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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당시 달력)
1988년 3월 25일 발표한 동아미술제는 회화와 조각분야였다.
당시 동아미술제는 "새로운 형상성"구축을 내세운 공모전 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작품은 2점 출품하게 되어있었다. 당시 불행이도 내 자취방에는 이삿짐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기가 없었다. 출품원서에 친구의 작업실 전화번호를 기입했고, 그 친구는 동아일보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발품을 팔아 알려주었다. 3월23일 동아일보사 측에 전화를 걸어 수상소식을 확인하고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동아일보사에 인터뷰하러 오라는 시간을 약속했다.
#2
동아일보사에 인터뷰하러 오라는 확인받다.
3월24일 오전 9시까지 동아일보 사옥 10층으로 오라는 약속이므로 아침 일찍 열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당시 열차 시간관계로 오전 8시쯤 광화문 동아일보 근처에 도착했다. 너무 일찍 도착해 동아일보 건너 아침 일찍 열은 다방(상호는 생각안남) 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여러 기억들과 상황들에 만감이 교차했다.
9시 정각쯤에 동아일보 10층 문화부(당시기억)에 도착했다. 다른 수상자들이 와있었고, 이때 대학친구(심재구) 때문에 알게 된 최정열(조각전공 세종대졸업)을 만나 악수하며 서로 축하한다는 인사 나눴다. 최정열은 조각분야 동아미술상 수상 작가였다.
#3
인터뷰를 마치고 작품사진 필름 확인하다.
10층 회의실에서 수상작가 1인에 1명의 담당자(당시 기자들만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1대1로 인터뷰했으므로..)가 개인별로 인터뷰했다. 수상소감, 작업과정(간단하게 하라는 주문)등을 물어보았다.
시간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를 한잔 접대 받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인터뷰 끝부분에 특별히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동안 지켜봐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모든 수상자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인터뷰 담당자들은 부산하게 오고갔다.
잠시 후 나의 담당자(기자인지 기억에 없다. 다만 키가 약간 작고 다른 사람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였다.)가 잠시 밖으로 나와 보라고 했다. 따라 나갔더니 복도를 조금 걸어가다 필름을 보여주었다. 당시 슬라이드 필름을 작은 크기만 보다 길고 큰 것을 보았으니 더욱 기억이 확연하다.
내 작품이 맞는 것이 틀림없냐는 것이었다.
합판을 바탕으로 만든 내 작품이 틀림없었다. 2점 모두 확인했다. 여기서 약간 묘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작품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쳤다.
기쁜 마음에 다른 수상자들과 빠른 인사를 하고 확실한 소식을 전해야 하겠기에 대전으로 돌아왔다. 동료들에게 축하받다.
#4
동아미술상 "잘못되었다"고 연락 받다.
3월 24일 저녁9시쯤 친구로부터 동아일보사에서 연락이 왔다는 전언을 듣다. 늦은 시간이지만 공중전화(당시 집에 전화가 없었다)로 동아일보사에서 남겨 논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오늘 오전에 인터뷰한 수상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무슨 그런 일이 있느냐고, 그야말로 굴지의 신문사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만 응답했으며 "다음기회에 다시 열심히 하라"고 했고 "한 점만 입선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었고 그날 아침부터 낮에 일어난 일이 혹 꿈을 꾼 것이 아닌가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나로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재학당시 교수님에게 전화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교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5
그 이후 대처상황
3월 25일 이미 다른 사람(이철희 경희대출신, 이 이름은 지금도 생생하다.)으로 수상자 발표가 났다. 나름대로 여러 방법으로 알아보았으나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일개 무명의 신출내기 화가가 거대한 언론사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시 그런 치밀성도 경제적 능력도 없었거니와 "그림을 업으로 살아야 할 내 삶이 이런 정도 가지고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때문에 당시 신문이외에 도록 등 더 이상 확인하기 싫었고 전시기간에 작품을 보러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이렇게 20년이 흘렀다.
#6
증거자료
다음은 1988년 제작된 <동아미술제> 도록이다. 1988년 것만 제시하면 그 편집 방식이 잘못되었다 할 수 있으므로 공예분야와 격년제로 열린<동아미술제-회화 조각>분야의 1986년 도록, 1990년 도록을 뒷부분에 제시하겠다.
1)도록 겉표지
2)1988년 동아미술상 수상작가 명단
(당시 대상작은 없었음)
동아미술상 회화2부 <壁이미지1> 이순구
2번 동아미술상(9점) 난에는 이철희 라는 이름은 없다.
수상작가 도록작품사진----------------------------------------------------
3)동아미술상 수상작가의 작품 1점은 당연직 입선으로 됨
(입선자 명단에도 수상작가 순으로 입선자 앞부분에 나열)
입선작가 작품사진(앞부분)
4) 동아미술상 수상작품들
회화1부 <무제> 남창식
회화1부<회고1> 이윤희 / 회화2부 <선대전-ㄷ> 장효경
회화2부 박훈성<지각적 공간위의 만남-1> / 회화2부 김용식 <몸짓>
문제의 그 회화2부 <역사-1986>이철희 / 회화3부 오이랑 <Existence111>
조각부 박상희<새벽-時空> / 조각부 최정렬<우리는 생각한다>
5) 이해를 돕기위해 1988년 '동아미술제' 전후의 1986년 도록, 1990년 도록 편집순서를 확인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편집됨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당시 뿐아니라 미술계의 심사판에는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 이후 대한민국미술대전 등을 둘러싼 소음들이 거침없이 들려 왔었으니까.
지금 그들은 잘 살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그 당시 새치기한 작가는(작가라 부르고 싶지 않다) 언젠가 언뜻 보니 공공 설치물 만드는 것으로 안다. 더럽게 많이 기웃거림도 파악된다.
요즘도 든든한 권력이나 경제력 배경의 라인을 등에 업고 수상하는 잡가들이 종종 있다. "제(그 또는 그녀) 상좀 주라"해서 받는 상, 참 자존심 구기는 일이 아닐까. 하긴 그런 자존심 있는 자들이 그런 짓 못하겠지만.... 그런 부정적인 일들로 경력 살찌워서 교수되고, 잡가가 되어 학생들앞에서는 "신념과 청념을 가지고 살아라"등의 설레발이를 치겠지. 어느 부분은 참 구린 이 세상이기도 하지만 아직 세상은 밝고 투명한 웃음이 남아 있기에 덤덤히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출처]동아미술제(1988년) 동아미술상 바꿔치기- 동아일보주최- (yisoongu art)|작성자 그 음강 표1) 198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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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헐이네요 맘고생 심하셧었겠어요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아주 많은 비리가 곳곳에 있었을때죠.....
어딜가나 편법으로 상을 주는군요 그런것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싫어서 협회를 탈퇴했었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각종 큰 대회를 안나가게 할 수 없어 다시 찾은 대회 물론 제 제자가 상을 탔어요 그런데 상을 주지 않았던 협회 어깨들이 나중에 상을 준것을 알고 아직도 이짓꺼리를 하다니 내 제자들한테 너무 부끄럽다면서 대회를 엎었지요... 인간이 주는 상에 연연해 하지 않기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지만 이런 더러운 비리에 받은 상 차라리 안받는게 더 나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썩은물에 가면 물고기가 살 수없듯이 진정한 예술가라면 자신의 예술을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팬만 있다면 그 가치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씁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