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의 재롱
변미순
외딸인 딸아이와 나는 썩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 서로 대면대면하면서도 믿고 보는 사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딸은 결혼 후 3년 만에 내게 외손녀를 안겨주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 그것만으로 딸아이에게 수시로 고맙다는 말을 한다.
올해 5살이 된 외손녀 도경이의 말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펜데믹 상황이 되어 일 년을 꼬박 대가족과 같이 지냈다. 첫돌 지나고 곧바로 분가하였지만 8달 만에 엄마, 아빠를 말해서 놀란 동영상을 지금도 보곤 한다. 대가족 속에 살아서인지 낯가림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어딜 가도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하는 사회성 백 점이다.
도경이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할머니 엄마는 어디 있어요?”
무심결에 하늘나라라고 답하였다. 하늘을 한번 쓱 올려다보더니
“저기 햇빛 나라?”
“응.”
“할머니 엄마는 눈부시겠다. 늑대랑 티라노가 나타나면 숨으세요!” 라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늘나라라는 개념보다 눈부신 햇빛이 더 와 닿았던 모양이다.
‘그래. 나의 엄마는 지금 너의 말처럼 나에게 햇빛이었구나. 살아 계실 때에도, 돌아가신 지금에도 햇빛처럼 소중한, 꼭 필요한 필수적인 존재였구나.’
나는 그날 이후 돌아가신 분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하지 않고 햇빛 나라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겐 부모가 햇빛과 같음을 도경이를 통해 배운 셈이다.
콩국수 잘하는 집으로 일곱 명이 가족나들이를 나선 날이었다. 먼저 시킨 빈대떡을 먹고 콩국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동생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경이가 소리쳤다.
“할아버지, 목에 구멍난대이.”
무슨 소리야? 듣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사위가 담배를 피우고, 그 담배 케이스에 그려진 목이 뚫려있는 그림을 보아온지라 할아버지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는 것을 그림으로 전달한 것이다. 남동생이 “도경아. 이때는 내가 뭐라고 해야하노”하며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들어 왔다.
올해 많이 아팠고, 열 경기도 하는 등 힘들었는데 설사하면서도 사과 한 조각 먹게 해 달라고 애교를 부린다며 딸이 찍어 보내온 사진은 천상의 천사 같다. 딸과 사위는 과일을 전혀 먹지 않는데 나는 과일이 밥보다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외손녀가 나를 닮아 온갖 과일을 다 좋아하니 유전인자에 놀라고 제철 과일 사다주는 것이 더 좋다. 어릴 적 걷기 시작하면서 뒷짐을 지는 건 왜 그럴까 했는데 나랑 뒷짐 지는 모습이 붕어빵이다. 외할머니를 닮아주어 정말 고맙다.
중복이라고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사위와 정원 넓은 식당에 갔다. 도경이랑 나는 토끼에게 상추도 먹이고, 아직 많이 어린 강아지도 보고 연못에 잉어도 보느라 식당에는 늦게 들어갔다. 상을 차려주시던 사장님께서 잉어가 몇 마리 있더냐고 묻자 도경이는 두 손가락 모두 펴서 “열 마리요.” 했다. 도경이가 가장 많다는 것은 열이라는 숫자이다. 열을 아는구나 하고 칭찬하자 ‘열’에 대한 생각에 빠졌는지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열난다 할 때 열, 맞지요?”
“그래그래, 감기 걸려서 열날 때 그 열과 같은 말이네”
“열미워 할 때도 열.”
열미워가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딸아이는 고기 주문하러 갔고, 사위도 잠시 자리에 없어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자니 나도 아는 노래를 한다.
“손이 시러워 꽁, 발이 시러워 겨울바람 때문에. 손이 꽁꽁꽁~~~ 어디서 이 바람이 불어 왔는지 너무너무 열미워~~” 식당이었지만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도경이는 ‘얄미워’를 ‘열미워’ 로 노래 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식당 옆 테이블에 돌 정도 된 아이가 가족들과 함께 왔다. 도경이가 아이를 계속 보고 있었다. 물과 우유를 번갈아 먹여도 아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기 엄마는 결국 아이용 의자에서 아이를 빼고는 안고 달래고 있다. 그래도 아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으니 도경이는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불쑥 “똥쌌나?”하였다. 옆 테이블 가족이랑 우리 가족이 박장대소했다.
어느 날 딸네에 들렀을 때 “할머니 사랑해요.” 하더니 종이에 하트를 그려놓고 특별히 리틀 스타까지 붙여서 서툰 가위질로 “여기요” 하며 주었다. “예쁘지요?”하는데 어찌 안 예쁘겠는가. 일정이 있어 간다고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지금 가시면 너무 아쉽잖아요.”한다. 이런 단어들은 어떻게 구사하는지 정이 뚝뚝 떨어지는 손녀의 말에 내가 녹는다. 사는 맛이 난다.
새콤한 것을 잘 못 먹는 나와 딸과는 다르게 사위와 도경이는 레몬 슬라이스를 즐긴다. 레몬을 먹으면서 “제가 이걸 잘 먹으면 할머니가 건강해지시죠?”한다. 아무 근거 없는 소리지만 많이 먹어라.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 아닌가. 레몬 먹는 것만 봐도 입에 침이 고여 어깨가 쪼글거린다며 들썩이니 목에 매달리듯 나를 안아준다. 나에겐 도경이가 레몬보다 더 새콤한 비타민이다.
요즘은 볼 때마다 재롱이 늘고, 말솜씨가 늘어 더 보고 싶어진다. 손녀가 태어난 이후부터 이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하고, 웃을 만하고, 뛰어놀 만한 쾌적한 환경과 상황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나의 일상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자세를 다잡기도 한다. 사람이 대을 이어가면서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겠다는 의지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세상이 발전해 가는 기반이 된다. 우리나라 출산률이 0.7이라는 최악의 수치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크게 고민하고 빠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도경이가 알아가고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고 입에 살살 녹는 것이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도경이 생각만 하고 있어도 저절로 행복해진다. 그렇게 우리 모두 행복한 세상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2023년 12월 <오늘의 수필 8호: 87-91>
첫댓글 도경이 사랑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국장님이 그려집니다.
사진으로 보아도 애교도 철철 넘치더군요.
귀여운 도경이랑 함께라면 행복은 절로~~
손녀 딸 할머니 모습이 눈에 훤합니다.
내리사랑이라 저도 손자 손녀가 눈에 삼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