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서평.hwp
얽히고설킨 관계 속 갑(甲)과 을(乙)을 들추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
<상냥한 폭력의 시대>(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16)
한 때 “손님은 왕이다”가 유행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남의 집 귀한 자식”이 대세다. 우리 사회의 선연한 갑(甲)과 을(乙)의 갈등이 엿보이는 전환이다. 더 이상 백화점 VVIP 회원이나 재벌 2세의 항공사 부사장 등 슈퍼 갑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을들은 갑에게 억눌린 감정과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분노하면서도, 또 다른 상황에서는 갑이 되어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사회적 약자에게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고 있다.
정이현 작가는 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통찰해내어 단편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집필했다.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얽히고설킨 다양한 관계가 등장한다. 은연중에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갑과 을의 모호한 행태를 통해 위선을 들춘다. 책은 그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작가 특유의 무심하듯 냉소적인 어조는 그녀가 만들어 낸 촘촘한 관계의 부조리에 대하여 독자가 객관성을 유지하게끔,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게끔, 무심히 읽어내게끔 한다. 독자가 적당히 등장인물과 사건을 모른 척, 못 본 척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두 번째로 수록된 단편 ‘아무것도 아닌 것’은 미성년자인 소년과 소녀가 낳은 한 생명을 뜻한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유약한 그것은 부제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를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를 낳은 부모도, 그리고 그 부모를 낳은 어미들도 어리숙하고 미숙했다. 생명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존재와 유무를 결단해버릴 수 있는 보호자의 슈퍼 권력은 책 속 등장인물 중 가장 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윤리적 문제를 앞두고 과연 나는 교복을 입은 내 딸의 선택을 존중해줄 수 있을지, 나도 우연을 가장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는지 고민하게 된 에피소드다.
이 외에도 양심을 뜨끔하게 하는 여러 인물과 이야기가 있다. 집을 둘러싼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 나이 많은 정치인 남자와 젊은 여자의 불륜, 북한의 상류층 집안 아이와 남한의 평범한 집안 아이의 우정 등 인간 간의 서열과 분리, 단절, ‘상냥한 폭력’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스산함과 공허함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작가는 각각의 인물과 독자가 밀접해질 때쯤 이야기를 종결한다. 작가의 짧고 간략한 호흡은 독자에게 공감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적절한 감정선에서 몰입과 단절을 조절하는 작가의 치밀함이 상냥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 상냥한 듯하다. 그녀의 친절한 갑질인가.
이 책은 황정은 단편집 『아무것도 아닌』과 꽤 비슷한 구조와 어조로 우리 사회의 냉정을 조명한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소설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나름 쏠쏠할 것 같다. 다만 내용이 건조한 만큼 두 권 다 거리 두고 읽기를 권한다. 갑에게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 받고 공감하고자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지만, 치유서는 아니다. 도리어 스스로도 모르게 갑이 되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다 부끄럽고 미안해지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많아지는 사회, 그 또한 작가의 친절한 갑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