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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통치구조와 정치활동
단원의 길잡이
정치사란 국가와 사회의 운영을 둘러싸고 벌이는 정치활동의 역사이다. 정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활동의 주체인 정치세력, 정치세력이 활동하는 틀인 정치구조, 그들이 정국을 운영해 나가는 구체적인 실상인 정치운영, 그 운영의 논리인 정치 운영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또한 정치 활동의 고리가 되는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정치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시기별로 정치 세력의 존재 형태와 성격, 통치 체제의 정비와 운영, 각 시대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백성의 생활 안정을 위한 정국의 운영 방향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정치활동은 우리 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해 온 과정이고, 통치 구조의 변화 과정도 당시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노력한 결과로 나타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1. 고대의 정치
고대국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왕정 체제였다. 왕의 권력은 점차 강화되어 전제화되었고, 귀족들은 왕과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귀족들은 원래 부족 사회의 족장 출신으로서 소수의 혈연적 특권 계층이고 매우 폐쇄적인 신분이었으므로 지방 세력이나 다른 세력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조직한 통치체제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아직 관직 체제가 완비되지 않았고, 행정 업무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정국의 운영도 합리성이 부족했고, 힘의 논리가 더 작용하였다. 특히 영토 확장을 위하여 주변 국가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므로 군사력의 핵심이 되었다.
1. 고구려 전성기인 5세기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의 내용과 그 의미를 알아보자.
2. 백제의 사비성 천도 이후 6세기 한반도의 정세 변화를 알아보자.
3. 신라의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 전제 왕권의 확립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고대의 세계 (p 47)
동(東)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을 이룬 중국은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주(周)나라가 쇠퇴하면서 춘추 전국(春秋戰國) 시대의 혼란기를 겪었다. 진(秦 B.C. 221~205)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진(秦)은 중앙 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고, 뒤를 이은 한(漢)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서역(西域)과의 교역을 확대하였다. 특히, 한(漢)은 유학(儒學)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여 유교주의적 중국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3세기 초 후한(後漢)이 멸망한 뒤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삼국 시대와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로 이어졌다. 이 때 양쯔 강 이남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되었고, 문벌 귀족이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불교가 융성하는 등 귀족 문화가 발달하였다.
6세기 말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무리한 고구려 원정 끝에 멸망하고, 7세기에 당(唐)이 건국되었다. 당(唐)에서 발달한 한자, 유교, 불교, 율령 체제 등은 우리나라, 일본, 베트남 등에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을 이루었다.
한편, 인도에는 Arians(아리아 인)이 남하하여 철기 문화를 보급하고, 브라만(Brahman)교와 카스트(Caste)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어 브라만교에 반대하고 평등을 강조한 불교가 성립되었다. 마우리아(Mauria) 왕조 때 정리된 소승불교(小乘佛敎)는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쿠샨 왕조 때에 성립한 대승불교(大乘佛敎)는 간다라 미술과 함께 중국, 우리나라, 일본으로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굽타 왕조 시대에는 인도의 민족 종교인 힌두교가 성립되고, 인도의 고전 문화가 완성되어 인도 문화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오리엔트(Orient) 지방에서는 강력한 전제 국가가 발전하였다. 사산조 페르시아(Persia)가 번성하여 비잔틴(Byzantine) 제국과 대립하였다. 7세기에는 아라비아(Arabia) 반도에서 마호메트(Mahomet)가 이슬람교를 창시하여 이슬람(Islam) 문화권이 형성되어 갔다.
서양에서는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그리스(Greece) 문화와 로마(Rome) 문화가 발전하여 서양 문화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리스는 아테네(Athenae)와 스파르타(Sparta)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에서는 시민 중심의 민주 정치가 발전했고, 인간 중심의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가 몰락하고,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하였다.
로마는 기원전 3세기 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어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공화정은 혼란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1세기 말 제정이 성립되어 약 200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려 ꡐ로마의 평화(Pax Romana)ꡑ를 이루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2세기 말경부터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겪고, 사회 경제 기반도 흔들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4세기 말에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395).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하고(476 ~ 1453), 동로마 제국은 이후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Hellenism) 문화 등을 종합하여 서양 고대 문화를 완성하였으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특성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법률이 발전하여 로마법이 성립하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 세계 종교로 성장한 크리스트(Christ Jehovah 구세주(救世主))교는 로마 문화에 계승된 그리스의 인간 중심 사상과 함께 서양 문화의 2대 조류(潮流)가 되었다.
2.1 고대 국가의 성격 (p49)
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들은 그 중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였고, 정복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고대 국가로의 발전 과정은 선진 문화의 수용이나 지리적 위치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순서로 고대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가야(伽倻)는 삼국의 각축 속에서 중앙 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채 연맹이 해체되어 신라와 백제에 흡수되었다.
2.2 삼국의 성립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太祖王 54~146)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과정에서 커진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황권이 안정되어 왕위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었고, 통합된 여러 집단들은 5부 체재로 발전하였다.
이후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백제(百濟)는 한강(漢江)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B.C.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의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 내면서 성장하였다.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계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재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건국되었다.(B.C.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왕(奈勿王)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또한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왕(奈勿王) 때에는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高句麗)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中國)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 호우명(壺杅銘) 그릇 경주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이 그릇 밑바닥에
ꡒ乙卯年國剛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ꡓ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준다.)
한편, 낙동강 하류의 변한(弁韓) 지역에서는 철기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어 점진적인 사회 통합을 거쳐 2세기 이후 여러 정치 집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세기경에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국인 금관가야(金官伽倻)는 김수로(金首露)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다.
가야의 소국들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문화(農耕文化)가 발달하였다. 또한 풍부한 철(鐵)의 생산과 해상(海上) 교통(交通)을 이용하여 낙랑(樂浪)과 왜(倭)의 규슈지방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4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밀려 전기 가야(伽倻) 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 말 ~ 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沿岸)으로 축소되었다.
3.1 삼국의 정치적 발전
고구려는 3세기 중반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아직 부족별로 흩어져 있던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전연과 백제의 침략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국가 체제를 개혁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은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 백제는 마한(馬韓)의 나머지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北)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충청․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遼西 랴오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山東)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침류왕(枕流王 384~385)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마라난타(摩羅難陀) 동진(東晋) 승(僧) 384)
한편, 신라는 내물왕(奈勿王 김씨 356~402)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智證王 500~514)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新羅)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麻立干)에서 왕(王)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法興王 514~540)은 병부(兵部)의 설치, 율령(律令)의 반포, 공복(公服)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제도(骨品制度)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3.2 삼국 간의 항쟁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그 후 장수왕(長壽王)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熊津 공주(公州))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5세기 후반 동성왕(東城王)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武寧王)은 지방의 22담로(擔魯)에 왕족(王族)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다음 성왕(聖王)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泗沘 부여(夫餘))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南朝)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552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 옥천)에서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眞興王 540~576)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花郞徒)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혜량 국통(國統) 주통(州統) 군통(郡統)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大伽倻)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에 그동안 후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532)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결국 대가야(大伽倻)가 신라에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3.3 삼국의 통치 체제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었으나 각 부의 귀족들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여러 귀족들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의 결정은 각 부의 귀족들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하였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 부의 귀족들과 그 밑에 있던 관리들은 왕의 신하가 되었다.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이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고구려는 4세기경에 각 부의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0여 관등을 두었고,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미 6좌평제와 16관등제의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 신라도 법흥왕 때 각 부의 하급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7관등제를 완비하였다.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계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신라는 관등제를 골품 제도와 결합하여 운영하였다. 즉, 개인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골품에 따라 정하고, 일정한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였다.
삼국에는 왕 아래에 여러 관청을 두었는데,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또는 막리지), 백제의 좌평은 국정을 총괄하는 관직이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6좌평 제도를 두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훨씬 정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국가가 발전해 감에 따라 병부와 집사부 등의 여러 관서를 차례로 두었다. 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上大等)은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성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는 강력하게 미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村主)로 삼았다. 촌주는 지방관을 보좌하면서 촌락 내의 행정과 군사 실무의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軍主)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停)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정(停) 외에도 서당(誓幢)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
4.1 고구려(高句麗)와 수(隋)․당의 전쟁
6세기 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시 한반도에서 신라의 위협을 받던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突厥)과 연결하고, 남으로 백제․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수의 압박으로 돌궐의 세력이 약화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고구려는 먼저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와 양제는 잇따라 백만 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략해 왔다. 고구려는 병력 규모는 작았으나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 냈고, 양제의 침입 때에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적을 유인한 뒤 살수에서 크게 격파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12). 이를 살수 대첩이라 한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은 건국 초에는 유화 정책을 취했으나 곧이어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 왔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 지방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은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내적으로 독재 정치를 단행하고, 대외적으로는 당에 대하여 강경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의 태종은 직접 수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요동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다. 당의 군대는 요하를 건너 요동성, 개모성, 비사성 등을 빼앗고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안시성을 공격하였다(645). 안시성에서 군민이 합심하여 60여 일간이나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이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는 대대적인 반격을 펼쳐 마침내 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는 당의 빈번한 침략을 물리쳐 당의 동북아시아 지배 야욕을 좌절시켰다.
고구려가 수․당과 싸워 이겨 그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의 국가 보위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4.2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당과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하려 하였다.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당도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나․당(羅․唐)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의 결사대를 격파한 뒤 사비성으로 진출하였고, 당군은 금강 하구로 침입하였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660).
백제 멸망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 갔다.
백제(百濟)를 멸망시킨 신라(新羅)는 다시 당(唐)과 연합하여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고, 요동 지방의 국경 방어선도 점차 무너졌다.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민심이 떠나고 있었으며,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뒤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668).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잠과 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고, 뒤에는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7세기 말에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고구려의 전통은 계승되었다.
4.3 신라의 삼국 통일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지배하려 하였다. 또한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羅․唐)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이용하였다는 점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사실에서 삼국 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신라의 삼국 통일은 의의가 있다.
5.1 통일 신라의 발전
통일 이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통일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 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다.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또한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다. 김씨 왕족은 왕권 옹호 세력으로 변질되고, 박씨 세력이나 가야 및 고구려계 귀족은 점차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반면에 진골 귀족 세력에게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보았다.
이렇게 확립된 전제 왕권은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경덕왕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녹읍이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전이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도 압박을 받았다. 또한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중앙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사치 생활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5.2 발해(渤海)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당은 이 지역의 고구려 유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당에 포로로 잡혀 있던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임명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의 이러한 민족 분열 정책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들의 동족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大祚榮)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그런데 그 영역에는 고구려 유민과 원래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돌궐․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후 지배층의 내분으로 한때 국력이 약화되었다.
발해가 다시 중흥한 것은 9세기 전반의 선왕 때부터이다. 발해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지방 제도를 완비하였다. 당시 중국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결국 23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오던 발해는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이후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마저 실패함으로써 그동안 우리 민족의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5.3 남북국의 통치 체제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아울러 관리들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대학인 국학(國學)도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의 장관을 군주에서 총관(뒤에 도독)으로 바꾸어 군사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대신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였다. 주 밑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관의 감찰을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정은 9주에 1정씩을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 변화는 중국식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관부의 장관과 주의 도독, 군대의 장군 등 권력의 핵심은 모두 중앙 진골 귀족이 독점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고 교육 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 지배 체제는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 지배 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5.4 신라 말기의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싸움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惠恭王)이 죽고 상대등(上大等) 김양상이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집사부 시중(執事部侍中) 보다 상대등(上大等)의 권력이 더 커졌다.
중앙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에는 지방 세력들도 가담하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으로 웅천주 도독 김헌창과 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일부 지방 세력들이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더욱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祿邑)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초적(草賊)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城)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城主) 혹은 장군(將軍)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였다.
한편, 당(唐)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5.5 후삼국(後三國)의 성립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甄萱)과 궁예(弓裔)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경주(慶州)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전개되었다.
견훤(甄萱)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全州))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後百濟)를 세웠다(900). 후백제(後百濟)는 차령산맥(車嶺山脈)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갖고 있었다.
궁예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인 양길의 아래에 들어가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양길을 몰아낸 다음 송악(松嶽 개성 開城)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다음 조령을 넘어 상주(尙州)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영주를 차지하여 옛 신라 땅의 절반 이상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이 영토가 확장되고 국가 기반이 다져지자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꾸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제도(骨品制度)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서를 설치하고 9 관등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위하여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게 되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 중세의 정치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이행하는 우리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치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도 유교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 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확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외 개혁이 진전되었다.
1. 과거 제도의 실시로 관리 등용이 고대와 비교하여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자.
2. 무신 정권기의 관리 등용과 정치 세력의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자.
3. 고려 말 공민왕 때 성균관을 통하여 성장한 신진 사대부에 대하여 알아보자.
1. 중세(中世)의 세계(世界) p 71
10세기 초 중국에서는 당(唐)이 멸망하고 5대(代) 10국(國)이 흥망하는 가운데 사대부(士大夫)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성장하였다. 5대의 혼란을 수습한 송(宋 960 조광윤 ~ 1279)은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과거 제도를 강화하여 문반 관료 중심의 문치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송은 국방력의 약화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국가 재정도 궁핍해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한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2세기 초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쯔 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어 강남이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주희(朱熹)가 체계화한 성리학(性理學)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세기에는 몽고족(蒙古族 Mongolian)이 크게 일어나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아시아의 대부분과 러시아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는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동서 문화 교류가 크게 촉진되었다.
일본은 9세기 중엽 국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이 장원(莊園)을 소유하고 무사를 고용함으로써 특유의 봉건제도(封建制度)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인도에서는 굽타 왕조가 무너진 후 정치적 분열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이 침투하였다.
한편, 서양은 게르만(German) 족의 이동으로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 서양의 중세 사회는 로마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 그리스 정교 중심의 비잔틴 문화권,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걸친 이슬람 문화권으로 형성되었다.
게르만 족의 이동 이후 서유럽 세계 형성의 중심이 된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회와 제휴하여 성장하면서 로마 교회를 후원하는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9세기에 분열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유럽 세계에는 고전 문화와 크리스트교에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성장하였다.
서유럽에서는 봉건 제도가 성립되어,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분권 체제가 이루어졌다. 봉건 제도의 경제적 단위는 귀족과 기사들이 소유한 장원이었다. 장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대체로 부자유 신분인 농노로서, 이들은 장원의 주인인 영주와 토지에 예속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 교회가 크게 성장하면서 그 주교는 교황이라 불리고, 교단 조직이 형성되었다. 이에 크리스트교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이 성립되어 로마 가톨릭이 서유럽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비잔틴 제국은 약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하였으며, 황제 교황주의의 그리스 정교가 발달하였다. 비잔틴 문화는 초기 서유럽 문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동북부의 슬라브(Slave)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동유럽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이슬람 제국은 아프리카 북부를 지배한 뒤 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슬람 문화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북부의 크리스트교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이슬람 세력은 유럽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2. 중세 사회의 성립
2.1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p73)
궁예(弓裔)를 몰아낸 뒤 신하(臣下)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王位)에 오른 왕건(王建)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松嶽 개성,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건은 본래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서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하여 성장한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강화하였다. 그 후 궁예의 신하가 되어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등 영토 확장에 공을 세웠다. 특히,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을 점령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광평성 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甄萱)과는 달리 자신이 호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경륜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였다. 또 태조는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우고, 후백제와는 대립하는 정책을 취했다.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 냄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아울러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들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2.2 태조의 정책 (74)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지방에 활거하고 있던 호족들을 포섭하여 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지를 개간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키며, 조세 제도를 재조정하여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아울러 골품제가 해체된 뒤 지배층을 새로이 편성하기 위한 제도도 마련하여야 했다.
태조는 후삼국의 분열이 신라 사회의 모순과 지방 세력의 대두로 인한 것이며, 그러한 사회 혼란의 근본 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조세 제도에서 비롯된 경제 모순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뒤 태조는 취민유도를 내세워 호족들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었다. 아울러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기구로 흑창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태조는 이어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 갔고, 지방의 중소 호족들에게는 향촌 사회에서의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공신들에게는 역분전을 지급하여 새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호족들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심관과 기인 제도를 활용하였다. 또한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2.3 광종(光宗 949~975)의 개혁 정치 (p75)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 943~945)과 정종(定宗 945~949)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자들과 외척(外戚)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왕규의 난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통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은 약화된 반면, 노비들이 양인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좀 더 안정되었다.
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시행하였다. 과거제도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종래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지배층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光宗)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皇帝)를 칭하고, 광덕(光德) ․ 준풍(峻豊) 등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성종 때의 지배 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2.4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p75)
성종(成宗 981~997)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최승로(崔承老)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성종은 먼저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한 국자감(國子監)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다.
이어서 성종은 중앙의 통치 기구를 개편하였다. 당(唐)의 제도를 받아들인 2성 6부제를 기반으로 하고 태봉(泰封)과 신라(新羅)의 제도를 참작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다. 뒤에 송(宋)의 관제를 받아들여 중추원(中樞院)과 삼사(三司)를 설치하고, 고려의 실정에 맞게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을 설치함으로써 세 계통의 기구들이 어우러진 고려만의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3. 통치 체제의 정비
3.1 중앙 정치 조직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고 관서로서 중서문하성을 두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는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을 맡았다.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도병마사는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였으나,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도당)로 개편되면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 사항을 담당하는 최고 정무 기구로 발전하였다. 식목도감은 임시 기구로서 국내 정치에 관한 법의 제정이나 각종 시행 규정을 다루던 회의 기구였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한편, 재신과 추밀은 6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최고직을 겸하여 중앙의 정치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사대(御史臺)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와 함께 대간으로 불리면서,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署經權)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들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 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관리들의 기능이 신라 시대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3.2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지방의 행정 조직도 성종 초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을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4도호부․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북방의 국경 지대에는 동계․북계의 양계를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군사적인 특수 지역이었다.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군․현과 진까지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 속현과 향․부곡․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들이 담당하였다.
향리는 원래 신라 말․고려 초기의 중소 호족 출신이었는데 집권적 지배 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행정 실무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토착 세력으로서 향촌 사회의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일시적으로 파견되는 지방관보다 영향력이 컸다.
3.3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으며, 군공을 세워 무신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도 있는 중류층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되거나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게 되자 몰락하거나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나중에는 일반 농민 군인으로 채워지기도 하였다.
군적에 오르지 못한 일반 농민으로 16세 이상의 장정들은 지방군으로 조직되었다.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兩界)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주진군은 상비군으로 좌군․우군․초군으로 구성되어 국경 수비를 전담하였다. 주현군은 지방관의 지휘를 받아 외적을 방비하고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3.4 관리 등용 제도
고려의 관리는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과거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으로 나뉜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잡과는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을 시험하여 기술관을 뽑았다.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들이 응시하였고,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시험관인 좌주와의 결속을 강화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쉽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한 관리의 등용은 신분을 중시하던 고대 사회와는 달리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였다는 점에서 능력이 중시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p80)
4.1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거의 독점하였다.
한편, 이들은 비슷한 부류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장악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벌 귀족의 성장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리들 중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이들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4.2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자겸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금과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반면 왕의 측근 세력들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몰려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 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면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4.3 무신 정권의 성립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의종 역시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고, 문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정치적으로 폭발한 것이 무신 정변이었다(1170).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 나갔다. 또한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는 더욱 늘어났고, 정치 싸움으로 인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농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최충헌은 정권을 잡자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회 개혁책은 흐지부지되고 그는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도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고, 더 나아가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정국이 안정되면서 최우는 문학적인 소양과 함께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을 등용하여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최씨의 집권으로 무신 정권이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 질서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최씨 정권은 권력의 유지와 이를 위한 체제의 정비에 집착했을 뿐,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들의 안정을 위한 노력에는 소홀하였다.
5. 대외 관계의 전개 (p84)
5.1 거란의 침입과 격퇴
10세기 초에 통일된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송과 연결되어 있던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거란은 먼저 정안국을 정복한 다음 고려에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처음 거란은 8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993). 거란은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을 것과 송과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청천강에서 거란의 침략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거란과 협상에 나섰다. 이 때 거란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거란군이 퇴각한 뒤 고려는 송과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거란과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4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해 왔다(1010). 이 때 개경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거란군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였다. 이에 거란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여러 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1018). 개경 부근까지 침입해 온 거란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 이 때 살아서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수천에 불과할 정도였다(1019).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고려가 거란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을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거란과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장성을 쌓아 거란은 물론 여진의 침입까지 방어하려 하였다. 이것이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이다.
5.2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여진은 한때 말갈이라 불리면서 오랫동안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고,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여진으로 불리면서 발해의 옛 땅에서 반독립적 상태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여진과의 일차 접촉에서 패한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하였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1107),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던 고려는 다시는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족의 조건을 수락하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의 처지에서도 서북쪽의 거란족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여진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국호를 금이라 하고(1115), 거란을 멸한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정치적 분쟁을 겪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금과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은 정권 유지를 위하여 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5.3 몽고와의 전쟁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을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이 때 금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고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평양 동쪽)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고 및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고는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고 사신 일행이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고군이 침입해 왔다(1231).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고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고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고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고가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고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냈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들이 용감하게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들까지도 몽고에 대항하여 싸웠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러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와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득세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몽고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한 것은 고려를 직속령으로 완전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항전의 결과였다.
그러나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 이처럼 삼별초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몽고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과 몽고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p88)
6.1 원의 내정 간섭
몽고와 강화한 이후 고려의 자주성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고려는 먼저 몽고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었다. 몽고는 국호를 원으로 바꾼 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단행하면서 고려로부터 선박, 식량, 무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와 함께 군대와 선원 등 인적 자원도 징발하였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원은 고종 말년에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였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뒤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 다시 찾았으나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때에 무력으로 회복할 때까지 원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는 오랜 항쟁의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또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한편, 원은 공녀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 갔으며, 금․은․베를 비롯하여 인삼․약재․매 등의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한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원의 내정 간섭과 경제적인 수탈은 고려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책동으로 인해 고려의 정치는 크게 왜곡되었다. 왕권이 원에 의지하여 유지됨은 물론 통치 질서가 무너져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6.2 공민왕(恭愍王 1351~1374) 때의 개혁 정치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그에 의존한 고려의 왕권은 이전 시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중앙 지배층도 개편되었다. 이전 시기부터 존속하였던 문벌 귀족 가문, 무신 정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家門), 원과의 관계를 통하여 성장한 가문 등이 이른바 권문세족으로서 새로이 자리 잡았다. 그들은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을 잡아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다. 이에 대하여 신진 관리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관료의 인사와 농장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의 노력은 충선왕 때부터 시도되었다. 그러나 원의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의 왕은 개혁을 철저하게 추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공민왕은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대외적으로 반원 자주를 실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은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의 숙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몽고풍을 없애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또한 무력으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 자주 정책은 친원파 권세가의 반발로 중단될 위기에 놓였고, 이에 대외적인 개혁의 완수를 위해서는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권문세족들을 눌러야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아울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한미한 집안 출신의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들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성균관(成均館)을 통하여 유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의 개혁은 권문세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개혁 추진의 핵심인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이 시기의 개혁은 아직 개혁 추진 세력이 결집되지 못한 상태에서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6.3 신진 사대부의 성장
무신 집권기 이래 지방의 향리 자제들을 중심으로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한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원의 간섭과 측근 정치로 인하여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하였다. 이들 중의 일부는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여 권문세족이 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신진 사대부들은 주로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침해하면서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족과 충돌하게 되자 국가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그들의 비리와 불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었고, 과전과 녹봉(祿俸)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왕권과 연결하여 고려 후기의 각종 개혁 정치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아직 역부족이었다.
6.4 고려의 멸망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권문세족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한편, 북쪽으로부터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해 와 공민왕(恭愍王 1350~1374)이 복주(福州 안동(安東))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南)과 북(北)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崔塋)과 이성계(李成桂)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 이성계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으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恭讓王 1389~1392.07.16)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 1391)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改革派) 사대부(士大夫)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朝鮮)을 건국하였다(1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