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 런웨이》
제25회 ― 혜린이 입은 강인의 옷
다음 날 오후.
의상디자인과 실습실.
커다란 작업대 위에는 강인과 미송이 고른 원단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처럼 가볍게 흐르는 여성복 원단.
그리고 나무처럼 단단한 선을 가진 남성복 원단.
미송은 스케치북에 고개를 숙인 채 선을 고치고 있었다.
강인은 옆에서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 다른 묘한 침묵이 흘렀다.
강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송 선배."
"응."
"아직 화나셨습니까?"
"아니."
강인의 손이 멈췄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목소리가 화나셨습니다."
미송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런 것도 알아?"
"조금 압니다."
미송은 다시 스케치북을 내려다봤다.
"안 화났어."
"정말입니까?"
"응."
강인은 안심한 듯 다시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희가 고개를 저었다.
"송강인."
강인이 고개를 들었다.
"네."
"너 진짜 여자 마음 모르는구나."
강인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배우는 중입니다."
옆에 있던 도윤이 감탄했다.
"야, 그래도 발전했다."
소희가 도윤을 바라봤다.
"네가 가르쳤어?"
"조금."
"그러니까 발전이 느리지."
도윤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왜 자꾸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소희가 대답했다.
"반응이 재미있어서."
도윤은 잠시 소희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
"뭐?"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때였다.
짝!
실습실에 익숙한 손뼉 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김태석 교수가 들어왔다.
그 옆에는 이영숙 교수도 있었다.
김태석은 학생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중간평가 결과를 말하겠다."
실습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현우와 세나가 자세를 바로 했다.
강인과 미송도 김태석을 바라봤다.
김태석이 말했다.
"현재 가장 완성도가 높은 팀은 최현우와 오세나."
세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현우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살짝 숙였다.
김태석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큰 팀은 송강인과 하미송."
학생들이 술렁였다.
세나의 미소가 사라졌다.
현우의 눈빛이 강인에게 향했다.
강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태석이 말했다.
"가능성은 결과가 아니다."
실습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가능성만 가지고는 무대에 설 수 없어."
그의 시선이 강인과 미송에게 향했다.
"너희 작품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미송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모델이 없다."
미송의 표정이 굳었다.
강인도 김태석을 바라봤다.
김태석은 실습실 한쪽을 향해 말했다.
"장혜린."
혜린이 고개를 들었다.
"네, 교수님."
"앞으로 나오게."
혜린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미송의 손끝이 멈췄다.
소희는 미송을 슬쩍 바라봤다.
도윤은 강인을 바라봤다.
강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도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
소희가 속삭였다.
"조용히 해."
김태석은 혜린을 바라봤다.
"자네가 송강인, 하미송 팀의 여성복 모델을 맡게."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미송의 얼굴이 굳었다.
혜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강인은—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교수님."
미송이 입을 열었다.
김태석이 바라봤다.
"왜?"
미송은 잠시 망설였다.
"모델은 저희가 직접 정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김태석이 대답했다.
"원래는 그렇지."
"그런데 왜……."
"이번에는 내가 정했다."
미송은 입을 다물었다.
김태석은 단호했다.
"이유가 있습니까?"
김태석이 혜린을 가리켰다.
"자네들이 그린 여성복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체형이 장혜린이기 때문이다."
미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디자이너로서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혜린은 패션모델이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고.
움직임도 좋았다.
무엇보다 옷을 보여 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김태석이 미송을 바라봤다.
"하미송."
"네."
"디자이너가 모델을 고를 때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도 되나?"
미송의 얼굴이 굳었다.
"아닙니다."
"그럼 됐군."
김태석은 돌아섰다.
그때 이영숙 교수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모델은 옷을 입는 사람이기도 해요."
학생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좋은 디자이너는 모델을 마네킹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영숙의 시선이 강인에게 향했다.
"서로 존중하면서 작업하세요."
강인이 고개를 숙였다.
"네, 교수님."
미송도 대답했다.
"네."
혜린 역시 말했다.
"알겠습니다."
김태석과 이영숙 교수가 실습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정적.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도윤이 천천히 강인에게 다가갔다.
"강인아."
"왜."
"살고 싶지?"
강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말이야."
"그냥 묻는 거야."
소희가 도윤을 밀어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도윤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문제인데."
혜린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럼 시작할까?"
미송이 그녀를 바라봤다.
혜린은 당당했다.
"모델이 정해졌으니까 치수부터 재야 하지 않아?"
강인의 손이 멈췄다.
미송도 굳었다.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인을 바라봤다.
"야."
"왜."
"이번에는 정말 위험하다."
강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뭐가?"
소희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혜린이 줄자를 들었다.
그리고 강인에게 내밀었다.
"강인아."
강인은 줄자를 바라봤다.
"네."
"네가 패턴 만들 거잖아."
"그렇습니다."
"그럼 네가 재."
실습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인은 줄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송을 바라봤다.
미송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도윤이 강인의 귀에 속삭였다.
"받지 마."
"왜?"
"나도 몰라. 그냥 받지 마."
강인은 고민했다.
그때 미송이 말했다.
"재."
강인이 미송을 바라봤다.
"네?"
"혜린이 치수."
미송은 태연한 척 말했다.
"패턴 만들려면 필요하잖아."
"그렇습니다."
"그럼 해."
강인은 천천히 줄자를 받았다.
도윤은 두 눈을 감았다.
"끝났다."
소희가 팔꿈치로 도윤을 찔렀다.
"조용히 해."
혜린은 강인 앞에 섰다.
"어디부터 할 거야?"
강인은 줄자를 든 채 굳어 있었다.
"그게……."
혜린이 웃었다.
"왜? 긴장해?"
"아닙니다."
"그런데 손이 왜 그래?"
강인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조금 떨리고 있었다.
도윤이 중얼거렸다.
"쟤는 미송 선배 앞에서도 떨고, 혜린 선배 앞에서도 떨고."
소희가 말했다.
"이유는 다르겠지."
강인은 깊은 숨을 쉬었다.
그리고 혜린의 어깨 치수를 재려 했다.
그 순간.
미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할게."
모두가 미송을 바라봤다.
미송은 강인에게 다가와 줄자를 가져갔다.
"여성복이니까 내가 재는 게 더 정확해."
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미송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좋아?"
강인이 당황했다.
"네?"
"내가 대신 재준다니까 좋아?"
"아닙니다."
"그럼 싫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뭔데?"
강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살았습니다."
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희도 결국 웃었다.
미송도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혜린만 웃지 않았다.
미송은 혜린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어깨.
팔 길이.
허리.
치마 길이.
혜린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미송아."
"왜."
"나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
미송의 손이 잠시 멈췄다.
"뭘?"
"강인 좋아하는 거."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혜린은 미송을 바라봤다.
"네가 싫어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미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좋아하게 됐어."
잠시 침묵.
미송이 다시 줄자를 움직였다.
"알아."
혜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미송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 더 싫어."
도윤의 눈이 커졌다.
소희는 미송을 바라봤다.
혜린이 물었다.
"솔직하네."
"응."
미송은 혜린의 허리 치수를 적었다.
"네가 나쁜 사람이면 미워하면 되는데."
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미송은 혜린을 바라봤다.
"그래서 더 신경 쓰여."
혜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포기 안 해."
미송도 웃었다.
"알아."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한 남자를 좋아하는 두 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인이 도윤에게 작게 물었다.
"지금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도윤이 대답했다.
"숨도 크게 쉬지 마."
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소희가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다 들려."
강인과 도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며칠 뒤.
첫 번째 가봉 날.
혜린은 강인과 미송이 만든 임시 의상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옷.
시침핀과 가봉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실루엣은 보였다.
바람처럼 흐르는 여성복.
혜린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옷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강인은 말없이 바라봤다.
미송도 옷을 바라봤다.
도윤이 감탄했다.
"와."
소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다."
혜린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혜린이 다시 물었다.
"강인아."
"네."
"어때?"
강인은 옷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아닙니다."
모두가 놀랐다.
혜린의 표정이 굳었다.
"뭐가?"
강인이 혜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옷의 옆선을 바라봤다.
"이 선이 아닙니다."
미송이 물었다.
"어디?"
강인은 허공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다.
"여기서 조금 더 흘러야 합니다."
미송의 눈빛이 달라졌다.
강인은 스케치를 가져왔다.
"바람은 이렇게 멈추지 않습니다."
혜린이 강인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없었다.
오직 옷만 있었다.
강인은 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을 보고 있었다.
미송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혜린이 그 미소를 보았다.
"왜 웃어?"
미송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이제 알았다.
강인이 혜린을 바라보는 눈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다르다는 것을.
모델을 볼 때 강인은 옷을 본다.
하지만 미송을 볼 때는—
미송을 본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미송은 강인 옆으로 갔다.
"여기를 더 풀까?"
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허리선은 조금 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두 사람은 나란히 스케치를 바라봤다.
혜린은 거울 속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가까이 서 있는 강인과 미송.
같은 옷을 바라보고.
같은 선을 고민하고.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두 사람.
혜린의 표정이 조금 쓸쓸해졌다.
그때 도윤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혜린 선배."
"왜?"
도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둘 사이에 끼어들기 쉽지 않을 겁니다."
혜린은 도윤을 바라봤다.
"그래도 해 볼 거야."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왜?"
도윤은 웃었다.
"선배도 고집 세 보이니까."
혜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칭찬이야?"
"반반입니다."
혜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바람과 나무.
그리고 그 사이에 선 자신.
혜린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알 것 같았다.
강인과 미송을 이어 주는 것은 단순한 첫사랑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같은 천을 만지고.
같은 선을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의 옷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보다 더 강한 인연인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
김태석 교수는 멀리서 세 사람의 작업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 선 이영숙 교수가 말했다.
"재미있네요."
김태석이 물었다.
"뭐가?"
"세 사람 말이에요."
"나는 학생들 연애에 관심 없소."
이영숙이 웃었다.
"제가 연애라고 했나요?"
김태석은 입을 다물었다.
이영숙은 작업대 앞의 강인과 미송을 바라봤다.
"저 두 사람, 서로를 성장시키고 있어요."
김태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아직 멀었소."
"그래도 가능성은 있죠?"
김태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영숙은 알고 있었다.
김태석 교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실습실 창밖으로 늦가을 바람이 불었다.
나무가 흔들렸다.
그리고 작업대 위에서는 한 벌의 옷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사랑도.
꿈도.
경쟁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한 땀.
또 한 땀.
1978년의 청춘이 그렇게 바느질되고 있었다.
― 제25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