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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표의 시세계
―외로움, 리듬, 직관, 병치, 현실
이은봉
1. 여는 글-좋은 시인, 좋은 스승
내가 석사논문을 제출한 것은 1980년 12월의 일이다. 1980년대는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가치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출발된다.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개막된 것이 1980년대이다. 1980년 봄에 벌어진 이들 역사,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는 물론 1990년대까지도 크고 작은 들불로 타오른다.
1981년 모 산업체 부설학교 국어교사직에서 해직된 나는 1980년대 초 몇 년을 모교에서 교양국어 시간강사를 하는 한편 종합문예 무크지『삶의 문학』등을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1983년과 1984년에 간행된 『삶의 문학』5집과 6집에 대한 문단의 반향은 뜻밖에도 매우 컸다. 『삶의 문학』의 반향이 커지면서 등단의 절차를 밟는 등 나도 점차 시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84년 초의 어느 날인 듯싶다. 우연한 기회에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에 교수로 계시는 홍희표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홍희표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작문과목을 배운 은사이시기도 하다. 이 무렵 선생님의 시집 『살풀이』(문학과지성사, 1984)가 나왔는데, 나는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학생들이 만드는 작은 문예지에 서평을 쓰기도 한다.1) 이제 막 평론이라는 형태의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이러한 일 등으로 하여 나는 홍희표 선생님과 매우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1984년 봄부터는 목원대학교에서 교양국어 강의도 하게 된다.
해가 바뀌어 1985년 8월, 이른바 『민중교육』지 사건이 터져 나를 비롯한 『삶의 문학』의 친구들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어쩌다 보니 이 사건에서도 나는 배후조정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지금은 다 잊혀졌지만 당시에는 이 사건에 연루된 자들 모두 빨갱이로 대서특필되고는 했다. 나로 하여 홍희표 선생님이 그때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많이 죄송스럽다. 안기부와 보안사에서 가해오는 온갖 압력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압력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내게 강의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안기부의 압력은 어떻게 막아냈으나 보안사의 압력은 막아내기 힘드니 날더러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하며 힘들어 하던 선생님의 모습이라니! 학장실로 불려가(그때만 해도 목원대학은 단과대학이었다) 강요된 진술서를 쓰고 다시 교양국어 강의를 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술서의 내용은 대강 『민중교육』지 사건의 수괴(?)였던 김진경 시인과의 관계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하여 결국 침례교신학대학 강사직에서는 떨려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중에도 시인 홍희표의 창작열은 오히려 더욱 타오른 듯싶다. 시인으로서 그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것도 실제로는 이 무렵이 아닌가 한다. 1987년에는 새 시집 『금빛 은빛』(창비사)을 상재하는데, 청에 따라 내가 해설을 맡아 시집의 말미를 더럽힌 바도 있다.2) 이후에도 홍희표 시인과 나는 여기서는 다 밝힐 수 없을 만큼 깊은 관계를 지속해온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시인 홍희표의 시세계에 대해 이런저런 군말을 덧붙이려고 하니 멋쩍고 쑥스럽기만 하다. 멋쩍고 쑥스러운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 당시에 간행된 시집『금빛 은빛』에 수록되어 있는 시 한 편을 읽어 본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오면
임진강변의 민들레
하이얀 낙하산 달고
남으로 남으로 떠나가네.
한양으로 부산으로
달리고 싶어도
달리지 못하는 鐵馬.
오월이 가고 유월이 오면
임진강변의 민들레
하이얀 낙하산 달고
북으로 북으로 떠나가네.
평양으로 신의주로
달리고 싶어도
달리지 못하는 鐵馬.
금빛 은빛 혼령만 오가고…….
―「금빛 은빛―씻김굿 16」 전문
이 시에서 시인 홍희표는 각 연이 이루는 abab의 구조를 변용해 시를 전개시키고 있다. 따라서 형식의 면에서는 매우 전통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의 면에서는 상당히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초에는 통일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하게 여겨졌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통일문제는 민족문제이거니와, 당시 민족문제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핵심고리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980년대 한때에는 이처럼 불온하고 전위적인 시를 써온 것이 시인 홍희표이다. 하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최근의 그의 시가 드러내는 분위기는 다소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갑년을 맞아 지난 2006년에 간행한 15번째 시집 『물땅땅이도 때때로』(문학아카데미)에 드러나 있는 정서가 특히 그렇다.3) 나이가 들면서 고독이 심화되는 것은 시인 홍희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2. 외로움 혹은 소외
시인은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 곧 문학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문학활동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다. 하나는 창작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문인활동이다. 창작활동은 말 그대로 좋은 작품을 쓰는 일을 통해 문학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고, 문인활동은 각종 문단의 업무나 문예지를 발간하는 일을 통해 문학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정작의 문학활동은 말할 것 없이 창작활동이다. 방구석에 틀어박혀서라도 좋은 작품을 써내는 일이 중요하다. 좋은 작품을 써내는 일이 일차적인 문학활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활동이 문인활동을 제거한 채 창작활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인활동은 대부분 문단활동을 통해 이루어지거니와, 문단활동은 결국 문학작품을 널리 보급하는 일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4)
새삼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시인 홍희표는 문단활동을 포함한 문인활동으로부터는 줄곧 소외되어온 바 있다. 물론 이때의 소외는 시인 홍희표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문인활동의 밖에서 저 스스로 고독을 선택해온 것이 시인 홍희표라는 것이다. 문인활동으로부터 그가 저 스스로를 소외시켜온 것은 무엇보다 이들 활동이 지니고 있는 세속성과 천박성 때문으로 보인다. 순결하고 지순한 영혼을 지니고 있는 그로서는 아무래도 이들 활동이 지니고 있는 세속성이나 천박성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서는 세속성이나 천박성을 선택하기보다는 외로움이나 고독을 선택했으리라는 얘기이다. 세속성이나 천박성을 멀리 하게 되면 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외로움이나 고독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다.
꽃샘추위처럼 잉잉 놀라워
마침내 으깨어진 채
끝없이 무장해제되어
아스피린으로 젖어드는 외로움
금강 물줄기 밑에서
아, 눈물 술 마시기
흰수염 끝에서
정리해고 같은 시쓰기
―「견지낚싯대」 부분
이 시는 “아스피린으로 젖어드는 외로움” 속에서 “정리해고 같은 시쓰기”에 빠져 있는 시인 홍희표의 심리적 현존을 담고 있다. 물론 이 시에서 시쓰기를 정리해고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간 낯설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시인 홍희표에게 시쓰기는 정리해고 같은 외로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만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이때의 외로움이 오직 아프고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른 시에 “달콤새콤 시를 쓰는/아니 써야 하는 외로움”(「老犬心」)이라는 표현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시인 홍희표는 문인활동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저 스스로를 소외시켜온 사람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일상의 삶은 언제나 자본을 위주로 진행되고 있거니와, 그가 파악하는 일상의 삶이 “세상을 증권시세로 읽는”(「그 세상」) 일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상을 증권시세로 읽은 사람들로부터” 그가 저 자신을 소외시키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세상을 증권시세로 읽는 사람들로부터의
깨금발 짚고 끙끙대는 사람들로부터의
눈뜬 소외는 검푸르다 죽비소리!
그 세상에 얼씨구 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붉으락거리며 사는 사람들로부터의
잠든 소외는 더듬거린다 별꽃나물!
그 세상을 아는 체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마지막 쥐불을 놓는 사람들로부터의
소외로부터도 소외되는 소외, 그러나……
―「그 세상」
이 시에서 시인 홍희표의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이다. 여기서 그가 ‘이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세상과의 거리를 강조하고 싶어서이리라. 이에는 마땅히 ‘그 세상’이 나의 세상이 아니라 남의 세상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남의 세상인 ‘그 세상’으로부터 그가 소외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저 자신이 생각할 때도 그는 “소외로부터도 소외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시인 홍희표는 외로움이 극에 이르러도 저 자신을 쉽게 허물지 않는다. 오히려 저 자신의 삶에 고독과 외로움을 불러들이는 것이 시인 홍희표이다. 물론 이렇게 고독과 외로움을 불러들이는 데는 저 자신의 진실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감추려는 의지도 깊이 도사려 있다.
남 욕하기를 좋아하고, 남 시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시인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어린 아이처럼 철이 없을 분만 아니라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시인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시인 역시 욕을 먹으면 고통스럽고, 시기를 당하면 괴롭기 마련이다.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하여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기는 시인 홍희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세속의 문단에서 온갖 시비에 시달리기보다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을 사는 낫다고 생각해온 것이 그이다.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세계와 대립하거나 갈등하는 마음을 갖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3. 개성 있는 심미의식
홍희표의 시는 독특한 심미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좀더 관심을 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심미의식은 리듬의식으로부터 기인한다. 이를테면 그의 시의 아름다움은 기본적으로 리듬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강렬한 리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리듬은 시를 시답게 하는 기본적인 자질이다. 이때의 리듬은 일상어의 호흡, 곧 일상어의 배열을 특별한 질서 속에 강제로 집어넣는 작업을 통해 현현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특별한 질서는 겉으로 드러난 외재적인 틀이 아니라 속으로 감추어진 내재적인 틀을 가리킨다.
시에 함유되어 있는 내재적인 틀, 곧 내재적인 리듬은 일단 시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심장의 박동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심장의 박동으로서 리듬은 시인 자신의 생명의 호흡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시의 리듬이 이처럼 심장의 박동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나 사회가 지니고 있는 리듬도 시의 리듬을 형성하는 데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체 밖에 존재하는 자연이나 사회의 리듬도 시의리듬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그의 시의 리듬은 남다른 개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시에서는 경험하기 쉽지 않은 강렬하고 촉급한 리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강렬하고 촉급한 리듬은 물론 단숨에 후다닥 내달리며 빠르게 스타카토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의 효과를 뜻한다.
가격감동/ 세일…… /세일
봄햇살/ 아래/ 쇼원도우
지렁이/ 글씨로/ 물들고
검붉은/ 우리/ 마음은
재취업/ 이력서의/ 먹빛 잉크
쓰러질 듯/ 저려올/ 때
부도정리/세일…… /세일
흙먼지 찌/든 보도블록/ 틈새
문득/ 발길에/ 차이며
떠도는/ 새싹/ 하나
―「틈새」전문
위의 시는 한 행을 3음보격의 리듬으로 분할해본 예이다. 3음보격의 리듬은 본래 활기차고 경쾌하며 동적이고 격정적인 정서를 산출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의 시가 강렬하고 촉급한 리듬을 바탕으로 빠르고 속도감 있는 소리의 울림을 주는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빠른 운동성을 바탕으로 활기차고 생기 있는 정서를 산출하는 기여하고 있는 것이 단숨에 촉급하게 읽히는 그의 시의 리듬이다.
활기와 생기를 생산하는데 목표가 있는 만큼 그의 시는 잠시도 3음보격의 리듬에 안주하지 않는다. 3음보격의 리듬을 끊임없이 변형, 생성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리듬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다음은 새로운 리듬을 위해 한 행을 2음보격 리듬으로 운산(運算)하고 있는 예이다.
진눈깨비/ 휘날리면
얼레지꽃/ 피듯
눈밥을/ 먹고
에헤―/오신다
오신다,/ 우별신!
는개/ 하늘거리면
홀아비바람꽃/ 피듯
비밥을/ 먹고
에헤―/ 오신다
오신다,/ 좌별신!
황사바람/ 튀어오르면
솔붓꽃/ 피듯
모래밥을/ 먹고
에헤―/ 오신다
오신다,/ 서낭님!
―「실직천사」 전문
이 시는 빗금을 통해 각 행의 리듬을 2음보격으로 분할해본 예이다. 물론 그 까닭은 시인 홍희표가 각 행의 리듬을 그렇게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시의 각 행을 지극히 의도적으로 1음보 대격인 2음보격의 리듬으로 묶어 놓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에서 그는 1음보 대격인 2음보격의 리듬으로 모든 시적 자질들을 응축시키고 있다. 구태여 그가 이 시에서 2음보격의 리듬을 추구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로서는 어쩌면 2진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2바이트의 컴퓨터 언어를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리듬은 일종의 모형화된 소리이다. 그의 시는 모형화된 소리, 곧 리듬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어 좀더 관심을 끈다. 이렇게 리듬에 집착하다 보니 때로 그의 시는 리듬 그 자체로 존재하기도 한다. 더러는 그의 시가 소리의 울림 그 자체로 존재할 때도 있다는 뜻이다. 소리의 울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시는 결국 의미가 제거되게 된다. 의미가 제거된 시는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체계적인 질서 자체에 머물 수도 있다.
물론 인간은 우주의 소리나 자연의 소리 택해 아름다움을 고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시는 본래 인간의 언어를 매개로 하여 태어나는 심미적인 정서구조이다. 뿐만 아니라 시는 리듬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언어예술과 변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과도한 리듬에 의해 의미가 제거된 시도 때로는 사물 그 자체나 존재 그 자체에 가 닿을 수 있지만 말이다.
초승달 떠나고
막사발 밑 가시덤불
목쉰 기침으로 사라지고
토막잠 속 무당새
갈림길 사이에서
개망초꽃으로 피고
지평선 위 무한천공
피어 흩날리고
보이지 않는 눈물잔.
―「무당새」 전문
이 시에서 시인 홍희표는 무당새라는 존재의 순환하고 유전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1연에서는 “목쉰 기침으로 사라”진 무당새가 2연에서는 “개망초꽃으로 피”어나고, 3연에서는 “보이지 않는 눈물잔”으로 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순환하고 유전하는 무당새라는 존재를 구체적으로 실감하기란 별로 쉽지 않다. 빠른 리듬에 파묻혀 앞에서 말한 의미가 그만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리듬이 소리의 체계적인 질서에 그쳐버리는 것은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도하게 동일한 패턴의 리듬이 반복되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얼마간은 상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상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 홍희표가 선택하고 지향하는 세계는 노래이다. 그가 노래를 선택하고 지향하는 것은 시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시가 본래 노래에서 불거져 나온 언어예술양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리 와요, 이리 와요
붉은 바다 몰려오고
절망의 목소리 들리네
―이젠 꿈꾸지 않아요
두 마리 달팽이
햇빛에 눈멀고
짓밟히고 끓어오르고 잊혀지네
―헤어져요 이제 그만
괴발개발 그대를 위하여
이 시는 2절의 가사와 후렴귀로 된 노래형식을 취하고 있다. 2절의 가사와 후렴귀로 된 노래형식은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의 시집 『물땅땅이도 때때로』에서만 하더라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노래형식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침」「시쓰기」「시간의 주름」「팬터마임」「적막강산」「의뭉떨기」 등의 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실직천사」「오늘도 장마중」「정동진역 ㆍ2」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 가운데에는 3절의 가사와 후렴귀로 된 노래형식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처럼 시인 홍희표는 시를 노래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면이 없지 않다. 그의 시의 도처에서 변형된 정형성이 엿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래형식은 홍희표의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시가 노래 자체는 아니다. 노래로부터 불거져 나오기는 했지만 이미 저 고유의 자율적인 영역을 지니는 것이 시이다. 물론 시의 고유성과 자율성은 행 단위로 구현되는 리듬으로부터 산출되는 정서적 아우라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시인 홍희표는 자신의 시에서 의미보다는 리듬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서적 아우라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셈이 된다. 시의 내용보다는 시의 형식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이 그인 것이다.
4. 직관적 정서 혹은 병치의 이미지
노래를 지향하는 시는 이야기를 지향하는 시보다 좀더 개성 있는 정서에 집착한다. 시에서의 정서는 주로 노래의 핵심자질이기도 한 리듬과 어조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정서에 주력하는 시는 심미적 아우라를 불러일으키는데 초점을 두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심미적 아우라는 낭만적 열정에 기초해 창출된다. 심미적 아우라를 창출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시는 상대적으로 직관에 기대어 사물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개성 있는 서정, 자성 있는 정서를 소중히 여기는 시는 일단 순간적인 인식에 기대어 문득 별안간 갑자기 사물을 포착하려는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 시는 본래 이야기가 만드는 상상력의 즐거움보다는 사물의 본질에 직핍하며 획득하는 기쁨을 추구한다. 이 말은 사물의 본질에 ‘禪的’으로 파고들며 획득하는 기쁨을 추구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론 ‘禪的’이라는 말은 선문답적이라는 말로 이해되어도 좋다. 그의 시의 경우 선적 인식을 선문답적 형식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예가 적잖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선문답 형식은 돌연한 질문과 돌연한 대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예의 그의 시집 『물땅땅이도 때때로』에서만 하더라도 「장님 거미」「현 위에서」「산」「울릉도 3」「기부스」등이 선문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대 하느님은 누구니?
중생대 한반도의 익룡이야!
보아라 은행나무 열매를……
그대 하느님은 누구니?
원효가 만난 해골바가지야!
보아라 늦가을 아기단풍을……
사랑이 떠나간다, 내 푸른 숨길
― 「장님 거미」전문
이 시 역시 후렴구가 있는 2절로 된 노래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1연과 2연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선문답형식의 엉뚱한 물음과 엉뚱한 대답이 이어지고 있음을알 수 있다. 그렇다. “그대 하느님은 누구니?”라는 질문과, “중생대 한반도의 익룡이야!”라는 대답 사이에서 논리적인 친연성(親緣性)을 발견하기는 극히 힘들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구절의 “보아라 은행나무 열매를……”과 같은 표현도 앞의 질문 및 대답과 곧바로 연결시켜 이해하기가 거의 어렵다. 이 시(노래)의 후렴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이 떠나간다, 내 푸른 숨길”과 같은 언술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는 이처럼 비논리적인 이미지의 중첩과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적잖다. 따라서 일상의 언어습관으로 대하면 예의 선문답과 그에 따른 언술을 바르게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만드는 이미지가 일단은 일상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점에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보여주는 제반 이미지가 매우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은 각각의 이미지가 독특한 비약을 통해 신선한 놀라움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시를 통해 드러나는 선문답적 이미지는 그가 자신의 삶에서 마주하는 존재들을 禪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문득, 별안간, 갑자기, 퍼뜩 대상을 깨쳐 알고자 하는 것이 홍희표 시의 인식론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 홍희표는 자신의 시적 대상을 문득, 별안간, 갑자기, 퍼뜩 깨닫는 형식을 통해, 다시 말해 禪的 인식을 통해 획득하려고 한다. 선적 인식의 보편적인 특징은 話頭를 참구하는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한다는 점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선불교의 화두가 대부분 이미지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홍희표 시의 인식론적 특징을 禪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5) 그의 시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대상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이들 이미지를 반복, 병치시키는 방식을 통해 드러내고 있어 더욱 주목이 된다. 그의 시에서 반복, 병치되고 있는 이미지는 절, 행, 연 등 다양한 층위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반복과 병치는 그의 시의 또 다른 형식적 특징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① 지구가 햇님 둘레를
좋아라 맴돌 듯
달님이 지구 둘레를
좋아라 맴돌 듯
―「금간 더듬이」 부분
② 몸섞고 섞는 금강물이었다가
피 뿜는 낙엽이었다가
(…중략…)
살점 뜯는 진저리이었다가
찔레나무 사마귀이었다가
―「아뿔사, 칼끝」 부분
③ 그러지 말아요
계룡산에 봄눈 난분분하니
노루귀 붉은 절망감에
다시 잠들지 않게―
그러지 말아요.
동해 쪽빛바다 광풍이 부니
버들개지 꽃샘바람에
두려움으로 갈 길 잃지 않게―
―「복수초 가슴」1. 2연
①의 시는 절의 차원에서 통사구조가 반복, 병치되고 있는 예이다. 절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1, 2행의 통사구조가 3, 4행에서 반복, 병치되는 가운데 다양한 심미적 효과를 산출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심미적 효과는 원활한 이미지 전개, 활기찬 리듬 등을 가리킨다. 이들 장치를 바탕으로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언술적 특징이다.
②의 시는 행의 차원에서 통사구조가 반복, 병치되고 있는 예이다. 이 시는 행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반복과 병치를 통해 독특한 심미적 아우라를 생산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이때의 반복과 병치는 강화된 리듬을 생산해 시의 이미지 전개는 물론 의미의 전개에도 커다란 도움을 준다.
③의 시는 연의 차원에서 통사구조가 반복, 병치되고 있는 예이다. 이 시 1연과 2연은 동일한 통사구조가 반복, 병치되는 가운데 단어만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의 차원에서 통사구조가 반복, 병치되면서 태어나는 리듬을 바탕으로 독특한 심미적 효과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처럼 홍희표의 시는 대상에 대한 선적 인식을 반복과 병치의 형식을 통해 드러내는 특징을 보여준다. 대상으로부터 문득, 별안간, 갑자기, 퍼뜩 획득하는 직관적 인식을 통해 저 자신이 깨닫는 시적 진실을 순간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의 한 경향이다. 물론 이때의 시적 진실은 오늘의 삶의 현실이 지니고 있는 온갖 문제에 대한 시인 홍희표 나름의 작은 깨달음이기 쉽다.
5. 닫는 글-현실의 두 모습
홍희표의 시에 드러나 있는 현실은 대부분 비판적 대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비판적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문제의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의 시에 존재하는 문제의식은 충만한 고발의식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실천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의 성격을 보여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문제의식이 깨어 있는 자아의 양심의 차원을 넘어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양심의 차원으로 존재하는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현실은 대강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관찰적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적 현실이다. 관찰적 현실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통해 획득되고, 경험적 현실은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태도를 통해 획득된다.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현실은 대부분 보편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가치, 즉 공적인 가치를 담고,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은 대부분 특수하고 구체적인 가치, 즉 사적인 가치를 담는다.
공적인 가치를 담는 시는 확장적인 시야를 통해 좀더 넓은 세계를 지향한다. 공적인 가치는 본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실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실은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현실을 가리킨다. 그렇다. 그의 시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지속적으로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현실을 탐구해왔다는 점이다.6) 다음은 이른바 IMF의 구제 금융에 따른 민중의 고통을 담아내고 있는 시이다.
새나라 어린이들은
기린 같은 눈치코치 보며
프리지아 피자를 먹고
사루비아 치킨을 시키고
오, 숨죽여 웃는 아이엠에프
거품 찢겨져 나가고 보니
뽀드득 뽀드득―
흰 옥돌처럼 멍울지는
맨몸 생살이었구나.
헌나라의 내외는
보리깜부기 같은 눈치코치 보며
순대국을 먹고 접시꽃
막걸리 마시고 호박꽃
아이엠에프 신음소리, 오!
잡아올린 빙어새끼 맹키로
푸드덕 푸드덕―
거미줄엔 이슬방울
뚝뚝 지는 눈물 노을이었구나.
―「눈치코치」전문
이 시에서 ‘새나라’나 ‘헌나라’는 ‘한나라’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 어휘이다. 이들 ‘새나라’나 ‘헌나라’는 IMF의 구제금융을 불러온 한나라당을 연상시키기 위한 시적 장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IMF의 구제금융으로 하여 민중의 “맨몸 생살이” “흰 옥돌처럼 멍울지”고 있다는 점이다. “잡아올린 빙어새끼 맹키로/푸드덕 푸드덕”대고 있는 민중의 “뚝뚝 지는 눈물”을 진심으로 아파하고 있는 것이 시인 홍희표라는 것이다.
물론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민중에 대한 연민은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른 시「물 땡땡이도 때때로」에서는 IMF의 구제금융으로 정리해고된 사나이, 즉 “추풍낙엽을 입은 사나이”가 그려지고 있고, 또 다른 시 「복수초 가슴」에는 “지난겨울 정리해고”된 “눈물도 닦지 못하는 사람들”이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밖의 시 「실직천사」에서는 직장을 잃고 눈밥, 비밥, 모래밥을 먹는 사람이 우별신, 좌별신, 서낭님으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노동자들의 과도한 업무를 “1초에 60회 나래질하는 벌새”에 비유하고 있는 「오늘도 장마중」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엘리뇨와 라니냐” 등 이상기후를 비판적으로 노래하면서도 “해오라기 두어 마리”와 “실직자 서너 사람”을 대조ㆍ비교하고 있는 시 「지긋지긋한 그대, 비」도 유사한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예이다.
그의 시에 비판적 시각으로 포착되고 있는 현실은 우선 이처럼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객관적인 관찰’이라는 것은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현실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접근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현실 중에는 직접적인 경험의 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의 시 중에는 사적이고 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삶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는 예도 적잖다는 뜻이다.
그의 시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사적이고 개적인 현실은 대부분 여행이나 유람, 산책 등의 체험을 반영한다. 그래서일까. 이들 시는 객관적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주관적 참여자 시점을 취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인이 직접 화자로 등장하여 자신의 행위를 묘사하거나 진술하는 시점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초당에 가면
작설차 마시고
떠올리네, 일지암 솔바람 소리
뜸부기 되어
호박죽 먹고
생각하네, 보릿고개 눈 먼 날
초당에 가면
홍시 하나 삼켜 버리고
불러보네, 별빛 최보살님.
―「초당에서」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초당은 아마도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인 듯싶다.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도 등장하니 만큼 이러한 유추는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이 시는 시인 홍희표가 전남 일대를 여행하거나 유람하며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남 일대를 여행하며 겪은 체험을 대상으로 하는 그의 시는 예의 시집 『물땅땅이도 때때로』에서만 해도 「땅끝 마을」「소록도」 등을 더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이들 시에 함유되어 있는 체험 중에는 몸으로 겪은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겪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위의 시에서만 하더라도 시인은 초당만이 아니라 “작설차 마시고/떠올리”는 “일지암 솔바람 소리”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2연에서는 “뜸부기 되어/호박죽 먹고” “보릿고개 눈 먼 날”을 “생각하”는 것이 시인 홍희표이다. 초당에서 “홍시 하나 삼켜 버리고” “별빛 최보살님”을 “불러보”는데 정작의 초점이 있는 것이 이 시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여행이나 유람, 산책의 체험을 담고 있는 그의 시는 부지기수이다. 「혼의 뼈」나 「사량도」도 그 중의 하나인데, 특히 「혼의 뼈」는 “으악새를 다시 보려고” 찾은 “신불산 등성이에”서의 심리적인 체험을 담고 있어 좀더 주목이 된다. “으악새를 10여 년 전/‘혼의 뼈”라고 명명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와 관련된 다양한 상상력을 펼쳐내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산책 삼아 나선 계룡산에서 봄이 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봄소식」, “산악회에 끌려/삼천포 앞 바다에 있는/사량도”를 찾고 있는 「용암포구에서」 등도 여행을 하며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그의 시이다.
이들 여행 체험을 담고 있는 그의 시는 대부분 화자가 시에 직접 개입하는 일인칭 참여자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형식의 시는 상대적으로 시인의 감정이 절제되어 있지 않기 마련이다. 객관적 리얼리티보다는 정서적 아우라를 좀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이들 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가 시인 홍희표 자신의 현존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가운데 진전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 지는 미지수이다. 돌이켜 보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홍희표의 시가 앞으로 가꾸어 가야 할 진정한 과제 아닌가 싶기도 하다.(2008. 4. 5 {홍희표시 다시 읽기 2} 종려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