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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사람
 
 
 
카페 게시글
한경직 목사 성역 스크랩 한경직 목사님
예향 추천 0 조회 346 17.03.17 15: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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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직 목사님을 그리며 영상을 모아 옮겨보았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영락교회 전도사 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영락교회에 다니기도 했었는데 중간에 잠시 충현교회를 다니다가

성인이 되면서 외국으로 나가 살기 전 까지는 영락교회에서 결혼하고,

(마직막 영상을 보니 왼편에 제가 결혼식을 올리던 선교관이 보이네요. 지금은 없어진곳.)


아이 낳고  아이도 그곳에서 유아세례도 받고, 남편은 교사로 학생들을 돌보고..

영락교회의 그 당시 모습은 활기가 넘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안아서

한경직 목사님.. 그렇게 훌륭한 분을 곁에 오래도록 가까이 모시고 지내면 좋으련만,

교회재직들은 (물론 어느 한 분의 명령이 있었겠지만) 한목사님을 먼곳 남한산성으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습니다. 목사님 사택이 교회곁에 있었는데..왜 그런짓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분께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일이였습니다.

어느 목사님 한 분의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다른 목사님들도 모두 자리를 떠나곤 하던,

교회로서는 아주 큰 어려움이 있던 시기였음이 기억납니다.


강남지역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때

남한산성은 학생들이 소풍가는 장소로 아주 먼 곳이였습니다.

한 목사님의 모든 열정과 시간이 담긴 영락교회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그곳에 사시면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인자하시면서도 강직하셨던 그 목소리가 늘 마음에 남았었는데 

오늘 한경직목사님의 음성을 들으니 지금도 살아계신것만 같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본당 문앞에서 성도들과  활짝 웃으시며 인사를 나누시던 모습..

멀리서 뵈어도 마치 주님을 뵙는것 처럼 형언키 어려운 광채속에 계셨더랬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참 그립습니다.  천국에서 만나뵈면 달려가 반가이 인사드리겠습니다.





 멘토,길을 묻다 부활절 특집-  한경직 목사 1









멘토, 길을 묻다 부활절 특집-  한경직 목사를 기억하다 2부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 목사








1958.5.11    영혼의 회복 / 한경직 목사 



   





1965.11.21    주님의 기도생활  / 한경직 목사









1966.5.8  한 기독교 가정의 모습 / 한경직 목사








1968.10.13  배우고 가르치라 / 한경직 목사








한경직 영화 예고편

 




[기독일보 기사]


“목사로서의 그의 인격은 문자 그대로 전인적인 신앙인이기에, 

신앙과 생활 사이에 괴리(乖離)가 없고 신앙과 신학 사이에도 모순이 없다. 

삶이 표(表)와 리(裏)의 상이(相異)가 없고, 신(信)과 행(行)에도 완전한 일치(一致)를 보인다.”


영락교회 원로장로이며 대광학원과 영락학원에서 일했던 송성찬이 

한경직 목사에 대해 한 말이다.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의 김은섭 박사는 

5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학술발표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리더십과, 

그 구조와 의미’에 대해 강연했다.



먼저 김 박사는 “한경직 목사는 자신의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면서 

“이것은 한 마디로 ‘사명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주님이 시키신 그 일을 한다는 것이다. 

한경직의 리더십, 그 핵심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고 했다.



또 “한경직은 70년대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가장 잘했던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 목사가 와서 집회를 할 때,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던 

무명의 젊은 김장환 목사를 불러서 통역을 시켰다. 

그 뒤에 김장환 목사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세계침례교연맹의 회장도 됐다. 


김장환 목사는 한경직 덕분에 오늘의 자신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곽선희 목사 또한 그러하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유명한 목사들이 무명의 젊은 목사 시절에, 

한경직이 불러서 부흥회 강사도 시키고 한국교회를 위한 굵직굵직한 일들을 맡기고 하면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고 고백한다”고 했다.



김 박사는 한 목사의 ‘비전의 리더십’과 관련, “일제 말기는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에 참으로 암울한 시대였다. 

창씨개명에 의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도 잃어버리고, 

얼이 담겨 있는 우리의 말과 글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경직은 ‘도대체 이 민족이 어디로 가느냐? 

정말로 우리 민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기도처였던 보린원 뒷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환상을 보게 됐다”고 했다.



한경직 목사는 ‘나의 감사’에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삼천리강산이 내 앞에 펼쳐졌다. 

삼천리강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형용할 수가 없고, 

높고 낮은 푸른 산세에 아름다운 부락들이 많이 있는데, 

그 부락마다 흰 돌로 지은 예배당이 보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종소리가 들렸다”고 환상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김 박사는 “한 목사는 광복 이후 1950년 당시 하얀 돌로 영락교회를 세웠고, 

차후 이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교회와 한국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됐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월드비전은 그가 ‘이 세상은 비전이 필요하다’라고 해서 만든 것이다. 

1950년 5월 밥 피어스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경직의 통역으로 부흥회를 인도했다. 

아마도 이 때 한경직이 밥 피어스에게 ‘이 세계를 보라’ 하면서 서울 근교의 비참한 상황, 

절망 중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는 이 사람들을 위해 비전을 제시해 줄 것을 밥 피어스에게 요구했다. 

그 결과 월드비전에 만들어지게 됐다”고 했다.





1957년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밥 피어스 목사(왼쪽)와 

통역하는 한경직 목사(오른쪽)의 모습. 

ⓒ월드비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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