 있는 남편 속풀이에도 한몫했다. 향긋한 방아 재첩국 한 그릇으로 어머님 아버님과의 간격이 좁아지고
양파껍질 같은 막이 한 겹씩 벗겨져 나갔다. 나만의 특별한 요리 비법으로 만들어진 우리 집 일미, 따끈한 재첩국 한 그릇에 정이 번졌다.
"심득순 씨,
도장 가져와요."
대문 밖에서 외치던 집배원 아저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상황이 '원고료'라는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방아 재첩국으로 난생처음 받은 원고료였다. 그 당시, 집배원에게 확인도장을 찍어주고 난 뒤
봉투에 든 원고료를 전해 받을 수 있었던 사실도 이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노란 편지봉투 안에 들어있던 오천 원짜리 소액환 한 장. 그날의 소액환 한 장으로 식구들이 푸짐하게 외식을 즐겼던 모양이다. 처음 받은 원고료가 일상의 행복이었다고 글 속의 젊은 내가 알려주었다.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못하면 뺨이 석 대. 삼면경에 실린 '중매'라는 글이 뒷장에 턱하니 버티고 있다. 인연을 맺어줌이 쉬운 일은 아니라서 다시는 중매는 서지 않겠다는 결의가 옹골차 보인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남동생의 친구 형과 내 친구 여동생을 배우자로 주선하고 나섰던 자리가 어쩐지 어색하게 다가온다. 사람과 사람의 연을 맺어주고 하물며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데 보잘것없는 나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는 내용. 깜찍하고 당돌했던 내 본연의 모습이 임진년, 흑룡이 시뻘건 해로 변신해 날아오르는 듯 글 속에 묻어나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살아있다. 부부로 연을 맺기까지 7천겁이 필요하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전한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 맺어지는 수많은 연(緣). 부모 자식으로 동기간으로 또 천생배필로 맺어지기도 하고 친구 또는 사랑하는 연인으로도 인연 줄이 닿는다. 세상을 살면서 우연찮게 만나 이어진 관계는 어떤 형태든지 다 소중하다. 감히 인륜지대사라는 엄청난 겁을 겁도 없이 무모하게 중재하고 나선 나의 에피소드가 이제는 입가에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게 한다.
뒷장을 다시 넘기고 넘겨도 삼면경에 내 얼굴이 나타나고 어설픈 졸필은 '글 마당'과 '여성문예'로 계속됐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잃어버린 시간들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캄캄하고 답답해서 우울했던 심사가 편안하게 잦아들었다.
'생일 선물'이라는 수필제목, 제목이 주는 여운이 깊다. 선물이라는 마음의 길은 또 어떨까? 주는 이는 줄 수 있어 즐겁고 받는 이는 준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 고맙고 기쁘다. 어느 날 배달되어 온 뜻밖의 작은 선물꾸러미 한 상자에 감격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체득하게 된다. 서른다섯 해, 나의 생일 선물로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로부터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날아온 에델바이스 꽃 한 송이. 선물로 인해 사람으로 인해 삶의 희열이
가슴을 적시고 일렁거리며 깊이 내장되어 있음을 느낀다. 살아가는 이유가 이것만으로도 채워진다. 내가 누군가에게 늘 생일 선물 같은 사람이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스친다.
부산일보와 맺은 연줄이 동아줄처럼 질기다. 강산이 세 번 바뀌도록 인연을 끊지 못하고 살고 있다. 사람의 인연도 질기고 질기다. 온몸으로 연줄에 목을 매달고 살아가는 삶이 따뜻하기도 하고 시리기도 하다. 그래도 꼭 붙들어 매야 할 인연 줄 한두 개쯤 가슴 깊이 저장해 두고 싶다. 시나브로 나의 글 솜씨도 부산일보를 통해 곰삭은 묵은 지가 되어갔다. 묵직한 파일 한 권에 나의 히스토리가 고스란히 살아서 움직인다. 딱딱해진 가슴도 풀잎처럼 유연해지고 근력이 붙는다. 생의 절정에 귀를 곧추세우고 애정을 퍼붓는다. 어느새 서랍장 자잘한 물건도 안정을 되찾고 집안에는 윤기가 좔좔 흘러내렸다.
심득순 수필가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