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강해(26) 2025. 2. 16
스데반의 설교(3) - 모세의 예언
사도행전7:17-41
<지난 시간 요약>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산헤드린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스데반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왜 구세주이신지를 변증합니다. 그런데 대상이 유대인들이다 보니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변증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교의 틀을 깨고 전 인류를 구원하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교 지도자들은 유대교 안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약속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셉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스데반은 요셉의 삶을 예수님의 예표로 증거합니다(9-10절).
1)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팔린 것과 같이, 예수님도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고 함께 하셨고, 가는 곳마다 형통케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동족 유대인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이 버려졌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귀히 쓰셨습니다.
3) 요셉이 이방인(바로)에 의해 존귀함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이방인에게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4)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그 민족의 조상들을 구원하는 결과가 되었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역사적인 배경>
세 번째로 스데반은 모세의 생애를 길게 다룹니다.
먼저 모세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17~1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는 앞의 6절에서 이스라엘이 4백 년 동안 다른 땅(애굽)에서 종살이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때가 다 되어 갈 무렵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성하여 수가 많아졌습니다(애굽의 고센 땅은 모내기에 앞서 모를 키워내는 못자리 역할).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번성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바로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을 압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을 노예로 삼고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산파들을 위협해 남자아이가 태어나는 즉시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는 엄청난 고난도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과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대로 애굽에 안주하였을 것입니다. 애굽은 그들이 안주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닙니다. 만일 바로의 압제가 없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지도,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빌드 업’(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 교훈을 우리 삶에도 잘 적용해야 합니다. 잘 되는 것만이 복은 아닙니다. 때로 고난도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무조건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 고난을 당할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 이야기>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낼 한 사람을 준비시키십니다. 그가 바로 모세였습니다. 아시는 대로 모세는 120년을 살았는데, 그의 일생은 40년 단위로 세 번의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첫째, 출생부터 애굽의 왕자로 살던 40년의 기간입니다.
20~22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는 바로의 명령에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지만,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용기를 내어 그를 살려두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집에서 석 달 동안 몰래 키웠지만, 울음소리가 커져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워 보냅니다. 누이 ‘미리암’이 모세가 어떻게 되는지 뒤를 따라갔습니다. 갈대 상자가 갈대 사이에 걸려 멈추었습니다. 그때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울음 소리가 나는 상자를 발견하고 열어보니 히브리 아이가 그 안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아이인 것을 한 눈에 알아봤지만 공주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자신의 양자로 키우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젖을 먹일 수 없어 고민하는 사이, 이때 누이 ‘미리암’이 히브리 사람 중 유모를 소개해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공주가 허락하자, 미리암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데려옵니다. 공주는 삯을 주리니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여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젖을 뗄 때까지 모세는 친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라납니다.
젖을 뗄 때가 되어 드디어 아기를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갑니다. 공주는 이름을 ‘모세’(물에 건져 냈다는 뜻)라고 짖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키워지면서 애굽의 최고 엘리트로 양육되었습니다(22절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그는 애굽의 무술과 과학, 역사, 철학, 문학을 배우고 웅변술도 배웠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여낼 지도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된 일이었습니다. 이런 교육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모세오경을 기록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둘째,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의 기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세상적인 학문과 경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그것을 깨닫는데 모세는 또 다른 40년이 필요했습니다.
23~25절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양육되었지만 자기의 뿌리가 히브리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어떻게 공주의 양자로 키워졌는지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을 것입니다(모세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것을 증명).
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에, 그는 자신의 동족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자신은 운이 좋아 왕자로 키워졌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자신의 동족들은 노예로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절의 모세의 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히11:24~25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분명히 그의 형제들을 구원하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나이와 그 정도의 학식과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히브리인들을 구원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히브리 노예 한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억울하게 매를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욱하는 마음이 들어 순식간에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고 말았습니다.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인을 모래 속에 숨겼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모세 단 두 사람뿐입니다. 이 일로 모세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보다는 민족의 영웅으로 구원자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튿날,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26~29절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는 가서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했는데, 오히려 때리던 사람이 모세를 밀치면서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면서 오히려 따지고 대듭니다.
그러니까 어제 자신이 도와준 그 사람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모세를 범죄자 취급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사람들이 자신을 존중해주고, 자신을 구원자로 여겨줄 줄 알았는데, 자신에게 대들 뿐 아니라 자신의 범죄까지 까발리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였습니다. 억울함을 풀어주려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약점을 잡힌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하늘 같은 애굽의 왕자인데 감히 어떻게 노예가 달려듭니까? 모세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이 되시지요? 그 마음이 억울함과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찼을지 상상이 되시지요?
사실 이런 때가 우리에게도 종종 있습니다. 순수하게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오히려 저쪽에서 강하게 반발하여 아주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녀에게도 잘되라고 이야기해주었더니 설교 좀 그만하라며 반발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내가 도와주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고 한 행동에 상대방이 이상하게 반응하고 나오면 당황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의 신분과 능력을 믿고, 히브리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자가 되어 보겠다며 스스로 나섰지만, 결과는 애굽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동족들의 반발을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은 급기야 애굽 왕 바로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바로는 모세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눈을 피해 애굽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때 자기 뒤를 봐주던 양어머니 핫셉수트가 실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잘 지내야 하는데 이런 사건이 벌어지니까, 그 다음 바로 왕인 투트모세 3세가 자기를 어떻게 할 것 같아 도망을 간 겁니다.
모세가 도망을 간 곳은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거기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은 게르솜과 엘리에셀입니다. 게르솜은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엘리에셀은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려 40년이란 시간을 광야에서 양들을 치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모세의 생각이었을 뿐, 하나님의 생각은 그와 달랐습니다. 우선 모세가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순간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틈이 없습니다. 그의 자신감과 교만은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시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땅에서 40년이 지나는 동안에 그의 물을 빼셨습니다. 모세는 40년이 지나는 동안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의 40년 못지않게,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기 위하여 훈련하시던 과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약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예수님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기는 여러분이 ‘은혜 아니면 설 수 없음’을 고백하고, 늘 겸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해방자로서의 40년의 기간입니다.
모세의 인생 세 번째 40년은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0~34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어느 날 모세가 길 잃은 양을 찾아서 우연히 시내 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가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지만, 나무는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갔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야! 모세야!” 하며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가 대답하자,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고 하셨습니다.
‘신을 벗으라’는 뜻은 첫째, 이것은 회개와 정결의 명령입니다. 세상에서 묻혀온 모든 죄의 먼지들을 떨어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능력이 많고 재주가 많아도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 주님의 종으로 쓰일 수가 없습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둘째,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미움과 절망과 욕심과 분노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습관과 인간관계와 취미생활과 집착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신발은 인간의 발을 보호해 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신을 벗으라는 것은 결국 무방비 상태가 되라는 말입니다. 거칠고 뱀도 나오고 전갈도 나오고 뜨거운 광야에 맨발로 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주 조심조심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겸손히 나아오는 것입니다. |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신을 벗어버렸습니다.
그제야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세를 히브리인들 구원할 지도자로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40년이 지나는 동안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며 부르셨습니다.
그는 두려워 거부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각종 ‘기사과 표적’을 보여 주시면서 그를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해방의 지도자로 40년간 쓰임을 받습니다.
35~36절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렇게 해서 모세는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민족을 구출해 내는데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비록 패기도 젊음도 남아 있지 않은 80세 노인이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기사와 표적’을 행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나오는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놀라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조상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신 사람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누구도 모세의 권위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스데반이 길게 모세의 이야기를 한 목적입니다. 바로 조상들의 불순종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모세의 말씀을 거역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대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첫째, 조상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인 양 섬겼습니다.
39~41절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모세가 시내 산에서 더디 내려오니까(40일)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하면서 축제를 벌였던 그런 이야기입니다(출 32장).
이 사건은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렸고, 하나님은 그 민족을 진멸하시려 하였습니다. 모세의 목숨을 건 기도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둘째, 광야에서 고생하는 것을 불평하면서 애굽을 그리워하여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39절에서 스데반은 ‘그 마음이 애굽으로 향하여’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마음으로만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실제 실행에 옮겼습니다.
민14:3~4(정탐꾼이 돌아와 부정적인 보고를 한 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때도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 결과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거역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조상들의 죄였습니다.
<모세의 예언>
그런데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고,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37~38절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7절의 예언의 말씀은 신 18:15에 기록된 말씀입니다(행3:22).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후손들은 늘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가 언제 오실지를 민감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스데반은 모세 이야기를 다루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을 심판하려고 하는) 산헤드린 회원들은 말로는 하나님과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세의 예언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모세를 존경한다면, 그분의 예언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예언의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하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 조상들이 모세에게 반역을 행한 것처럼, 오늘날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반역을 행하고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데반의 설교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심각한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율법을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변질).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와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율법(유대교의 구조)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다. 모세 시대의 조상들과 다릅니까? 산헤드린 회원들과 다릅니까?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반역과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대판 금송아지인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에도, 옛날 세상의 방식(구습)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과거의 못된 생활을 벗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새로운 피조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