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옥한 땅이 아니라 척박한 곳이어야 된다. 수분이 적은 메마른 땅. 그런 곳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 메밀이다. 감자·고구마와 같은 구황작물(救荒作物·가뭄이나 장마 등 불순한 기후조건에서 잘 재배되는 작물)인 메밀은 산간이 많은 강원도에서 자리잡은 곡물이다. 중년 이상의 강원도 출신은 끓는 물 솥 위에 국수틀을 얹고 메밀반죽을 넣어 혼신의 힘을 다해 내려먹던 어릴 적 메밀국수를 평생 맛의 기준으로 얘기하곤 한다. 밀에 비해 메밀은 끈기가 없어 메밀만으로 면을 만들 때 반죽을 치대는 노력이 상당하다.
간혹 100% 메밀면을 고집하는 맛집이 있긴 한데 대개는 밀가루를 섞어서 끈기를 보충한다. 메밀국수를 먹는 방법도 냉면처럼 차갑게 먹는 것과 칼국수처럼 뜨거운 국물에 먹는 것으로 나뉜다. 강원도와 일부 경기도 지역의 메밀국숫집 몇 곳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박하면서 푸짐한 메밀국수 '신일식당'
자식 농사 마친 할아버지·할머니가 휴일도 없이 메밀국수를 끓이고 있는 소박한 맛집이다. 식당에 들어서면 썩 쾌적한 공간이 아니라서 실망할 수도 있지만 나오는 음식과 노부부의 꾸밈없는 정에 곧 긴장을 풀게 된다. 좁은 부엌에선 직접 반죽한 메밀반죽을 기계로 뽑아 칼국수처럼 걸쭉하고 푸짐하게 끓인다. 이를 '꼴두국수'라 부른다. 날고춧가루를 푼 국물에 국수가닥부터 애호박, 감자까지 모두 굵직한 모양새로 투박하기 그지없다. 시골 식당의 맛은 종종 밑반찬으로 판단되곤 하는데, 이 집의 김치, 고추장아찌, 무생채 등은 모두 여느 시골 할머니 음식 그 자체다. 직접 담근 김치를 한 잎씩 부친 메밀부침개는 저렴한 가격으로 국수 나오기 전에 꼭 맛볼 별미다. 배가 불러도 감자떡이 남아있다면(종종 떨어진다) 이것도 먹어보길. 강원도 어느 곳보다 찰진 제 맛이다.
〉〉 신일식당: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 122-5. (033)372-7743. 꼴뚜국수 5000원, 메밀부침(3장) 2000원, 칼국수 4000원, 감자떡(10개)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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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막국수 물메밀, 신일식당 꼴뚜국수, 송원막국수(왼쪽부터) / 레스토랑 가이드 다이어리알 제공
구수한 국물의 굵은 메밀면발 '동광식당'
원기 회복과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한약재 '황기'가 유명한 정선에는 황기두부, 황기밥, 황기칼국수, 황기백숙 등이 많다. 그 중 특화 외식 메뉴로 자리잡은 것이 '황기족발'이다. 황기를 넣은 물에 삶아낸 윤기 나는 족발로 유명한 동광식당의 또 하나의 대표 음식이 '콧등치기국수'다. 끈기 없는 굵은 면발인 메밀국수를 먹다 보니 먹을 때 국수 끝가닥이 콧등을 친다 해서 불린 이름인데 그 이름 덕에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기도 했다. 육수에 된장을 풀어 끓였기에 다소 거무튀튀한 국물색은 식감을 불러일으키는 형상은 아니나 먹어 보면 나름 구수하다.
〉〉 동광식당: 강원도 정선군 정선은 봉양리 49-3. (033)372-7743. 콧등치기 5000원, 황기족발(小) 2만2000원.
〉〉 청원식당: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 (033) 562-4262. 콧등치기 전문 식당은 이 외에도 여러 곳이 있다.
진정한 메밀의 참맛 '삼군리메밀촌'
외식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요인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식재료로 만든 음식일 것이다. 이곳은 식당 옆 밭에서 직접 재배한 메밀을 사용한다. 그것도 100% 메밀가루를 국수 주문이 들어온 후부터 반죽을 한다. 메밀은 끈기가 없기에 손반죽할 때 손목이 시큰할 정도도 무척 힘이 들어가는데, 메밀촌 사장님은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주방 뒤꼍에서 어김없이 반죽을 시작한다. 그 외 모든 음식의 총지휘는 부인이 맡고 있다. 이 집의 메밀국수는 삶은 국수와 동치미 국물이 따로 나와 맘대로 부어 먹는다. 난 삼군리에 갈 때마다 삶은 메밀국수 일부를 맨입으로 먹어 향과 맛을 음미한 뒤 동치미 국물, 다진 양념, 참기름 등을 섞어 먹는다. 메밀국수에 쏟는 정성이 이 정도니 다른 음식 또한 말할 나위 없다. 얄팍하게 부쳐낸 메밀전은 식어도 제 맛이고 메밀묵도 직접 쑨 수제품이다. 토종닭을 그날 잡아 끓이는 백숙은 예약하여 먹을 수 있는 별미인데 육질의 쫄깃함이 두고두고 남는다. 누룩과 옥수수 조청으로 만든 엿술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술 맛이다. 산속에 위치하여서 내비게이션도 산 아래까지밖에 안내하지 않으나,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가던 방향으로 쭉 올라가면 식당에 도달한다.
〉〉 삼군리메밀촌: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부창리 67. (033)342-3872. 메밀국수 5000원, 메밀묵 4000원, 메밀부침 5000원, 토종닭 3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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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박한 메밀의 맛은‘고향’의 동의어이다. 경기도 가평의 송원 막국수(왼쪽), 강원도 횡성의 삼군리메밀촌 메밀국수. / 레스토랑 가이드 다이어리알 제공
봉평 메밀국수의 역사 '현대막국수'
기온이 찬 고지대에서 수확한 메밀이 좋다고 하는데, 봉평 메밀이 그렇다. 거기에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라는 점, 효석문화제 영향까지 더해져 한적한 봉평 시골에 메밀국수 전문점이 30여 곳 정도 성행하고 있다. 그중에 현대막국수는 4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터줏대감 메밀국숫집이다. 대부분 외지 손님들이 찾는데, 이 집 맛을 강원도 메밀국수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이곳 막국수(물국수)는 과일과 양파 등의 채소를 넣어 숙성시켰기에 약간 단맛이 돌아 일반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메밀묵무침, 메밀묵사발, 메밀전병, 메밀부침 등 메밀로 흔히 먹을 수 있는 웬만한 음식은 다 모여 있다.
〉〉 현대막국수: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384-8. 033-335-0314. 메밀국수(물메밀·비빔메밀) 6000원 메밀묵무침 5000원, 메밀전병 5000원
양념 맛과 육수의 적절한 조화 '송원막국수'
도로변 막국수 간판을 보고 들어간 뒤 복도를 거쳐 입구에 다다른다. 어디서 왔는지, 언제 가도 사람들이 많다. 말없이 막국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테이블에 자리가 비면 서로들 조금씩 비켜주며 자리를 내주는 것에도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어르신들과 단체 등산객들이 특히 많다. 오랜 시간의 유명세와 인이 박이게 하는 막국수 양념 맛이 자꾸 찾게 하는 이유로 보인다. 원래 삶은 국수야 그 자체로 특별한 맛은 없고 대개 양념 맛과의 조화라고 볼 수 있는데, 이곳은 메밀국수 위에 다진양념, 고춧가루, 양념간장, 깨소금 등이 먹음직스럽게 얹어 나오고 그 조합이 안정적이다. 여기에 상 위에 있는 주전자의 육수를 붓는다. 대개는 조금 부어 비빔처럼 먹는데 간혹 넉넉한 육수를 넣어 매콤한 물국수 형태로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막국수만을 목표로 찾아올 정도는 아니지만 가평을 지날 때는 들를 만한 메밀국숫집이다. 부드럽게 잘 삶은 제육은 술안주로 제격의 식감인데 비계 양이 많아 부담을 느끼는 이들도 적잖다.
〉〉 송원막국수: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363-1. (031)582-1408. 막국수 5000원, 제육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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