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
설 명절이 코앞이라는 소리를 들었어도 설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를 않았다. 나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지금쯤이면 설빔 음식 준비하느라 한창 바쁠 때인데, 지금은 우리 집을 포함한 동네가 조용하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러 큰 형님댁으로 형제들을 위시한 식솔들이 모이니 우리 집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었고 손으로 성의 표시만 나타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정부지침으로 인구 유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자율적인 집합금지를 권장하기 까지 이르러,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고 정부 시책에 호응하고자 명절차례의 규모를 축소하여 코로나 기간동안 명절답지 않은 명절을 보내기도 했다.
코로나가 완화되는 기미가 보여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는 관계로 금 년 명절에는 차례를 지내지 않을 것이라는 큰 집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욕심이 별로 없던 선친께서는 유독 자식 농사에서는 욕심이 많으셨던지 나의 형제들이 십 남매다, 바로 내 위로 누님이 한 분 계셨고 아들이 아홉 명으로서 9형제를 이뤘으니 여식 한 명 시집보내고 며느리 아홉 명을 맞으니 아무리 헐하게 계산을 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9형제가 결혼을 하여 짝을 맺었으니 우리 가족의 수가 열여덟 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한가정에 두 명씩의 자녀만 두어도 부모님의 직계로만 따져도 서른여섯 명이 되는데, 나이든 형님의 자녀(나의 조카) 들이 결혼을 하여 애를 낳고, 막내동생이 늦게 자녀를 낳다 보니 삼촌 간인지 오촌 간인지 한데 뭉쳐서 이리 몰리고 저리 뛰는 아이들을 보노라니 내가 다 헷갈리어 그중 한 녀석을 잡고 “너는 몇째 집의 식솔인가?”를 하소연 겸 물어보기까지 했다, 딸들이라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면 출가라도 하여 이러한 모임에 여백이라도 있으련만 아들이 아홉이니 차라리 군대 편제로 전환하여 생각도 해봤다
내일이 명절인데 6사단(여섯째)장과 예하 가족은 아직까지 도착을 못 했단다.
7사단장(일곱째)이 웃으며 이죽거리듯 말을 했다. “아버님이 자갈 논 마지기나마 조금 남겨놓고 돌아가셨더라면 형제들의 재산 싸움으로 차례는 고사하고 형제 중 한 두어 명은 이미 맞아 죽었고, 두어 명은 병원에 드러누워 있을 것”이라고 웃으며, 형제들의 우애를 미리 염려하신 아버님의 현명한 처사에 감복했다고 말을 했다.
아버님의 작고로 사령관직을 이어받은 1사단장(첫째)이 율(栗)을 치는 중에 말했다. “형제 중에 넷째(4사단장)와 다섯 째(5사단장)가 병마에 고통받는 것을 보고,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차례를 한 번쯤은 건너야 할 것 같다는 말을했었다. 요번 설 명절에 부득이도 차례를 거를 터이니 집에 남아있으라는 사령부 전통이 떨어진 것이다.
집에 남아 TV로 민족의 대 이동이라는 귀성 차랑 들을 지켜보며 우리 가족이 명절을 쇠러 움직였다가는 민족의 이동에 버금가는 가족의 대 이동이 될 뻔 했다며 삼십 여년 만에 참으로 호젓하고 편안하게 설 전야를 즐기고 있었다.
명절을 쇠기라도 한다면 지금쯤은 명절 음식 준비하랴 차례상 준비하랴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이리저리 몰려 뛰다 부딛쳐 넘어져 우는 녀석에 명절을 치루는 것인지 난리를 치는 것인지 정신이 없었을 터인데 명절을 쇠지 않다 보니 집이 조용한 것이 절간이 따로 없다 싶다.
머리 큰 아이 둘과 아내는 컴퓨터를 있는 대로 켜놓고(우리 집엔 노트북 포함 컴퓨터가 4대 다) 등을 보이며 컴퓨터 삼매경에 빠져 모니터를 주시하는 것이 미국의 나사 직원들이 달착륙선과 모선의 도킹 장면을 초조하게 주시하는 것 같아 숨 소리도 못 내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오니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가 앙가슴을 풀어헤치고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그 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와 눈을 맞추며 밤을 보내는데 힘들면 누워서도 눈을 맞췄고 옆으로 또는 모로 그래도 자세가 불편하면 엎드려서 새벽녘까지 눈을 맞췄다. 낮에 보기 시작하여 펼쳐 놓았던 책을 저녁에 마저 읽고 밤으로 끝을봤다. 하루 만에 책 한 권을 뗐다.
허리도 아프고 잠을 못 자서 눈도 침침하여 차갑기는 하지만 맑은 공기라도 씌려고 문을 열고 나서니 세상에나! 온 세상이 하얗다, 캄캄한 밤이 밤새 고요하더니만 이렇게 세상을 하얗게 덮으면서도 어찌 그렇게 고요할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도 넓은 바닥을 덮으면서도 높 낮음 없이 균일하면서 거룩하게 덮을 수가 있단 말인가.
넉가래로 눈을 치는데 상쾌한 마음에 노래가 절로 나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눈을 넉가래로 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아내가 나와서 소리쳤다.
”여봇! 정신 차려요. 오늘은 성탄이 아니고 설날이란 말예요, 설날!“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라는 노래는 잊었어욧“
”나이 한 살 더 먹었으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올해도 정신 멀쩡한 사람하고 지내기는 글렀구나“ 라는 말을 남기며 아내는 현관문을 닫고 들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 – 유태계 작가 에프라임 키숀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