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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목사 새벽을 깨우리로다 中 " 거듭난 간증"
본 내용은 김진홍 목사님의 새벽을 깨우리로다 책자 내용중 거듭난 간증을 떼어서 올려 보았습니다.
워낙에 철학이 나의 체질에 맞는 과목이었다. 철학에 관계되는 책만 들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만큼 그 속에 빠져들곤 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 내게 붙은 별명이 「미스터 소크라테스」였 다.
2학년 때부터 해마다 열리는 전국 철학학술 대회에 참가했다. 2학년 때는 「플라톤의 이데아연구」란 제목으로, 3학년 때는 「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연구」로, 4학년 때는「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철학적 배경」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나를 장래 철학교수가 될 인물로 인정했다.
나 스스로도 장차 한국 철학계를 짊어지고 나갈 기둥이 되겠다는 자부심을 품고 공부했다.
그래서 「도서관 지킴이」가 되었다.
도서관에 가장 일찍 들어가 가장 나중에 나온다 하여 붙은 별명이었다.
하루는 여전히 도서관에 앉아 형이상학(形而上學)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철학과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이 미스터 소크라테스. 형이상학 연구에 소출이 있냐?』『별로 없심더. 아직은 형이상학까진 못가고 하학(下學)에서 중학(中學)정도까지 오르고 있심더』
『딴기 아니고 자네에게 급하고 중요한 일로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지금 도서관 앞 잔디밭으로 좀 나오소』
홍응표란 이름의 선배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성큼 성큼 나가버렸다. 나는 도리없이 읽던 책을 덮고는 따라나갔 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홍선배는 내가 미처 자리도 잡기 전에 물어왔다.
『김진홍. 자네 거듭났는가?』
『예? 선배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깁니까!』
『거듭났느냐고. 예수 믿고 거듭났느냐를 묻는 것이네』
『아니, 선배님 먼 질문이 그렇습니까? 급하고 중요한 일이란기 바로 그깁니까? 세상에 그런 황당한 걸 물어보려고 공부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낸 것입니까?』
『아문, 급하고 말고.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임마누엘 칸트를 아무리 읽어보았자 그 속에서 생명을 얻을 순 없네, 자네에게 고민만 더하여 줄 따름이네. 자네도 그만큼 열심히 읽었으면 이제쯤은 질릴 때도 됐을 텐데.
칸트의 전공은 질문일세. 그에게는 해답이 없어. 해답은 나사렛 예수에게만 있는 거야.
자네도 칸트처럼 평생을 해답없는 질문만 계속할 텐가? 형이상학(形而上學)을 한다는 것은 출구 없는 숲속을 헤메는 것과 같아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길을 잃고 마는 것이네.
자네는 영특하니 잘 판단하게나. 내가 자네에게 급하다고 한 것은 자네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네. 지금의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사렛 예수를 평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거듭나는 일일세』
홍선배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설득이 내게 통할 리 없었다.
나는 그런 선배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소위 형이상학을 다룬다는 철학도가 저런 형이하학적인 수준의 사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의 지능이 낮은 탓이라 생각했다.
아예 나와는 토론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는 한마디 일러 주고 자리를 떴다.
『홍선배님 혼자 거듭나시라요. 거듭나서 천당을 가든지 만당을 가든지 가서 잘 먹고 잘 사시라요.
나는 선배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면 동행할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거듭나지 못해서 지옥에 간다면 인간답게 가겠습니다. 변증법을 공부하고 형이상학을 논하는 사람이 어떻게 거듭났냐, 구원 받았냐, 그런 질문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이 가는 천당에 가서 머리없는 도야지로 사느니 차라리 지옥가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로 살랍니다』
『글쎄 자네가 지금은 그렇게 고상한 말을 하고 있지만 시간문제일세. 언젠가 나의 말에 고개 숙일 때가 올 것일세. 그날이 오도록 내가 기도하지.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변증법, 형이상학 하러 가게나. 나는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로 가서 거듭나는 길을 전하러 가겠네.
자네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진 후에 만나세나.
형이상학 먹다가 영양실조 걸려 기진맥진해질 때쯤에 내가 영양분이 넘치는 생명의 떡을 다시 전해 주겠네』
...중략...
1966년 5월 어느날 영문학과와 철학과 1학년이 수강하는 교실에서 나는 철학개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인생관에 대한 주제를 걸고 열강을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며 물었다. 영문과 학생이었다.
『교수님, 진리가 무엇입니까?』돌이켜보면 그때 그 학생의 한마디 질문이 내 인생 여정에 한 전기가 되었다.
애초에 내게는 벅찬 질문이었다. 대답할 만한 적합한 말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망설임 끝에 임마누엘 칸트의 진리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칸트는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의 앞 부분에서 진리에 대하여 논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나의 머리 속에 있는 개념과 그 사물 혹은 사건 자체가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 손에 쥐여 있는 만년필로 말하자면 나의 머리 속에 담겨있는 이 만년필에 대한 생각과 이 만년필 자체가 일치될 때 그것이 진리란 것이다. 일컬어 인식론상(認識論上)의 진리이다. 나는 이런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고는 알아 들었느냐는 몸짓으로 그 학생의 얼굴을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픽 웃으면서 되물어왔다.
『교수님, 그런 진리말고요. 내가 그것을 위해 살다가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그런 진리를 묻고 있습니다. 칸트가 말했다는 그런 진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유학 포기하고 세상 속으로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내 정신세계의 가장 큰 약점을 그가 지적한 셈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 진리는 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나도 지금 그런 진리를 찾는 중입니다』
나의 어색한 대답에 그는 다시 따지듯 물어왔다.
『교수님 오늘 강의를 시작하면서 철학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라고 전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수님은 진리가 무엇인 지 아직도 모르고 계신다니 그렇다면 수업을 더 계속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닙니까? 모르시는 것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서로가 시간낭비 아니겠습니까? 그만 수업을 마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온 교실의 학생들이 『와 …』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남은 시간을 어물어물 넘 기고는 끝나는 벨소리가 나자마자 연구실로 갔다. 의자에 앉자 심호흡을 몇번 하고는 생각했다. 그 학생이 제기한 질문은 타당하였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장님을 안내하는 만큼이나 난센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것을 위해 살다가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그런...,
진리가 체득(體得)되기 전까지는 가르치기를 중단해야 할 것인가? 지금은 풋내기 조교니까 강단에 서지 않으면 되겠지만 장래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런 확고한 진리를 깨달아 소유한 후에 철학교수가 되어야 하는가? 맹자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이 깊어지자 왕궁을 떠났다.
눈 덮인 산에서 7년의 고행을 쌓은 후에 도를 깨쳤다. 그리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사렛 예수도 그랬다.
그는 유대땅 후미진 마을 갈릴리에서 목수로 일하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하늘의 뜻을 터득했다.
그리고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가 가르치기 시작한 첫 마디였다. 때가 찼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자신이 가르칠 때가 찼다는 말일까? 아니면 백성들이 들어야 할 때가 찼다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하늘의 뜻이 백성들의 삶의 한 가운데로 임하는 때가 찼다는 말일까? 나도 석가모니나 예수처럼 깨달음에 이르고 때가 찼음을 확신하게 된 후에 가르쳐야 할 것인가? 다른 선배 철학교수님들은 어떤가? 무언가 깨달음의 자리에 오른 후에 가르치고 있을까? 모르긴 해도 나와 오십보 백보의 차이일 것이다.
물론 그 지식의 넓이나 인간이해의 폭을 나와는 비할 바 아니겠으되 「모르고 가르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대학 할 것 없이 철학과 교수님들은 자신이 체득한 삶의 의미를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번역 소개하는 수준이 아닐까. 그래서 모 대학의 모 박사는 칸 트전공이다,
모 대학의 누구는 하이데거 전공이다 하여 자기가 전공한 철학자의 책을 읽고 번역하고 논문을 낸다. 학위를 받고 세월이 흐르면 권위가 붙는다. 자기 삶으로 익힌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한 칸트나 하이데거를 말한다.
그걸 들은 학생들은 그러잖아도 모르던 데서 더 모르게 되고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나도 선배 철학교수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교비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니 미국에서 학 위받고 귀국하여 강단에 서게 되었을 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때에도 어느 학생이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온다면 무슨 대답을 하게 될 것인가? 자신 없는 일이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중략...
교회당 입구에 「심령부흥성회」라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교회당 안은 이미 찬송소리 박수소리 기도 소리에 열기로 가득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기도드리기 시작 했다.
온 정신을 다하여 기도드렸다. 어린 시절부터 섬겨왔던 「하나님」을 잃어버린 나는 무턱대고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신을 향해 기도드렸다. 마치 길 잃은 어린이가 부모를 찾듯이 나는 간절함으로 찾았다. 목마른 노루가 시냇물을 구하듯이 구하였다. 그리고는 목사님의 설교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저녁 목사님의 설교는 길을 잃은 내 영혼이 길을 찾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석조건물인 그 교회는 교회당을 증축하는 중이었고, 건축에 소요되는 건축비를 모금하는 중이었다. 강사의 설교는 헌금을 많이 하는 성도가 복을 많이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신의 계시는 낌새도 없었고 하품만 나왔다. 도대체 예수를 만나게 해주어야 헌금을 하든 몸을 바치든 하겠는데 예수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헌금부터 하라니 하품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터였다. 나는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교회당을 나왔다.
...중략...
나는 일어나 가방 밑바닥에 넣어두었던 성경을 끄집어냈다. 무릎을 단정히 끓고 두 손바닥 사이에 성경을 낀 채 중얼거렸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이 중얼거렸다.
『하늘에 계시는 임이시여! 이 책이 정녕 당신의 책이라면 지금 내가 펴서 눈이 닿는 말에서 내게 깨달음을 주시옵소서!
아멘!』나는 눈을 감은 채로 성경을 펼쳤다. 숨을 멈춘 채 펼쳐진 곳을 보았더니 구약과 신약 사이에 끼워진 백지였다. 백지를 보고 도(道)를 깨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망하고는 성경을 접어 가방에 넣어버렸다.
새우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그 골목을 빠져 나왔다.
...중략...
67년 여름 어느날 구의령 선교사의 지프에 세간살이를 싣고 목단교회로 갔다. 목단교회는 야트막한 언덕에 붙여 세워진 자그마한 교회당이었다. 교회당 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짐을 내리기 전에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당신께서 이 제단에서 나를 깨닫게만 하여 주신다면 평생에 충실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 날로 나는 월급 3천원에 쌀 한말 받는 전도사가 되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글자 그대로 발이 부르트고 입이 부르트도록 일했다. 교회 일보다는 주로 마을 일을 했다. 일 손이 모자라는 농가마다 찾아 다니며 일을 도와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상한 전도사가 왔다고 수근수근하더니 점차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중략...
나는 이래저래 교회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대구 청산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오라는 전갈이 와 있었던 때였다. 나는 목단교회를 사임하고 대구로 옮겨갔다.
목단마을을 떠나던 날은 교인들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환송하여 주었다. 모인 사람들 중에 절반은 울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목회 아닌 목회는 끝이 났다.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대구 청산교회로 옮겨 간 나는 학생지도를 맡았다. 청산교회는 지식인들이 모이는 수준높은 교회였다.
그 즈음 어느 날 나는 길거리에서 대학 철학과 선배인 홍응표형을 만났다. 대학시절 도서관에 있는 나를 불러내어 『거듭 났느냐?』고 묻던 선배다. 홍 선배는 반색을 하며 다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는 말을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자네를 만나고 싶어 계명대학에 들렀더니 행방을 모르겠다더군. 교수님들께서 자네 염려를 많이 하시던데. 학교쪽에서는
자네를 무척 아끼고 기대를 걸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게야. 그건 그렇고 자네 요즘은 무슨 문제와 씨름하는가?』
『대학에 남아 있다가는 뭔가가 될 것 같지 않아서 속세를 한동안 헤매다가 지금은 교회 전도사로 있습니다』
『자네 몇년전에 나와 토론했던 일 기억나나?』
『기억나구 말구요. 거듭나는 이야기말이지요? 지금도 그 얘기 하고 다니십니까?』
『아무렴 나야 다른 재주 있냐. 늘상 그 얘기지. 오늘도 복음 얘기 다시 할테니 들어주겠는가?』
『듣구 말구요. 지금 내가 교회 전도사로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봉사 밤길 더듬듯이 무언가를 더듬어 찾고 있는 중이니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찾도록만 이끌어 주십시오』
잘 됐네. 우리 시간을 정해 매주 한번씩 만나 책을 함께 읽는 것이 어떻겠나?』
『갑자기 웬 책을 찾습니까? 난 도통(道通)하기 전에는 책은 안 읽기로 했는데요』 『자네 「로마서」 알지? 일본의 성서학자 중에 우치무라 간죠(內 村鑑三)란 분이 있는데, 그가 쓴 「로마서 강해」란 책이 있네.
서양학자들이 쓴 책과는 다르게 깊이가 있고 통찰력이 있는 책이네. 매주 한번씩 만나 그 책을 같이 읽자구.
내가 자네에게 투자를 하고 싶으니까 자네 거절 않겠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명색이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속의 갈등은 늘 계속되고 있었던 터라 순순히 응했다.
이리하여 나의 성경연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진지한 자세가 더해갔다. 우리는 우치무라 간죠 선생의 『로마서 강해』를 함께 읽으며 토론을 거듭했다.
나는 「로마서」에서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확신이 부러웠다.
그 진위(眞僞)를 떠나 그렇게 확신에 찬 신앙을 지닌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 여겨졌다.
「실존철학의 시조」 바울과 나
나는 바울과 같은 확신에 찬 믿음을 주시라고 기도했다. 그런 확신이 내 영혼 속에 깃든다면 비록 가시밭 길을 걸어갈지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성경 본문을 조목조목 풀어 살피며 생각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가다가도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머리로는 수긍이 가나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 것이었다. 읽을 수록 의문이 일어나고 의문은 또다른 의문을 낳았다.
의문들 중의 첫째는 「인간이 죄를 지었다」할 때의 죄가 무엇인가 하는, 죄의 개념이 파악되지 않는 점이었다. 둘째로 예수가 피흘려 죽은 것과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 것 사이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셋째는 인간이 자기를 대신하여 피흘린 예수를 「믿는다」할 때 그 믿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일컫는 지 이해되지 않았다. 넷째는 신이 이 우주에서 왜 정의를 나타내야 하는지?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 왜 자신의 정의를 나타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하여 정의를 나타내어야 하는지? 자기 스스로에게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타자를 위해서인지? 누가 신에게 정의를 요구하였는지? 이런 의문들이 풀리지를 않았다.
다섯째는 인간이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신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할 때 그렇게 회복된 관계란 어떤 상태인지? 본래의 인간과 타락한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다르며,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과 구원 받은 후의 인간은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의문이었다. 생각할수록 의문만 쌓였다.
그런 의문속에서 「로마서」 연구는 계속되었다. 「로마서」 연구가 계속되어가면서 나는 바울이란 인간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바울에게서 느낀 인간적인 매력중에서도 「로마서」 7장에 나타나는 그의 탄식은 나 자신의 탄식과 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는 바울의 탄식을 읽으며 실존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절규를 생각했다. 바울의 탄식을 실존철학자들의 언어로 표현해보자.
『오호라, 나는 비극적 실존이로다. 이 죽음의 한계상황에서 누가 나를 초극(超克)시켜 주겠는가!』
흔히 실존철학의 시조로 니체나 키에르케고르를 들지만, 「로마서」 7장 24절의 말을 미루어 보건데 실존철학의 시조는 바울이라 할 수 있겠다. 「신앙의 용장」 바울도 그의 뜨거웠던 신앙역정의 뒷그늘에는 이렇게 처절한 자기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로마서」가 시작되는 1장에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했던 바울이 7장에 와서는 『이 죽음의 자리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치무라 간죠의 묘비명
나는 바울이 지녔던 영혼의 갈등이 내가 지닌 문제와 상통한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이 인생을 통째로 걸어 충성할 수 있었던 예수라면 나도 그에게 삶을 바칠만한 무언가가 있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세월은 흘러갔다. 여름에 시작되었던 「로마서」 연구는 가을을 지나 겨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간에 매주 한번씩 열렸던 성서연구는 수시로 열리게 될 만큼 불이 붙었다.
우치무라 간죠 선생의 책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서양 성서학자들이 쓴 글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서양학자들의 글은 논리적 전개에는 능하나 직관적 통찰력이 부족했다. 독자들의 혼에 호소하는 통합적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우치무라 간죠의 글은 바로 이 점에서 탁월했다.
그의 저서 중에 『구안록』(求安錄)이란 책이 있다. 자신의 자서전 적인 책이다.
그가 예수 안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누리기까지 거쳤던 방황과 고뇌 그리고 예수 안에서 평강을 얻게 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었다. 그는 1841년에 일본의 한 하급 사무라이 가정에서 태어났다. 10대에 클라크 선교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신케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일본 민족을 사랑하는 일, 이 두 가지 사랑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 하였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고, 일본이 복받는 길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주의를 본받지 말고 평화로서 세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는 이로 인해 군부의 미움을 받아 일터에서 쫓겨났다. 그는 동경의 6평짜리 다다미 방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성서를 가르쳤다. 성서의 진리로 신일본을 세우기를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길러진 인재들이 전후 일본을 이끌어가는 기둥들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사회는 명치유신 이후 1백년간 오늘의 일본을 일으킨 20명의 선각자를 뽑을 때 우치무라 간죠를 포함시켰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유언을 남기기를 『내가 죽으면 나의 묘비에 이 글을 새겨달라』고 했다.
「나는 일본을 위한 나다/일본은 세계를 위한 일본이다/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다/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다」
나는 우치무라 간죠의 신앙이 예수에 대한 충성과 자기 조국에 대한 충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고 있음에 감명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우치무라 간죠의 영향을 받았던 인물로는 김교신과 함석헌을 들 수 있겠다.
나는 우치무라 간죠를 좋아하게 되면서 김교신 선생의 글과 함석헌 선생의 글도 탐독하였다.
나는 이런 글들을 읽으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이 교회당 안에서만 머무는 생활에서 벗어나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느껴가게 되었다. 그러던 터에 드디어 역사적인 날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의 삶을 근본으로부터 변화시킨, 나의 삶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일으킨 사건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드디어 도통하다.
1968년 12월 4일이었다.
그 날 홍응표선배는 성경공부하는 시간에 최광수란 이름의 다른 선배 한 분과 함께 왔다.
모교의 교육과 출신 선배였다. 우리 셋은 함께 「신약성서」 중의 에베소서를 읽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노니…』로 시작된 바울의 서신을 읽어내려가던 중에 1장 7절에 이르자 무언가 번쩍하는 느낌이 본문에서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나마 내 영혼에 헤드라이트 불빛 같은 빛이 비쳤다. 나는 숨을 멈추고 7절을 다시 읽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두번째 읽었을 때에 나의 머리 속에서 천둥이 울리는 듯 하였다.
아니, 내 영혼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리·스·도·안·에·서」 일곱 글자가 나를 압도했다.
문제의 열쇠는 거기에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에 해답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이란 어떤 곳인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이 결집된 곳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나를 기투(企投)할 때 나는 하나님과 합일된다. 일컬어 구원받는다고 표현한다. 그간에 나는 구원의 길을 어디에서 찾았던가? 내가 방황하고 다녔던 공간은 어디였던가? 분명히 그리스도 안이 아닌 그리스도 밖이었다.
나는 진리를 찾되 「철학 안」에서 찾으려 했고 「인간 안」에서 찾으려 했다. 나는 「철학 안」에는 길이 없으리란 것까지는 짐작하였으나 「인간 안」에도 길이 없음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날 밤 그리스도 밖에서 방황하였던 나를 볼 수 있었고, 스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인 나를 볼 수 있었다. 내 안에 있었던 것은 고뇌와 방황이었다. 그리고 그 고뇌와 방황의 뿌리에 죄가 있었다. 고뇌와 방황은 죄가 낳은 자식이었다. 내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는 고뇌와 방황을 끝내게 하려면 내 영혼을 점령하고 있는 죄를 해결하여야 함을 알게 되었다.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된 뒤에 라야 고뇌와 방황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날 밤 한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어깨에서 죄의 짐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내 영혼을 점령하고 있었던 죄의 세력을 추방하고 나로 하여금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분을 평생의 주인으로 모시기를 다짐했다. 내가 무릎을 꿇었을 때에 예수는 나를 품어주었고 나는 예수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한계상황(Boundary Situation)을 넘어섰고 새로운 존재(New Being)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땅의 아들에서 하늘의 아들로 신분이 변하게 된 것이었다.
기쁨의 강이 내 심장을 흘렀고 세포 세포마다 나의 새로운 출생 을 감사드리는 듯했다.
1968년 12월 4일 밤 11시에서 5일 새벽 1시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떠오른 태양은 이전의 태양과는 다른 태양이었다. 부는 바람도 이전의 바람이 아니었다.
새로운 태양과 새로운 바람이 새롭게 태어난 나를 환영해 주었다. 길거리에서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로만 보였고 길가의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해 12월4일 밤에 일어났던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일생에 가야할 길을 분명히 결정하여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교회와 백성을 섬기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 길을 걸으려면 신학교로 가서 목사가 되는 과정을 밟아야 했다.
첫댓글 오래전 읽었던 새벽을 깨우리다 책자의 내용중 구원 간증을 소개해 올렸습니다.
거듭난 간증은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늘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