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이나 연말이면 영화 팬들을 가슴 설레게 했던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3편 "왕의 귀환"으로 완결되었다. 마무리가 남아있는 1,2편의 결론이 기대되었고 더욱 완성도가 높은 3편이었기에 연말 영화 팬들을 크게 만족시켰다. 이 시리즈는 영국 작가 J. R. R. 톨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고대 세계를 무대로 한 장대한 스펙터클을 펼쳐낸다. 악한 세력 사우론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고난스러운 여정을 감당해내는, 사람 크기 절반 키인 호빗족 소년 프로도와 여덟 명의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원정대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상상에 불과한 것 같은데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판타지에 대한 거부감만 떨쳐버리면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크리스천들 중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폭력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사람이 아닌 '괴물'들을 죽이는 장면이어서인지 느낌이 훨씬 덜하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필자 자신도 사실적인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편식하는 편이어서 그런 태도에 공감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보자. 소설이나 영화란 어차피 픽션이고 상상력에 기초하는 것 아닌가. 사실성이 많은 영화도 사실은 픽션이다. 실화를 다룬 영화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영화는 영화 자체의 허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조금 더 가면 어떤가. 사회적 금기에 해당하는 도덕적 경계선마저 마음껏 상상하여 막가는 영화들도 난무하는 형편에 이런 <반지의 제왕>류의 판타지 영화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느낀다면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혹자들은 이 작품이 동화를 넘어 신화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J. R. R. 톨킨의 원작 소설에 대해서 '쓰레기 같은 작품'이라고 악평했던 사람들에 반해서 우리가 잘 아는 C. S. 루이스가 '세기적 걸작'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극찬했던 것은 그가 톨킨과 친한 친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막론하고 이 작품이 가진 크나큰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크리스천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이 영화를 그저 재미로 보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1편보다는 2편, 그보다는 3편으로 갈수록 더욱 빠져들게 하는 전쟁 장면에만 빠져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영화의 바른 메시지를 전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겠는가.
또한 교육적 차원에서도 이런 종류의 영화를 주의 깊게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크리스천들이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과 요소에 크리스천 마인드를 반영한 '크리스천 영화'를 아직은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처지에 세상에서 만들어낸 좋은 영화를 우리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차선책이긴 하지만 이런 노력마저 않는다면 문화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경 속에서 가져온 많은 상징과 이미지
옥스퍼드 대학교 고대 영어과 교수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톨킨은 그의 소설 속에 성경적 이미지와 상징들을 많이 넣었다. 물론 성경의 본래적 의도나 문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 속에는 여러 개념이 뒤섞여 있으며 성경만이 아니라 다른 신화나 고전 작품들 속에서 수많은 이미지들을 가져왔다. 여기서는 톨킨이 의도한 성경의 상징을 피터 잭슨 감독이 그대로 가져와서 영화 속에 살려낸 이미지들을 눈에 띄는 것만 살펴보자.
호빗족의 스미골이 친구 데아골과 함께 낚시를 하다 우연히 반지를 발견한 친구를 미워해 살인하는 장면에서 성경 속 가인이 형제 아벨을 죽인 사건을 느낄 수 있다. 이후 스미골이 자신 속의 또 다른 자아인 골룸과 선악 간의 갈등을 하는 모습은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는 갈등을 기억나게 한다. 중간 대륙의 지배를 위해 '두 개의 탑' 동맹을 맺은 악한 세력의 절대자 사우론과 그를 추종하는 마법사 사루만(이들은 '사'탄과 돌림자를 나눈 형제들인가?)의 모습에서 바벨탑 이미지를 발견하며 '모리아' 땅굴에서 선한 마법사 간달프가 고대의 악마 발록과 맞서 싸우다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서 모리아 산의 이삭을 떠올릴 수 있다.
곤도르의 왕통을 이어갈 인간 아라곤이 죽은 자의 산에 들어가 죽은 영의 군대를 깨워 참전하는 것은 마치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난 모습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힘을 다해 불의 산으로 가려고 했으나 지쳐 쓰러진 프로도를 둘러메고 가는 동반자 샘의 모습 속에서는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프로도를 둘러메니 십자가처럼 보인 것이 이채롭다. 그런데 곤도르의 섭정왕이 산 아들을 화장시키며 자신도 함께 죽으려고 하면서 불더미 속에서 팔을 벌린 십자가 모양과는 차원이 다르다.
2편에 나오는 숲의 지배자들인 엔트들의 반격은 사루만이 나무들을 남벌했기 때문이다. 사루만은 성경이 말하는 전쟁 법칙 중 나무는 적이 아니므로 베어버리지는 말라는 교훈을(신 20:19) 망각했기 때문에 나무들의 반격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간달프가 미나스티리스 전투에서 호빗족 피핀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고 우리가 걸어갈 또 하나의 여정이라"면서 하얀 백사장과 태양빛, 초록빛 나라와 여러 음식들을 머리에 떠올려 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천국을 기대하는 듯하다. 아라곤이 죽은 자들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승리한 후 왕의 대관식을 치르는 모습 속에서 심판주로 오시어 영원히 세상을 통치하실 예수님의 재림을 상상할 수 있다. 자기 고향 샤이어만을 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프로도의 모습에서는 마치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보는 듯하다.
수(數)의 상징과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 대로 이 소설이나 영화 속에는 성경 속의 상징 외에도 여러 작품들 속에서 이미지를 가져온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놓치지 않고 반영한 소설 속의 수 상징도 더러 눈에 띈다. 로한 왕국의 헬름 계곡 전투 때 300명으로 적 1만 명을 상대해야 한 것은 마치 기드온의 300용사들을 상기시킨다. 안개가 깊은 산으로 40일을 가야 절대반지를 파괴할 모르도르에 이른다고 할 때의 40도 성경 속에서는 자주 나오는 숫자이다. 반지원정대가 임무를 완수한 기간이 13개월인데 이것은 서양인들이 싫어하는 13이라는 숫자를 깨뜨린 징크스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숫자 중 중요한 상징 하나는 절대반지의 숫자에 관한 것이다. 하나의 절대반지이지만 모든 반지들을 지배하기 위한 절대반지가 사실은 세 개이다. 톨킨의 소설 세 권의 각 권 앞에 쓰여 있는 동일한 시에 그 내막이 나온다. 엘프(요정)들의 전설로 내려오는 시에서 절대반지에 대한 묘사가 사실은 세 개이다. 다른 반지들을 찾아내기 위한 절대반지 하나, 그것들을 데려오기 위한 절대반지 하나, 그것들을 가두기 위한 절대반지가 각각 하나씩이다. 간달프가 절대반지를 불에 달궈 프로도에게 보여주면서 엘프의 옛날 말로 쓰인 글씨를 해독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이렇게 '하나뿐인 세 개의 반지'는 마치 한 하나님이지만 세 분으로 존재하고 사역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3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엘프의 여왕도 이제 세 개의 반지가 통치하는 시대가 사라졌고 인간이 통치하는 시대가 왔다고 선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수 상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상징성과 이미지들이 이 영화의 기독교적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작자 톨킨이 의도했고 피터 잭슨 감독이 반영한 신학적인 의미가 틀림없이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이제 보다 더 중요한 이 영화의 신학적 메시지를 살펴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