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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양박씨 규정공 후 숙민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네페르티티
다음의 글은 박찬(숙민공13세손)이 쓴 <밀양박씨이야기-숙민공파2천년>에 실린 내용이다.
승종 선조님은 밀양박씨 가운데 유일하게 영의정을 지내신 분이시다. 요즘 최고위관료들처럼 잠깐 빛났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 조선왕조 최장수 영의정 가운데 한 분이란 사실을 앞서 밝힌 바 있다. 또한 조선왕조 500년동안 가장 드라마틱했던 시기인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두드러지게 활약했던 인물이라 승종 선조님의 전후좌우에 얽힌 이야깃거리 또한 드라마틱하다.
선조님은 1585년(선조18)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급제하셨다.
이듬해 9월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에서 장원급제하시고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봉교(奉校. 왕의 칙서를 기록하는 직위), 지제교(知製敎. 왕이 내리는 교서 초안을 작성하는 실무자로 나라의 기밀을 주로 다루는 위치)를 지내셨다. 1592년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여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어 선무원종일등(宣武原從一等)과 호성원종일등(扈聖原從一等)의 공훈으로 선조(宣祖)의 어필(御筆)과 묵난(墨蘭) 묵죽화(墨竹) 그림을 하사받으셨다. 1593년 지평(持平), 병조정랑(兵曹正郞), 장령(掌令), 헌납(獻納), 집의(執義), 동부승지, 1597년 예조참의, 우부승지(右副承旨), 1599년 대사간(大司諫),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내시고,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오셨다. 1601년 호조참의, 귀성부사(龜城府使), 1603년 다시 대사간이 되셨다. 1604년 부제학(副提學), 대사헌(大司憲),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도승지(都承旨)가 되시고, 1607년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세자시강원우부빈객(世子侍講院右副賓客), 1609년(광해1)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가 되셨다.
1611년 선조님의 손녀(孫女)가 광해군의 세자世子 이질李侄(1598~1623)의 빈嬪이 되어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에 봉군되셨다. 세자시강원좌부빈객(世子侍講院左副賓客)이 되시고, 1614년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를 지내셨다. 1617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금부 수장. 종1품)가 되셨다.
인목대비는 서궁西宮(지금의 덕수궁) 생활 5년째 되던 해(1918년) 1월에 이르러 폐위되어 유폐생활에 들어갔다. 이이첨이 총대를 메고 공갈협박식 여론몰이와 폐모정청廢母庭請을 벌인 결과였다. 1613년 5월 대북파 이위경이 "인목대비는 저주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되었으니 국모로서 대우하기 어렵다"는 상소를 올린 뒤로 5년에 걸친 조정 안팎의 논의에 종지부를 찍은 셈.
인목대비(仁穆王后 金氏 1584~1632.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84년 11월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둘째딸로 출생하여 선조 25년(1602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는 영창대군의 어머니요, 선조의 두 번째 부인이다.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19세의 나이로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미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뒤였다. 인목왕후는 광해군보다 9살 아래였다.
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북이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살해하고 인목대비의 거처를 서궁西宮으로 옮겨버렸다.
▲ 서궁西宮 선조임금의 추모처이자 인목대비가 유폐됐던 곳이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것이 특징. 인조반정 후 광해군은 이곳에 꿇어앉혀져 인목대비가 내린 폐위 교서를 들었다. 원래는 임진왜란 직후의 선조가 침전으로 쓰다 이곳에서 승하했다.
승종 선조님이 서궁에 유페된 인목대비를 보호하고자 애쓴 대목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사서 <연려실기술 제20권>(이긍익 1736~1806. 조선 후기의 실학자)에 나와 있다.
1617년(광해9)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이 교체되어 돌아와서 이이첨·한찬남 등과 상의하기를 “대비가 만약 살아 있게 되면 우리들은 마침내 땅에 묻히지도 못할 것이다” 하니, 정조·윤인·이위경이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 먼저 일을 단행하는 것만 같지 못하오”라고 하였다. 12월 그믐날에 백대형과 이위경은 ‘역귀를 쫓는 굿을 한다’ 하고서, 도적의 무리를 많이 거느리고 징과 북을 치면서 떠들썩하게 경운궁으로 난입했다.
그런데, 이날 초저녁에 대비의 꿈에 선조가 슬픈 기색으로 나타나서, “도적의 무리가 지금 들어오고 있으니 피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하였다. 대비가 꿈을 깨고 나서 슬피 울기 시작하자, 궁인이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대비는 궁인에게 꿈 얘기를 해주었다. “선왕의 혼령이 먼저 타이르시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대신 대비의 침전에 누워서 기다리겠습니다” 하여 대비가 잠시 후원으로 피했는데, 도적이 궁에 들어가 대비로 착각하고 죽였다. 곧이어 백대형이 들어와 궁인의 얼굴에 햇불을 들이댔다.
"헐! 대비가 아니잖아!"
이때 부하로부터 사변을 들은 판의금부사 박승종이 가동家僮(집안 노복)들을 거느리고 서궁에 이르러 고함을 치면서 도적을 쫓았다. 그날 밤 백대형은 끝내 대비를 찾지 못하였다. 이날 인목대비가 살해되지 아니한 것은 실상 박승종의 힘이었다.
인목대비의 글씨 인목대비가 폐모의 위기에 몰려 잠시 칠장사七長寺로 피해 있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1.1m, 폭 50cm. 경기도지정 문화재 제34호,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이 족자는 인목대비가 억울하게 죽은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생각하면서 칠언시를 직접 써서 김광명金光明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늙은 소는 힘을 쓴 지 이미 여러 해
목 찢기고 가죽 뚫려 다만 사랑스런 눈만 남았구나
쟁기질 써레질 이미 끝나고 봄비도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 심하게 또 채찍질을 하는가
대북파들이 정권안정과 후환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저지른 난행이 그 정도였다. 그런데, 이 만행은 광해군의 묵인하에 행해졌다. 그러고보면 이런 반인륜적 살륙을 제지시킨 승종 선조님은 광심光心(광해군의 의중)에 정면도전한 셈이 된다. 더구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고, 북인은 다시 소북, 중북, 대북으로 소파를 형성, 운신의 폭이 자꾸 좁아져가는 시점에서. 그러나 이 사건에서 선조님의 마음이 엿보인다. 정치적 이해득실을 초월하여 오로지 선왕인 선조와 인목대비를 향한 충성과 의리, 그리고 인륜을 우선시하셨던 '착하고 단순한' 마음 말이다. '요사한 여우와 독한 벌레가 한데 뭉친 듯한' 마음을 쓰는 여타 정치깡패들과 음흉한 모리배들의 난행을 목숨 걸고 이렇게 막아내고나서 당신의 저택에 <읍백당揖白堂>이란 당호까지 걸어 인목대비를 보호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그 뒤 공께서는 우찬성右贊成과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1618년 좌의정 겸 도체찰사(조선시대에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의 군직軍職)에 오르셨다.
이 시절 승종 선조님은 외교의 귀재라 일컬었다.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등거리외교等距離外交를 주창하셨다. 이는 중립을 지향하는 외교를 말하는데, 그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자.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서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명나라를 돕자니 후금의 힘이 너무 강해 어떻게 보복을 당할지 모르겠고, 외면하자니 신의를 저버리는 꼴이었다. 이런 진퇴양란의 어려움 속에서 광해군은 도체찰사인 선조님의 주청奏請에 따라 우선 1만 3천명의 군사를 명나라에 보내 연합하게 한 다음 일부러 싸움에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한 것이다.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은 광해군이 은밀하게 당부한 관형향배(觀形向背, 형세를 보아 행동을 결정하는 것)의 전술을 충실하게 구사했다. 그 결과 많은 군사를 살렸으며, 중국 대륙의 명明-청淸 교체기에 전란의 불꽃이 한반도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냈다.
1619년(광해11) 3월 13일 영의정에 오르셨다. 사소辭疏를 자그만치 10여차례나 올려 고사의 뜻을 밝히셨으나 가납嘉納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께서는 영의정(재위 1619. 3. 13~1623. 3. 14)으로 계시면서, 광해군의 비리적 행동,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외줄타기 외교, 갈수록 꼬여만 가는 정국, 패거리정치인들의 권모술수와 알력 등으로 인해 남 몰래 흐느껴 우시기도 했으며, 늘 나라일을 생각하며 폭음을 하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술을 즐겨함이 아니고 속히 죽기를 원하여 그러는 것이다. 세상꼴이 이 지경이라니!" 라고 하시면서. 한음 이덕형(1561~1613. 영의정)의 증언에 의하면, 공께서는 항상 차고 다니는 가죽 주머니에 오리알만큼 큰 비상砒霜(arsenic poison)을 넣어두고 "이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어찌 이 물건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하시며 흐느끼셨다고 전한다.
공께서 이즈음 동작(현 서울시 동작구) 남쪽 강 기슭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였는데, 정사를 보시다 가끔 이곳으로 물러나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시며, "간신들을 물리치고 상감을 광구匡求(잘못된 것을 바로잡음)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음으로써 대속하리라"는 결의를 다지곤 하셨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공의 존호 '퇴우'는 '물러나 나라를 걱정하다'는 의미.
광해군의 집권 중기와 말기때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세력가가 세 사람 있었다. 광창부원군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예조판서 겸 대제학), 밀창부원군 박승종(세자빈의 조부), 문창부원군 유희분(柳希奮 1564~1623, 광해군 처남). 왕실의 인척인 이 세 부원군을 세상에서는 삼창三昌이라고 불렀다.
중북中北(북인 내부에서도 유희분·유몽인(柳夢寅)·기자헌(奇自憲)·남이공·박승종(朴承宗) 등을 중심으로 폐모론의 반대파. 여기에는 기존의 소북계(영창대군지지파) 인물과 함께 정온(鄭蘊)·이경전(李慶全)·문경호(文景浩) 등 정인홍의 문인들도 일부 가담했다)의 거두이신 승종 선조님은 유희분과는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셨으되 대북大北(광해군 지지파)의 이이첨과는 비록 사돈간이나 빙탄간氷炭間(얼음과 숯)의 정치적 라이벌로 자주 충돌하셨다. 1917년 이이첨이 꾸민 폐모정청에 불참하심으로써 폐위 반대 의사표시를 분명히하셨다. 그러자, 이이첨의 주구인 박시준朴時俊 등이 소를 올려 공의 죄를 성토하자고 했다.
“박승종은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며 총애받는 신하로서 여러 번 청하여도 오지 않았으며, 이경전李慶全은 의정부에 와서는 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도망갔으니, 임금을 저버린 죄를 성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정치적 위기를 감수하고서 인목대비를 구해내셨다는 얘기를 이미 앞에서 짚었다. 이미 짚었는데 왜냐고? 무식한 자들이 가끔씩 볼거져나와 승종 선조님까지 싸잡아 삼창 운운하며 오물오물 씹기에 뭘 제대로 알고나 주둥이를 놀리라고 이렇게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복권 안 된 사실을 대체 알기나 하는가!
SBS 대하사극'왕의 여자'(2003. 10. 6~2004. 3. 2)에서 박승종
하늘이 왕을 버리셨구나!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 요소인 동복형인 임해군과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서궁에 유폐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士林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세력들이 그러한 사류士類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서서히 정변을 계획했다. 1620년부터 무신 이서·신경진 등이 먼저 계획을 세운 뒤 김류, 이귀, 최명길 등 문신들도 동조자로 끌어들였다. 특히 이귀는 반정의 모주謀主로서 거사를 약속한 문신들과 무신 신경진, 구굉 등을 연결시키고 역할분담과 지침을 내리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반정을 모의한 서인 일파는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 이종李倧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1622년 말에 이르러선 이귀와 김자점을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불거져 나왔다. 그러나 왕은 그런 주장을 곧이듣지 않았다.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의 견제세력이 필요하였기에 귀향살이하거나 숨죽이며 살던 이들 서인들을 하나둘 불러들였던 것. 왕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귀를 보라구. 과인 몸보신하라고 제 늙음 따윈 잊고서 몸소 호랑이를 잡아 진상하는 등 충성을 보이니 나 또한 그를 총애할 수밖에... 허니 헐뜯는 게 당연하지... 그러나 왕의 판단은 틀렸다! 일찌기 파워 게임에서 정인홍한테 밀려났던 이귀는 호랑이 사냥을 구실로 제 병력을 한양권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 따라서 왕은 자기를 겨눈 이귀의 칼 끝에 묻은 꿀을 탐한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부하는 자를 멀리해야 신상에 좋은 법.
1623년 3월 11일 낮.
왕은 어수당魚水堂(창덕궁 후원에 있던 정자)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김자점이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하여 김상궁에 게 보내 광해군이 궁인들과 더불어 태평하게 놀고 즐기도록 한 것이다. 이이반李而盤과 김신국金藎國의 고변告變을 접한 선조님은 곧바로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라, 명하시고는 즉시 연회장으로 달려가셨다. 김류, 이귀 등이 오늘밤 대궐을 침범할 것인데 이흥립도 내응하기로 되어 있다는 첩보를 왕에게 보고하면서 어서 이흥립부터 죽이라고 간하셨다. 이흥립은 요즘 청와대 경호실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김개시(介屎 : 개똥)라는 상궁이 나서서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반정을 주도한 이귀와 김자점 등이 수년 전 김상궁 개똥이와 연줄을 맺고 그녀를 뇌물로 푹 삶아놓았던 것.
개똥이는 왕세자 시절 광해군의 눈에 들어 줄곧 총애를 받았던 여인으로 광해군의 반인륜적 만행의 중심에 있던 요부였다. <광해군일기>에 보면 그녀에게는 비방秘方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광해군이 '꼼짝못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미모는 아니나 민첩하고 꾀가 많아 광해군의 총애를 업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정치판을 더럽혔다. 이름 그대로 개똥칠을 한 것이다. 윤선도(1587~1671) 등이 여러번 상소하여 논핵했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장녹수, 정난정, 나합부인, 어우동과 함께 조선시대 5대 요녀로 회자되고 있다.
"제가 어찌 영상대감을 배반하리요"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상황이 되자, 이흥립은 공을 찾아가 변명을 했다. 그러나 공께서는 끝까지 그의 변명을 듣지 아니 하고 역모관련자들을 체포하라는 어명이 어서... 하시며 노심초사하셨다. 그러자 이흥립은 경기감사(경기감사는 조선시대 외관(外官)의 하나로서 예하의 부윤(府尹), 목사(牧使),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도호부사(都護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 지방관을 감독하는 한편 감영(監營)에는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이 있고 도사(都事), 판관(判官), 막비(幕費) 등의 기관을 두어서 일반 행정과 군정, 사법, 경찰 등의 정사를 보았다. 경기감영은 현재 서대문로터리 적십자병원 자리에 있었다) 자흥한테 쪼르르 달려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이보게, 사위! 영상 대감께서 내가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시는구먼. 아, 글쎄 억울한 일도 분수가 있지. 자네가 좀 해명해 주시게.”하면서 눈물을 쏟으며 통곡을 했다. 자흥은 아버지께 간청하여 그를 놓아주었다. 이흥립은 자흥의 전처 광주이씨의 아버지였다. 선조님의 천거로 훈련대장에 오른 인물로 이렇다할 공은 세우지 못하고 늘상 사돈 그늘에 눌려 지낸 신세였다. 사위 장신張紳의 설득으로 이미 반정군에 포섭된 그가 거짓 맹세와 눈물 흘리며 통곡까지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다니 실로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께서는 애가 닳아 두 세번 더 간곡하게 왕에게 간했다. 그제서야 왕은 마지못해 금부당상, 포도대장을 부르고 도승지와 병조판서를 입직하도록 명하였다.
광해군과 김개시SBS 대하사극'왕의 여자'(2003. 10. 6~2004. 3. 2)에서 광해군(지성 분)과 김개시(박선영 분)
11일 밤.
홍제원弘濟院(중국 사신들이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머물며 예복으로 갈아입던 공관. 현재 홍제동에 있다)에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고있었다. 김류金류(53세), 이귀李貴(67세), 최명길崔鳴吉(38세), 김자점金自點(46세), 심기원沈器遠(37세)을 비롯하여 600~700명의 군병들이었다. 친병을 거느린 능양군(29세)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거기서 김류를 거의대장으로 삼고 고양 연서역延曙驛에서 다시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병력 700명과 합류했다. 이이반의 고변告變에 의해 쿠데타 계획이 탄로나 계획보다 몇 시간 앞당겨 출병한 것이다.
쿠데타군은 머리에 ‘의’(義)자를 쓴 띠를 두르고 굳은 결심을 다짐하며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여기서 유래한 지명이 세검정洗劍亭이다). 이들은 12일 새벽 3~5시에 창의문(자하문)을 통과한 다음 여세를 몰아 어느덧 돈화문敦化門(창덕궁 정문)에 이르렀다.
돈화문 수비대장은 어영총 천총千摠(정3품) 이확(李廓, 34세)이란 자였다. 이때 그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그가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신도비에 쓴 글을 보자.
朴承宗素信公(박승종소신공)
박승종(朴承宗)은 평소에 공을 신임하였는데,
急招公(급초공)
급히 공을 불러
謂曰(위왈)
이르기를,
有告若與大將李興立叛者(유고약여대장이흥립반자)
“그대와 대장(大將) 이흥립(李興立)이 모반한다고 고하는 사람이 있소.
吾不若疑(오불약의)
나는 그대를 의심하지는 않으니,
急聚軍敦化門外(급취군돈화문외)
급히 군사를 돈화문(敦化門) 밖에 집결시켜
以備非常(이비비상)
비상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오.”라고 했다.
公遂令軍中曰(공수령군중왈)
공은 드디어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리기를,
今日我特將專號令(금일아특장전호령)
“오늘은 내가 특별히 호령(號令)을 하노니,
敢違者斬(감위자참)
감히 어기는 자는 목을 베리라.”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배신때리고야 말았다.
夜義旗指門(야의기지문)
밤중에 의기(義旗)가 궁문(宮門)을 향해 오자,
軍中擾擾(군중요요)
군사들이 웅성거리며
告有外兵(고유외병)
외병(外兵)이 있다고 고했다.
公乘馬東向立曰(공승마동향립왈)
그러자 공은 말을 타고 동쪽을 향해 서며
視我馬首(시아마수)
"내 말 머리를 보아라."고 명령했다.
有行且字公者(유행차자공자)
궁문을 향해 가며 공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으나
公陽爲不聞(공양위불문)
공은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呼公者(호공자)
그때 공을 부른 사람은
東城君也(동성군야)(신경인 1590~1643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형 경유와 함께 거사에 참여했다.)
동성군이었다.
事定(사정)
반정이 이루어지고 나자
諸功臣疑公(제공신의공)
여러 반정 공신들은 공을 의심하여
欲幷誅之(욕병주지)
적신들과 아울러 처형하려 했다.
延平君李貴力爭曰(연평군리귀력쟁왈)
그러자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힘써 쟁변하기를,
使廓不讓陣(사확불양진)
“이확(李廓)이 군진(軍陣)을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誰敢入者(수감입자)
누가 감히 궁문으로 들어왔겠는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함부러 거두는 게 아녀' 라는 말이 생겼났던가.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이라더니 아니 글쎄, 저명한 <열하일기>의 저자 반남인潘南人 박지원이 이런 자를 추모하여 신도비를 써주다니!... 또 이런 내용이 뭐가 자랑스럽다고 돌에 새겨놓았다가 몇 백년 지난 오늘에 이르러 이 순천초부順天樵夫한테까지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끔 내버려둔 이확의 후손들도 딱하긴 마찬가지. 그러나 이확이 승종 선조님을 배신한 일을 두고두고 괴로워했다니 그래도 양심은 있는 사람이다.
然承宗以首相誅(연승종이수상주)
박승종은 영의정으로서 죽지 않을 수 없었으나
而公嘗爲其所厚(이공상위기소후)
공은 그의 후대를 받았으면서도
則無以自晰(즉무이자석)
스스로 해명할 길도 없어서
常鬱鬱不得意(상울울부득의)
늘 울적한 마음을 펴지 못했다.
3월12일 이른 아침.
돈화문을 무사통과한 쿠데타군은 기세등등하게 북을 울리며 창덕궁에 이르렀다. 이때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쫘~악 포진한 군사를 야물딱지게 단속하여 각자위치에서 꼼짝못하게 해놓고는 기실, 외간남자한테 속곳을 열어준 화냥년처럼 쿠데타군과 그 물건들(무기들)을 받아들였겠다?......
왕의 행방을 추적하던 승종 선조님께서는 왕이 그 빌어먹을 개똥이와 함께 침소寢所에 있다는 걸 아시고는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하셨다.
“아, 하늘이 왕을 버리셨구나!”
자흥이 달려와 왕의 안위를 여쭙자,
“상감은 지금 계집의 속살에 취해 있다.”
하시고 곧 아들을 재촉하시어 말을 달려 빨리 양주(현재 남양주)로 가라, 이르셨다.
전날 고변에 의해 누설된 역모를 의론하느라 밤샘을 하고 있던 조정대신들과 궁중 대소 관속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음은 <궁중비사>(http://cafe.daum.net/ybwenxue)에 적힌 내용이다.
이때 왕은 작취미성昨醉未醒(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아니함)하여 자리에 누워 있었다.
궁 밖 고함 소리에 놀난 개똥이는 밖에 나갔다가 황급히 달려 들어왔다.
"상감마마 큰일났습니다. 반군이 벌써 금호문에 쳐들어왔다 하옵니다."
"반군이?"
왕은 취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감 군졸들은 뭘 한다는 건가?"
"대장 이흥립이 도망을 했답니다."
"뭐?"
왕은 깜짝 놀랐다.
개똥이는 보석 등 폐물을 챙겨 상자에 넣은 다음 궁인더러 자기의 친가에 전하라고 이르고는 서둘러 나인의 옷으로 갈아 입기 시작했다.
"종묘에 불이 붙었나 보아라."
개옥改玉(역성혁명)이라면 종묘가 불타고 있을 터!... 왕은 생사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반군들의 정체를 알고자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개똥이는 죽느냐 사는냐 하는 이 마당에 까짓 종묘가 다 뭐람, 하는 투로 냉랭하게 코웃음치면서 잽다 문으로 내달아 36계.
다행히 종묘는 건재했으나 쿠데타군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거사의 성공을 알리느라 환성을 울리며 신나게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다녔다.
"상감마마..."
내시의 대부분이 도망하고 무감武監 등속이 한 명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때 영의정이 나타났다.
"나의 대에 와서 나라가 망했구료. 어이 하면 좋겠소?"
"모든 것이 천운天運(하늘이 정한 운명)입니다. 빨리 옥체를 피하소서."
"경은 어이 할려오?"
"늙은 신이야 지금 당장 죽사온들 여한이 있사오리까."
박승종은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는듯 서 있었다.
광해군은 다급하게 창덕궁의 담을 넘었다. 내시의 등에 업힌 채 궁인 한 사람만을 대동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쿠데타군의 함성 소리를 뒤로하고 안국방安國坊의 집으로 숨어들었으나 곧 체포되었다.
광해군은 조선조 왕들 중에서 몇 개의 최기록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최다 공신 배출, 최다 존호 보유, 강연의 최저 개최, 친국親鞫(임금이 중죄인을 몸소 신문하던 일)의 최다 시행(210회) 등. 이들 자료들을 추론해보면 광해군이 자신의 안전에 대해 병적 집착성을 보여준 사례들... 그러나 개똥이 같은 요부 앞에선 이런 기록들도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단 하룻밤 사이에 왕위와 궁궐을 내주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개똥밭에 미끄러져 신세 망친 꼴.
전날 오후 이흥립을 어서 죽여야 한다고 간했던 선조님의 말을 듣고 신속하게 대응했더라면!......
이 대목을 읽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들 말할 것이다.
“계집은 요물이랑께!”
쿠데타군 수뇌부는 순찰군사가 주워 온 어보御寶 를 가지고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찾아가 큰절 올리며 반정의 성공을 알렸다. 대비는 속으론 무지무지 달가워하면서도 얼차려를 준답시고 차렷! 열~쭝 쉬어! 하고 한참 군기를 잡더니 드디어 왕을 폐하고 능양군 이종을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종은 대비로부터 어보를 넘겨받고는 흐~미, 정녕 꿈은 아니렷다? 꿈이 아니라면 체통을 지켜야지. 옛말에도 있잖아? 옥을 바꿔 차면 걸음걸이도 바꿔야 한다는 말....쿠데타가 성공한 다음날부터 권위에 바짝 칼날을 세운 인조는 옛 왕을 군君으로, 동궁(세자世子)을 서인으로 강등하여 유배를 보냈다. 곧이어 피비린내나는 숙청작업이 대대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괜히 목숨 걸고 혁명했겠어? 이제 우리도 한자리씩 꿰차야하지 않겠냐구~ 야! 박정길, 이위경, 한찬남, 네들부터 좀 죽어줘야겠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백성들을 길들이려는 속셈에서 다 모여, 하고선 이들 대북파 핵심인물들을 저자거리로 끌고나가 싹둑싹둑 목을 잘랐다.
이이첨은?
이천까지 도주했다가 잡혀 와 아들 셋과 함께 목이 잘렸는데, 이이첨은 원수진 사람들이 많아 도성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난도질하여 시체가 온전한 구석이 없었다. 일찌기 명나라 사신이 이이첨의 관상을 보고는, '가을 바람에 우는 여자의 상'이라 했다던가.
광해군의 처남으로서 그리 잘 나가던 유희분도 동생 희발과 함께 목이 잘렸다.
산림山林(조선시대 한 학파나 지역 사대부의 지도자 또는 중추적 인물을 지칭하는 말)으로서 선조 · 광해군 대에 북인 · 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던 정인홍鄭仁弘(향년 88세)도 합천에서 잡혀 올라와 뎅겅 목이 잘렸다.
그 요물은 어찌 되었냐고?
개똥이는 이귀의 딸을 자기의 수양딸로 삼은데다 반정의 고변이 있을 때마다 왕을 주물러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준 일등공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왕을 버리고 도망쳐나와 염불한답시고 절간에 숨었다가 잡혀 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중심인물이었으므로.
마지막으로 평안감사 박엽과 의주부윤 정준의 목을 베었다. 광해군의 대외정책을 일선에서 실천했던 이들의 처형은 명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한 조처였다.
피에 굶주린 두억시니(야차夜叉)나 다름없는 자들은 이런 식으로 40명의 목을 베고, 200여 명을 유배했다. 중도부처中途付處(벼슬아치에게 곳을 지정하여 머물게 하던 형벌) 형을 받은 80명 명단에 공의 둘째아드님 자응自凝(영광군수)과 세째아드님 자전自全(부여현감. 반정 두달 뒤 폐세자의 탈출사건 직후 중도부처됨)도 포함돼 있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이홍립은 일등공신의 훈을 받고 광주군廣州君에 봉군되고 수원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너무 짧았다. 일년 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투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자결하였다. 한번 배신을 때리면 또 때린다니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김자점은 일등공신의 녹훈을 받고 23년 뒤 용케 영의정까지 올라갔다가 곧 파직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그는 1649년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고발하였고, 1651년 역모죄로 손자와 함께 목이 잘렸다.
반정대장 김류는 등공신의 녹훈과 함께 승평부원군에 봉군되고 25년간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때 그의 모친, 처, 손부, 증손부 모두가 강화도 앞바다에 투신자살하고 만다.
숙민공의 최후
대궐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자흥은 양주로 달려갔다. 양주목사 박안례가 집안 어른(승종 선조님의 5촌 당숙)이라 거병하기가 수월하겠다는 판단에서 그리 하였으리라. 자흥은 거기서 수원방어사(방어사防禦使 : 조선 때 지방 관직으로 각 도(道 )의 요지를 방어하는 병권(兵權)을 가진 종 2품의 벼슬) 조유도趙有道와 파주방어사 윤정尹珽에게 전령을 보내 당장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게 하였다(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조정은 신속하게 신경유申景裕를 보내 이 두 사람의 거병을 막았다).
다음 내용은 강노(1809~1887 판중추부사)가 쓴 숙민공 신도비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왕을 북문으로 탈출시킨 뒤 수구문水口門(서울특별시 중구 광희2동에 있다)을 빠져나오신 공께서는 가복家僕(집에서 부리던 사내종)을 대동하시고 노원蘆原(현재 서울시 노원구. 과거엔 양주 땅이었다) 한 농가에 이르러 은신하시다가 마침 군병을 이끌고 입성하려던 자흥과 박안례을 만났다.
"난은 어찌 되었습니까?"
"선왕(선조)의 손자가 대비를 만나 벌써 대통을 잇었으니 우리 부자가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 한번 죽는 것 외엔 따로 방책이 없다.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상감의 신하된 자로서 모든 책임을 떠안고 너를 만나 같은 곳에서 함께 죽기를 원했었다."
너를 만나 같은 곳에서 함께 죽기를 원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공은 물론 자흥도 간장이 찢어지고 타는 것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러나 공께서는 이런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시지 않고 서둘러 조정 앞으로 유서를 쓰시기 시작하였다.
“승종이 임금을 바른말로 간하곤 하였으나 도무지 먹혀들지가 않았기에 오늘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니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황망 중에 성문을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자 하나 난병亂兵들에게 살해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천지신명께 사죄하겠다.”
또 둘째아들 자응 앞으로 유서를 한장 더 쓰셨다.
“우리 집이 왕실과 혼인한 까닭에 진퇴부득進退不得이라 오늘 불행하게도 부자가 머리를 맞대고 죽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운명이니 어찌할 것이냐. 너는 이위경李偉卿(1613년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상소를 처음 올린 자로 1617년 인목대비살해미수사건에 관여했던 자. 이자가 올린 인목대비 폐위 상소문을 자응이 찢어버린 적이 있다.)과 서로 논쟁한 일이 있고, 또 조정의 큰 의론엔 참여하지 않았으니 조정은 결코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자살하지 말고 근신하여 선대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
이 두 장의 유서를 박안례에게 건네신 다음 그에게 거병을 접으라 이르시고는 서둘러 자흥과 함께 길을 떠나셨다. 저자도楮子島(현재의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의 한강 중간에 있던 섬)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공께서는 갑자기 강에 투신하려다 곧 멈추시고는, "만약 내 시체가 물 속에 가라앉아 찾지 못 한다면 화禍가 종족宗族에게 미칠 것이다. 차라리 선묘先墓 아래에서 죽는 편이 낫겠다." 하셨다. 그러나 고양 박재궁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음을 아시고는 곧장 용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셨다. (문헌상으론 외씨묘소가 광주 검천에 있는 걸로 되어 있다.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용인이 검천에 속해 있었는지, 착오 혹은 오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현재 용인이다.) 의창군義昌君 황림黃琳 (1517~1597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선조11년 명나라에 가서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를 바로잡은 공으로 종계변무3등공신宗系辨誣三等功臣에 책록되고 의창군에 봉군됨)으로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 耆老所에 들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평장平莊이란 시호가 내렸다.)의 묘소로 가시기 위해서였다. 공께서 36세 되던 해, 그러니까 선조30년 10월 24일에 하세한 외왕고外王考의 장례를 몸소 치렀기에 묘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것. 황림에겐 자식이 없어 공의 막내동생 승황(承黃 1566~1640 김제군수)이 제사를 받들고 있었다. 현재 지명으로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광교산 하단 유좌酉坐(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앉은 자리)에 다다르신 선조님과 자흥은 하염없이 통분의 피눈물을 쏟으셨으리라......
반정 당일(12일)부터 14일까지 선조님의 행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궁궐(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수구문(서울시 중구 광희2동)-노원(남양주. 현재 서울시 노원구)-저자도(서울시 압구정동과 옥수동 중간에 있던 섬)-황림의 묘(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황림의 묘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광교산) 14번지. 장명등은 없으나 방형(方形)의 호석분(護石墳)인 것으로 보아 공신(功臣)으로 예장(禮葬)된 분묘이다.
묘의 석물 가운데 문인석 한쌍이 16세기 석조미술의 원숙미에 도달한 수작으로 용인시 향토유적 제41호로 지정되었다.
14일 새벽, 묘소 아래 제사祭舍(산소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공사견문록>엔 금천衿川 삼악사三岳寺 승방僧房이라고 되어 있고, 박자흥의 신도비에는 현재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정림시제곡이라 되어 있다.)에서 부자가 함께 자결하셨다. 공은 향년 62세, 자흥은 43세였다.
<공사견문公私見聞>(정재륜(1648-1723)이 쓴 야사野史로, 역대 왕실 및 고위 관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화가 대부분이다.)에 승종 선조님의 비극적 최후가 담겨 있다.
이는 제사祭舍를 돌보던 금천衿川 삼악사 三岳寺 승려가 숙민공 부자의 최후를 지켜보고 나(정재륜)의 집안 어른께 말해준 것이다.
승종 대감이 방에 누워 세조대(허리에 묶는 끈)로 목을 맨 후 그 한 끝을 창 틈으로 내어보내고 종에게 당겨 홀치라고 하니, 종이 꿇어앉아 말하길를, “종이 어찌 감히 제 손으로 주인을 죽이겠습니까. 죽어도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감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죽지 않으면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네가 나를 죽이면 충이 되고 죽이지 않으면 불충이 될 것이다.” 하고 누누이 타이르시자 종이 하는 수 없이 줄을 잡아당기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세조대(조선시대 전통한복에서 허리에 묶던끈)
비록 광해군과 영화를 함께했으나 탁월한 외교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인물로 당대의 평가를 받은 선조님의 최후였다. 아버지에 이어 자흥도 그런 식으로 자결했다. 조정에서 사람이 나와 부자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그 친족으로 하여금 초상을 치르게 하였다.
비보를 접한 자응은 영광군수직을 버리고 천리길을 달려와 염습을 끝내고 부친과 형님을 땅에 묻어 드렸다. 2008년 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꼭 385년 전 사건으로 참으로 가슴 아픈 우리 선세先世의 화禍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어제 일어난 일 같아 이 대목을 엮고 있는 나도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두 어르신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잠깐 기도 드리자......
파쟁의 적폐를 탈피하고자 초야에서 인재를 찾고, 기민飢民의 구휼에 적극 힘쓰고, 장병의 녹봉을 신설하여 무약武弱의 한을 씻어주셨던 승종 선조님. 1609년(광해1) 공께서 김응하(1580~1619. 승종선조님이 병조판서로 계실 때 발탁한 인물로 1618년 명나라 원정군 좌영장으로 참가하여 전사함)를 비장裨將으로 삼고 전라도관찰사로 나가셔서 많은 덕을 쌓고 인의仁義로 선정을 베푸시니 유림들이 나서서 공의 '호남덕정비湖南德政碑'를 세웠다. 역사의 기록은 칼을 쥔 자, 붓을 쥔 자의 일방적 폭력이 난무한 법. 세상을 뒤엎은 자들은 과거 기득권층을 왜곡, 비하, 매도함으로써 반정을 정당화하였지만 이 비는 건재했다.
송한위공宋韓魏公(송나라 한위공이)
소력제대진所歷諸大鎭(여러 대진을 거쳤는데)(대진 : 전략상 요지에 설치했던 군진)
계유애皆遺愛(그가 남긴 공덕을 사랑하여)
인인人人(사람들이)
화상사지畵像祀之(그의 초상을 사당에 모셨다.)
금박공승종今朴公承宗(오늘에 이르러 박공 승종은)
내오동한위공야乃吾東韓魏公也(우리나라의 한위공이다.)
공의 묘소는 앞서 말한 제3묘역 청룡좌에 위치해 있다. 영의정을 지낸 분의 묘답게 석인石人, 석수石獸, 서주, 석등, 상석, 묘비, 신도비 등 온갖 석물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짜임새 있게 단장되어 있다.
영의정 박승종의 묘(경기도 고양시 주교동 두응촌 3묘역)
영의정 박승종의 묘(경기도 고양시 주교동 두응촌 3묘역)
특이한 점은 묘를 둥글게 휘감고 있는 화강암 병풍석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들. 거기엔 선조 임금이 손수 그려 승종 선조님에게 하사한 난초와 대나무 그림 및 선조 어필이 새겨져 있다. 이와 함께 전국 각지 지역문중 및 개인 명단도 새겨져 있는데, 잠깐! 이 가운데 버젓이 ‘보성 비봉 문중’도 끼어있다!
선조의 그림
선조(1552~1608) 임금이 손수 그려 임진왜란 공신 박승종에게 하사한 난초와 대나무 그림. 선조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숙민공 박승종의 묘 병풍석 오른쪽에 '보성비봉문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내가 속한 ‘비봉문중’에서도 숙민공의 묘역 단장과 준공 및 묘비 건립에 헌성금을 기부했던 흔적이었다. 누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전국 모임에 출입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 글을 쓰면서 추측해 보건데, 밀양박씨규정공성제공파보密陽朴氏糾正公誠齊公波譜 편수위원장(2000년)을 맡은 종권鍾權(만발의 장남 종렬宗烈의 후손, 자字 학주鶴柱) 족형과 정석正錫, 봉규俸圭 어르신이 아닌가 싶다. 제 조상도 잊고 먹고 사는 일에 정신이 팔린 후손들로 하여금 ‘너희들의 뿌리인 조상님이 저기에 계시다’하고 알려준 것 같아 참으로 고맙고 황송했다.
성제공誠齊公은 취도 선조님의 존호尊號이며, 이 분의 후손들의 명단(단주單主가 무려 86명이다)을 집대성한 파보가 위에서 말한 성제공파보다. 양장본으로 앞뒤 표지가 검은색으로 되어 있고 앞 표지에 금박으로 세로 글씨를 넣은 이 족보는 2000년 대전의 회상사에서 발행했다.
숙민공의 유골은 무려 네 번씩이나 세상 구경을 하셨다. 우리 시대에 대권에 도전한 사람들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조상의 묘를 이리저리 옮겨 발복發福을 받으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한 데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었으리라. 숙민공의 유해는 원래 광주 검천(현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정림시제곡)에 자흥과 함께 권조權厝(권폄權窆, 임시로 장사지냄)하였다가 공주 요당면 두만동 자좌子坐(정북방향을 등지고 정남향으로 앉은 자리)에 모셨다. 1961년 2월 천안 목천 관동으로 이안하였다가 1975년 청명일에 비로소 이 자리에 유택을 마련했다. 2007년 봄에는 박재궁 제2묘역 낙촌공 충원 묘 아래 깊이 잠들어 계시던, 3남매를 낳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신 배위 정경부인 청풍김씨를 옆에 모셨다.
숙민공을 모신 재실이 전남에도 두 곳이 있다. 장흥의 세덕사世德祠(장흥군 장흥읍 사안리 34번지)와 곡성의 일당日堂齋(곡성군 입면 서봉리 탑동부락입구).
세자빈의 아버지 박자흥
'명분과 의리'라는 무게가 실린 부친의 말씀 한 마디에 냉큼 군사행동을 접고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자흥(1581~1623 자字 인길仁吉. 호號 서당瑞棠 또는 읍청헌揖淸軒)....... 공께서는 한양漢陽 낙촌駱村에서 태어나셨으며, 성품性稟이 온후溫厚하고 기품氣稟이 강직剛直하고 용맹勇猛스러웠다. 여섯 살 때 조부의 가르침으로 글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촉명하고 민첩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7세 때 조부 응원군 안세께서 "개의 발에는 버선이 필요없느니라" 하시자, 즉시 응대하여 여쭙길, "사람은 입으로 풀을 먹을 수 없사옵니다"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30세에 대과급제를 하고 이듬해 1611년 시강원 설서侍講院 說書(정5품. 세자를 가르치는 직)에 배명拜命(임명을 삼가 받음)되었다. 이 무렵 공의 딸(1598~1623. 당시 15세)이 세자 질의 빈에 응선되었다. 이때에 왕이 빈청에 전하여 이르기를, "세자빈을 설서 박자흥의 딸로 정하고 싶은데 그의 가세가 어떤지 모르겠다"하니 영의정 이덕형(1561~1613)과 좌의정 이항복(1556~1618)이 의논하여 회계回啓(임금의 물음에 신하들이 대답함)하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자옵고 살펴보니 박씨의 가세는 명벌名伐(문벌이 좋은 집안)로 종사宗社(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주관하도록 맡기기에 정말로 잘 어울립니다"하였다. 이리하여 1612년 10월 24일 세자와 세자빈의 가례(혼인)가 행해졌고 공은 32세에 세자의 장인이 되었다.
1618년(38세)에 공께서 전라도관찰사(종2품. 제주도를 포함, 전라도 56개 고을을 관할하던 지방장관. 고을 수령들을 규찰하고 인사고과를 매기면서 때로는 전주부윤까지 겸했다. 사법권과 군권도 쥐고 있었다. 전라감영은 감사의 집무소인 선화당을 중심으로 그 경역이 1만2000평에 이르렀다. )로 나가 아름다운 행실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의 선정비를 세웠다.
"학업을 권장하고 친히 제술을 강론하니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다. 군정軍政(정남丁男으로부터 군포軍布를 받아던 일)을 투명하게 하니 수륙水陸(육군과 해군)이 정돈되고, 공평과세하니 백성이 편안하고, 구습을 타파하니 오랜 악습과 폐단이 없어졌다. 이러한 치적으로 인해 원망과 시기가 다 풀렸다. 이처럼 어질고 밝은 정사를 펼치고 청렴한 덕을 베푸니 고금에 없던 일이다." (반정군은 이 비도 파괴하지 못했다.)
1609년(광해1) 전라도관찰사였던 승종 선조님의 '호남덕정비湖南德政碑' 옆에 아들의 선정비까지 세워졌으니 고금에 이런 사례도 드물 것이다.
그 뒤 공은 수원부사, 형조참판, 대사헌, 대사간, 의금부사, 대사성, 병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에 의망擬望(관원(官員)을 임명(任命)할 때 이조(吏曹)ㆍ병조(兵曹)에서 세 사람의 후보자(候補者)를 추천(推薦)하던일. 의망을 반대하는 것을 지의枳擬라 한다 .)되었다. 그러자, 공은 임금에게 "아버지께서 영의정으로 계시는데 자식이 사마장司馬長이 된다면 조물주가 시기할 것이니 그 재앙이 두렵습니다"하고 간곡히 아뢰어 병조판서직을 고사했다.
위와 같이 공公께서는 항상 의로운 일을 추구하고, 국가위기에 처하여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광해난정光海亂政의 책임을 지고 자결함으로써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켰으니 견마지로犬馬之勞의 본을 실천한 충신이다.
공께서는 정부인 광주이씨에게서 자녀들을 낳았는데 자녀의 수가 문헌상 일치하지 않는다. 후손 영록의 청으로 조종업(충남대 교수)이 찬한 서당공 박자흥 행장엔 9남1녀(정예, 희순, 견인, 수양, 유상, 자소, 수만, 수원, 해인, 세자빈)로, 1956년 족보엔 4남1녀(정예, 희순, 견인, 수양. 세자빈)로 기재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중대한 의문에 봉착했다. 정부인 광주이씨는 대체 누구일까? 광주이씨 이흥립의 딸일까, 아니면 광주이씨 이이첨의 딸(1585~1632년 12월 자결)일까? 1956년 판 족보와 <광해군>(한명기, 2000)에는 이이첨의 딸 광주이씨에게서 이들 자녀를 낳은 걸로 되어 있고, <서울육백년사>(서울특별시)와 <엔싸이버 백과사전>에는 박자흥이 이이첨의 딸과 재혼한 때는 1618년(병조참판에 오른 해)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족보상엔 이들 자녀들 모두가 1618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예(1603), 희순(1606), 견인(1604). 이 기록은 자흥의 생몰연대와도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자흥은 이흥립의 딸 광주이씨에게서 이들 자녀를 낳았다고 봐야?... 혹시 괄호 안 이름들 가운데 이이첨의 딸에게서 낳은 자녀가 있나?... 이 기회에 자흥의 후손들이 머리 싸매고 연구하여 바로잡을 것을 제의하는 바이다.
철종 정사년(1867) 6월 13일 아버지와 함께 신설伸雪(신원설치伸寃雪恥의 준말. 신원되어 부끄러움을 씻음) 되어 기백畿伯(경기감사) 겸 병조참판에 복작되었다. 묘는 광주 검천(현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산 8번지 정림시제곡) 갑좌甲坐(동북쪽을 등진 자리, 정확하게는 계좌정향)에 있다. 1999년 공의 14세손 인호仁鎬(전 서울고법부장판사. 현재 변호사)와 15세손 영렬永烈(현 광주지검장) 등이 김종구(전 법무장관. 재위 1997~1998)의 찬술撰述을 받아 공의 신도비를 세움으로써 후손들의 효성이 세상의 본이 되고 있다.
이쯤해서 신중한 독자들은 반드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승종 선조님의 손녀가 세자빈, 맞죠? 그분은 어찌 되었나요?"
세자빈 박씨 부부는 반정 직후 광해군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위리圍籬(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의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던 일) 안치되었다. 정확하게는 강화도 내가면 외포리. 세자는 유배직후 몇 차례 자결에 실패했다가 유배생활 두 달만에 가위와 인두를 사용하여 집마당에 땅굴을 파고 (26 동안 70척=약 20미터)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끌려갔다.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조선시대 가위
조선시대 인두
이때 나무에 올라가 망을 보던 세자빈은 그만 혼절하여 땅에 떨어졌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사흘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지아비 없는 몸이 수졸守卒의 감시를 받고 지내는 것은 이름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며 스스로 비단에 목을 매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이경화 분) KBS1 <불멸의 이순신> 2004년 9월 4일~2005년 8월 28일
조정에서는 호조로 하여금 옷과 이불을 보내 염습하고 여가(閭家 어염집)에 옮겨 빈소를 차리게 하였다. 아, 이 가련한 세자빈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기도 드리자. 뿌리 깊은 명문대가名門大家의 6대째 이어내려온 장손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신 분이라 그리 단아하시고 총명하시고 후덕하셨다는데... 후궁들로부터 모진 시집살이를 당하실 때마다 명목장담明目張膽(두려워하지 않고 분발하여 일을 하다)의 태도와 함께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이곤 하셨다는데...
동갑내기였던 세자(26세)는 붙잡힌 지 한달 뒤 인조의 명에 따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곧고 옳은 성품을 지녔으며, 아버지 광해가 할아버지 선조의 여자인 개똥이의 처소에 드나드는 것에 크게 불만을 품어 개똥이를 버리라고 당당히 항의한 적도 있던 이질은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세자 질과 세자빈 박씨 사이에 자식이 없어 대가 끊기고 말았다.
아래의 시는 폐세자가 강화도로 유배될 때 나룻배 위에서 지었다는 시다.
번복 많은 세상일 파란 같으니
시름 근심 부질없이 마음 한가해
이십육 년 참으로 한바탕 꿈이니
기꺼이 흰구름 사이로 돌아가리라.
광해군의 비 폐비유씨(1608~1623)는 아들이 붙잡혀가고 며느리마저 죽자 그만 화병을 얻어 그해 10월 8일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체념인지, 달관인지 매우 초연하게 모든 사실들은 받아들였다고 한다.
1627년 정묘호란에 이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는 억울하게 폐위된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는 구실로 조선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국권은 땅에 떨어지고 종묘사직은 유린되었으며 백성들은 수없이 죽어갔고 60만명이 붙잡혀 가 군인, 창기, 노예로 팔렸다. 인조 본인 스스로도 씻을 없는 삼전도 굴욕(인조가 세자와 함께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치렀던 치욕)을 당했다. 광해, 그가 그토록 염려하여 공력을 들여 막았던 청나라의 침략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인조는 이제 광해군을 마음대로 죽일 수도 없게 되고 정치적 부담만 가중되니 아예 멀리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는 제주도에서도 초연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그의 시중을 들라고 배치된 하인의 수모마저도 묵묵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광해군은 결국 제주도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1641년. 세수 67세였다. 장장 18년의 귀양생활을 마감하며 그는 자신의 시신을 어머니 공빈 김씨곁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조정에서도 그 유언 만은 존중해 주었으니 현 경기도 양주군에 묘가 있다.
숙민공의 문장, 시, 유묵
승종 선조님께서는 독서를 좋아하셨다. 우리나라의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요순시대로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시문과 역사를 두루 섭렵하셔서 관통하지 않은 지식이란 없었다. 당신께서는 문장가로 자처하진 않으셨으나 시문 저작에 민섬敏贍(민첩하고 지혜가 많음)하시어 사람들과 더불어 창수唱酬하실 때 수 많은 시문을 지어 읊어도 바닥나지 않는 글 곳간과 같았다(판중추부사 종1품 강노 1809~1887).
이선호(행정학박사 국방대학원 교수 한국시사문제연구소장)가 2005년에 발표한 <지도자 不在현실에서 李舜臣을 추모한다> 라는 글에 숙민공 선조님의 문장이 소개돼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임금을 포함한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의 공로를 찬양하는 수많은 글 가운데 승종 선조님의 문장을 가장 감격적인 글이라고 했다.
......충무공 전서에 보면, 그 부록에 이순신의 공로를 찬양하는 역대 국왕과 문무백관들이 올린 수많은 글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감격적인 두 편의 글은 퇴우정退憂亭 박승종朴承宗의 충민사기忠愍祠記와 숙종 임금의 현충사 제문이라고 하겠다.
첫 번째 글 구절은 그가 죽을 시기에 죽을 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도리어 살았다는 가슴 뭉클한 뜻을 담고 있다.
「아! 공으로 하여금 만일 그 날에 죽지 않게 했더라면, 일개 공신에 불과했을 것인데 이제 마침내 그 충성을 현양하고 절개를 표칭 함이 천지에 찬란하니, 비록 죽었어도 오히려 살았도다.성을 버리고 군사를 패한 무리들은 몸이 그대로 성하여 제방 창문 아래서 늙어 죽는데 이순신의 충렬은 마침내 몸을 버림에까지 이르렀으니 하늘의 보답이 어찌 이리 공평치 못한고. 그러나 구차스레 제 목숨 보존한 자들은 저 나뭇잎 위에 붙은 먼지와 다를 것이 없어서, 이것으로서 저것에 비긴다면 하늘의 은총이 또한 풍족하다고 할 것이다.」
이는 이순신이 평소에 지녔던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확고부동한 사생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전혀 가식이나 각색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비겁하고도 치욕스러운 삶을 마감한 원균에게 던져주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두 번째의 것은 역대 조선왕 중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가장 옳게 평가한 숙종의 제문인데, 이순신을 죽이려고 온갖 계략을 다 꾸민 선조와는 사람을 보는 눈이 판이하다.
「예로부터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있지만, 제 몸 죽이고 나라 살린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겠네(殺身殉節 古有比言, 身亡國活始見斯人)」
현재 내가 찾아낸 숙민공 선조님의 시는 3수이다. 전관수가 엮은 <한시어 사전>(국학자료원. 2005)에 수록되어 있다.
매한죽취동청표梅寒竹翠同淸標
겨울 매화 푸른 대나무 다 맑고 기품이 있어
진취방준내온향盡醉芳樽內蘊香
임금님 내리신 술 향기로워 취토록 마시었도다
-회이경전댁부매논심會李慶全宅賦梅論心(이경전 집에 모여 매화를 두고 마음을 논함)
봄날 푸른 대나무 숲이 우거진 이경전(선조 때 암행어사)의 집에서 갓 피어나기 시작한 매화를 감상하면서 임금이 내린 술을 나눠 마시는 모습을 이처럼 생생하게 시로 표현해 마치 옛 그림을 보는 듯하다.
위 시의 첫 행은 한매취죽寒梅翠竹, 이렇게 써야 마땅하다. 그러나 공께서는 술에 취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앞뒤 글자를 매한죽취梅寒竹翠 뒤집어 농弄하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아래의 시는 유명세를 탄 시가 되어 고관대작들 사이에 전송傳誦되기까지 했다.
일언오주지무분 一言悟主知無分
만사수은상유여 萬死酬恩尙有餘
이 시를 누가 처음 한글로 번역했는지는 몰라도 첫행 무분(無分)이란 대목에서 막혀 이를 쏙 빼놓고 '한 마디로 말로 임금을 깨우칠 수 있다면/ 만번 죽어도 오히려 남음이 있겠네' 이렇게 해석하여 뜻이 엉뚱하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엉뚱한 해석을 옳은 것으로 알고 인용들 하고 있으니 참 한심하다. 큰아들 자흥의 춘첩시春帖詩에 나온 이 시를 이번 기회에 이렇게 바로잡는 바이다.
'(내) 말 한 마디에 임금이 깨우쳐 지혜에 이른다면, 설사 만번 죽는다해도 (내 말을 가납嘉納해준) 임금의 은혜를 못다 갚을 것이다.'
광해군은 대인기피증이 의심될 정도로 신하들을 피한 왕이었다. 소심했던 광해군은 재위기간 내내 신료들과 친인척을 모두 의심했다. 왕과 대신들의 커뮤니케이션 부재는 광해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왕의 손을 빠져나간 신하들은 당쟁에 열을 올렸고, 사직서를 던지고 떠나는 신하들도 많았다. 광해군이 이이첨 등 간신배 무리와 요부 개똥이의 속임수에 빠져 정사를 그르치는 것을 보다못해 선조님께서 이런 시를 지어 탄식조로 읊으셨을 것이다......
다음은 승종 선조님이 1621년(광해13) 봄 명나라 사신(유홍훈)에게 직접 써준 7언시다. 단정하면서도 힘차고 아주 예리한 글씨로 준미遵美가 돋보인다. 글씨는 '신언서판身言書判'(당나라 관리 임용 기준) 가운데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 주는 것. 선조님의 글씨를 미뤄보건데 성품이 강직하시고 혈기가 충만하시고 지혜가 뛰어나신 분임을 알 수가 있다.
숙민공 박승종의 글씨 천계원년天啓元年(1621년, 60세)에 쓰신 글씨로 단정하면서도 힘차고 아주 예리한 글씨로 준미遵美가 돋보인다. <해동역대명가필보>3권에 실려 있다.
천자의 은혜가 내리자 처음으로 세상이 태평해지더니
태사太史 유공劉公과 급간給諫 양공楊公이 오셨네
귀한 손님들의 시는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를 압도하고
연세 높은 이의 곤옥崑玉(고상한 인품)은 소동파蘇東坡나 황산곡黃山谷 같네
이 봄빛을 먼저 글로 쓰는 일을 사양하지 않을 뿐 아니라
풍경을 화려하게 표현하기도 했다네
이 늙은이는 많은 병을 앓고 난 뒤라
손님을 전송하는 자리에 술병 들고 참석하지 못함이 부끄럽네
천계 원년 중춘 퇴우.
약소국 영상인 선조님께서 저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한강을 함께 유람하시면서 이처럼 아부성(?) 짙은 시를 지어 읊으셨다. 또 공께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논하니 저들은 숙소로 돌아가는 것도 잊고 거듭 경탄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딴 맘을 품고 자기네 윗선에 뇌물을 바친 덕에 사신으로 뽑혀 왔던 것. <광해군일기>를 보자.
조사詔使 유홍훈劉鴻訓과 양도인楊道寅이 서쪽으로 돌아갔다. 왕이 모화관에서의 전송연회를 마치고 나서 그대로 경덕궁에 들렀다가 신시에 돌아왔다.
홍훈은 제남齊南 사람이고 도인은 영남嶺南 사람인데, 탐욕스럽기가 비길 데 없었다. 인삼 값을 은으로 치르는 데 인색함이 매우 많았다. 심지어 개인의 은을 발급하여 수천 근의 인삼을 팔도록 하고는 삼을 받은 다음에 곧바로 본은本銀까지 추징하였다. 양서兩西 지역과 송도松都, 그리고 서울에서 상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큰 도시에서 은 7, 8만 냥을 거두어들이니 우리 나라의 재물이 바닥이 났다. 우리 나라에 왔던 중국 사신 가운데 장녕張寧이나 허국許國과 같이 청렴한 기풍과 높은 지조를 지닌 이는 비록 쉽게 볼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학사나 대부로서 풍류가 있고 문채가 있는 이는 앞뒤로 연이어 있어 왔다. 은삼銀蔘과 찬품값을 요구하는 일은 고천준顧天俊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유홍훈과 양도인은 더욱 심하였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약소국은 강대국의 밥이자 좋은 우물인 셈.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때 선조님이 군기도략軍氣圖略을 지어 명나라 군감軍監 양지항梁之恒에게 제시한 바 있다. 이 군략이 중국에서 <선유록宣諭錄>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자, 황제로부터 "중국에도 없는 인재"라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숙민공의 집터
인터넷 포털사이트 엠파스empas 검색창에 ‘읍백당’을 치니 화면이 바뀜과 동시에 열린게시판에 엔사이버Encyber가 제공한 읍백당 터 사진들이 나온다.
승종 선조님과 차남이신 자응 선조님이 살던 집터는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2번지이다. 집은 흔적조차 없고 다만 <읍백당 터>라고 적힌 표지석만 서 있을 뿐이다.
표지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광해군 때 영의정 박승종(1562~1623)과
성균관 교리를 지낸 그의 차남 읍백당 자응自凝이
살던 집 터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경기도 관찰사이던 장남
자흥自興의 군사행동을 중지시키고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읍백당揖白堂의 의미를 풀이해 보자. 읍揖은 읍례揖禮를, 백白은 서방西方의 빛으로 곧 서궁西宮을 가리킨다. 따라서 읍백당揖白堂의 속뜻Hidden meaning은 폐비가 되어 서궁에 감금된 인목대비를 보호하고 경의를 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읍백당 터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2번지
인정반정 직후 이 읍백당은 반정공신 김류가 차지하고, 자흥의 집은 이귀가 차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정의 주역들이 내세운 명분은 광해군의 ‘페륜론’이지만, 승종 선조님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읍백당을 차지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능양군을 왕으로 내세운 반정무리들이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소인배요, 부도덕한 정치깡패라 아니 말할 수 없다. 반정 이전 이들의 과거를 들추자면, 김류는 탄핵을 받고 일찌감치 정치일선에서 손을 뗀 자이고, 이귀는 과부인 딸이 남편의 친구와 야반도주하여 얼굴에 똥칠을 했던 자이고, 이서는 과부와 간통하여 탄핵을 받았던 자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읍백당은 승종 선조님의 비복들이, 자흥의 집은 부인이 되찾았다는 기록(한명기, 2007. 7. 25 서울신문)이 있지만, 난이 평정된 후로는 또 어찌 되었는지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잠깐! 이쯤해서 옛 그림 한 점을 감상하자.
겸재 정 선(1676~1759)그림 풍계유택楓溪遺宅(보물 585호)
인왕산 자락의 청풍계(淸風溪)에 웅거한 대저택이다. 계곡가에 버드나무가 늘어지고 저택의 담방 밖에는 초가집이 보인다. 담장 안에 2층 누각이며, 측면 3칸에 정면 4칸의 팔작지붕의 규모로 보아서 선비의 강학 처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이 그림이 누가 그린 그림인지 단박에 알아맞출 것이다. 여러분의 지갑을 열어 천원 권 뒷면을 자세히 보면 <계상정거도> 라는 동양화가 박혀 있을 것이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이 그림도 그렸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 敾 1676~1759)이다. 승종 선조님의 당질(5촌 조카) 자진自振(1625∼1694)의 외손자인 겸재가 자신의 외가댁을 이렇게 그렸던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읍백당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반정공신들의 탐욕스러운 처신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냉소가 번져갔다. 1625년(인조3) 6월, 도성에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아, 너희 훈신들이여(嗟爾勳臣)
잘난 척하지 말라(毋庸自誇)
그들의 집에 살고(爰處其室)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乃占其田)
그들의 말을 타며(且乘其馬)
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又行其事)
너희들과 그들이(爾與其人)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顧何異哉)
또 보라, 반정에 성공하고 얼마 안가 논공행상으로 인해 자기네들끼리 시비가 붙어 급기야는 이괄이 난을 일으켜 서로 죽이는가 하면, 판세 분석도 못하고 친명親明 사대주의에 빠져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당해 무고한 백성 수십만을 저승에 보내고, 60만명을 포로로 내주지 않았느냐 말이다.(이 가운데 남자는 군인, 농사꾼, 부역자가 되었고, 여자는 심양의 노예시장에서 주로 첩과 기생, 술집 작부로 팔려나갔다. 가족이 속전을 치르고 귀향시킨 여인들은 몸을 망친 여자라는 의미에서 화냥년이라 불리우는 등 고통을 당했다.)
경제를 '갱제'로 부를 때부터 경제가 멍들기 시작하더니 결국 IMF 터져 이후 10년간 엄청 후유증을 겪은 국민들이 건설회사 CEO 출신 이명박이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하는 말이 하도 고마워 대통령을 시켜놨더니 집권초기부터 이런 메기나건빵, 잇따라 터지는 악재로 한숨 투성이다. 한반도대운하, 북핵 문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독도 영유권 논쟁,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고유가와 고물가에 따른 생활고, 국회의 공전 등으로 아주 시끄럽고 도통 정신이 없다. 이런 시점에서 위정자들이 과거 역사를 이리 되작 저리 되작 연구하면서 허허실실을 잘 따져보면 해법이 보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신원복작伸寃復爵 상소문
인조반정 직후 승종 선조님이 광해군의 왕세자 장인이자 경기감사인 큰아들 자흥과 함께 자결하신 뒤 홍호, 이준, 안방준, 송시열 등 고관대작이 승종 선조님의 신원 상소에 앞장섰고 이밖에도 누대에 걸쳐 유신儒臣들과 후손들의 신원계청伸寃啓請(임금에게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고 아뢰어 청하는 일) 상소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가 죽음에 임박하여 말하기를, ‘대신의 신분으로 바르게 임금을 인도하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그의 말을 살펴보면 종용처변從容處變(어떤 변을 당하여 그것을 침착하게 잘 처리함)하려는 뜻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허물을 살펴 뉘우치고 깨닫는 단서가 엿보이고 있으니 이 또한 비통하지 않습니까!”
홍호(홍호洪鎬 1586~1646 대사간)
홍호(1586~1646)의 글씨
홍호의 상소문을 접한 인조는 노발대발했다. 그러자 반정공신 김류와 이귀가 나서서 송원訟寃하여 말하길, "박승종이 서궁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저희가 오늘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인조는 홍호의 벼슬까지 떼면서 언로言路(임금에게 말을 올릴 수 있는 길)를 막았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의를 중시한 고관대작들은 관직과 목숨을 담보로 상소를 이어갔다.
“당시에 죄 있는 사람으로서 백방으로 도망하고 숨을 것을 계획하고는 끝내 죽음을 면한 자들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승종의 경우, 이미 이이첨 등 무리와는 서로 등을 돌렸으며 더군다나 모후(인목대비)를 돕고 구한 공로가 있었으니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마는 오히려 그는 구차하게 살기를 원치 않고 마침내 목매어 자결하였으니 그의 죄과를 족히 덮을 만합니다.”
-이준(李埈 1545~1624 이조판서)
“박승종은 광해의 신하입니다. 광해가 비록 무도하였지만 그가 임금을 위하여 죽은 것은 의리상 옳지 않는 것이 아니고 10여 년 동안 대비를 구하고 감싼 일이 무슨 죄악이기에 정홍인, 이이첨 등 적인賊人과 함께 적몰하셨습니까?”
-안방준(安邦俊 1573~1654 공조참의)
안방준(1573~1654)의 글씨
또 다른 상소문을 보자.
“지난날 박승종은 혼조의 윤리가 멸절된 시기를 당하여 서궁西宮을 옆에서 돌보면서 시종 대북파의 흉패한 논의인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았고, 읍백揖白이란 두 글자를 자신의 당액堂額으로 걸고 서궁을 보호할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반정하는 날을 당하자 그는 자식과 더불어 동시에 자결하여 신하의 절개를 떨어뜨리지 않았을 뿐더러 유서로 조정에 사죄하며 말하기를, ‘노신老臣이 조정을 광구匡求(바로잡고 구제하다)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하였습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이조판서)
송시열의 글씨
“박승종이 읍백揖白으로 편호編戶(호적에 집을 편입시키다)한 일을 탑전榻前(왕의 자리 앞)에서 거론하여 그의 평소 충절을 밝혔으니 이로써 공의公義가 인멸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예가 아직도 천일天日 아래서 신원받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애통히 울부짖으며 성명聲明(세상에 공언하여 의견을 발표함)의 세상에 허물을 부담지우고 있으니 이는 실로 조정의 일대 흠전欠典(흠이 되는 일)으로서 오래 전에 죽은 혼백은 아마도 끝없이 원통함을 저 세상에까지 품고 있을 것입니다.”
-이성구(李聖求 1584~1644 영의정)
인조 당대에 절의節義(절개와 의리)를 중시하는 고관대작들이 줄기차게, 성가시게 올린 신원 계청에도 조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정군들의 잔치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정 무리들은 아마 이렇게들 생각하지 않았을까?
“좋네, 좋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무슨 맛이네, 무슨 맛이네 해도 이 권력맛이 최고지! 으흐흐흐, 인생 일장춘몽, 지금 즐기지 않는다면, 그럼, 치매가 온 뒤에 즐길 건가? 아니, 시방 저 사람들이 뭐라는 거여? 빠진 쓸개 찾느라 앞뒤 분간 못 하는 사람들 같구먼. 저런, 쯧쯧...... 귀신이 된 승종의 혼을 불러 들여 관작과 읍백당을 넘겨주라고! 쯧쯧, 재수없게시리!!! 그런 생각일랑 당췌 하덜덜 말어! 시방 이 좋은 판을 깨라는 거여 뭐여? 그건 어림없지. 암암, 그렇고말고!”
중요 요직을 한 자리씩 꿰찬 반정 무리들은 이랬다손치고, 그럼, 인목대비는 대체 왜 묵묵부답이었지? 아마도 광해군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나 커서 자기 아버지와 아들을 죽인 광해군을 어떻게 엿 한번 찐하게 먹여볼까 골몰하느라 그랬던 걸까? 아니면, 서궁의 유폐 생활 전후 10년 동안이나 승종 선조님한테 입은 은혜를 깜박했던 걸까? 혹시, 치매? 이도저도 아니라면, 새 정권 실세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 뒤로도 임금이 바뀔 때마다 신원계청은 계속되었다. 김석주(金錫胄 1634~1684 홍문관 수찬), 김이교(金履喬 1764~1832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1760~1840 영의정) 등이 상소문을 올렸다.
한편, 후손들도 신원을 간청하였다.
다음은 승종 선조님의 7대손 기덕(직산=천안 유학)이 정조23년에 올린 상소문이다.(1799년 9월 19일 갑술일)
직산(稷山) 유학 박기덕(朴基德)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6대조 박승종(朴承宗)에 대하여 전후에 걸친 조정의 논의에서 그 하자를 논박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계축년의 옥사 때 참여하여 국문했다는 것과 궁문을 막아지켰다는 것과 삼창(三昌)이라고 하여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거론되었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계축년의 옥사 때 참여하여 국문했다는 문제는, 저의 할아버지가 그 당시 의금부 판사를 지내고 위훈(僞勳)의 명단에 이름이 끼었으므로 그에 대한 시비는 반드시 응당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할 일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 명사들 가운데 누구는 위관(委官)이었고 누구는 위훈의 명단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대강 손꼽아 셀 수가 있는데, 지금 옥사를 다스렸다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신의 할아버지에게만 죄를 돌렸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궁문을 막아지켰다고 하는 문제, 그 당시 윤리가 장차 없어지고 서궁(西宮)이 곧 유폐될 상황으로서 흉악한 진당들이 틈을 엿보면서 무당굿을 기회로 삼아 변란을 꾀하기까지 하는 등 화가 일어날 조짐이 계속 터졌으니, 군사를 풀어 궁문을 지킨 것이 어찌 깊은 뜻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막아지킨 한 가지 일만 가지고 곧장 그 마음가짐과 행사를 판단하였으니, 어찌 극히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정사 공신(靖社功臣)들은 모두 폐조(廢朝) 때 벼슬을 지내고 그 당시의 일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이었으나 반정을 한 뒤에는 모두 신의 할아버지가 서궁을 보호한 공을 말하였고 대궐 군사로 막아 지킨 것을 죄로 삼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 행위를 용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창이라고 싸잡아 함께 거론되었다는 문제는, 저의 할아버지가 유희분(柳希奮)·이이첨(李爾瞻)과 불행하게도 모두 왕의 외척 신분으로서 다 함께 중용(重用)되었고 봉호에 창(昌)자가 들어간 것도 우연히 서로 같았으므로 당시에 사실 삼창이라고 지목을 받은 적은 있으나 그 마음가짐이나 행사를 논한다면 그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향초와 악초, 얼음과 숯불덩이의 차이 정도만이 아니었습니다. 고 상신(相臣) 조익(趙翼)의 차자 내용에 언젠가 ‘이이첨은 항상 옥사를 일으켰고 박승종은 보호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창이란 명목으로 이첨의 무리와 똑같이 취급하고 분간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영원토록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유감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할아버지는 왕의 외척으로서 혼란한 때를 만난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자니 종묘 사직과 흥망을 함께 하는 의리를 도외시할 수도 없었고 왕의 뜻을 거역하여 죽어버리자니 양궁(兩宮)을 보호할 책임을 부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년 세월을 애쓰면서 온갖 일을 미봉해 나가다가 경신년에 와서야 비로소 영의정이 되자 허균(許筠)·김개가 모두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고 삼사(三司)가 비로소 이첨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신의 할아버지가 흉악한 무리를 배척한 성과입니다. 아버지를 보면 지돈령(知敦寧) 박안세(朴安世)가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폐하자는 정청(庭請)의 반열에 참가하지 않았고 아들을 보면 교리(校理) 박자응(朴自凝)이 위경(偉卿)의 상소문을직접 찢어버리는 등 한 가문에 3대가 모두 충효를 가다듬었습니다. 그 고심과 피어린 정성은 언제나 윤리를 부지하고 바른 선비를 심는 데에 있었으나 다만 그 처지가 특별했던 관계로 밖으로는 권세를 탐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심적으로는 왕과 함께 죽어야겠다는 뜻을 지켜 가죽띠 주머니에 비상을 넣고 다니고 입춘날 지은 시에는 죽기를 빌었으니, 그 시를 읊는 사람은 천년 뒤에도 상심하기에 충분합니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아뢴 말중에는 박승종이 아니었더라면 서궁(西宮)이 보전될 수 없었고 신들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내 목숨을 내던진 것은 곧 본디부터 자처하던 것이었으나 조용히 의리를 지켰으므로 식견이 있는 자들은 칭찬하였습니다. 돌아가신 지 한 달이 지난 뒤에 비로소 소급하여 벼슬을 삭탈하는 처벌을 가하였는데 당초의 처분은 능창 대군(綾昌大君)을 용서하지 않은 것까지 소급하여 문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므로 홍호(洪鎬)가 한(漢)나라 주유의 일을 인용하여 주인을 위해 죽은 절개를 덮어버리지 말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의 할아버지가 폐조(廢朝)를 위하여 죽은 것은 절의라고 말할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예로부터 순절한 신하는 모두 혼란한 때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몇해전 유몽인(柳夢寅)에 대해 관직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릴 때 임금께서 그를 길재(吉再)와 김시습(金時習)에게 견주기까지 하셨으니, 신의 할아버지의 진퇴가 몽인과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섬기는 사람을 위하여 본분을 다한 점을 가지고 논한다면 마땅히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신의 할아버지 승종의 벼슬과 그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의금부가 복계(覆啓)하기를,
“승종이 지은 죄가 과연 어떤 것인데 세대가 이미 멀어진 지금에 와서야 기덕(基德)이 감히 함부로 논변을 한단 말입니까. 천만 놀라운 일입니다. 그의 상언을 들어주지 말고 해조로 하여금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판하하기를, “박승종의 일은 오랜 세월 동안 공론이 결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옛사람이 임금께 아뢴 말은 증거로 삼을 만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처지로서 그처럼 특별한 면이 있었으니, 이를테면 주머니에 독약을 넣어두어 자기 혼자서만 살아남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나 억울한 옥사는 반드시 구제해주려 한 일, 흉악한 주장은 한사코 배척한 일 등이다. 그러므로 승평 부원군과 연평 부원군등 몇 명의 공신들은 승종이 아니었더라면 서궁이 보전되지 못하고 신들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을 뿐만 아니라, 홍호(洪鎬)는 한나라 주유의 일을 인용하여 주인을 위해죽은 절의를 표창하자고 청하였는데, 그의 아비 박안세(朴安世)는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자응(自凝)은 위경(偉卿)의 상소문을 손수 찢어버렸다. 이 때문에 그의 집안 사람이 몇 해전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을 때 마땅히 참작해보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판하했던 것이다. 본 사건은 여느 경우와는 약간 다르므로 기왕에 시행했던 비슷한 경우의 규례를 곧장 시행할 수는 없더라도 그 호소를 도외시해 버리는 조처를 취한다는 것은 시대 상황에 맞게 조처하는 법칙에 어긋나는 듯하다. 성조(聖祖)께서 반정했던 초기에는 조정의 처분상 그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늘의 시점에서 성조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깊은 뜻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또한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춘추의 대의는 풍경을 구경할 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양이 바뀌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대신과 전임 금오 당상(金吾堂上) 등 여러 사람에게 이 문제를 물어 아뢰도록하라.” 하였다.
방손傍系(방계에 속한 혈족의 자손) 기복基福과 방손 준상準祥 등도 복관을 청했다.
드디어 1857년(철종 정사년. 중국연호로는 함풍7년) 6월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 임금의 전교가 있었다.
"박모사朴某事는 백세지공의百世之公議가 미민未泯하니 고인주언故人奏言을 가징可徵이니라.(박모의 일은 백세가 지나도록 공의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옛 사람들의 주언을 받아들이노라)."
이에 이조판서 김보근(金輔根 1803~1869)이 적극 신원을 청했으나 우의정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이 청문을 열어 대소신료들에게 묻고자 하니 임금이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
"선현입론先賢立論이 편시공안便是公案이요, 정묘판하正廟判下가 자재自在하시니 하필갱순何必更詢고(선현들이 세운 논의는 공론에 의하여 결정된 안건이다. 정묘(역대 임금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가 반대하시지 않는데 어찌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단 말인가)."
철종은 당장 부자 모두 복관하라, 명하였다.
승종 선조님은 인조반정 나고 꼭 234년 만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관직을 돌려받고 밀창군密昌君에 봉군되셨다. 그리고 동치10년(1870년) 5월 숙민肅愍 ‘집심결단왈 숙執心決斷曰 肅 사민비상왈 민使民悲傷曰 愍’(마음을 굳게 가져 일을 결단하였으니 숙肅이요, 백성들이 공의 죽음을 슬퍼하고 가슴 쓰리게 여기니 민愍’이라)이란 시호諡號가 내렸다.
박승종의 신원 전교 교지
박승종의 시호 전교
숙민공의 후예들
숙민공 선조님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청풍 김씨(군수 사원士元의 딸)에게서 자흥, 자응과 1녀를 낳았다. 청풍 김씨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자, 계배위이신 정경부인 완산 이씨(완풍부원군 이서李曙의 서매)에게서 자전, 자천, 자품(이상 신도비 내용), 자순, (자돈, 자열, 자호, 자곤, 자은)을 낳으셨다. 괄호 안은 족보(1956년판) 내용.
자응自凝
1589(선조 22)∼1645(인조 23)
숙민공2세손(시조59세손 밀양30세손 규정공15세손)
자字, 정길正吉. 호號, 읍백당揖白堂.
자녀는 7남6녀를 낳으셨다. 숙부인淑夫人 동래 정씨(군수 근謹의 딸)에게서 동도, 취도, 수구, 수천을 낳았고, 계배위이신 숙부인淑夫人 청송 심씨(군수 협浹의 딸)에게서 수인, 수민, 그리고 4녀를 낳았으며, 측실(첩)에게서 수장과 2녀를 낳으셨다. 이 기록은 약제 송병화가 쓴 공의 행장의 내용에 따른 것. 족보(1956년판)엔 '수원'이라는 아들이 한명 더 있고 딸은 5명으로 되어 있다.
(유택)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두응촌 부친 승종의 묘 아래
박자응의 교지
통정대부 행 영광군수어려서부터 총명하셨다고 한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셨다.
이듬해 세자시강원사서 및 홍문관 부수찬을 거친 뒤 1617년에는 홍문관 부교리·성균관 직강·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시고 1618년 성균관 전적이 되셨다. 이때 대북파의 이위경이 폐모 상소문을 올리자 광해군의 면전에서 이를 찢어버리고 또 폐모정청하는 날에도 신병을 핑계로 불참하였다. 이런 사유로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미운털이 박혀 대기발령 중에 계셨다.
그해 7월 조정은 명나라에 원정군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때 원정군 사령관인 도원수 강홍립이, "박자응은 일찍이 신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에 염철鹽鐵에 관한 일을 담당하여 재국才局이 심히 뛰어나고 일을 잘 처리하였는데 바야흐로 죄를 의논하는 중에 있습니다." 하고 데려가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이듬해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하였다.
1618년(광해10) 1620년 지평, 장령, 홍문관 교리를 지내셨다. 조선시대의 양반사회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벼슬이 있으니 재상급의 홍문관 대제학이요, 중간간부급의 교리 자리이다. 교리는 홍문관의 5품관이나 옥당 혹은 한림으로 불리우는 문관. 문한文翰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1621년 검상, 사인, 응교 겸 경연 춘추관 수찬관 편수관을 지내시고 1622년 영광군수로 나가셨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가화家禍를 당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부친과 형의 치렴治殮(염습하고 상을 치룸)하신 다음 조정에 자수하여 곧 제주로 유배되셨으나 이듬해에 몽방蒙放(죄인이 풀려남) 되셨다. 전날에 흉도 이위경의 폐모상소문을 찢어버리고 서궁을 비호한 일이 참작되었기 때문이다.
1628년(인조 6) 진도로 이배된 뒤 이듬해 위리圍籬만 철거되었다는 <응천일록>의 기록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유배에서 풀려나신 뒤 숙부 승조承朝(안세의 차남으로 승종 선조님의 손아래 동생)가 계시는 천안군 소등면 한적동(현재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어 있는 연기군 전의면 대곡리 4구 대사동)에서 은거하셨다. 정확히는 대사동으로부터 10여리 떨어진 목천 관동.
승종 선조님께서 좌의정으로 계실 때 부모님이 하세하셨다. 1618년 4월 22일 부친 응원군 안세가, 같은 해 5월 27일 배위 창원황씨가 하세하셨다. 고양 두응촌 선영에서 시묘살이를 하시던 승종 선조님은 지사 박상희의 천거로 이곳 대사동 간좌艮坐(동북방향을 등진 자리. 2000년판 족보는 갑자)에 모친을 모셨던 것(2007. 9. 20. 고양 두응촌 안세 묘에 합폄됨). 연안부사로 있던 승조(규정공파 31개 소파의 하나인 연안공파의 파조)는 벼슬을 내어놓고 모친의 시묘살이를 하다 식솔마저 불러내려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고 있었다. 이즈음 승조가 사형舍兄인 승종 선조님께 벼슬을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리자, 승종 선조님께선 "수차례 사직소를 올렸으나 왕이 놓아주질 않는다. 왕의 인척이라 진퇴부득進退不得이다. 나는 종내 끝이 좋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고 있다."하고 탄식하셨다.
자응 선조님께서는 가화로 인한 척결剔抉(살을 긁어내고 뼈를 발라냄)의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김유, 서수부, 김여관, 심자성 등과 함께 <환성육일회歡成六逸會>라는 풍월모임을 조직하여 서로 왕래하면서 수창酬唱(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읊음)하시며 절통切痛한(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한) 세월을 보내셨다. <육일집六逸集>이 세상에 전한다.
공께서는 1645년 정침에 57세의 일기로 하세하셨다. 묘소의 위치는, 송병화(宋炳華 1852~1916 호는 약제約齊. 조선 말기와 왜의 한국 강점기 초기의 유학자)가 쓴 공의 행장에 공주 요당면 두만동 자좌 '원종숙민공조야原從肅愍公兆也'라 되어 있으니 숙민공 묏자리 아래 자좌子坐이다(현재는 고양 두응촌 제3묘역 숙민공의 묘 아래 이안되어 있다). 배위 동래정씨는 고양 두응촌 '선조先兆'(선영)에, 계배위 청송심씨는 목천 관동에 묻히셨다.
취도(就度 1607~1684)
자字, 성일聖日. 호號, 성재誠齋.
자응의 차남.
숙민공3세손(시조60세손 밀양31세손 규정공16세손)
(음陰)통덕랑通德郞(정5품. 서기관급. 4급공무원)
공인恭人 안동김씨(1618~1678), 계배위 공인恭人 평산신씨, 그리고 공인恭人 능성구씨(취도의 배위에 대해서 : 1956년 판 족보엔 공인 안동김씨(묘 : 경기도 검천 장기리 합폄했으나 실전)만 실려있으나, 1988년 판과 2000년 판 족보엔 공인 안동김씨, 공인 평산신씨(묘 : 청송군 진보면 세장동 간좌), 공인 능성구씨(묘 : 경남 진주 남현리 부연동 유좌), 이렇게 3분이 실려 있다.)에게서 만발(보성), 만룡(나주), 만원(정읍), 만우(진안), 만수(완도), 만굉(김제), 만현(영암), 만원(곡성), 만기(홍성),만수(영덕), 만호(영양), 만춘(고창), 만욱(익산), 만홍(김제), 만구(부안), 만태(영양), 만재(서산), 만계(무안) 18형제를 낳았다.
(유택) 보성군 득량면 마천리 산 33-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