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력 6월은?
벌써 금년도 절반을 넘어섰다.
오늘이 7월 18일인데, 음력으로는 유월 초엿새날이고, 어제가 초복이었다.
금년의 경우 양력 7월 13일이 금요일이면서 음력 유월의 시작일이었다.
서양에서는 13일이 금요일과 겹치면 불길함을 예고하는 관습이 있다.
음력 유월하면 무더운 계절인데, 금년의 폭염은 유월 초하룻날부터 시
작되었고, 올해는 월복(越伏)이라서 더욱 더위가 극성을 부릴 것 같다.
이런 무더위 속에 태어나신 우리의 위대한 선인(先人)을 말하라면
누구나 남명 조식(南冥 曺植 : 1501-1572))선생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선생을 꼽을 것이다.
그러면 남명(南冥)과 다산(茶山)은 어떤 인물인가?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실천의 사상가이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육자이면서, 임진왜란을 예고하여 출중한 의병장들을 제자로 길러내어 나
라를 구한 우리의 선인이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은 실존의 경제학을 접목시켜 현실에 맞는
부(富)를 민중에게 심어주려 노력한 분으로, 근세 한국경제학사에 그 이름을
맨 처음의 윗자리에 올려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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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은 연산군 7년 신유년(1501)음력 6월 26일(금년의 경
우 8월 7일) 아버지 조언형(曺彦亨)과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외가
인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 (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나서
일흔두 살을 일기로 선조 5년(1572)에 한평생 즐겨 제자들과 학문을 나누며 지내
던 두류산(頭流山) 아래 덕산(德山)에서 졸(卒)하였다.
흔히들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을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과 함께 그 시대
사림(士林)의 양대 산맥을 이룬 영남학파의 대학자로 알고 있지만, 그러한 인식
만으로는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남명(南冥)은 민본주의의 뿌리를 다진 실학
의 대가로 일체 벼슬하지 않고, 오직 학문과 후학을 기르는 일에만 열성을 보인
올곧은 분이다.
이는 성균관(成均館) 대제학(大提學)이란 높은 벼슬을 지낸 퇴계(退溪)와는 다른
양상의 대학자로 모두가 추앙하고 있다. 말년에 퇴계(退溪)선생이 청량산(淸凉山)
을 근거지로 후학을 기른 데 비해, 남명(南冥)은 애시당초 지리산(智異山)의 산속
에 뿌리박아 오직 자신의 학문의 깊이를 넓히고, 다음 세대에 필요한 인재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 1482~1519)의 학맥과 사상을 이어받아 훗날 우리나라
를 이끌고 구해나갈 동량들을 길러내었다. 특히 남명(南冥)의 제자로는 그 시대의
천재인 개암 강익(介庵 姜翼 : 1523~1567)선생이나 임진왜란때 의병의 수장이 된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 1552 ~ 1617) 등은 유명하다.
특히 남명(南冥)은 실천의 사상가이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낸 우리 역사상 가장
탁월한 교육자이다. 실천을 강조하는 남명(南冥)의 학문은 경의(敬義)로 요약된다.
남명(南冥)은 이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 제자를 기르며 이 세상을 구제하려고 노
력하였다. 특히 1555년 남명(南冥)은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제수 받고, 바로 사직
상소(辭職上疏)로 올린 단성소(丹城疏)는 청사에 길이 빛나며 나라를 그르치는 일
에 대해서는 왕에게도 파천황(破天荒)의 극언을 쓴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일체의 벼슬을 하지 않은 남명 조식선생은 그의 사후에도 어떤 관작(官爵)도 쓰지
말고 오직 처사(處士)라고만 쓰도록, 제자 김우홍(東岡 金宇顒 : 1540~1603)과 정
인홍(來庵 鄭仁弘 : 1535~1623)을 불러 지시한 것도 한 오라기의 사심도 없이, 살
다가 간 내용이다. 선생의 죽음 앞에 보이는 벽면에는 敬과 義 - 두 글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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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선생은 경기도 광주현(廣州縣) 초부(草阜)의 마현(馬峴)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에서 영조 38년(1762) 음력 유월 열엿새
날(금년의 경우 7월 28일이지만 1762년의 음력 6월 16일이 양력으로 환산하면 8월
5일이 되어 다산연구소에서는 양력 8월 5일을 탄신일로 결정)에 정재원(丁載遠)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은 남인파의 양반으로 일찍부터 벼슬길에 올라 진주목사(晉
州牧使) 등 지방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 윤씨(尹氏)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
道)의 증손으로 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다산(茶山)이 태어나던 해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참변이 있었는데, 이때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이를 공격하는 벽파(僻派)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다산의 아
버지는 세자를 불쌍히 여겨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짓고 살려고 벼슬을 버리
고 귀향하였다. 그래서 다산의 어릴 때 이름을 귀농(歸農)이라고 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경사(經史)를 배워 그의 학문은 일취월장하였으며, 1776년 (영
조 52년) 상경하였는데 이해에 서양에서는 미국의 독립과 자본주의 경제학의 기본으
로 삼는 영국의 애덤 스미스(Adam Smith : 1723~1790)가 국부론(國富論 ; The Wealth
of Nation)을 발표한 때였다.
서울로 올라온 다산(茶山)은 이듬해 성호 이익(星湖 李瀷 : 1681~1763)의 유고(遺稿)
를 보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리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한하여 조선천주교 창시자로 복자시복(福者諡福)을 받은 광암 이벽(曠菴 李檗 : 1754~
1786)을 통해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이는 결코 우리나라 경제학(經濟學)의 역
사가 서양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육경(六經)사서(四書)의 주석에 나타나는 경학체계(經學體系)와 《일표이서
(一表二書)、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에 나타나
는 실학체계로 나누어진다. 그는 훈고적 실증을 중시하는 한학(漢學)과 청(淸)나라 고증학
(考證學)의 경전해석 방법을 비판적으로 도입하였다.
서학(西學)의 과학적 사고와 신앙체계까지 수용, 객관적 사실에 대한 분석적 입장과 실증
적 방법을 통하여 인간 또는 사회적인 가치 속에서 실용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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