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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왕릉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권정희(휴휴당)
1. 1,400년을 내려온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그러나 둘 사이에 홀연히 나타난 사택왕후!~
6세기말 금마저엔 마 캐는 청년 서동이 있었다.
과부였던 어머니와 연못 속 용 사이에서 태어난 서동은 비범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
그녀는 미염무쌍의,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서라벌로 간 서동은 서동요를 지어 퍼트렸다.
해괴망측한 노래가 장안에 퍼지자 신라 진평왕은 그녀를 유배보냈다.
유배길에 서동을 만난 선화공주, 한 눈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이후 서동은 왕이 되고, 미륵삼존을 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짓는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백제 30대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그러나 1,400년간 이어온 이들의 사랑은 최근 절대절명의 위기를 맡는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 통해 두고
맛둥방을 밤에 몰래.....
이 노래는 삼국유사 무왕전에 나오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서동요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야기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지난 2009년 1월 미륵사지 사리장엄이 발굴되면서
서동, 즉 무왕의 여인으로 사택왕후가 등장하게 된 것이죠.
사택왕후의 등장으로 선화공주는 갑자기 미아가 될 상황입니다.
지난주 1부에서 우리는 미륵사 사리장엄의 아름다움과 그 역사적 가치를 집중분석 해보았습니다.
방송후 시청자들의 관심은 온통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의 결말로 쏠리고 있습니다.
원래 역사의 진실을 밝혀나가는 것이 저희 역사추적의 의도입니다만
오늘만큼은 그 아름다운 사랑이 깨어질까 조금은 마음이 무겁습니다."
무려 1,338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미륵사는 3탑 3금당,
즉 세 개의 탑과 세 곳의 불당을 가진 한국 최대의 사찰이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서탑은
일제시대 콘크리트로 보수를 해야 할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지난 2002년 미륵사지 발굴과 더불어서
서탑 역시 해체 복원 작업을 진행해왔다.
1,400년에 역사를 이어주듯 석탑엔 네 개의 통로가 있다.
로를 따라 들어가면 탑의 중앙에 돌기둥을 만나게 된다.
어느 누구도 이곳에 1,400년전 백제가 살아있을 줄 예상치 못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세워진 최고의 석탑인 미륵사지석탑!
당대 백제의 석조기술이 총동원된 건축물이었다.
2미터가 넘는 돌 하나의 무게만도 3톤이 넘어
1층 기단부까지 해체하는데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09년 1월 19일 탑의 기둥으로만 여겼던 돌을 들어올리는 순간
가로 세로 25센치미터의 아담한 공간에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백제의 역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1,400년의 세월을 믿을 수 없는 완벽한 보존상태.
최고의 발굴전문가들도 긴장했다.
금제사리호.
높이 13센치미터의 금으로 만든 사리호.
연꽃문양과 당초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개방적이고 세련된 백제의 아름다움이 완연히 녹아있는 걸작이다.
그리고 사리호 뒷편에 놓여있던 금제사리봉안기.
바로 이것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뒤집어놓은 유물이다.
"이거요 엄청 쓰여 있어요. 가득 쓰여 있어요."
이 금판은 사리기를 모시게 된 내력을 적은 사리봉안기였다.
"정월 29일..."
유물에 씌여진 글씨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최고의 자료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글자가 나왔다.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녀'
백제왕후 사택왕후가 깨끗한 재물로 미륵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193자 중 모두를 긴장시킨 것은 이 두 글자였다.
'사택(沙宅)'.
과연 사택왕후는 누구인가?
미륵사는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 그 완성이자 상징이다.
그러나 미륵사지에서 나온 사택왕후의 등장으로 상황은 돌변했다.
1,400년간 이어온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랑에 홀연히 끼여든 사택왕후는 누구인가?
"...진평왕이 공인을 보내 미륵사 창건을 도왔다..." - 삼국유사
이전에 미륵사 창건의 주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선화공주였다.
그러나 선화공주가 아닌 뜻밖의 이름 사택왕후가 전면에 떠오른 것이다.
"좌평도, 사택도, 전부 백제쪽 이야기입니다.
좌평은 백제 관등이고,
사택씨도 당시 백제의 가장 유력한 귀족의 성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화공주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 김상현 교수, 동국대 사학과
2. '사택'~ 백제사비시대 최고귀족가문!~
무왕과 관련된 부인의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딱 한 번 등장한다.
"금년 정월에 국주모가 죽자
제왕자의 아들인 교기와
국주모 여동생의 딸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
- 일본서기 642년
642년 국주모가 죽자
무왕의 아들 의자왕은
교기왕자와 국주모 여동생의 딸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다는 것이다.
국주모.
국주모는 의자왕의 어머니격이자 무왕의 부인이다.
그렇다면 국주모는 선화공주나 사택왕후 중 한 명일 것이다.
어머니격인 국주모가 죽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국주모의 측근을 제거하는 의자왕.
국주모는 누구일까?
다시 <일본서기>의 기록을 찾아보자.
'국주모의 여동생의 네 명의 딸'에 해답이 있다.
선화공주는 국주모일 수 없다.
선화공주의 여동생이 백제에 살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봉안기에 보면
사택씨 왕후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642년 시점이지요.
그렇다면 국주모란 사택씨 왕후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분명한 해답이 나온다고 봅니다."
- 이도학 교수, 국립전통문화학교
의자왕에게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국주모, 사택왕후.
사택지적비는
사택왕후 집안에 대해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비문의 사택지적(砂宅智積)은
무왕의 장인 사택적덕처럼
의자왕 대에 최고의 고위직인 대좌평을 역임했다.
개인적으로 절을 지을 만큼 경제력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금을 뚫어 진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탑을 바치니......."
사택씨는 성왕 때부터 백제 정치의 중심에 등장한다.
금강유역을 대표하는 집안으로 사비백제의 최고 가문이다.
딸은 왕후요, 아버지는 최고위직인 대좌평, 그리고 동시대의 사택지적 등
백제가 망할 때까지 사택씨는 백제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백제 지배층내에서 사씨 세력이
일급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비 천도일 것 같아요.
성왕이 사비로 538년에 천도를 단행합니다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왕이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고,
그 의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지지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걸 사씨 쪽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거죠."
- 노중국 교수, 계명대 사학과
전설의 한 장면처럼 돌탑 속에 있다가
1,400년만에 등장한 백제 여인 사택왕후의 등장과 함께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가?
백제 30대 왕이 된 무왕, 그는 가난한 시절의 조광지처 선화공주를 버린 것인가?
3. 서동요의 두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
"사택왕후의 등장,
그것은 600년대 초반 백제 왕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대 혼란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지금 제게 나와 있는 곳은 서동와 선화공주의 사랑을 주제로 조성된 서동공원입니다.
이곳말고도 익산에는 그들의 사랑을 기리는 흔적들이 많이 있는데요,
사택왕후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워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따라가보겠습니다."
대왕릉 - 전북 익산 석왕동.
이곳 익산엔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그것은 전설이 아니었다.
지난 1917년 이미 학술조사가 이루어져서
판석으로 짜여진 석실과 목관의 잔해, 그리고 금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발굴보고서는 이 능을 7세기 백제의 왕릉인 부여 능산리 고분과 일치한다고 결론내렸다.
"사비 능산리에 있는
백제 왕릉으로 전해지는 능묘와 그 형식이 같다."
- 조선고적도보보고
국립전주박물관엔 목관을 장식했던 유물이 전시 중인데
백제 전형적인 문양을 하고 있다.
대왕릉 복원 목관.
잔해를 바탕으로 복원한 관이다.
그런데 이 관을 만든 나무의 재질이 특이하다.
일본 와카야마현의 고야산은 아주 단단한 금송이 자생하는 곳이다.
백제와 일본의 활발한 교류를 바탕으로
백제왕들은 이곳의 금송을 가져다 관을 짰다.
그런데 익산의 쌍릉의 목관 역시 일본산 소나무로 밝혀졌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목관도
역시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자료가 무왕릉이라고 일치합니다.
따라서 이 고분은 무왕과 왕비릉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 최완규 소장, 원광대 마한 백제연구소
그렇다면 무왕과 함께 쌍릉에 묻힌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였을까?
삼국유사는 선화공주를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로 기록하고 있다.
선화공주의 아버지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승만공주가 그 뒤를 이었는데 그녀가 바로 선덕여왕이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딸은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천명부인이다.
선화공주는 김춘추의 이모인 셈이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의 기록은 왜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것일까?
삼국사기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왕의 부모만 기록하기 때문이다.
선덕왕이 진평왕의 딸이라는 것도
진평왕의 기록이 아니라
선덕여왕조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선덕왕은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큰딸이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천명부인 역시 태종무열왕의 부모를 기록했기 때문에
진평왕의 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태종무열왕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다." - 태종무열왕 원년
"선화공주 경우에는
본인이 신라왕이 된다든지,
신라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기록에 남겨질 수 없었던 것이고,
이러한 식으로
우리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될 것 같습니다.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이도학 교수
그래도 사택왕후의 등장은 사뭇 충격적인 것이다.
명확한 역사적 진실 앞에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야기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단순히 지어낸 것일까?
삼국유사 무왕전에 나오는 서동요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로
총 25글자의 짧은 노래다.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표기한 것으로,
주어나 목적어 등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글자들은 뜻을 사용하고,
조사와 같은 문법적인 요소들은
음을 빌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대단히 파격적인 노래다.
어떻게 신분도, 국경도 뛰어넘는 이런 사랑노래를 할 수 있었을까?
당시 신라 사회 성풍속을 알 수 있는 유물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토우장식장경호(국보 195호).
적나라한 성행위의 묘사를 통해서 신라인들의 성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것은 신라사회가 남녀간의 사랑을 지극히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이며 대단히 파격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자유로운 성풍속을 가진 신라사회에서 진평왕은 왜 딸을 내쫓았을까?
무엇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딸을 내쫓았을까?
문제는 바로 이 한 글자에 있었다.
<삼국유사>에서 같은 글자의 쓰임을 살펴보았다.
문맥상 이 글은 '황금란 6개', '난생'이다.
결국 이 글자는 '알란(卵)'자였다.
그렇다면 왜 알이 문제가 된 것일까?
다시 한 번 노래를 들어보자.
"선화공주는
남몰래 얼어(정을 통해) 두고
맛동방을(에게)
맛동방을(에게)
밤에 알을 안고 간다네"
'밤에 알을 안고 가다?'
대체 무슨 뜻일까?
"서동의 남성을 품고서 간다,
품고 간다는 게 포란이라고 되어있는데
암탉이 알을 까는 것을 포란이라고 하거든요.
선화공주를 암탉이라고 하고,
서동의 남성을 알이라고 하고,
'여성이 성을 주도하는 입장에서 성행위를 한 다음에, 궁궐로 간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 정우영 교수, 동국대 국문과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일지라도
일국의 공주와 마 캐는 청년 사이의 음탕한 소문은
진평왕을 곤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과연 서동요가 6세기에 지어진 노래일까?
"이런 노래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악플이라는 것의 특성이
어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폄하하거나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것이지요.
이걸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하고 친연성이 없는 것이지요.
관계가 없는데 그런 노래가 지어졌을 리 없다고 보구요.
그때 진평왕 때로 그냥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우영 교수, 동국대 국문과
최고의 미녀를 얻으려는 서동의 계략은 성공했다.
미륵사 창건의 주체로 사택왕후가 분명하다면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선화공주 또한 역사 속의 인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택왕후와 선화공주는 역사 속에 공존하고 있다.
4. 삼국유사의 진실을 찾아서!~
- 금(金), 사자사(師), 미륵사 연못
"사리장엄구의 발견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미륵사 창건의 주체가 사택왕후라는 것입니다.
선화공주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좀 당혹스럽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섣불리 선화공주를 허구의 인물로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현재로서는 아직까지 선화공주를 부정할 어떤 근거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삼국유사 무왕전 미륵사 창건설화는 어떨까요?"
삼국유사는 설화적인 요소가 많아서 그 신빙성을 의심받을 때가 많다.
미륵사 창건 설화도 그 중에 하나다.
미륵사가 있는 익산,
그리고 인접 지역엔 유난히 금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전북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
실제로 이 지역 산자락엔 폐금광 흔적이 수십 곳 남아있다.
일제시대에 개발된 금광이다.
해방후까지도 이곳은 유명한 금광지역이었다.
'많이 나왔다고, 금이 많이 나왔다 이거야
여기서 나온 금이 소 한 마리 덩치는 된다고 그러지.
이 하천을 따라가면서 다 채굴을 해서 그렇지 금이 없는데가 없어."
- 송봉엽, 김제시 금구면
그래서일까?
삼국유사 무왕전에는 유난히 금 이야기가 많다.
미륵사지 사리장엄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금과 관련된 특이한 유물이 나왔다.
조심스럽게 하나씩 들어올린 황금빛 유물, 그것은 금판이었다.
길이 8센치미터, 폭 1.5센치미터의 금제소형판 18개, 그것은 시주품이었다.
삼국유사 무왕전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특이한 대화가 나온다.
'내가 마를 캐던 곳에 금이 흙더미처럼 쌓여있다."
서동이 말한 흙더미처럼 쌓였다는 금도 단순한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
논농사를 지는 이곳엔 겨울이 되면 특별한 광경이 펼쳐진다.
바로 사금 캐는 현장이다.
이곳에선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수십 년째 사금을 채취해오고 있었다.
'금 안 나오는 지역이 없어요.
금구에서는 어디고 파면 다 금이 나와요.
금구, 금산, 두말할 것도 없어요.'
- 온운하(80), 김제시 금구면
금구라는 지명 역시 금이 나오는 도랑이란 뜻이다.
예전에 명성에 비하면 끝물이지만 여전히 논바닥엔 금가루가 있다.
몇 차례 걸러내자 정말 모레 속에서 금이 나왔다.
'여기 노랗게 보이는 게 다 금이야!'
흙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는 금!
그것은 금괴가 아니라 사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70~ 80년대 때에는 무지하게 많이 불야성을 이루듯 이 근방에는 거의 다 사금을 채취했습니다."
- 경은선(44세), 김제시 금구면
삼국유사 무왕전의 금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불교사상적인 면 이외에도
현실적으로 재정확보라는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금광개발인거죠.
금광개발을 통해서 익산천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려고 한 것입니다."
- 노중국 교수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부인이 사자사를 찾아가는 길에 미륵삼존을 만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사자사에 가려고...." - 삼국유사 무왕전
실제로 미륵사지 뒷편 산에는 사자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런데 사자가 스승사(師)자가 아닌,
동물인 사자사(獅)자를 쓰고 있었다.
삼국유사가 허구일까?
그런데 전주박물관에는
지난 1994년 사자사지 발굴 중 수습한 기와가 전시되어 있다.
도공의 실수로 글씨가 거꾸로 찍혀있지만
기치2년, 즉 1322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다.
'스승사'자가 씌여져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자사는 고려시대까지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기록도 사실일까?
'하룻밤에 산을 깍아 연못을 메웠다." - 삼국유사 무왕전
미륵사지 발굴 조사가 시작된 1970년대, 미륵사터는 논과 밭이었다.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시 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약 2~2.5미터까지 판 걸로 기억하는데 성토가 되어 있는 층이 있고
사찰을 짓기 위해 성토를 했죠.
그 아래 뻘흙층이 나왔어요.
그 뻘흙층에는 갈대 잎 이런 것들이 섞여 있었어요.
그래서 연못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리고 또 이 땅속에서 물이 엄청나게 나왔어요."
- 김선기, 원광대 박물관
결국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무왕전의 미륵사 창건설화는 사실로 밝혀졌다.
삼국유사를 내세우는 선화공주와
사리기를 내세우는 사택왕후의 팽팽한 사랑쟁탈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5. '용의 아들' 서동, 그 출생의 비밀!~
그는 부여씨에서 떨어져 나간 몰락한 왕족이었다!~
"삼국유사는 단순한 설화가 아니었던 겁니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나이 서동, 백제 30대왕 무왕,
우리가 이 두 사람의 사랑의 진실을 알려면 무왕의 정체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법왕의 아들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는 '용의 아들이다'고 되어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연못가에 살던 어머니가 연못속에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고
마를 캐며 살다가 선화공주를 만나 결혼한 후에 왕이 되었다' 이렇게 전하는데요..."
전북 익산 금마면 마룡지.
이곳 마룡지는 용의 아들 서동이 어머니와 마를 캐며 살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살던 곳이라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근처에는 꽤 넓고 아늑한 평지가 있는데 집터로는 손색이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아직도 건물의 흔적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있었어요.
크고 작은 돌들이 있고, 주춧돌들이 큰 것은 양팔 벌린 것만 하고, 작은 건 좀 작고, 깍지 않은 돌들도 많았고요.
그것을 현재 우리 아버지가 옮겨서 건물밑돌로 쓴 상태라 보여드릴 순 없네요.'
- 심숙희, 전북 익산 금마면
그런데 왕위계승자인 법왕의 아들이 왜 사비궁궐이 아닌 이곳에서 마를 캐며 살았을까?
가난한 과부의 아들이 어떻게 왕이 되었으며,
삼국유사에는 왜 서동을 용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서동이, 즉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 분명하다면 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서동의 출생에 뭔가가 있다는 겁니다.
법왕의 아들이 아닌, 즉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거죠."
- 노중국 교수
지난 2007년 10월 왕흥사에서 발굴된 창왕명사리기.
우린 여기서 서동의 출생에 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창왕, 즉 위덕왕은 서동의 할아버지였다.
위덕왕은 먼저 죽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곳에 절을 세우고 사리를 봉헌했다.
"백제왕 창이 죽은 아들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 창왕명사리기
그리고 일본서기엔 창왕이
또 다른 아들 아좌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하였다." - 일본서기 추고천황 5년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좌태자.
그는 597년 일본에 건너가 쇼오토쿠태자의 초상을 그렸다는 그 왕자다.
그런데 그의 행보가 사뭇 불가사의하다.
그는 아버지 위덕왕이 73세의 고령인데도 일본에 건너갔고
위덕왕이 사망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위덕왕 입장에서보면 자기 뒤를 태자가 잇는 게 당연한거죠.
그런 태자를 일본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이것은 자기의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아좌태자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위덕왕이 밀린 것입니다.
실권 귀족세력 입장에서 자기들 위주로 정국을 운영하기 위해선
자기들이 조정하기 쉬운 쪽의 왕을 택했겠지요."
- 노중국 교수
위덕왕이 죽자
아좌태자 대신 고령의 삼촌 혜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하고 죽었다'는 단 두 줄만 남긴 채
일 년만에 죽는다.
그 뒤를 이어 혜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서동의 아버지 법왕이다.
그는 당시 귀족에게 눌린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왕이었다.
왕자시절부터 대규모 호국사찰을 짓는데
불교정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런데 법왕도 역시 재위 1년만에 사망한다.
"600년 법왕 재위 2년 만에 사망"
2년 사이,
세 명의 왕이 연달아 사망한 것이다.
"위덕왕 사망 598년
혜왕 사망 599년
법왕 사망 600년"
'뭔가 법왕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인 변동이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법왕의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변고라는 느낌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 이도학 교수
그리고 학자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왕이 등극하였다.
600년 백제 30대 왕 무왕 즉위.
익산에서 마를 캐던 서동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서동, 즉 무왕!
과연 그는 법왕의 아들이었을까?
서동을 용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 의구심을 나타냈다.
다른 왕들은 누구의 아들이라고 명확히 밝혔는데
유독 무왕만이 법왕의 아들이라는 언급이 전혀 없다.
"무강왕 또는 헌병왕이라고도 하며 어렸을 때 이름은 일기사덕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후대의 기록이라 정확성이 떨어질 수 있다.
중국 하남성 박물관.
그런데 이곳 박물관엔 당대의 생생한 기록이 있다.
백제 말기의 왕실 가계를 알 수 있는 1차 자료.
바로 무왕의 손자인 부여융의 묘지명이 있다.
묘지명은 당대의 기록이기 때문에 왜곡이 있을 수 없다.
"공의 이름은 융이고
호도 융이다.
백제의 귀인이다."
대개 망자의 내력과 증조할아버지까지 가계를 싣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아버지 의자왕과
할아버지 무왕은 이름이 정확히 나와 있지만
증조인 법왕의 이름이 없다.
"부여융의 할아버지 장은(무왕) 백제국왕이다."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과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서동의 사연은 무엇일까?
복신과 도침을 모시고 있는 은산 별신당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별신당 - 충남 부여군 은산면.
무왕의 조카였던 복신은
백제 멸망후 부흥군을 이끌었던 백제의 영웅이었다.
무왕의 조카 복신장군,
백제 왕가의 성은 부여씨,
그렇다면 그의 이름은 당연히 부여복신이다.
그런데 662년에 일본서기에
그의 이름을 귀실복신이라고 했다.
부여씨가 아니라 귀실씨였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중국 남경박물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었다.
흑치상지는 백제인으로 당나라에 가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의 묘지석에는 성씨 흑치에 대한 내력이 있다.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로 봉해지다.
결국 흑치는 부여씨에서 분화된 성씨라는 것이다.
"한 번 왕족이라 해서 다 유세를 누리는 건 아닌 것 같고, 격도 낮아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 소위 분지화라는 것입니다.
왕실에서 떨어져 나가서 별도의 성을 칭하는 이런 게 나옵니다."
- 노중국 교수
그렇다면 무왕은 백제 왕족에서 떨어져 나온 몰락한 왕족이었을까?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는 그를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여러 가지 이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무왕이 법왕의 적자가 아니다는 거죠.
그럼 법왕의 아들로 표시가 된 것은 뭐냐,
한 왕이 다음 왕을 잇는다는 것은 적자개념이라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자식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 정재윤 교수, 공주대 사학과
몰락한 왕족 서동은 권력을 좌지우지하고자 했던 백제 귀족들에게 알맞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대신 용이라는 상징조작이 필요한 무왕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6. 미륵불이 되고자 한 무왕과,
석가모니불을 숭상하는 사택집안의 결합!~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은 국제결혼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일연스님의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습니다.
미륵사 황금사리장엄의 발견으로 삼국유사 무왕전의 창건설화가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왕은 왜 삼국을 통틀어 가장 큰 이 미륵사를 수도인 사비가 아닌 이곳 익산에 세웠던 걸까요?
그리고 왜 이 거대한 사찰에 미륵불을 모신 걸까요?"
미륵불은 과거불인 석가모니불과는 달리 중생들을 현세의 고통에서 구해줄 미래불이다.
그래서 미륵불은 새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도솔암 마애 미륵불 - 전북 고창군 이산면
이곳 도솔암 미륵불은
새세상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미륵불이다.
미륵불 배꼽속에서 비결이 나오는 날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미륵불은 고통받는 중생들에겐 구원의 메시아였던 반면에
새로운 통치세계를 꿈꾸웠던 지배자는 자신들이 미륵불로 비춰지길 바란다.
무왕이 굳이 수도가 아닌 익산에 웅장한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륵이 출현했다고 하면
미륵이 출현한 그 시대 자체는
곧 바로 이상적이고 대단히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백제 왕실에서는 그러한 이상세계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다스리는 시대가 그런 이상적인 시대임을 강조하고 싶은
정치적인 의도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 김상현 교수
미륵신앙을 창건이념으로 담고 있는 미륵사.
그런데 이번에 발굴된 사리봉안기에는 의외의 글자들이 나온다.
석가모니불을 지칭하는 법왕과
그의 사리를 모신다는 글이 주된 내용이다.
"이번에 나온 곳이 미륵사 서탑이기 때문에
미륵신앙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언급되지 않은 게 상당히 특징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에 이 사리봉안기가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미륵신앙과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고
석가불 신앙과 연관을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조경철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왜 사택왕후는 남편 무왕의 통치이념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사택지적의 이름 지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화경> '화성유품'편에는 '16왕자 출가편'이 있는데
그 중 마지막 16번째 왕자가 사바세계에 오신 석가모니불이다.
그런데 이 석가모니불의 큰형님의 이름이 '지적'이다.
'제일왕자 지적'
사택왕후의 집안 사택지적.
그는 석가모니불의 형님인 지적불을 지향하고 있다.
사택지적비에도 사택지적 집안의 사상적 지향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금으로 세운 불당과 옥으로 세운 보탑'.
이것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경주 불국사.
이곳 불국사에는 다보탑과 석가탑, 쌍탑이 유명하다.
동쪽에는 다보탑,
서쪽에는 석가탑을 배치하는 것이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화사상의 기본배치구도다.
백제 최고의 귀족 집안이었던 사택씨 집안은
석가모니불신앙을 통해 지배구도를 유지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집안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가운데 탑은 미륵신앙에 의해 형성된 탑이고
동서 쌍탑은 법화신앙에 의해 쌓여진 탑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조경철 박사
미륵사는 무왕의 통치이념에 의해 세워진 절이었고
미륵사 창건과정은 기존의 귀족들을 끌어안는 구심점 역활을 한 셈이었다.
"이렇게 미륵과 법화가 혼재되어 있는 것은
미륵불을 표방하여 정치적 이상을 삼고자 했던 백제 무왕과
대표적 귀족가문 사택씨의 법화신앙을 하나로 융화시켜서
무왕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상적 통합과 정치적 결속을 이루려고 한 것 같습니다."
- 조경철 박사
미륵불을 통해 정치적인 내부통합을 확립했다면
선화공주와의 결혼은 적대국 신라와의 화해책이었다.
백제와 긴장관계에 있었던 신라는
600년대에 들어서 고구려의 침략까지 받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였다.
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렸던 신라는 백제까지 가세한다면 협곡을 받는 양상이었다.
신라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무왕은 재위 40여 년 동안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런데 집권초 10년간은 신라공격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때문이 아니었을까?
"무왕 입장에서
신라의 왕녀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서
일반 귀족세력들을 제압하고
또 강력한 왕권을 마련한 토대를 구축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면 신라의 경우는 결혼관계를 통해서
백제하고 원수관계가 되는 상황인데 휴전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거죠.
그리고 그것으로 다져진 국력을 고구려와의 싸움으로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겠죠"
- 이도학 교수
선화공주와 서동의 결혼의 진실은
신라와 백제의 화해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신라와 백제는 5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동맹을 맺어 나제연합방어선을 구축했었고,
493년도에는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 이찬 비지의 딸이 혼인을 하여 결혼동맹을 맺은 적도 있었다.
신라와 백제 사이 가장 긴장이 고조되었던 553년,
신라에게 한강을 잃은 성왕은 바로 그 해에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신라와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져 백제 성왕은 신라군에게 잡혀 참수당했다.
"무왕하고 선화공주의 결혼은 국제결혼입니다.
왕실과 왕실의 결혼은 이것은 애정의 결혼이 아닙니다.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서 결혼을 한거죠.
그럼 언제 이런 결혼을 하느냐,
보통 평화시보다는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어지는,
그것을 좀 완화시키는 완충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 노중국 교수
선화공주와 서동.
적대국의 왕과 공주의 결혼.
그 아름다운 결합은 수십 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긴장 완화책이었던 셈이다.
"우리 고대사 같은 경우 자료가 적기 때문에
보통 '설화적인 이야기는 모두 설화다'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는 건 곤란하다고 봅니다.
그 설화속에는 뭔가 역사적 현실이
꼬투리가 되어가지고 살이 좀 붙어나가는 것으로 봐야지,
완전히 설화로, 허구적인 것으로 돌릴 수가 없다는 이야깁니다.
이 무왕조의 이야기는
백제사 자체를 전체적으로 이야기할 때
상당히 꿈을 심어주고 윤기를 내는 그런 면을 갖고 있는 것이죠."
- 노중국 교수
용의 아들 서동, 그리고 당대 최고의 미녀 선화공주.
두사람의 사랑이 1,400년간 이어져 온 것은
비극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자 했던 신라와 백제인들의 소망때문이 아니었을까?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견을 통해 1,400년의 침묵을 깨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택왕후,
그녀는 선화공주의 사랑을 허구로 만든 논란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1,400년전 백제인들의 격동의 삶과 사랑을 오늘에 되살려주는 소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격동의 역사속에서 만난 선화공주와 서동, 이 두사람의 만남을
아름다운 대서사시로 꽃피운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이야기 서동요.
서동과 선화의 사랑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 한상권의 역사추적을 보고(늘 복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