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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태마산행기 스크랩 초보산꾼 여행 이야기 : 노고산(양주)의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초보산꾼 추천 0 조회 148 16.02.11 21: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초보산꾼 여행 이야기 : 노고산(양주)의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언제 : 병신년(16년) 시샘달 열흘 물날 설날(대체휴일)          

누구랑 : 광명 로얄산악회 산우님들

어딜 : 이수광묘역 ~ 복성군묘역 ~ 이상재선생묘역 ~ 추사필적 암각문 ~ 노고산 ~ 흥국사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895 에 있습니다

 

 

그간 서울 위주로 답사여행을 했는데 모처럼 서울시내를 벗어나 양주의 노고산으로 떠나본다

한북정맥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알게된 노고산에 역사적 사실들이 숨쉬고 있었고

도시화로 더이상 촬영이 어려워져 양평을 옮겼다는 전원일기의 흔적도 남아 있고

정맥꾼들이 아니면 잘 찾지 않던 산이었는데 삼각산의 최고의 조망터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곳

노고산으로 역사 답사 겸 가벼운 산행을 위하여 길을 떠나 본다

 

노고산 여행 지도 : 참고용

 

양주시 장흥면 남쪽의 삼하리는 삼패하리의 준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牌패는 각 지방의 마을 나눌 때 쓰는 기준이라고 한다

삼하리 길목에 있는 이수광 선생의 묘가 있고 금바위저수지 양?에는 복성군묘역과 이상재선생의 묘가 있으며

또 옛날에 존재 했다는 마을인 독재동(篤才洞) 계곡 일대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추정되는 암각문등이 산재해 있다

어떤 산세를 지니고 있기에 추사를 따르는 후배들이 독재동 계곡에서 풍류를 즐겼는지 풍수지리에 문외한이지만

노고산을 품고 있는 삼하리의 산세를 확인하기 위해 노고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불광역 1번과 2번출구 사이에 있는 정류장에서 360번 버스를 탄다고 나오는데...  정류장 번호까지 확인했는데도 버스가 없다

 

360번 버스 정류장을 가운데 버스전용차선으로 옮겼다고 한다... 연신내 방향으로 오다보면 버스전용차선이 보인다

 

서부시외버스정류장에서 360번 버스로 출발한다. 34번은 흥국사로 하산하여 올 때 이용

 

버스에서는 비석거리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수광의 묘 라고 정류장이 표시되어 있다. 도착

 

비석거리에서 내려 조금 올라오면 이수광 선생의 묘가 보인다

 

먼저  3기의 신도비(神道碑)가 보이는데 너무 글자를 작게 새겨놓아 알아볼 수가 없다. 오른쪽부터 이희검, 이수광, 이성구

 

'비각'이 있는 것을 보니 그래서  이곳 도로를 비석거리라고 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석재공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수광의 가족무덤이 보이는데 제일 앞쪽에 아들 이성구의 부인 파평 윤씨의 무덤이고 뒤가 안동 권씨와 함께 묻혀 있다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동자상이 1쌍씩 배치되어 있고

아들 이성구(李聖求, 1584~1644)는  1641년(인조19)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고 하는 분의 무덤인데...

이성구는 부인 안동 권씨와 함께 합장되고 첫부인 사별 후 재혼했는지 부인 파평 윤씨의 무덤은 그 아래 있다.

안동 권씨와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살다가 첫 부인 사별 뒤 맞은 파평 윤씨에게도 정경부인의 칭호를 붙인 것 같다

 

세번째에 이수광의 아버지인  이희검(李希儉, 1516~1579)의 무덤이 있고 제일 위에 이수광의 무덤이 있다

이수광의 무덤이 가장 위에 있고 그 아래 아버지 이희검(李希儉, 1516~1579)의 무덤이 있다. 할아버지 아래에 손자인 이성구의 무덤이 있다

원래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선조의 무덤이 위에 자리하는데 위 아래가 바뀌어 있다

왕족으로 태어난 이수광의 아버지인 이희검은 마흔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이수광을 얻었다고 한다

 

제일 마지막 위에 이수광과 부인 안동김씨의 합장묘임을 알리고 있는 묘비가 총탄?의 흔적을 안고 있다

이수광이 지은 <지붕유설>은 일종의 백과전서로 지리, 풍속과 관련해 제주도 관련 기록을 소개하고 있으며,

외국의 문물과 마체오 리치의 <천주실의>등의 내용을 소개하여 당시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던 저서이다.

마흔 여섯의 이수광은 서인(西人)으로 권력과 벼슬길에서 밀려 나와 낙산의 성곽 밖의 외갓집 소유의 허름한 별서 비우당(庇雨堂)에서 <지봉유설>을 썼다는데...

정순왕후의 자지동천 위의 낮은 낙산의 봉우리를 '지봉(芝峰)'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수광의 호가 지붕이다

서인의 쿠데타(1623)로 새 임금(인조)이 되자 다시 이수광은 요즘으로 치면 장관인 이조판서까지 지내게 된다

 

제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다시 도로로 나와 삼하리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화해단지와 일영허브랜드 이정표를 지나 제일슈퍼가 나오면 우틀하여 골목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선 앞에 있는 식당에서 와세다 회장님의 막걸리와 제육볶음으로 함께 점심을 해결하고

 

제일수퍼 골목으로 들어오면 전원일기 담벼락 그림을 지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설물이 나온다

 

예전 농촌드라마 <전원일기> 촬영장이었는데 이곳 삼화리의 급격한 도시화로 전원일기는 그 이후 양평으로...

 

길을 계속 이어가면 복성군묘역 이정석이 우측으로 보이고 계속 직진하면 11방향으로 금바위저수지 이정표를 따른다

 

계곡과 함께 따라가면

 

이정표를 지나고

 

금바위 저수지를 지나

 

금바위 저수지 끝부분에 월남 이상재 선생 신도비가 보인다.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만덕사 암자를 통해 오르고 좌측으로 가면 바로 올라갈 수 있다. 노고산에서 금바위 저수지로 하산하는 코스

 

우리는 우측 만덕사 암자로 해서 바로 좌측으로 올라가면 된다

 

월남 이상재 선생묘소를 아래에서본 모습 - 비문은 초보산꾼 산행기에서  확인

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묘역

영원한 청년으로 알려진 월남 이상재 선생의 본관은 한산, 본명은 계호(季皓), 호는 月南이며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개화파로 분류된다

일제 강점기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사회운동가, 인권 운동가, 청년운동가,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충남 서천출신으로 선영도 서천에 있었으나  57년 이승만의 명으로 삼하리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묘역에 이승만의 친필 비문과 시인 변영로 선생이 선생의 삶의 여정을 정리해 일중 김충헌 선생이 한글로 새겨놓은 묘비가 자리하고 있다

 

앞에는 YMCA를 상징하는 역삼각형 모양의 연못을 조성하여 놓았다고 한다. 제일 위에서 본 모습

 

위에서 본 금바위 저수지가 가뭄이 뭔지를 보여주고 있어 심각함은 느끼게 해 준다

 

중간에 샛길로 추사 암각문을 보려 갈 수 있지만 복성군묘를 찾기 위해 다시 내려와 복성군묘 이정석 뒷길로 들어가 본다

 

아마 이길도 전원일기의 촬영현장이었겠지?   삼거리가 나오고 복성군 500년 봉향기념비와 서산선조묘도가 나온다

 

우리는 능선 두갈레중 가운데(우측) 묘지군을 올라 본다

 

복성군福城君 묘역

조선시대에 복성군이 두분 계시는데 이 곳 福城君은 조선 제3대왕인 태종(이방원)의 서자인 경녕군의 아들이다.

또 한분은 사극에 자주 나오는 '작서의 변'으로 연루되어 사사되었다가 복권되신 11대 중종의 서자이자 장남으로 생모는 경빈박씨이다

복성군의 묘는 5기중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묘지중 맨 아래앞이 당진공배서씨묘(묘비),  두번째가 복성군배서씨묘(비문), 세번째가 복성군묘(묘비)가 차례로 있다

 

위에서 본 모습

 

다시 제일수퍼가 있는 큰길로 나와 우틀하면 삼하리 정류장이 보이고

삼하리(三下里)    양주시 장흥면의 남쪽에 위치

삼패하리의 준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牌패는 각 지방의 마을 나눌 때 쓰는 기준이라고 한다

삼하리 길목에 있는 이수광 선생의 묘가 있고 금바위저수지 양?에는 복성군묘역과 이상재선생의 묘가 있고

또 옛날에 존재 했다는 마을인 독재동(篤才洞) 계곡 일대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추정되는 암각문등이 산재해 있다

 

특산물인 ‘연(蓮)’을 주제로 해서 천연의 자연이 숨 쉬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은 천생연분(天生蓮盆)마을 이정표도 보인다

 

여기서 우틀한다

 

일영리 사람들이 일출을 볼 수 있는 봉우리가 있어 붙여진 일영로 골목길을 이어간다

 

삼거리가 나오면 좌측으로

 

등산안내도를 지나고 작은삼거리를 직진하여 올라오면 이정표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고인돌?

 

제단석 - 회장님이 시산제로 욕심을...

 

화장실을 지나 숲길을 계속 오르면 삼거리를 만나 암각문 이정표 방향으로

 

독제동 암각문이 먼저 반긴다 : 독재동(篤才洞)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노고산독재동추사필적 암각문 안내문이 나오면서 주위에 암각문이 널려 있다

 

안내문 바로 옆에 커다란 바위에 어지럽게 글자가 쓰여져 있다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은혜?  여러 선비들의 낙서와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미수 선생의 제자인 '이시선 근서'라는 글도 보이고...  여러 선비들이 쓴 것 같다

어찌됐든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너무 많아 아쉬위움이 남는다

 

맞은편 계곡에 추사의 글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몽재(夢齋)..  

꿈꾸는 집, 꿈꾸는 서재 쯤으로 해석이 가능한데 바위 왼쪽에 추(秋)字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추사의 글씨로 추정된다

몽제 각자 밑에는 간지가 쓰여 있으나 시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秋史는 김정희가 젊은 시절에 쓰던 호로 과연 젊은시절 김정희는 어떤 집을 꿈꾸었을까?

 

회장님이 열심히 보물찾기 해서 가져온 '秋史'글씨중 잃어버린 '史'로 추정된다고 가져 오셨다

 

계곡 건너는 길에 있는  '미수선생장구지소 “眉?先生杖?之所”    '미수 허목의 지팡이와 신발이 머물던 곳'

글씨를 세긴 분은 왕족인 전주 이씨로 평생을 벼슬도 지내기 않고 산 이시선(松月齋 李時善, 1625~1715)이라고 한다.

독재동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금도 독재계곡으로 불리고 있다

'미수 허목의 지팡이와 신발이 머물던 곳'이니 이 곳에 미수 허목이 방문했고 그 내용을 바위에 새긴 것이다

미수 허목(1595~1682)이 남긴 기록에 실제로 허목이 64세이던 무술년(효종9년, 1658) 여름, 고봉(高峰)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 때,

서산(西山)의 주인과 독재동의 계곡물에서 놀았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자료 : http://blog.daum.net/gbbae56/11808267

 

가탁천(可濯泉)   예서체로 새겨진 바위.

씻을 수 있는 샘이라는 뜻으로 어지러운 세상에서 손발을 씻으며 더러움을 씻어낼 만한 샘이라는 뜻으로

어부사에도 나오는 글로 어부가 굴원에게 불러준 노래라고 한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

자료 : http://blog.daum.net/gbbae56/11808267

 

‘충서근(忠恕勤)’  부지런히 충과 서를 닦자는 뜻          勤 : 부지런하다 용서하다, 어질다

 

‘감사(感思), ’산수(山水)‘,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면...

 

유마폭(流磨瀑)(해서채)  계곡을 흐르는 물은 바위를 다듬고 폭포를 이룬다.  오랫동안 물줄기가 떨어진 탓에 돌 표면이 갈아졌다는 뜻

 

'만의와(萬懿窩)'   懿 : 아름답다. 기리다, 깊다 窩 우뭇한 곳. 숨기다,  해석은 모르겠슴

 

이렇게 해서 준비한 자료암각문은 다 찾고 노고산을 향해서 독재계곡을 올라가는데 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사는 마을인지 알 수 있다

 

같은 노고산 줄기인데 아까 보았던 금바위 저수지는 물 한모금 구경 못했는데 여기는 아직도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으니...

 

산성터? 어디에도 노고산에는 산성이 있다는 기록이 없으니... 암자터 였을 것이다

 

거의 정상까지도 물이 얼음으로 남아 있다. 역시 선조들의 예지는 우리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슴이니... 篤才洞 ...몇번이고 되뇌인다

 

산이 낮다고 희미한 길따라 올랐다 고생 또 고생, 힘들게 정상을 향하여...

 

노고산 정상 헬기장

 

헬기장에서 본 삼각산과 도봉산 줄기들...  오늘은 시계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바로 앞에 있는 듯...

 

 

 

금바위 저수지 이정표따라 하산하다 다시 전망이 좋은 헬기장에서 본 삼각산.  엊그제와 딴 세상이다.

 

더 내려오면 우리가 가야할 흥국사있는 계곡과 좌측으로 원효봉과 의상봉 조금

 

금바위저수지 갈림길이 나오면 이정목 뒤에 바로 흥국사 푯말이 붙어 있다. 지나치기 쉬우니 정신 바짝차려서 봐야 한다

 

 

내려오다 삼각점도 지나고

 

흥국사 일주문이 나온다

흥국사(興國寺)

1,400년 前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해인 661년에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라 하고 절 이름은 興聖庵이라 했다가

조선조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소를 갈 때마다 들려 절 이름을 흥국사로 바꾸고 영조가 직접 약사전 편액 글씨를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이후 흥국사는 왕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기도 도량이 되었다.

 

일주문 뒤에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가 있다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

일주문 바로 뒤에 세워진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記)에 흥국사 창건연대가 새겨져 있다.

산이름을 한미(漢美)로 바꾼 것은 노고(老姑)의 뜻을 옮긴 것으로 별다른 뜻은 없다고 전한다.

 

뒷면에 보면 시주등의 방법으로 참여한 분들이 적혀 있다

만일회는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준말로 염불수행하는 불교 행사인데 오랜 기간 대중이 모여서 염불수행을 하려면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스님과 상궁들을 중심으로 신도들이 돈을 모아서 만일회를 결성하면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비문으로 남긴 것이다 

북한산 둘레길에 '내시묘역길'이 있고 장흥 삼상리 일대에 상궁들과 내시마을이 있었다는 것은 은퇴 후 이곳에서 많이 살았음을 의미한다

궁내의 상궁들이 은퇴하기전에 절에 돈을 시주하면서 은회후에 절에 몸을 의탁했기에 서울에 비구니 절이 많은 이유와 상통한 것 같다 

 

경내 입구에는 450년된 老巨樹인 느티나무도 만날 수 있다

 

영조가 직접 써서 하사 했다는 약사전 편액

 

사곡마을을 지나고 창릉천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원효봉과 의상봉을 담아 본다

 

흥국사 정류장에서 34번 버스로 연신내로 해서 광명사거리역까지

 

이제 깔끔하게 인테리어를 마친 무지게 님의 정육식당에서 뒤풀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 연휴에 쉬지도 못하시고

이 초보산꾼과 함께 답사에 함꼐 해 주신

와세다 회장님과 행운아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 정성껏 고기 굽는 봉사를 해 주신 무지게님 감솨...

 

생각보다 시계가 좋아 우리에게 대자연의 맛을 보여준 삼각산을 품을 수 있어 행복했던 마무리

독재계곡을 오르면서 전국이 다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데

독재계곡만은 신천지 같다는 생각으로 올랐던 노고산 삼하리 마을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이런 곳을 찾아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감동을 주고 있는지...

자료에서만 봤던 독재계곡을 만나고서야 왜 답사가 즐거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옛선조들의 지명 하나에도 빛나는 예지에 또 다시 놀라고 또 놀란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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