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관
고린도전서8:10~13
전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 피버스 소속 정상헌 선수가 처형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홧김에 살해하고 잡혔습니다. 그런데 어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은 아내가 살인을 교사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인교사의 진위가 어찌되었든 살인을 지시한 것이 쌍둥이 동생이라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전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습니다.
지난 4월 10일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2012년도 전국 결혼 및 출산동향 조사'와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번 조사는 전국 1만8000가구의 남녀 1만3385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부모의 월평균 양육비 부담이 118만9000원이고 자녀 한 명당 대학 졸업까지 드는 총 양육비가 3억896만4000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평균 수치니까 그렇지 많은 가정들이 더 많은 양육비부담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젊은 남녀가 결혼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결혼을 해도 가정을 책임을 져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유지비용은 결혼을 하는데 적지 않는 부담을 느끼게 하는 것도 현실이지만 결혼을 했다고 해도 아이 낳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 양육비에 대한 부담이 너무나 크니까 말입니다.
이런 부담들이 결국 결혼과 출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는데 부담이 되니까 출산을 적게 하다가 보니까 대체로 자녀들이 하나, 둘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어느 때보다 가족과 형제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야 하는 때입니다. 이전에는 너무나 많아서 무관심해도 되었지만 지금은 가족이 없으면 너무나 외로운 시대이니까 형제는 곧 인생의 중요한 동반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가족구성원의 구조상 하나는 너무나 외롭고 둘은 잘하면 금메달이고 못하면 목메달입니다. 왜냐하면 사이가 좋으면 그보다 좋은 관계가 없고 사이가 나쁘면 평생을 함께 살아가면서 원수지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간에 왜 싸웁니까? 돈이 없어 싸웁니까? 아닙니다. 주도권과 독점력입니다. 존재감과 자존감 때문에 끊임없는 고발하고 부모의 판결로 수습하는 것 같으나 불신의 앙금이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가라앉아 있다가 때때로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올라와 관계에 대한 갈등을 확인해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부모의 유산정리를 객관성있게 하지 않았다 싶을 때 결국 숨어 있었던 앙금이 다시 올라와 관계를 파괴시키는 경우들이 허다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CBS 변상욱기자는 피보다 돈이 진하다. 라는 기사를 쓰면서 1. 두산家 형제의 난에 대해서 형제간에 분식회계 비자금 폭로로 진흙탕싸움이 되었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두산그룹하면 경영철학이 '인화'와 '가족경영' 가화만사성이었지만 이제는 박용오 전 회장이 형제의 난 이후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심리적 외로움을 겪다가 2009년 11월 자택에서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2. 현대家 형제의 난은 현대그룹도 고 정주영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2000년 후계 다툼을 벌이다가 적통을 이어받은 정몽헌 회장의 판정승으로 끝나는 듯했지만 결국 정권에 관련된 비자금 사건으로 2003년 8월 젊은 나이에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3. 삼성家 형제의 난은 현재 진행형으로 장남 이맹희 회장이 1960년대부터 일찌감치 그룹의 후계자로 낙점 받고 활발한 경영 수업을 받다가 경영부실 등으로 아버지와 심각한 불화를 빚게 되고 결국 불명예 퇴진하며 셋째인 이건희 회장이 대권을 승계함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4. 한화家 형제의 난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동생 김호연 빙그레 회장사이에 오랫동안 재산분쟁을 벌이다가 1995년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서 두 형제가 화해하고 재판을 끝냈다고 합니다.
5. 롯데家 형제의 난도 롯데그룹 신격호, 신준호 회장 형제도 재산을 두고 법정다툼을 벌였습니다.
6. 한진家 형제의 난도 한진그룹 총수 일가 형제들은 재산 상속이 불공평하다며 두 차례 소송을 벌였습니다.
7. 금호家 형제의 난도 금호그룹 오너인 박삼구 회장과 동생 박찬구 화학부문 회장 간 갈등으로 형이 동생을 해임하고, 형은 스스로 회장직에서 물러난 사건이었습니다.
2012년 11월 17일 뉴델리 외곽의 한 초호화 농장 저택에서 인도 재벌 차다그룹의 형제가 무장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회동했습니다. 선친 사망 이후 농장 소유권을 두고 다투던 형제의 결말은 참혹했습니다. 동생이 먼저 총을 겨눠 형의 가슴을 명중시켰고, 형의 경호원들은 동생의 명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차다 일가 재산이 100억달러(10조8560억원)라고 합니다. 도대체 돈이 무엇입니까?
2003년 강제규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진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보면 이념보다 형제간의 피와 정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 1950년 6월 형 진태를 맡은 장동건은 진석이라는 동생을 맡은 원빈의 대학진학을 위해 구두닦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고 피난하기 위해 열차를 타려다 대구역사에서 동생 진석이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징집이 되자 형 진태는 동생을 탈출시키려다 실패하고 동생과 함께 징집되어 군대를 가는데 동생을 집에 보내기 위해 죽음을 무릎쓰고 싸웁니다. 결국 동생을 살려서 집에 보내기 위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념 전쟁 중에 그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동생만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던진 감동을 준 영화입니다.
오늘날 과연 이와 같은 형제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하르낙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리스인다운가를 물을 때 답변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 하면서 실제로 원수마귀보다 먼 사이가 형제입니다. 원수마귀는 날마다 싸우다 친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타협해서 하나님 앞에 죄송한 삶도 살지만 형제는 무관심과 왕따와 비난의 대상이 되다가 보니까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담이 무너졌다고 말을 하지만 담이 더 견고히 쌓여 있는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이 성경을 보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형제의 난은 시작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가인과 아벨의 싸움이 결국 시기심으로 동생을 살인하게 되는 비극으로 마치게 됨을 볼 수 있고 에서와 야곱 사이에도 장자권과 축복권으로 인해 형제간에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하는 비운의 형제들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누가 더 크냐? 누가 으뜸이냐를 놓고 서열다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형제입니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95세)가 폐렴 증세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정치범으로 감옥에서 27년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석방되어 처음 실시한 평등선거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뽑힌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전혀 보복하지 않고 모두를 품어 주는 정치를 했습니다. 그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길래 그리했을까? 그의 어록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성인은 늘 청렴하려고 노력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4분의 3을 악인으로 살았어도 성인으로 추앙 받는 것은 그 사람이 나머지 4분의 1을 성인으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생활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오.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들, 차분하면서도 변덕스럽고 강하면서도 약하고 유명하면서도 악명 높은 사람들, 우리 몸에 흐르는 피 속에서 구더기와 살충제가 매일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 말이오."(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라는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의성품에 참예하는 것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도 덕도 지식도 절제와 인내와 경건이 다 형제우애를 위해서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의 성품을 닮아가는 제일 높은 단계의 성화된 모습이 사랑을 더한 형제우애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예로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입니다. 요나단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다윗을 위해 자신의 왕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우정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오직 형제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본이 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형제를 위해서 내가 아는 지식의 자유를 누리기보다 형제를 위해서 그 자유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가 실족하는 일이 있다면 형제를 위해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대단한 결심입니다. 여러분 금식해보셨습니까? 사람이 먹지 않으면 도대체 뭘해야 좋을지를 모릅니다. 너무나 시간이 많고요. 시간이 잘지나가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누려야 할 것 중에 먹는 비중이 얼마나 많이 차지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형제를 위해서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제가 우리 형제들에게 묻겠습니다. 형제를 위해서 바울처럼 살아보겠습니까? 형제가 실족할까봐 먹을 것을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결단하셨습니까? 그러면 나의 형제들에게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술과 담배를 먹고 피우면 제가 실족할 수 있으니까 영원히 먹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정도는 결심해야 저의 형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족할 형제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형제관이 곧 민족관이 되고 인류애를 이루는 평화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