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어느 만큼 들어서 어느 시골쯤의 산자락을 찾아들어 토담집을 한 채 짓고 싶다. 앞으로는 작은 시내가 있고 뒤로는 조금은 골이 깊은 산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집앞과 뒷뜰에는 밭을 일구어 계절마다 채소를 가꾸는 약간의 공간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집은 황토 흙으로 지으련다.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천정을 높여서 맑고 신선한 산바람과 들바람이 이리저리 넘나들게 하고.. 지붕은 돌기와를 올려야겠다. 집구조는 이층으로 올리면 좋겠지? 아래층은 부엌과 작은 통마루를 놓고.. 앞뜰을 훤히 바라볼 수가 있으면 족 하겠다. 뒷산이 올려다 뵐 수있도록 뒷문은 크게 내야겠고.. 방은 크고 넓게 하나만 들여야겠다. 한식으로 내부를 꾸며야 겠다. 우선 장판은 노오란 한지로 깔고..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장판위로 환한 햇살이 넉넉히 드리우게 해야겠고.. 되도록이면 장식이나 치장은 과감히 생략해야겠다. 그저 나무결 무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농짝 과 문갑만 있으면 되겠고 문갑 위에는 난이나 한 촉 키워두고 바라 보련다. 한쪽 벽으로 산수화가 그려진 여덟폭짜리 병풍을 세워두고 두툼한 감촉의 보료를 깔아두고 앉아 방바닥을 지나는.. 노란 햇살을 지그시 바라보며 뒷뜰에 날아와 앉은 새소리에 귀를 모으리라.
위층에는 양식으로 꾸미리라. 앞전체를 통유리로 꾸미고 운동장같이 그냥 넓은 공간으로 해야겠다. 우선 책장을 'ᄀ'자로 두 벽면을 둘러놓고 틈틈이 모아온 책들을 꽂아두고 오며가며 눈길로 읽어보리라. 그 옆으로 오디오셋트를 요란하지 않게 놓겠다. 구석 쪽에는 전자올겐을 놓고 서툰 음으로 가끔씩 건반을 누르며 옛추억에 젖어도 보리라. 책상은 통유리벽 안쪽에 놓아두고 구름이 지나면 지나는 대로.. 바람이 지나면 지나는 대로..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또 낙엽이 지면 지는 그대로.. 고스란히 자판위로 떨어져 산문이 되고 시가 되리라. 넓은 방바닥 중앙에 안락의자를 놓겠다. 흔들흔들 세월을 꼽아보다가 그냥 그냥 잠드는 날이 그럭저럭 많아서 좋으리라.
텃밭에는 이랑마다 다른 채소를 가꾸리라. 봄여름 가을을 그 밭고랑에 쭈그려 앉아 정성들여 가꾸리라. 작은 시냇가를 끼고 손바닥 만한 작은 논배미를 부쳐야겠다. 모를 심고 나락을 거두는 작은 노동의 기쁨과 양식을 아울러 구하리라. 새벽 일찍 삽자루를 둘러 메고 논으로 나가면.. 내자는 벌써 텃밭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앉 아 있을 게다. 논에 물꼬를 보고 느릿한 걸음으로 올라오다 보면 남 향받이 집 흙벽으로 붉은 황토색의 햇살이 은은히 퍼질게고.. 마루 에는 구수한 된장찌개가 곁들인.. 앞뒷뜰의 푸성귀와 산나물로 이미 조반상이 올라있으렸다. 옆에서 풋고추와 상추쌈을 집어주는 내자의 주름살 잔잔한 옆얼굴을 넌지시 바라보면서.. 천천히 손을 뻗어 '먼저 한입 베어 물게나'하며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가 놔주련다. 상 물리며 구수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시면서.. 다시 한번 사발넘어로 내자의 곱게 늙어 가는 얼굴위로.. 옛적의 그 붉던 입술을 생각해 내련다.
내자의 설거지하는 달각대는 나직한 소리와.. 마루벽 괘종시계 소리 만 고요한 아침나절의 집안으로 퍼져나가리라. 허면 안방에 앉아 방바닥으로 비쳐드는 아침햇살을 바라보며.. 차를 달이리라. 그리고 녹차향기 가득한 방안으로 내자를 불러 차를 권하면서 이런저런 하루를 여는 농사이야기며 대처에 사는 자식들 이야기들을 띄엄띄엄 나누리라. 허면 환히 비쳐드는 햇살 가득한 창호지 문 창살을 한개 두개 세어가며.. 먼먼 그리움에 젖어도 보련다.
마당으로는 벌이 윙윙!~ 날아다니게끔 한봉을 쳐야겠다. 뒤란 장독대 뒤 야트막한 비탈 양지쪽에 꿀벌들의 안식처를 만들어서 아무도 없는 한낮의 적요를.. 꿀벌들이 나니는 소리와 같이 하리라. 집 뒷산 숲속길을 걸어 오르며 김소월의 시도 읊조릴게고.. 국민학교적 동요도 나직나직 불러 볼 것이며.. 그 옛날 나뭇지게를 지고 숲길을 같이 걷던 초동친구들의 이름도 하나하나 불러 보리라.
보랏빛 아침햇살이 비춰드는 아침나절의 한적한 숲속 오솔길에는 나뭇잎 사이로 반짝반짝 낮별들이 나오리라. 나뭇잎을 흔들어대며 산바람이 건듯 불게고.. 허면 옥양목 하얀 천으로 받쳐입은 한복의 겨드랑이며 등까머리로는 산바람이 솰솰~ 지날게다. 발아래 부드런 흰 고무신의 알싸한 감촉을 가만가만 밟으며 오르는 산길에는 산 꿩이 울고.. 구성진 뻐꾸기소리는 흰 고무신을 내내 따라서 토담집 울 안까지 내려 올게다.
집울타리는 칡넝쿨로 싸리를 엮어서 둘러치련다. 그 담장 밑으로는 내자가 들과 산에서 들꽃들을 옮겨다 심어놓을게고.. 듬성듬성 호박 도 심어 여름 한철 시원하게 담장을 둘러치리라. 소낙비 호박잎에 떨어지는 소리.. 그 또한 토담집에 사는 은근한 즐거움에 하나를 더 보태리라.
집울타리 마당가며 텃밭 둔덕으론 유실수를 심으리라. 허면 계절따라 가며 복사꽃 능금꽃이 뜨락을 환히 밝힐게고.. 벌과 나비도 함께 집안팍으로 이리저리 한가로이 나닐게다.
하루에 한 수씩은 시조를 외워보리라. 가끔씩 어렵고 난해한 한자 일랑은 옥편에 손가락 짚어가며 돋보기 넘어로 찾아 그 뜻을 음미할 것이며.. 바쁠 것 하나 없는 느릿한 동작으로 책장을 쉬엄쉬엄 넘겨보리라.
창호지 장지문을 슬며시 열어 제끼면.. 희뿌연 산 안개 속으로 건너 산이 나타날게다. 허면 한동안은 꼼짝을 않고 뒷짐을 진 채로 서서 산 바래기를 하다보면.. 귀로는 솔바람 소리 들릴게고.. 눈감고 좀 더 귀를 모으면.. 영을 넘는 흰구름소리도 들리것다?..
한동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고나면.. 아침나절 고운 햇발아래 내자는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텃밭이랑에 앉아 밭을 매고 있을 게다.
"이것은 무슨 곡식인고?.. 저쪽 이랑은 또 무슨 곡식을 심었는고?"
허면 호미질 분주한 내자는 고운 얼굴위로 잔잔한 웃음으로만 대답을 대신할게고.. 또 한개의 호미자루를 가만히 내손에 쥐어주리라.
나란히 고랑을 타고 앉아있으면.. 내자는 어릴 적 친정어머니와 밭고랑에 앉았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젊은 날의 아련했던 우리 둘의 이야기를 할 것이며.. 몇 번을 듣고 또 듣는 이야기면서 처음으로 듣는양 호미 질만 할 것이고.. 내자는 이야기 도중 가끔가다가 호미자루를 놓고 내쪽을 넌즈시 바라보곤 하다가.. 그 긴긴 얘기가 다할쯤에는 점심 찬거리 푸성귀를 솎으러 일어나리라. 그리곤 눈을 지그시 뜨고 먼 후일.. 어느 날 함께 나란히 묻힐 앞산자락 양지 녘을 이마에 손 얹고 오래오래 건너다보리라. "임자도 내가 그리 좋으우?.."
텃밭에서 갓 솎아낸 풍성귀에 산나물 가득한 점심을 바람 시원한 마루에 걸터앉아 먹는 맛은 또 그 어디에 비길 건가.. 소반상 머리에 마주앉아서 찬을 집어주며 건강을 염려하는 내자의 싫지 않은 잔소리도 있을 게다. 허면 소반상 물린 자리에 느긋이 누워서 내자의 잔소리에 장부타령으로 화답할게다.
"나물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지.."
눈감고 누워 솔바람소리며.. 꿀벌이 나니는 가물가물한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보면.. 그렇게 또 한낮의 적요는 찾아들려니.. 그때쯤이면 멀리인듯 가까이인듯 이층에서 내자가 낮게 틀어놓은 이미자 의 노래가 들려올게고.. 점점 감겨드는 눈으로는 영을 넘는 흰 구름이 가까이 다가섰다가.. 멀어졌다간 이내 안겨들 것이니.. 그냥 그 구름을 베고 한가로운 오수에 잠겨들면 좋을 게다.
잠에서 깨어보면.. 보랏빛 맑은 햇살은 그렇게 그렇게 싸리담장을 넘어 밭이랑을 타고 푸르른 산마루쯤을 비출게고...
며칠 만큼에 하루씩은 내자와 함께 읍내 장으로 출타를 해야겠다. 운전석일랑은 내자에게 맡겨두고 의자를 뒤로 한껏 젖혀놓고 누웠는 듯 앉았는듯 창으로 지나는 산마루와 흰 구름을 바라보려니.. 내자는 구성진 옛노래를 부를 것이고.. 허면 나는 노랫소리 중간중간 마다에 김소월, 노천명에 한용운의 시를 암송할게다. 그러다 보면 읍내에 이를 것이니.. 내자는 단골 순대국집 문 앞에다 차를 멈출 것이고.. 김치 깍두기 곁들인 국밥 말아 동동주 탁배기잔을 들다 보면.. 예와서 하나 둘 사귄 지기들이 부를게고.. 허면 권커니 자시거니 한두 잔을 마시다보면.. 서산을 넘는 저녁 해에 얼콰한 얼굴 더 붉으렷다?..
어허라!~ 풍류는 내 것이요.. 저기 저 청산은 또 뉘것인고?..
그쯤에서 파장분위기로 어수선한 잡화점에 들려 합죽선 부채를 고를 것이며 마루에 깔고 앉을 원앙무늬 어여쁜 대방석도 동동주 술 기운에 선듯 사서 내자에게 안길게다. 그즈막에서 돌아갈 길을 재촉할 것이니.. 아..참!.. 그렇지.. 옛것을 유독 좋아하는 머릿결 고운 내자에게는 옥비녀에 참빗 하나를 사주리라. 이왕 지사 거기에다 좌경 하나 더 보태면 좋겠다.
돌아오다가 달이 밝거들랑은 산아래 마을에다 차를 세워두고 산길 을 올라와야겠다. 그 산길에 달은 휘엉청청 밝을 테고.. 앞서 걷는 내자의 달 그림자를 밟아 걷다보면.. 교교한 숲에서는 산비둘기 울 것이고.. 띄엄띄엄 소쩍새소리 들리리라. 허면 무서움 많은 내자는 내손을 가만히 부여잡을 것이고.. 손아귀에 들어온 내자의 파르르~ 떨리는 따순 손 감촉도 좋으리니.. 어여쁜 내자의 옆얼굴을 걸음 멈춰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을 게다.
그 즈음에서 길가양 풀섶에 나란히 앉아.. 나는 달을 올려다보며 한시를 읊어 줄게다. 허면 내자의 따스한 머리가 내 어깨로 가만 가만 기대올 것이고.. 고요히.. 고요히.. 달은 구름을 지날것이고.. 구름은 달을 지나갈 것이다.
만년의 안온한 나날을.. 어제도 오늘같이.. 내일은 또 오늘같이.. 옆에서 같이해주는 내자의 주름살 고운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 보다가 살며시 등에 업고 토담집으로 올라오면.. 노란 장판으로 달빛 가득 쏟아지것다?.. 문 창살에 은은히 어리는 달빛 또한 좋을 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