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자본에도 상한선이 필요하다—기술 시대의 권력을 다시 묻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들
자전거는 페달을 멈추면 넘어진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꼭 그렇다. 내년에 올해보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증식하지 않으면 붕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자전거가 달리는 길의 끝에 절벽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멈추면 넘어진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 문명이 처한 구조적 딜레마의 본질이다.
유한한 지구 위에 무한한 물질적 증식을 허용하는 경제 시스템이 이치에 맞는가. 자명한 질문이다. 그러나 주류 자본주의 체제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기술 혁신을 내세우거나, 효율 개선을 들먹이거나, 아직 때가 아니라며 질문 자체를 유예한다.
그 사이에 기후위기는 가속되고 생태계는 무너진다. 이 글은 자본주의라는 엄연한 현실을 무작정 부정하자는 이상주의적 주장이 아니다. 폭주하는 현실을 가장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해야 할 미래 방향을 논하고자 하는 실천적 모색이다.
후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자본주의
이 부조리한 무한 증식이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은 교묘한 '비용 전가(轉嫁)'에 있다. 자본주의의 회계 장부는 지구가 수억 년에 걸쳐 축적한 화석연료·광물·깨끗한 물과 공기를 공짜나 헐값으로 기입한다. 채굴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태계 파괴, 온실가스 배출, 공동체 붕괴라는 막대한 비용은 재무제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경제학이 '외부효과(Externality)'라 부르는 이 비용들은 지구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조용히 떠넘겨진다. 자본의 무한 증식은 이렇게 정당한 이치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사기다.
일론 머스크는 로켓을 우주로 쏘아 올리고, 인공지능을 개발하며, 전 지구적 위성망을 구축한다. 그의 영향력은 산업을 넘어 여론과 정치의 경계까지 스며든다. 그의 개인적 선악을 떠나, 더 중요한 사실은 오늘의 기술-자본 시스템이 누구든 그 자리에 서면 이와 유사한 힘을 갖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견제받지 않는 힘은 결국 남용의 위험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묻기 시작해야 한다.
자본에도 상한선이 필요한가.
부는 어디에서 오는가
프랑스 경제학자 얀 물리에 부땅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부의 원천이 더 이상 공장의 노동에만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오늘날의 부는 수십억 사용자의 데이터, 네트워크, 그리고 축적된 공공지식 위에서 생성된다. 거대 기술기업의 초과이익은 개인의 창의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기반 위에서 형성된 집합적 산물이다. 부의 원천이 집단적일 뿐 아니라, 그 축적 과정의 비용조차 집단(미래세대)에게 전가된다.
토마 피케티가 경고했듯,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을 지속적으로 상회하는 구조가 유지되면 부는 필연적으로 집중되고, 결국 세습된다. 이는 단순한 불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작동 조건 자체를 잠식하는 구조적 문제다.
따라서 이제 논의는 '재분배' 수준을 넘어야 한다.
자본 축적 자체의 한계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즉 '상한선'의 문제로 나아가야 한다.
권력은 왜 제어되어야 하는가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액튼 경은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했다. 본래 정치권력을 두고 한 말이지만, 지금은 자본권력에 그대로 적용해야 할 때다. 우리는 정치권력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 삼권분립, 임기제, 선거라는 장치를 통해 권력을 분산하고 순환시킨다. 그러나 자본-기술 권력은 이와 같은 제도적 견제를 거의 받지 않는다.
한 개인 혹은 기업이 막대한 자본, 글로벌 인프라, 데이터, 알고리즘, 여론 형성 능력을 동시에 장악할 때, 그 영향력은 국가 권력과 맞먹거나 그 이상이 된다. 그러나 그 권력은 선거로 교체되지 않으며, 국경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액튼의 경고가 정치권력을 넘어 자본권력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견제 없는 힘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부패한다. 이 비대칭적 권력 구조야말로 21세기 민주주의의 가장 큰 공백이다.
"상한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본 상한선은 단순히 개인 재산을 일정 수준에서 자르는 급진적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 축적이 사회 전체를 압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제도적 장치의 총합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방향이 논의될 수 있다.
- 초고자산에 대한 누진적 자본세 강화와 국제 공조
- 플랫폼·데이터 독점에 대한 강력한 반독점 규제
- 초과이익의 일정 비율을 사회적 배당으로 환원하는 메커니즘
- 시장 지배적 기업의 구조적 분할 또는 공공적 관리
핵심은 단순하다.
혁신의 보상은 인정하되, 그 보상이 무한정 권력으로 전환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다.
혁신은 정말 상한선에 의해 죽는가
가장 강한 반론은 이것이다. 상한선을 두면 혁신이 사라진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단순화한 것이다.
혁신에는 분명 초기의 고위험 투자와 자본 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다. 성공 이후에도 자본이 끝없이 축적되고, 네트워크 효과와 독점 지대가 강화되며, 경쟁 자체가 봉쇄되는 구조가 지속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논점은 '혁신을 허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혁신 이후 형성되는 독점적 지대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다.
자발적 윤리에서 제도로
이 글이 제안하는 것은 성장의 중단이 아니라 성장의 재설계다. 무한 증식을 향한 자본 독점 구조를 해체하자는 것이지, 기술 혁신의 동력을 꺼버리거나 개발도상국의 번영을 가로막자는 것이 아니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탈성장이 빈곤 고착화를 낳는다는 반론은 이 구분을 의도적으로 흐린다. 문제는 성장이냐 정체냐가 아니라, 성장의 과실이 어떻게 분배되고 그 비용이 누구에게 전가되느냐다.
서구 학계에서는 최근 들어서야 철학자 잉그리드 로베인스(Ingrid Robeyns) 등이 '한계주의(Limitarianism)'라는 이름으로 극단적 부의 상한선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수백 년 동안 이 이치를 삶과 실천으로 증명해 온 위대한 선례가 있다. 바로 경주 최부자댁의 지혜다.
경주 최부잣집은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가훈을 통해 수백 년 동안 부를 유지했다. 그들은 공동체와의 균형 속에서 부를 축적했고, 그 균형이 오히려 지속성을 낳았다.
그러나 이 사례의 핵심은 미담이 아니다.
자발적 윤리는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은 지역 공동체의 도덕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제도화된 상한선이다.
국경을 넘는 자본, 국경을 넘는 규칙
문제는 실행이다. 오늘날의 기술-자본 권력은 이미 국가를 초월했다. 서버, 알고리즘, 데이터 흐름은 단일 국가의 법으로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해법 역시 국제적이어야 한다.
OECD, G20과 같은 다자 협의체를 기반으로, 글로벌 최소 자본세를 넘어서는 자본 집중과 플랫폼 권력에 대한 국제 규범이 논의되어야 한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파리협정을 만들었듯, 이제 우리는 자본 권력에 대한 국제적 '둑'을 설계해야 한다.
다시, 상한선을 말한다
강물은 둑이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살린다. 둑 없는 강물은 결국 범람한다.
지금 우리의 자본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그 흐름을 통제할 장치는 충분한가.
자본 상한선 논의는 선택이 아니라, 기술 문명 시대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완전한 해답은 아직 없지만, 논의를 미루는 것만큼은 분명한 위험이다.
이제, 그 질문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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