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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줄요약
성문은 무상·고·공·무아를 관하여 고요한 해탈의 즐거움에 머물 수 있지만, 보살은 그 고요함에 머무르지 않고 본원과 자비로 다시 중생을 향해 나아갑니다.
2. 머릿말
지난 회차의 마지막은 다음 구절이었습니다.
是故,大慧!自覺聖差別相,當勤修學,自心現見,應當除滅。
시고, 대혜! 자각성차별상, 당근수학, 자심현견, 응당제멸.
그러므로 대혜여,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차별상을 부지런히 닦아 배워야 하며, 자기 마음에 나타난 허망한 견해는 마땅히 없애야 한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마음을 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을 보라”고 하시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집착하여 견해를 세우는 것은 제거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수행자는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나타난 것을 실재라고 붙잡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능가경의 핵심입니다.
이번 24회차에서는 그 흐름을 이어서, 성문승의 두 가지 분별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능가경은 성문의 수행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문의 수행이 어떤 점에서 깊고, 또 어떤 점에서 보살의 길과 다른지를 정확하게 가려 줍니다.
성문은 괴로움을 보고 벗어납니다.
보살은 괴로움을 보고도 다시 중생 곁으로 돌아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이번 회차의 중심입니다.
3. 한문원문
復次,大慧!有二種聲聞乘通分別相,謂:得自覺聖差別相,及性妄想自性計著相。
부차, 대혜! 유이종성문승통분별상, 위: 득자각성차별상, 급성망상자성계착상.
云何得自覺聖差別相聲聞?
운하득자각성차별상성문?
謂無常、苦、空、無我境界。
위무상, 고, 공, 무아경계.
真諦離欲寂滅,息陰界入自共相,外不壞相如實知,心得寂止。
진제리욕적멸, 식음계입자공상, 외불괴상여실지, 심득적지.
心寂止已,禪定、解脫三昧,道果正受解脫,不離習氣、不思議變易死,得自覺聖樂住聲聞;
심적지이, 선정, 해탈삼매, 도과정수해탈, 불리습기, 부사의변역사, 득자각성락주성문;
是名得自覺聖差別相聲聞。
시명득자각성차별상성문.
大慧!得自覺聖差別樂住菩薩摩訶薩,非滅門樂正受樂,顧愍眾生及本願不作證。
대혜! 득자각성차별락주보살마하살, 비멸문락정수락, 고민중생급본원부작증.
大慧!是名聲聞得自覺聖差別相樂。
대혜! 시명성문득자각성차별상락.
菩薩摩訶薩,於彼得自覺聖差別相樂,不應修學。
보살마하살, 어피득자각성차별상락, 불응수학.
大慧!云何性妄想自性計著相聲聞?
대혜! 운하성망상자성계착상성문?
所謂大種:青黃赤白,堅濕煖動,非作生自相共相。
소위대종: 청황적백, 견습난동, 비작성자상공상.
先勝善說,見已,於彼起自性妄想。
선승선설, 견이, 어피기자성망상.
菩薩摩訶薩,於彼應知應捨,隨入法無我想,滅人無我相見,漸次諸地相續建立;
보살마하살, 어피응지응사, 수입법무아상, 멸인무아상견, 점차제지상속건립;
是名諸聲聞性妄想自性計著相。
시명제성문성망상자성계착상.
4. 한글번역
다시 대혜여, 성문승에는 두 가지 통하는 분별상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차별상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품에 대해 허망하게 상상하여 자성에 집착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차별상을 얻은 성문인가?
그것은 무상, 고, 공, 무아의 경계를 관하는 것이다.
참된 진리에 의해 욕망을 여의고 적멸에 들며, 오음과 십팔계와 십이입의 자상과 공상을 쉬게 하고, 바깥의 무너지지 않는 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 마음이 고요히 멈추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히 멈춘 뒤에는 선정과 해탈삼매와 도과의 바른 수용과 해탈을 얻는다.
그러나 아직 습기를 완전히 여의지 못하고, 부사의한 변역생사를 여의지 못한 채,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즐거움에 머무는 성문이 된다.
이것을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차별상을 얻은 성문이라고 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차별된 즐거움을 얻더라도, 멸진의 문에서 누리는 즐거운 정수에 머물지 않는다.
중생을 돌아보고 가엾이 여기며, 본래 세운 원력 때문에 그 즐거움을 최종 증득처로 삼지 않는다.
대혜여, 이것을 성문이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차별상에서 얻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살마하살은 그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차별된 즐거움에 대해, 마땅히 그것을 목표로 삼아 닦지 않아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성품에 대해 허망하게 상상하여 자성에 집착하는 성문인가?
이른바 지·수·화·풍의 큰 요소와,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색상, 단단함과 젖음과 따뜻함과 움직임 등이 본래부터 스스로 생긴 자상과 공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앞서 훌륭한 가르침을 들었더라도, 그것을 보고는 다시 그 가운데 자성이 있다고 허망하게 상상한다.
보살마하살은 그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버려야 한다.
법무아의 관찰에 들어가고, 인무아의 상견을 없애며, 점차 여러 보살지의 수행을 계속 세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모든 성문이 성품에 대해 허망하게 상상하여 자성에 집착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5. 경전의 종지
1) 성문승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밝히는 말씀
이번 원문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능가경은 성문승을 단순히 낮추거나 배척하는 경전이 아닙니다.
성문도 분명히 깊은 수행을 합니다. 무상, 고, 공, 무아를 관합니다. 욕망을 떠납니다. 마음을 고요히 멈춥니다. 선정과 해탈삼매를 얻습니다.
이것은 결코 얕은 수행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성문은 고요한 해탈의 즐거움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제 괴로움이 사라졌다.”
“나는 생사의 불길에서 벗어났다.”
“나는 적멸의 평안을 얻었다.”
이러한 경계는 분명히 수행의 큰 성취입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 고요함마저 붙잡으면 다시 하나의 머묾이 됩니다.
해탈의 즐거움도 붙잡으면 미세한 집착이 됩니다.
적멸의 평안도 “내가 얻은 경계”가 되면 아직 자심현의 그림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능가경은 보살에게 말합니다.
그 즐거움에 머물지 말라.
그 경계를 최종으로 삼지 말라.
중생을 돌아보고 본원을 잊지 말라.
이것이 성문과 보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2) 자각성락주와 보살의 본원
원문에는 “得自覺聖樂住聲聞”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즐거움에 머무는 성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락주”는 즐거움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성문은 괴로움을 벗어난 뒤 그 고요한 즐거움에 머뭅니다.
그러나 보살은 그 즐거움을 알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문은 두 가지 이유를 듭니다.
하나는 중생을 돌아보고 가엾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원 때문입니다.
보살은 처음부터 자기 혼자 편안해지기 위해 발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보살의 발심은 “나만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가 아닙니다.
보살의 발심은 “일체 중생과 함께 깨달음에 이르겠다”입니다.
그래서 보살에게는 고요함도 통과해야 할 문이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마치 먼 길을 가던 사람이 아름다운 정자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그곳은 편안합니다. 바람도 좋고 그늘도 좋습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아직 남아 있다면, 정자에 눌러앉을 수는 없습니다.
성문의 적멸락은 아름다운 정자와 같습니다.
보살은 거기서 쉬어 갈 수는 있지만, 거기에 머물러 끝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3) 멸문락정수락에 머물지 않는다
원문은 보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非滅門樂正受樂
비멸문락정수락.
보살은 멸진의 문에서 누리는 즐거운 정수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멸문”은 번뇌와 생사의 흐름이 멸한 고요한 문입니다.
“정수”는 선정 속에서 바르게 받아들이는 깊은 삼매의 상태입니다.
수행자가 번뇌의 소란을 떠나 깊은 삼매에 들면, 세상의 욕망과 비교할 수 없는 고요한 즐거움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보살에게 그것조차 붙잡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의 길은 “나의 고요함”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고요함을 얻고도 다시 움직입니다.
침묵을 알고도 다시 말합니다.
공을 깨닫고도 다시 중생의 세계로 들어옵니다.
이때 보살의 움직임은 번뇌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집착의 움직임도 아닙니다.
자비와 본원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생사에 물들지 않으면서 생사 속으로 들어가고, 적멸에 머물지 않으면서 적멸을 잃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승의 깊은 길입니다.
6. 심층 탐구
1) 무상·고·공·무아의 수행
원문에서 성문이 관하는 네 가지 경계가 나옵니다.
無常
무상
苦
고
空
공
無我
무아
이 네 가지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모두에서 매우 중요한 수행 주제입니다.
무상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관찰입니다.
고는 변하는 것을 붙잡으려 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는 관찰입니다.
공은 모든 존재가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찰입니다.
무아는 그 가운데 고정된 “나”라는 실체도 없다는 관찰입니다.
성문은 이 네 가지를 깊이 관하여 욕망을 여읩니다.
오온, 십이입, 십팔계가 모두 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봅니다.
몸도 마음도 감각도 대상도 모두 인연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뿐임을 봅니다.
이 관찰이 깊어지면 집착이 약해집니다.
집착이 약해지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선정과 해탈의 문이 열립니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귀한 수행입니다.
하지만 능가경은 다시 묻습니다.
그 고요함을 누가 얻었는가?
그 해탈의 즐거움을 누가 붙잡고 있는가?
그 적멸을 “나의 경계”라고 삼고 있지는 않은가?
이 물음이 바로 대승의 물음입니다.
2) 습기와 변역생사
원문에는 어려운 표현이 나옵니다.
不離習氣
불리습기
不思議變易死
부사의변역사
성문은 큰 번뇌를 끊고 분단생사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가경의 관점에서는 아직 미세한 습기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습기란 오래된 마음의 냄새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번뇌는 사라졌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미세한 경향입니다.
예를 들어 화를 크게 내지는 않지만, 아직 미세한 우월감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욕망에 휘둘리지는 않지만, 고요한 경계를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세속의 집착은 끊었지만, “나는 해탈했다”는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습기입니다.
또 “변역생사”는 거친 생사윤회와는 다른 미세한 변화의 생사를 말합니다.
범부가 몸을 받아 태어나고 죽는 생사를 분단생사라고 한다면, 변역생사는 미세한 의식의 변화와 경계의 전환 속에서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능가경은 매우 섬세합니다.
큰 번뇌가 끊어졌다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고요한 삼매에 들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분별이 잠잠해졌다고 해서 자성에 대한 미세한 집착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보살은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인무아를 넘어 법무아로 들어갑니다.
나라는 집착을 넘어 법이라는 집착까지 비웁니다.
3) 인무아와 법무아
이번 원문 후반부에서 보살의 길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隨入法無我想,滅人無我相見
수입법무아상, 멸인무아상견.
법무아에 들어가고, 인무아에 대한 상견을 없앤다는 뜻입니다.
인무아는 사람에게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나”라고 부르는 존재가 몸, 느낌, 생각, 의지, 식별의 임시 결합일 뿐이라는 통찰입니다.
법무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만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잡는 모든 법도 실체가 없다는 통찰입니다.
생각도 실체가 없습니다.
감정도 실체가 없습니다.
수행 경계도 실체가 없습니다.
깨달음이라는 이름도 실체가 없습니다.
성문, 보살, 범부라는 구분도 궁극에서는 자성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능가경이 계속해서 말하는 “자심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나타났다고 해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다 해도 집착하면 안 되고, 없다 해도 단멸에 떨어지면 안 됩니다.
이것이 능가경의 중도입니다.
4) 자성에 집착하는 성문
원문 후반부에서는 두 번째 성문상을 말합니다.
性妄想自性計著相聲聞
성망상자성계착상성문.
이는 “성품에 대해 허망하게 상상하고 자성에 집착하는 성문”입니다.
이 부분은 성문 수행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붙잡아 고정하려 합니다.
색은 색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느낌은 느낌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성격은 원래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본래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본래 이렇게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능가경은 말합니다.
그것은 자성에 대한 계착입니다.
조건 따라 나타난 것을 본래 그런 실체로 착각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가 일어났다고 합시다.
범부는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능가경적으로 보면, 화는 인연 따라 일어난 자심현입니다.
그것을 “나의 본래 성격”이라고 고정하면 자성집착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차갑게 대했다고 합시다.
범부는 “저 사람은 원래 나쁜 사람이다”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조건과 상황 속에서 나타난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자성으로 고정하면 다시 분별이 됩니다.
수행은 이러한 고정된 판단을 푸는 일입니다.
본래 그런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나타난 것을 보되, 거기에 자성을 덧붙이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7. 선종·마음공부로 읽기
1) 고요함도 붙잡으면 병이 된다
선종에서는 흔히 “한 생각 쉬어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생각 쉬었다고 해서 그 쉼에 머물면 다시 병이 됩니다.
고요함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시끄러운 현실을 싫어하게 됩니다.
선정의 맛을 좋아하면,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을 피하게 됩니다.
침묵을 좋아하면, 말해야 할 자리에서도 침묵으로 도망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참된 자유는 고요함 속에서도 자유롭고, 시끄러움 속에서도 자유로운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도 마음을 잃지 않고, 사람들 속에 있을 때도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보살의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살은 고요함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보살은 적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멸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살은 해탈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즐거움보다 중생의 고통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2) 깨달음의 맛에 머물지 말라
수행하다 보면 작은 체험들이 생깁니다.
마음이 아주 고요해질 때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환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랜 번뇌가 갑자기 힘을 잃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런 체험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붙잡기 시작하면 곧 장애가 됩니다.
“내가 뭔가 얻었다.”
“나는 이제 다르다.”
“나는 예전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특별한 경계를 체험했다.”
이렇게 되면 수행은 다시 아상으로 돌아갑니다.
능가경은 바로 이 지점을 경계합니다.
성자의 즐거움이라도 머물지 말라.
해탈의 경계라도 붙잡지 말라.
고요한 삼매라도 최종으로 삼지 말라.
보살은 얻은 것을 내려놓고, 다시 길 위에 섭니다.
3) 일상 속의 법무아
법무아는 어려운 철학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생각은 정말 고정된 진실인가?
내가 옳다고 믿는 판단은 정말 절대적인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정말 본래부터 그런 사람인가?
내가 괴로워하는 이 감정은 정말 변하지 않는 실체인가?
이렇게 묻는 순간, 마음의 고정성이 조금씩 풀립니다.
우리는 대부분 사실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위에 덧붙인 해석 때문에 괴롭습니다.
해석 위에 덧붙인 집착 때문에 괴롭습니다.
집착 위에 덧붙인 “나” 때문에 괴롭습니다.
법무아는 그 모든 덧붙임을 걷어 내는 공부입니다.
그때 마음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벼워집니다.
고정된 내가 없으니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고정된 상대가 없으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정된 상황이 없으니 전환할 수 있습니다.
고정된 법이 없으니 지혜가 열립니다.
이것이 능가경이 말하는 마음공부입니다.
8. 용어 풀이
1) 성문승
성문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괴로움의 소멸과 해탈을 구하는 수행의 길입니다.
무상, 고, 공, 무아를 관하여 욕망을 여의고 적멸의 경계에 들어갑니다.
능가경은 성문승의 수행을 인정하면서도, 보살의 길과는 분명히 구별합니다.
성문은 해탈의 즐거움에 머물 수 있지만, 보살은 그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중생을 위해 다시 나아갑니다.
2) 자각성차별상
자각성차별상은 스스로 깨달은 성자의 경계에 나타나는 차별된 모습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직접 체험한 성자의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가경에서는 이 경계조차 붙잡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경계를 붙잡는 순간, 그것은 다시 자심현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3) 무상·고·공·무아
무상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입니다.
고는 집착하는 존재에게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이 괴로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공은 모든 법이 독립된 실체 없이 인연 따라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무아는 고정된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 관찰은 성문 수행의 핵심이며, 대승 수행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초입니다.
4) 습기
습기는 마음 깊은 곳에 남은 오래된 버릇과 흔적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번뇌는 사라져도, 미세한 경향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능가경은 이 습기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자심현의 흐름은 단순한 생각 하나가 아니라, 무시이래의 습기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5) 변역생사
변역생사는 거친 몸의 태어남과 죽음이 아니라, 미세한 의식과 경계의 변화 속에 남아 있는 생사의 흐름을 말합니다.
성문은 분단생사를 벗어날 수 있지만, 능가경의 관점에서는 아직 변역생사의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6) 인무아와 법무아
인무아는 사람에게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법무아는 모든 법에도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보살은 인무아에 머물지 않고 법무아로 들어갑니다.
나라는 집착뿐 아니라, 법이라는 집착도 내려놓습니다.
9. 결론
이번 24회차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성문은 무상·고·공·무아를 관하여 고요한 해탈의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러나 보살은 그 즐거움에 머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에게는 중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에게는 본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에게는 나만의 평안으로 끝낼 수 없는 깊은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능가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상·고·공·무아를 관하라.
그러나 거기서 끝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아직 보살의 길은 아니다.
고요함을 얻고도 고요함에 머물지 않는 것.
해탈의 즐거움을 알고도 그것을 내 것으로 삼지 않는 것.
공을 깨닫고도 중생을 외면하지 않는 것.
마음이 본래 환인 줄 알면서도 자비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능가경의 마음공부는 세상을 등지고 자기만 편안해지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의 허망한 분별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서 다시 중생을 향해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고요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요함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깨달음의 맛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맛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보살은 적멸을 알고도 다시 세상으로 옵니다.
공을 알고도 다시 이름을 부릅니다.
자심현을 알고도 다시 자비를 행합니다.
이것이 능가경이 보여 주는 깊은 대승의 길입니다.
願共法界 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10. 참고문헌
『楞伽阿跋多羅寶經』 권1, 구나발타라 한역, T0670. 이번 회차 원문은 「復次,大慧!有二種聲聞乘通分別相」에서 「是名諸聲聞性妄想自性計著相」까지의 문단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원문 대조는 공개 한문대장경 자료의 권1 해당 대목을 참고했습니다.
『大乘入楞伽經』 T0672, 실차난타 한역.
『入楞伽經』 T0671, 보리유지 한역.
Suzuki, D. T., The Lankavatara Sutra: A Mahayana Text.
Red Pine, The Lankavatara Sutra: Translation and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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