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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읍 성동리 복룡과 대사동 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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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룡 마을은 실학실 각시골 개장뫼 복룡으로 이루어졌다. 무안읍 소재지에서 나주 쪽으로 1㎞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목포-광주간 국도 1호선이 마을을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이 자리한 위치가 용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마을에서 인물이 나지 않도록 용머리를 동강내기 위하여 마을을 가르는 길을 냈다고 보고 있다. 행정구역명으로는 무안읍 성동4리 복룡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 성동4리에는 복룡과 실학실 등 두 개의 마을이 있다. 그러나 실학실은 복룡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는 풍수상의 한 터로 학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의 失鶴室이란 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복룡 마을이 광-목 간 도로가 나면서 아랫마을 윗마을 등 두개로 나뉘어지자 윗마을은 실학실, 아랫마을은 복룡마을이 되었다. 이렇게 편의적으로 갈라서 부르게 된 것이 행정명으로 굳은 듯 하나 주민들은 실학실이 마을 이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호구총서 등 지명 관련 자료에는 복룡동리는 나오지만 실학실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마을유래지에나 주민들이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에 청계 도대에서 살다가 결혼 후 분가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함풍이씨 이기순(李基淳)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안군의 입향조와 성씨 자료에는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이가 무과로 고성 현감을 지내다 인종(1544-1545) 임금의 서거 후 이곳에 자리 잡은 나주 정씨 鄭以夏(호-해은)로 보고 있다. 복룡 저수지 위 주민들이 여시밭굴로 부르는 곳의 산 정상에 샘이 하나 있다. 이 샘 옆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아래에서 나온 물이 고여 이루어진 것이다. 주민들은 이 샘을 선녀 샘 또는 달내 샘[月川샘]으로 부르고 있다. 이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내를 이루어 마을로 흐르고 있다. 국도 1호선도 달내를 가로지르는 복룡교 위를 지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지명으로는 안고랑, 큰 고랑, 작은 고랑, 여시 밭굴, 범바위, 질몰동(말을 많이 키웠다 해서 부르는 지명), 개장뫼, 각시골(학터),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선녀샘 등이 남아 있다. 여시밭굴 너머에는 소각장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 조금 올라간 복룡저수지 위에는 여러 개의 고인돌이 널려 있었는데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현재는 현경면 들머리에 마련되어 있는 고인돌 동산에 옮겨서 전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여기저기에서도 고인돌로 추정되는 큰 돌들이 많이 있었으나 묻어버리거나 치워버린 일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현재의 마을 회관 자리에 여의주(주민들은 용의 거품이라 함)에 해당하는 큰 바위가 세 개 있었는데 회관을 지으면서 땅 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이 마을은 마을 가운데로 국도 1호선이 지나면서 주민들은 늘 교통사고의 위험에 불안해 하고 있다. 또한 무안읍 우회도로가 마을 뒤로 나면서 마을을 마치 옹벽처럼 막아버려 주민들의 조망권은 물론 농사를 짓는데 불편을 주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 팔만구암자의 절이 있었다는 마을-성동5리 대사동
대사동은 약사사 마구실 삽바웃골로 이루어졌다. 원래 성동1리 였는데 몇 해 전에 분리(分里)되면서 지금은 성동5리에 속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큰 사찰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대사동 일대가 모두 절터였다. 현재 대사동 구역에 있는 기관들로는 대림장을 포함하여 약사사 중앙교회 국악원 무안군청 왕국회관 쥬바라복지원 등이 들어서 있다. 대사동에 위치하고 있는 약사사는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성명미상의 대사가 창건한 南鶴寺가 폐찰된 자리에 1972년 대우사를 짓고 이어 1983년에 약사사로 개명, 중창한 사찰이다. 大寺洞이란 이름만큼이나 불교와 관련된 설화나 사찰이 많았고 불세(佛勢)가 성했던 곳이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곳에서는 "버선발 (또는 벗은발)로 남산까지 다녔다"거나 또는 "팔만구암자의 절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사찰이 많았었다고 한다. 약사사에는 전남유형문화재 제178호(1990년 12월 5일 지정)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다. 약사사 창건주 경훈스님의 선몽에 나타났다는 이 석불은 왼손에 약항아리[藥壺]를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결인을 취하고 있는 약사여래불이다. 자세히 불상을 보면 고려시대 조각으로는 드물게 뛰어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약사사 주변에는 주목할 만한 나무 세 그루가 있다. 사찰 경내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둘레가 280mm가 넘는 나무도 있다. 또한 사찰 뒤에 있는 팽나무는 둘레가 480mm가 넘는 아주 오래된 나무로 지금도 신도와 주민들이 매월 초사흘이면 이 나무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있다. 사찰 앞은 예전에는 몽탄과 일로로 가는 큰 길이었다. 해서 행인들이 팽나무 앞을 지날 때는 이 나무를 木神으로 믿고 치성을 드리고 갔으며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침을 세 차례 뱉고 지나갔다고 한다. 또한 단오날에는 주민들이 팽나무 아래에 있던 들독을 들고 힘겨루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 그 팽나무 앞에는 정참봉을 칭송하는 ‘정공학정덕혜기념비’가 있다. 약사사 앞을 흐르고 있는 개울을 月川이라 했으며 대림장 앞에서 낙지골목으로 가는 개울에 월천교가 있었다. 사찰 앞은 사장터(활터)라고 하며 앞의 산은 활 터와 관련이 있는 매듭산이라 한다. 또한 성동저수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저지동골이라 하는데 그곳은 6,25 때 14명의 주민이 인민재판을 받아 한꺼번에 총살당했던 곳이라고 한다. 군청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마구실(또는 마기곡)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말을 기르고 관리했던 곳으로 지형이 일어나는 말의 형국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무안읍으로 바뀌기 전 면성파출소가 있었다. 또한 성동제 맞은 편에 있는 산을 큰 산으로 부르는데 원래 그곳에는 나주 김씨 제각이 있었다. 그러다 저수지가 생기면서 현재 버벌산이라 부르는 곳에 그 제각을 옮겨서 지었다. 제각 아래에는 옛날 원님들이 나들이 나와 즐겼던 구시래라는 바위가 있다. 예전에 주민들은 남자들은 목욕할 때 구시래에서 하고 여자들은 저지동골에서 했다고 한다. 또한 대사동 서쪽에 있는 등성이를 산당이라 하며 용산에서 대사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삽바웃재라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