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리의 죽음으로「사망유희」는 난관에 봉착했다. 리는 주연뿐 아니라 제작, 감독, 각본, 무술지도 등 혼자서 여러 역할을 맡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겨진 필름은 액션 신뿐이었다. 게다가 그 액션 신조차 전부 찍어 완성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각본도 미완성인 채였다. 이런 상태에서「사망유희」를 완성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리의 사후에 날조된 여러 스캔들이 신문에 보도되어 그토록 높던 리의 인기가 홍콩에서는 급락했다. 이 엉터리 정보의 상당수는 리를 지나치게 라이벌시하고 있던 모 폭력단의 스타가 흘린 것이 아닐까하고 일부에서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골든 하베스트는「사망유희」의 제작을 단념하고 있었지만 사태는 호전되어 갔다.「용쟁호투」공개에 의해 구미에서 브루스 리의 인기가 폭발했던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브루스 리의 주연작은 4편으로 매우 적어, 팬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미완성작인「사망유희」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한「사망유희」의 완성을 바라며 고대하는 전 세계 팬들의 편지가 잇달아 하베스트로 도착했다.
그런 와중에 일본에서도「용쟁호투」가 73년 12월 22일에 공개되어 일본 영화 사상 2위라는 경이적인 흥행 수입을 기록하였다. 반년간에 걸친 장기 상영이라는 초대형 히트를 눈앞에 두고 일본의 배급 회사간에 리의 구작에 대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팬들에게 행운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골든 하베스트가「맹룡과강」의 배급권을 일본의 토호 토와 東宝東和와 먼저 계약하고서 토에이 東映에 넘겨 버린 것이었다. 즉 2중 계약이다. 당연히 토와는 격노해 레이먼드 초우를 다그쳤다. 거기서 초우는「맹룡과강」대신에「사망유희」를 완성시켜 배급권을 토와에 넘기기로 약속했다. 이로 인해「사망유희」의 제작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74년 9월,「사망유희」와「맹룡과강」의 조감독을 맡았던 식요창을 필두로 해서 홍금보, 임정영 등이 모여 프로젝트 팀이 결성되어「사망유희」제작에 돌입했다. 또 이 팀에는 초대 홍콩의 스필버그 오사원도 참여해 식요창과 함께 공동 지휘했다.
같은 해 10월에 브루스 리의 대역을 선발하기 위해 각지에서 오디션이 개최되었다.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후보자 가운데 리역으로 선택된 사람은 한국인 김태중 金泰中 예명은 당룡이었다. 그는 원래 브루스 리의 팬으로 언제나 리의 흉내를 냈던 듯 하다. 그 보람이 있었던지 선발 위원인 식요창의 눈에 띄었다.
일반적으로는 김태중이 태권도의 달인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스카웃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오디션 당시 아직 청띠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후, 카사노바 원 이나 황정리 黃正利등의 실력자와 공동 출연함으로써 무술 실력이 부쩍 늘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술 지도가 홍금보였던 것이 가장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리가 남긴 사망유희의 필름은 NG 등을 포함해 전부 2시간 30분 정도의 분량이다. 이 필름을 살려 리의 원안에 충실한 방향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또한 리의 다른 출연작에서 사용할 수 있을 듯 한 장면을 발췌해 제작하는 것도 결정되었다. 스탭간에 다소의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믿기 어려울 지도 모르지만 당룡(김태중)의 증언에 의하면 공항이나 레스토랑에서의 난투신, 아내 역인 노라 먀오의 출연신, 탑의 1층에서 황인식과의 대결이나 온실에서 당룡 대 카사노바 원의 격투까지 당시에 촬영되어 있었다고 한다. 홍금보가 얼마나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리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완성시키면 반드시 걸작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 프로젝트를 중단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의 발단은「신 사망유희 7인의 쿵후」였다. 이 작품은「사망유희」의 구성을 본 떠 먼저 공개해 버린 범죄적인 작품이었다. 진짜 리의 작품과 착각해 버린 관객들, 조금이라도 리와 비슷하다면 가짜라도 상관없다는 팬들이 극장에 몰려들어 작품의 질과는 반비례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베낀 작품이 먼저 공개되어 히트하는 바람에 시장성이 없다고 느낀 초우는 격노하여 거의 완성에 가까워지던 75년판「사망유희」는 자금 부족까지 겹쳐 중단되어 세상에서 봉인되었다.
극비로 촬영되었던 작품의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것은 내부에 밀고자가 있음을 의미했다. 초우의 분노는 굉장해「향후 이 작품에 관한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갈 경우, 개런티를 일절 지불하지 않겠다」라고 관계자에게 고해 계약서까지 쓰게 만들었다. 당시의 이야기가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홍금보도「신 사망유희」사건에는 격노하고 있었는지, 그는 당시에 마구잡이로 제작되고 있던 브루스 리 흉내내기 식의 영화 전반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브루스 리의 이름을 경솔하게 사용하는 놈들은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홍금보는 후에「비룡과강 Enter the Fat Dragon 肥龍過江」을 발표한다. 그리고 극중에서 리를 흉내낸 전혀 닮지 않은 가짜를 분노의 주먹으로 때려 눕힌 후 홍금보는 이렇게 외친다.「브루스 리는 말야, 나의 소중한 우상이란 말이다! 엉터리 액션으로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마라!」작품 자체는 코메디지만 이 장면의 대사에서는 리에 대한 홍금보의 애정이 느껴져 감동적이다. 덧붙여 그 극중 영화의 타이틀은「사망약속」이었다.
여담이지만, 이「신 사망유희」사건은 모 폭력단 스타의 리에 대한 짓궂음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출연자들의 대부분이 그 사제이고.
초우는 이 사건이 있은 후 사망유희 제작권을 워너에 넘기겠다고 발표한다. 워너가 관여함으로써 대폭적인 스케일 상승이 기대되었고 공동 출연 예정자로 스티브 맥퀸 등의 이름이 올랐다. 이 소식에 팬들은 들떴으나 2개월도 못가서 다시 하베스트로 제작권이 옮겨졌다. 그리고 1975년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 6월 15일, 반년간 침묵을 계속하던 골든 하베스트가 다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홍콩의 석간지가 일제히「사망유희」제작 재개 뉴스를 보도했던 것이다. 그 후의 뉴스에서도「공동 출연자로 복싱 세계 헤비급 챔피언 모하메드 알리나 축구의 신 펠레 등의 이름이 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레이먼드 초우가 스티브 맥퀸이나 제임스 코번 등의 대 스타와 교섭하기 위해 가까운 시일내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까지 보도 되었다.
리 팬들에게 꿈같은 정보가 잇달아 날아들던 와중인 7월 21일, 홍콩에서「용쟁호투」가 재상영되어 대히트를 기록했다.
「사망유희」관련 뉴스가 다시금 리의 인기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 때 극장에서「사망유희」의 단편 필름이 동시 상영되고 있었다.「사망유희」의 훌륭한 액션에 관객들은 놀라며 하루 속히 완성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맥퀸, 코번, 알리 그리고 펠레의 출연은 개런티 등의 면에서 타협을 보지 못해 실현되지 않았지만, 새롭게 프로젝트 팀이 결성되어 8월이 끝나갈 무렵에 겨우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전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이었던 식요창은 하베스트를 퇴사하였기 때문에 홍금보가 메가폰을 잡았고 임정영의 참여도 결정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내 역의 노라 먀오도 하베스트를 퇴사한 상태로 초우와는 견원지간인 로 웨이 프로덕션과 계약해 그녀가「사망유희」에 출연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촬영은 홍콩과 일본 (「사망탑」에 일부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에서 행해졌다.
이야기의 내용은 몇개의 탑에서 각각 싸움이 전개되어 그곳에서 승리한 사람이 마지막에 제일 큰 탑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직 사망유희의 오리지널 세트가 남아 있어, 홍금보는 탑 내부의 격투신을 찍어서 첨가했다. 촬영은 대역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조명을 상당히 어둡게 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탑 내부를 지키는 사람은 칼날을 사용해도 해치울 수 없는 기공을 쓰는 사람이나 스파이더 맨과 같은 캐릭터가 있는 등, 상당히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레이먼드 초우에 의해 이 프로젝트도 궤도 수정이 가해진다. 구미 시장을 의식한 초우가 미국과의 공동 제작을 바랬기 때문이었다. 캐스트도 미국의 배우를 쓰기로 했다. 이 때문에 감독은 홍금보와 로버트 클라우스 두 사람이 맡게 되었다. 각본도 새롭게 고쳐 쓰게 되어 촬영은 다시금 중단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77년 8월, 결국 클라우스 감독판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9월 6일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헐리우드에서는 오스카상 수상 경험이 있는 딘 재거 Dean Jagger와 긱 영 Gig Young (영화 완성 직후에 권총 자살해 버린다), 휴 오브라이언 Hugh O'Brian 등이 불리워졌고, 리의 애인역으로는 신인인 콜린 캠프 Colleen Camp가 분했다. 새로운 악역으로 밥 월의 참가도 결정되었다. 밥과 브루스 리역의 당룡은 현장에서 대면했는데, 밥은 당룡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룡은 일이 있을 때마다「너의 킥과 펀치는 브루스와는 전혀 다르다. 좀 더 그처럼 해봐라」는 밥의 질책을 들어야했다. 당룡은 그런 압력으로 한때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밥은 친구인 리의 유작을 위해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무술 지도를 맡은 홍금보도 결코 타협을 허락치 않았다. 당룡과 밥이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액션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로버트 클라우스 감독을 밥과 둘이서 현장에서 따돌릴 정도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스턴트 맨 원표 元彪의 존재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홍금보에게서 당룡과 더불어 대역을 맡도록 지시 받았다. 원표는 신인이었던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격려해 주었던 브루스 리의 은의를 잊지 않았다. 그는 몇 일 밤을 새워가며 리의 액션을 연구했다.
「리 선생님, 저의 액션을 보아 주십시오. 사망유희는 홍금보와 함께 반드시 완성시키겠습니다.」
원표는 맹세한다.
라커룸의 명 파이트 신은 그러한 현장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감독이 두 사람이어서 스탭도 홍콩, 미국, 영국이라는 다국적으로 이루어져 현장은 상당히 복잡했다. 미국측 스탭의 방식은 순조롭게 빨리 진행하는 듯 했으나「날림 작업」이었다. 한편, 홍금보가 이끄는 홍콩측은 액션으로 인해 시간이 걸렸다. 또한 무술 지도도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홍금보 외에 클라우스가 미국에서 한 명을 데려 왔기 때문이다. 78년 판의 연출이나 액션 신에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촬영은 홍콩과 마카오에서 행해져 9월의 마지막에 일단 종료되고 10월 하순에 추가로 촬영해 11월에는 모두 마무리 되었다. 그 후에 필름은 헐리우드로 옮겨져 편집 작업이 개시되었다. 그 사이 골든 하베스트는 보도 관제를 깔아 외부로 정보가 새지 않도록 배려했다.
1978년 3월 15일, 홍콩의 월드 프레스 프리뷰에서 마침내 78년판「사망유희」가 세계 최초로 공개되어 방문한 팬들은 스크린으로 돌아온 리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작품 전체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클라우스 감독의 부족함도 여실히 드러나지만,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방식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러 간 극장에서는 라스트에서 진짜 브루스 리가 모습을 나타낸 순간, 장내가 박수와 환성의 소용돌이에 싸여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리는 일순간에 관객을 포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스타는 이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야기가 많은 브루스 리를 흉내낸 대역의 액션도 다른 이미테이션 배우의 작품과 비교하자면 홍금보 일행이 분투한 덕분에 최고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존 배리 John Barry의 음악도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