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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ing Grace!!!
카미노에서 첫번째 겨루기(앞의 글 참조)가 시작된 밤이다.
운 좋게도 고마운 치과의사 덕에 몇 해째 현상 유지를 하고 있을 뿐 내 신체중 가장
불안한 부분이 치아인데 잇몸이 간헐적으로 욱신욱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청년의 호의로 편한 잠자리는 확보했으나 치아에 이상 신호가 옴으로서.
그래서 기한(expiry) 지난 인사돌을 먹고 '그 분'에게 떼 쓰느라(구약성서 창세기의
표현으로는 씨름하느라) 간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저의 치아를 몽땅 뽑아낸다 해도 어차피 카미노에서 도중하차하는 일은 없을 텐데
한 번 더 후하게 봐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그 분'과 씨름했는데 밤잠 못잔 것 정도 가지고 뭘.
사실, 내게 여한이 있는 건 아니다.
오르고 싶은 산과 걸으려 한 길 다 섭렵했는데 무슨 여한이 있으랴 마는, 내 어머니
또한 이미 한(恨)을 풀르셨을 것이라 믿지 마는 이왕에 시작한 순례길이니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것일 뿐이다.
이후로는 잠 못이룬 연3일은 물론 카미노 75일 동안 몸에 이상 증세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4월 25일자 엽서에 쓴 대로 몸은 "내 일생에서 최고로 좋은 상태"였다.
마지막 카미노 마드리드에서 역(逆)코스로 인해 악전고투는 했지만 좋은 몸 상태가
뒷받침해주었으니까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 뿐인가.
35일을 예상했던 프랑스 길을 1주일이나 단축함으로서 최고, 최상의 환희를 느끼게
한 솜포르트(Somport) 길을 덤으로 걷게 되지 않았는가.
다시 걸은 팜프로나 ~ 사아군 길까지 합해서 500km 이상을 더 걷지 않았는가.
1941년, 7살 소년은 개복수술을 받고 반년째 병실에 누운채 래디오를 통해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듣고 있었다.
얼마 후에는 일본 천황이 승전 선물로 하사한다는 고무공을 병실에서 받았다.
(고무가 없는 일본이 동남아의 고무산지 점령을 자축한다 해서 고무공을 만들어 온
나라의 소학교 학생 모두에게 나눠준 것)
내가 과연 이 공을 가지고 다른 애들과 더불어 운동장에서 뛰놀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은 그 때였다.
앉은뱅이, 세 발로 걷기 등 한 많은 역정에 마침표를 찍은 청년이 미친 듯 산을 누빈
것은 전적으로 한(恨)풀이였다.
그리고 오래잖아 그 한풀이는 자기때문에 하염없는 눈물의 세월을 보내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思母曲/메뉴 백두대간과 아홉정맥 38번 글 참조))으로 바뀌었다.
"힘차게 걷는 것이 바로 사모곡을 우렁차게 부르는 것"이라고.
77세의 늙은 아들은 그 사모곡이 수만리 이역에서도 여일하게 울려퍼지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몸의 한 부분에 이상이 온다 해서 포기할 늙은이가 아님을 익히 아시는'그
분'이시기에 쿨하게 봐주시는 것일 게다.
옛 신앙인들의 표현대로 "Amazing Grace!(놀라운 은혜)"다.
미세스 굿 아이디어와 프랑스 노녀
아내에게 말한 것처럼(4월 7일자 엽서) 조춘과 성하(早春 盛夏)의 날들이다.
아침에는 손이 곱아 애를 먹고 한낮에는 맹렬한 태양열에 흐느적거리게 된다 할까.
산지기님이 챙겨주신 핫팩(hot pack)을 아침마다 요긴하게 쓸 줄이야.
그래도 작렬하는 태양길 보다 싸늘한 새벽길이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캄캄한 새벽길을 피하려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 실제로는 되풀이되고 있다.
다시 건너는 아르가 강의 레이나 다리(푸엔떼 라 레이나)가 어둠 속에서 막연하다.
지도에서 본 수도원과 수녀마을은 어림만 될 뿐이고 아르가 강과 나란히 가던 길이
산을 깎아 급조한 듯한 길로 변해 꾸불거리며 솟구쳐 오른다.
'데스비오 프로비시오날'(desvio provisional/임시 우회로)이란다.
왜 산을 깎아 이 임시 우회로를 만들었는지 그 까닭은 모르지만 싱싱한 이른 아침인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어제 페르돈 봉 오를 때 잠시 함께 했으며 나를 내 카메라에 담아줬던 카나다 여인을
N-111과 접한 고개마루에서 다시 만났다.
'굿 아이디어'((good idea)를 즐겨 쓰는 호기심 많고 순진한 이미지의 할머니다.
그녀의 걸음으로 미뤄볼 때 얼마나 일찍 떠났기에 벌써 여기까지?
내가 윈드재킷을 배낭 멜방고리에 묶는 것을 본 그녀는 또 굿 아이디어!
자기의 배낭과 동일한 상표(OSPREY)인데 자기 것에는 없는 고리라기에 내가 따로
달았다니까 역시 굿 아이디어!
'미세스 굿 아이디아'라 했더니 '굿 닉(good nickname)'이라며 티없이 웃는 그녀와
마녜루(Maneru)를 지나 시라우키Cirauqui)/Zirauki) 까지 다시 동행했다.
마녀루는 16tc에 취락이 형성됐다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마을 끝의 묘지와 밀밭, 포도밭을 지나면 정면 언덕바지의 제법 큰 마을이 기다린다.
지평선 상에 우뚝한 중세풍의 시라우키다.
멀리서 보기와 달리 좁은 골목이 꼬불꾸불하고 광장아치를 통과해 가파르게 오르면
정수리에 산 로만교회(Iglesia de San Roman)가 요새처럼 서있다.
13c에 세워진 건물로 푸엔떼 라 레이나의 산티아고 교회를 모델로 한 현관이라나.
마을을 지나면 시야는 열렸으나 굴곡이 심한 밭길이다.
카미노는 유적(ruin)처럼 남아있는 로마다리(puente romano)를 건너 N-111도로와
A-12 고속도로의 육교와 굴다리를 통해 차례로 가로지른다.
에스테야에 도착하려면 이러기를 반복해야 한다.
도로와의 전쟁이라 할까.
현대화 대세에(도로들 개설) 카미노가 중병을 앓고 변형을 거듭한 지역이라 하겠다.
그런데도, 어이없게도 이 길이 잔존하는 대표적인 로마시대의 길이란다.
굴곡과 기복이 심한 경작지대 길에는 육중하나 아름다운 중세풍의 돌다리도 있다.
살라도 강(rio Salado)에 놓인 다리다.
스페인어 '살라도'는 소금이라는 뜻인데 천지개벽 이전에 여기가 바다였었나?
저 앞 밭 가장자리에서 쉬고 있던 프랑스 할머니가 나를 따라나섰다.
얼마나 힘겨우면 뙤약볕을 무릅쓰고 주저앉아 있었을까.
외관은 70넘어 보이는데 61세라는 그녀는 최종 목적지는 산티아고지만 걷다 지치면
귀가하기를 반복해 여기까지 왔단다.
우리나라의 백두대간 구간종주자들 처럼?
돌이 많은 나라라 석공기술(예술?)이 특히 발달했을 것이다.
돌집, 돌담, 돌길, 돌다리, 돌조각품 등을 통해 돌기술과 예술 감각을 키웠을 테니까.
돌 예술품에 다름 아닌 돌굴다리(고속도로) 지나 오르막에서 두 남자와 대면했다.
초로의 그들은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가의 관목 숲을 헤치며 뭔가를 따는 중.
어제도 페르돈 봉 오르다가 숲에서 뭘 따는 이를 보았는데.
그들과 몇마디 나눈 프랑스 노녀가 설명하고 이름까지 말해 주었으나 약초라는 정도
로만 짐작될 뿐 프랑스어에 백지인 내가 알아듣겠는가.
그들로 부터 받은 고사리대 닮은 줄기는 내 숄더백 안에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고.
프랑스 노녀와는 로르카(Loeca) 까지 동행했다.
한데, 미세스 굿 아이디어와 그녀는 동연배의 두 서양여인인데 동행 맛이 왜 다를까.
전자가 부드럽고 맛이 좋은 음식을 먹는 기분이라면 후자는 건조하고 딱딱한 음식을
씹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까닭은 대화, 즉 의사의 소통 여부에 따라 상반된 느낌으로 반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투른 영어지만 대화하며 걸을 때와 주고 받을 공통어가 없으므로 농아(聾啞) 상태
에서 걸을 때의 차이라 하겠다.
정녕 그래서, 산이건 길이건 늘 혼자인 나를 염려하는 이들의 이구동성이 누군가와
동행하기를 권하는 것이리라.
실은, 나는 늘 그 누군가와 동행하고 있는데 그들이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내게 부와 명예와 권력 따위는 애당초 없거니와 이웃, 친구, 가족 등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리거나 떠나도 내가 거부하지 않는 한 결코 나를 버리지 않는 '그 분'
과 충분히 대화하며 걷고 있는데.
<신과 나눈 이야기 / Conversations with God>의 주인공 월쉬(Neale D. Walsch)
는 절망의 심연에서 만난 신과 대화한다.
그의 신(God)역시 인간과 일체의 세상 것은 물론 무수한 신들(gods)까지도 회의와
절망만 안겨주고 사라져버린 바로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기 앞에서 2인칭으로 불린
유일한'그 분'이 아니었을까.
비야투에르따 마을과 성모몽소승천교회
로르카(Loeca)는 인상적인 미니 마을이다.
알베르게 마을이라 할까.
낡은 주택들 사이에 들어선 새 집이 더욱 산뜻해 보이는 것은 시각의 상대적 효과라
하겠으나 인구 150명도 못되는 마을에 알베르게가 2개나 있으니까.
론세스바예스의 수도원과 연계된 순례자 호스텔 부지였던(한 가이드북에서 읽은 적
있음) 곳에 들어선 마을이라 그런가?
로르카~비야투에르따(Villatuerta) 간은 카미노 프랑스에서 산티아고행 고속도로(A
-12)와 가장 많이 동행하는 길일 것이다.
N-111 도로는 더욱 그러해서 다소 지루한 느낌이지만 카미노가 질주하는 차량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나있어서 걸을만 하다.
파란 밀 보리밭과 말라비틀어진 고목같은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연록 순이 생명력을
과시하는 듯 해서 그늘막 없는 들길도 개의되지 않았다.
이 무렵 국내 대간과 정맥을 탈 때면 추운 겨울을 용케 이겨내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 순들을 밟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하는데 그럴 일도 없으니 더욱 편했다.
다소 멀지만 전면(남쪽)에 등장하는 해발 1.044m 후라 산(monte Jhrra)까지의 사랑
스러운 정경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기도 했다.
조금 전, 로르카 직전에 통과했던 지하통로를 빼닯은 또 하나의 굴다리를 지나 한참
걸으면 거민 1.000명이 넘는 제법 큰 비야투에르따 마을이다.
바람개비철탑 우물이 있는 동구밖 과수원, 이란수 강(rio Iranzu)돌다리가 순례자를
마을로 안내한다.
낡은 주택보다 산뜻한 아파트 건물들이 더 눈에 띈다.
퇴락해가는 중이 아니라 발전하는 마을이라는 뜻이겠다.
가톨릭교 신도는 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을 믿는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었던 성모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교리로 정한 신앙이다.
비야투에르따에는 '성모몽소승천교회(Iglesia de la Asuncion)' 라는 고딕(Gothic)
형(로마네스크 양식이었는데 1378년에 파괴되어 고딕스타일로 재건) 교회가 있다.
교회의 건립 시기는 중세라는데 교회이름의 역사는?
이 특이한 교회가 이 마을에 들어서게 된 내력은?
성모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는 교황 비오12세때인 1950년에 제장되었다.
그렇다면 1950년 이후에 개명된 것인가 건립 때 이미 그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가?
에스테야(Estella)
카미노 프랑세스는 한 때 수도원 부속예배당이었다는 성 미겔(Capilla San Miguel)
유적을 우회하고, 내리막과 오르막 및 개간이 진행중인 야산의 밭길로 이어진다.
아까 멀리 보이던 후라 산이 지호지간이다.
굴다리(N-111도로)를 통과하고, 에가 강(rio Ega)을 건너가면 에스테야(Estella)다.
아라곤 왕조의 산초 라미레스 왕(King Sancho Ramirez /재위 1063 ~ 1094)에 의해
1090년에 취락이 형성되었단다.
바스크어로는 리사라(Lizarra)이며 현재는 인구 1만 5천여명의 활기찬 중소도시다.
에스떼야에는 4개의 알베르게가 있다.
내가 묵은 곳은 3층건물 전체가 알베르게인 대형 무니시팔(Municipal/지자체운영).
루아 거리(Calle de la Rua)초입, 카미노 상의 편리한 위치에 있어서 택했는데 어제
보다 비싸면서도(7유로) 비좁고 침대층간이 낮고 많은 순례자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알베르게 간의 산술적 비교를 한다면 부당하며 편치 않은 집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통이 필수는 아니지만 피해서도 안되는 순례자에게는 천만부당한 비교다.
순례는 영성수련(Exercita Spiritualia/Spiritual Exercises)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순례자들에게는 로욜라의 성 이그나씨오(St. Ignacio de Loyola :1491~
1556)의 기도가 필수적이리라.
<그리스도의 영혼으로 저를 정화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저를 구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제가 취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흐르는 물로 저를 씻어주시고/
. . . . . . .
당신의 품안에 저를 숨겨주시고/ 제가 당신과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사악한 악마에게서 저를 보호하시고 / 죽음의 시간에 저를 부르시어/
제가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카나다의 미세스 굿 아이디어와 프랑스 노녀가 늦은 시각에 도착했다.
론세스바예스 음식점의 한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던 방그라데시 부부도 보였다.
대부분이 낯익은 순례자들인데 아직 초반이라 체력이 뒷받침되는 듯 했다.
많은 구면들(舊面)에게는 내가 여전히 자기네와 한 그룹 안에 있는 것이 신기한가.
힘들지 않은가 또는 아픈 데는 없는가 묻는 것이 마치 낙오되기 바라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두 엄지를 치켜 세워 경의 표하기를 잊지 않는 그들이다.
(엄지 하나를 세우는 것은 서양인들의 관습이다)
알베르게의 주방과 식탁이 만원사례.
비집고 들어갈 숫기가 없는 늙은이는 취사를 포기하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성 마르틴 광장(Plaza San Martin) 한 곳이 내 디너 식탁이 되었다.
수퍼에서 산 빵을 먹은 것이 저녁식사였으니까.
식사후 에가 강을 건너 야노스 공원(Parque de los Llanos)을 산책하며 성 베니또
수도원(Convento de San Benito), 17c에 세웠다는 산타 클라라 수녀원(Convento
de Santa Clara) 등을 돌아보았다.
볼 것이 많고 즐길 것도 많이 있다고 알려진 에스테야다.
꼭 봐야 할 것일 수도 있기에 볼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즐길 거리에 대해서는 나는 여지 없이 부정적이다.
사려깊은 순례자라면 나에게 동의할 것이다. <계 속>
2011년 4월 9일 미명의 레이나 다리(Puente la Reina)
잘 닦은 '데스비오 프로비시오날'(desvio provisional/temporary diversion/임시 우회로):
왜 이 임시 우회로를 만들었는지 그 까닭을 나는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이 하나 있다.
미구에 '임시 우회로'라는 문구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이 길이 영구적인(permanent) 카미노가 될 것이다.
카미노를 포함해 지금의 길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거쳐 왔다. 이것이 길의 숙명이다.
마녜루(1. 2. 3)마을의 끝 공동묘지(4)를 벗어나 밀밭과 포도원(5. 6)을 지나면 시라우키(6의 정면) 마을이다.
마을 입구의 리모델링 공사중인 집(7)을 지나면 카미노는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고(8. 9) 광장에서 아치를
통과해 지루한 골목을 벗어난다(10. 11)
GR65 안내표지(1) 따라 마을을 벗어나면 도로와 들길로 이어지는 카미노가 한눈에 들어온다(2)
카미노는 유적(ruin)처럼 남아있는 로마다리(puente romano/3)를 건너 N-111도로와 A-12 고속도로의
육교(4)와 밭길(5. 6)), 다시 도로와 나란히 가는 지루한 길(7)이 계속된다.
살라도 강(8)을 건넌 후 예쁜 굴다리(9)를 통과해 로르카(Lorca/11)로 가는데 두 중년이 뭔가를 따고 있다(10)
(12)는 로르카 끝지점 도로변에 있는 집이 쓸모 있게 보여 담아온 것.
로르카를 벗어나 도로와 평행선을 이루는 이 포도밭 길(1)은 분명 현대판 카미노다.
카미노가 대로로 변한 것은(2) 영농의 기계화 때문일 것이며 지하통로(3)가 의외로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다.
어찌나 아름다운 지하도인지 낙서 천국 스페인의 낙서광들도 차마 낙서를 하지 못했나?
바람개비 우물(4)이 있는(현재 사용 여부는 미확인) 과수원, 이란수 강의 돌다리(5)가 차례로 페리그리노들을
아파트가 많은 비야투에르따(6)로 안내한다.
성 미겔 예배당(1), 다시 긴 밀밭 길(2), 지하도(3), 에가 강 다리(4), 아스팔트 차로(5), 그러면 에스테야의
무니시펄 알베르게다(6. 7. 8)
시내의 여러 곳도 담았는데 웬 일인지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