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엽 : 그 동안 두 분 잘 지내셨습니까?
정수자·홍성란 : 네(웃음). 올 한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지엽 : 두 분 다 우리 시조단 행사 100주년 행사와 관련해서 주도적으로 준비하시고 참여하시느라 굉장히 바쁘셨을 줄로 생각합니다.금년은 시조단으로 보면 특히 의미 있는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시조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의 102권의 시조집이 완간되고 ‘시조의 날’이 제정, 선포되기도 했죠. 특히 2006 만해축전도‘현대시조 100년 세계민족시 대회’로 열리면서 각 단체의 세미나는 물론 고유제와 시화전, 가곡의 밤 등 굵직한 행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오늘 좌담은 이 행사들을 점검해 보고 성과도 분석·검토해 보며, 금년에 나온 시조집들과 주요작품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시조단의 전망과 과제 등을 폭넓게 얘기해 보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시조의 날’ 제정과 관련하여
이지엽 : 우선 100주년 기념행사를 중심으로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100주년은 《대한매일신보》 사림란에 대구여사의 〈혈죽가〉가 발표된 1906년 7월 21일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미나 때도 거론됐고 신문에도 더러 나오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7월 21일이 과연 맞느냐, 1906년으로 볼 수 있느냐, 이런 점에 대해 두 분 선생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홍성란 :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구여사의 〈혈죽가〉가 최초의 ‘읽는 시조’입니다. 노래로 불리던 시조가 인쇄매체를 통해 읽는 시문학 양식으로 발표된 최초의 작품이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전에는 1907년 3월 3일 《대한유학생회학보》 1호에 발표된 낙천자의 〈국풍4수〉로 보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 낙천자라는 사람 이야기인데요, 이 사람이 처음엔 육당이라고들 했어요. 지금 우리가 손쉽게 볼 수 있는 시조론 책들에도 〈국풍4수〉가 최남선의 작품이라고 돼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주승택 선생이 1992년에 《향천 김용직박사 회갑기념논문집》에 수록한 〈백대진 문학 연구 서설〉에서 낙천자가 백대진(白大鎭, 1892∼1963)임을 밝혔지요. 이제 시조문학계에서도 수정하고 보완해야 되겠습니다.
이지엽 :
네, 그렇군요. 낙천자가 최남선이 아니라 백대진이었군요.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1906년에 대구여사는 대구에 있는 여사 정도로 추측해 볼 수가 있는데 여성이란 말이죠. 여성이 시조를 썼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여성들의 바깥출입이라든지 문단에서 발표를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여성이 발표를 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 이전에 발표는 혹시 안 될는지 모르지만 이미 창작이 되고 있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들을 해서 1904년이나 혹은 더 앞당겨서 얘기를 하고 또 최남선의 시조집에도 그런 단서가 좀 나오죠. 그래서 이견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홍성란 : 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육당 최남선이 1926년에 발간한 《백팔번뇌》 서문에서 “최초의 시조로 활자에 신세를 진 지 23년 되는 병인(丙寅)해”라고 밝힌 것을 근거로, 육당의 첫 시조 창작이 대구여사보다 2년 앞선 1904년으로 보기도 했었어요. 그러나 해당 작품이 발견되지 않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지엽 : 그럼 실제적으로 《백팔번뇌》 이전에 썼던 작품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거죠?
홍성란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1904년이 아니라 그 이전에 쓴 작품들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노래하기 위해서 지은 시조가 아니라 읽고 즐기는 시 텍스트로 누군가는 적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인쇄매체를 통해서 다중의 독자를 위해 발표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죠. 정수자 : 그러니까 그 점에 의미를 둬야 될 것 같아요.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로 볼 때, 〈혈죽가〉가 최초 인쇄매체를 통한 발표라는 거죠.
이지엽 : 날짜가 명확하다는 거죠?
정수자 :
그렇죠. 근대적 지표로 볼 수 있는 신문이라는 인쇄매체를 통한 발표라는 점에서 우선 의미를 찾을 수 있죠. 그땐 문예지가 없던 시절 아닙니까? 그러니까 〈혈죽가〉는 신문을 통한 발표에다 작자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시조와 다른 거죠. 물론 작자 ‘대구여사’를 필명으로 볼 소지는 있습니다. 조동일 선생님도 그 점을 《한국문학통사》에서 언급하시는데요.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적극적으로 펼친 애국 계몽 시조는 많은 부분 논설진이 썼을 거라는 추정이 있습니다. 이후 시조에서 강화되는 저항의 측면을 볼 때, 근거 있는 추정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필명이든 아니든 ‘여사’라는 게 꼭 여자라고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기는 거죠. 이 문제는 더 깊이 있는 연구를 해야 분명해지겠지요. 그렇지만 〈혈죽가〉를 현대시조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즈음 논의하는 현대성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미흡하지만, 인쇄매체를 통한 발표이고 작자가 명시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 이전의 발표가 나온다면 그것은 또 다른 논의를 통해서 우리가 정립을 해야 되겠지요.
이지엽 : 그렇다손 치더라도 일단은 날짜가 명기되고 또 정확하게 이렇게 발표된 것을 기준으로 해서 일단은 1906년 7월 21일을 기준으로 시조의 날 선포식을 한 정당성 부분은 크게 훼손이 된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홍성란 : 그래요. 실증적 자료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니까 인정할 수 있죠.
정수자 :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다른 자료가 나온 게 없으니까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학문적 논의가 좀더 필요한데요, ‘시조의 날 선포’나 ‘현대시조 100년’ 등이 그런 논의를 거치지 않은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지엽 : 논의를 거쳐야 하지만 아마 그런 논의를 거쳤다면 100주년 행사를 치르지 못했을 겁니다. 다만 확정하지는 말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해야겠죠. 우리가 한 가지 더 점검을 해 봐야 될 게 우리가 〈혈죽가〉를 현대시조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죠? 내용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한번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고 봐요.
홍성란 :
잠깐만요, 아까 정 시인께서 대구여사가 필명이라는 점에서 여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여성이라고 봐요. ‘사동우 대구여사’라는 말은 대구에 우거하고 있는 여성으로, 이름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필자라는 뜻이거든요. 대구, 영남 쪽에서는 내방가사 같은 규방문학이 활발했거든요. 조선 후기로 오면 시조가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도 아니게 되고,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서 19세기 후반이나 구한말쯤에 와서는 충분히 여성들이 시조를 지었을 것으로 봐요. 물론 조선 중기에 양반 사대부가의 여성이 지은 시조가 있고, 박을수 교수도 여성이 최초로 지면에 시조를 발표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어요.
이지엽 : 이런 것은 있죠. 내용으로 당대로는 상당히 자주적인 민족성, 우국충정 이런 것들이 강하게 어필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신분을, 오히려 방향을 여사 쪽으로 돌려서 얘기될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니까 일단 어쨌거나 그것이 여자다 남자다, 이런 것을 떠나서 일단 일자가 명확하게 명시됐고 누군가는 썼고…….
홍성란 : 당시에 〈혈죽가〉는 많은 아류작들을 만들었어요. 〈혈죽가 십절〉은 1906년 8월 13일자 《제국신문》에 〈여학도 애국가〉란 제목으로 발표됐어요. 그런데 거의 같은 작품이 1907년 7월 26일 《대한매일신보》에 ‘시됴 계동(癸童)의 동요(童謠)’로 소개됐어요. 10명의 여학생들이 지은 시조라는 거죠.
정수자 : 그게 혹시 필명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요. 반드시 그렇다고 밝혀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런 문제에 대한 논의들을 좀더 풍부하게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지엽 : 앞으로 두 분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주기 바랍니다.
정수자·홍성란 : (웃음)
홍성란 : 그 다음에 아까 건너 뛴 것인데, 현대시조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현대시조라고 의미부여를 하는 데는 노래로 불리던 시조가 시 텍스트로 바뀌었다는 것에 포인트를 둔 것이죠. 현대문학에서 말하는 근대와 현대 그리고 과연 시조가 현대시적 징후들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논의한 것은 아니죠. 그런 것과는 크게 관련짓지 않고 노래와 시라는 구분으로 본 게 아닌가 싶어요.
정수자 : 그러니까 문학으로서 다시 접근하면, 발표 매체를 통한 인쇄된 시조이므로 ‘읽는 문학’이 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고 하겠지요. 아까 지적한 대로 작자를 명시했다는 것도 예전 상황과 다른 근대적 자각, 작가로서의 자각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홍성란 : 제목이 있고, 실명이든 필명이든 이름을 적어서 무명씨로 발표하지는 않았지요.
정수자 : 제목의 명시도 중요하죠. 이전의 시조에서는 제목이 명시되지 않은 게 많았으니까요. 물론 당시가 근대 초기이기 때문에 고어나 구투 같은 것들이 같이 섞여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무렵의 자유시를 봐도 그런 언어나 기법, 세계관 등에서 근대와 전근대가 섞여 나타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문학으로서 다시 말하면, 인쇄매체를 통한 발표이니 〈혈죽가〉가 읽는 문학으로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아까 얘기했던 대로 작자를 명시했다는 것도 이전과는 다른 근대적 자각, 작가로서의 자각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지엽 : 이행기로서…….
정수자 : 근대로 이행되는 시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흔히 ‘현대문학’ 하면 근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는데, 그런 측면에서 〈혈죽가〉를 ‘현대시조’로 부를 수 있다고 봅니다. 당대성만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부터 나타나는 것들을 현대문학에 포함해서 말하니까요. 사실 이 시기의 시조를 ‘근세시조’로 구분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근대문학이니 현대문학을 분명하게 나누는 데도 어려움이 따르거니와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밝혀진 몇 가지 특성을 근거로 이 시조를 현대시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 발표된 시조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 점을 인정하면서 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이지엽 : 그리고 이제 개화기에 시조가 변모되는 특징들도 이 작품에서는 잘 보여 주고 있죠?
홍성란 : 그렇죠.
이지엽 : 종장 끝마디가 생략된다든지…….
정수자 : 〈혈죽가〉는 초·중·종장의 장 구분은 명확히 안 했지만 세 수의 구분은 나름대로 하고 있어요. 한 수 한 수가 쭉 이어진 줄글 형식으로 나눠진 부분은 신문의 편집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것들이 시행 인식이라고 하기엔 아직 미흡하지만, 수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지엽 : 그러니까 그것이 장 구분은 안 돼 있고 수 구분은 돼 있다는 거죠?
정수자 : 네.
이지엽 : 그것이 근대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 내용상 봐서도 그렇고 거기에 대해서 물론 논란은 있겠지만 이행기로서의 어떤 시조, 또 시와 견주었을 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근대적인 자각들을 담고 있다는 이런 측면에서 조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홍성란 : 말씀하신 근대적 자각의 두 줄기에서 본다면 그 시기의 시조를 개화기 시조라고 하는 것은 좀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개화기라는 명칭은 그 시기가 전통을 부정하거나 버리고 새로운 외래적인 것을 수용하자는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것 같아요. 애국적 자각에서 전통을 지키고 새것을 적극 수용한다는 점에서 ‘애국계몽기’ 또는 ‘근대 이행기’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하죠. 그 때 〈혈죽가 십절〉도 마지막 두 수는 사설시조였고, 〈국풍4수〉 같은 경우도 엄밀히 말하면 엇시조 1수에 사설시조 3수가 이어진 거죠.
정수자 : 반외세도 중요한 근대적 자각이 되겠는데요. 이후의 시조들이 〈혈죽가〉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심화·확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개화기―편의상 이렇게 부릅니다. 고시조, 현대시조 이런 명칭들이 시대구분에 따른 것이라면 용어의 적용 기준에도 일관성이 필요하죠. ‘개화기’에 내포된 문제를 알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용어도 앞뒤 시기의 용어와의 균형을 생각해서 정립할 필요가 있으니까요.―시조들을 살피면서 저는 그런 반외세 정신에 들어 있는 특성들을 탈식민성으로 다시 읽어봤어요. 근대 초기 일제에 저항하는 시조들은 민중의 각성과 저항을 독려하면서 시대의 한 동력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이런 것이 〈혈죽가〉의 정신에서 배태되어 이후 더 강화되고 확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지엽 : 그러면 7월 21일을 시조의 날로 선포한 정당성이라든지 현대시조 기점 부분은 이 정도로 점검을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홍성란 : 그 점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면요, 자유시도 〈불놀이〉가 처음 발표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 발표작들이 새로 발견되고 있거든요.
이지엽 : 동일인으로 《학우》라는 잡지에 발표된 〈눈〉이나 〈샘물이 혼자서〉라는 작품도 〈불놀이〉 이전의 작품이고, 그리고 만해 선생이 썼던 〈심〉이라는 작품도 1918년, 한 해 전에 나오고 그러니까 그 이전 것들은 많이 있죠.
홍성란 : 1915년 2월 《학지광》에 발표된 최승구의 〈지엄의 용사〉나, 같은 해 3월 《청춘》에 발표된 〈산아희로 생겨나서〉 같은 현상윤의 작품이 있죠.
정수자 : 그래서 발표 시기만 갖고 ‘최초의 작품’을 확정하는 데는 위험이 따르게 되죠. 그 전에 발표된 게 나오면 사실이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작품이 나올 때면 비슷한 작품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올 가능성을 생각하면, ‘최초의 작품’ 확정이란 게 난점을 수반하는 것 같습니다.
‘시조의 날’ 선포식과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출판기념회
이지엽 : 7월 21일 ‘시조의 날’ 제정·선포식 행사는 크게 세미나와 선포식, 100인집과 선집 합동출판기념회, 〈혈죽가〉의 현장 헌화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행사를 주관한 저로서는 꽤 쑥스러운 질문입니다만 행사에 큰 잘못은 없었는지요?
정수자 : 우선 100인 선집을 기획해서 합동발표회까지 완결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시조를 쓰는 사람들이 자료를 구해 볼 수 없다, 텍스트가 부족하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해왔지요. 곳곳의 많은 독자, 습작생들이 시조집을 구할 수 없는 게 애로사항이었는데, 100권이라는 시조집이 상당한 수혈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도 물론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번 행사도 현대시조 출발 이래 가장 많은 시인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행사도 성황리에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시조 100년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자축도 같이 할 수 있었지요. 몇 년 전에 ‘한국 현대문학 100년’을 돌아보는 큰 기획이 있었죠. 그 연구 논문들이 단행본으로도 나왔는데, 시조는 들어 있지 않아 참 허전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시조 100년도 후속작업을 통해 좀더 진전된 논의를 해보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다시 얘기하면, 사전에 의견 수렴이나 조정 같은 과정을 좀더 거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요. 물론 행사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사전에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히, 또 충분하게 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행사를 마치고 나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지엽 : ‘1906년 7월 21일이다’라는 그런 시기성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전 논의가 좀 많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조단이 물론 다툼이나 어떤 이념적 문제들로 해서 갈라진 부분은 없지만 각자 지역 연고권이나 활동하는 무대 등이 다르다 보니까 한군데 모인다는 것이 사실상 이전에는 없었죠. 한국시조시학회가 주관을 하긴 했지만, 모든 시조 단체가 주체가 되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각 단체장들이 모여서 역할 분담도 하고 얘기도 하고 이런 자리들을 갖고 나서 이번 행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논의들이 좀더 차분하게 된 다음에 이런 것들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행사를 사전에 논의하고 얘기하는 자리들이 이런 것을 계기로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전문 평론가들이 많지 않고, 시조 연구자들도 고전시가 연구가 아니면 거기에 대해서 가치들을 잘 부여하지 못하고……. 일단 우리 책임이기도 합니다.
홍성란 : 저는 긍정적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해요. 시조문학계에서 현대시조 100년을 기념하는 큰 축제를 연 것인데, 잘 알다시피 그 당시 만해축전의 주(主) 행사로 시조축전이 마련됐어요. 그러니까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셔서 큰 축제가 벌어질 수 있었던 거죠. 이 자리를 빌어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퇴계나 율곡, 황진이나 윤선도 같은 시조 선대의 조상님들께 한자리에 모여 고유제를 올린 건 시조 천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대단한 의미를 갖는 거죠. 그렇다면, 성과와 과오를 짚어보는 일에 앞서서 우리가 ‘시조의 날’을 제정, 선포하고 이 큰 축제를 기념하면서 범시조단이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했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다시 말하면 이 축제가 미래 시조문학 창달에 어떤 기폭제가 되고 범시조단의 대동제가 됐다고 생각해요. 또 분명한 것은 우리 시조 시인들의 각성 계기가 됐다는 거죠. 소박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저는 바로 이런 것이 큰 성과가 아니겠나 싶어요. 그 다음에 〈혈죽가〉 현장을 찾아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상 앞에 헌화하고 〈혈죽가〉를 창으로 멋스럽게 부르고 의미를 되새겨 본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죠. 사실 인사동에 가끔 가지만 근처에 충정공 동상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어요.
정수자 : 현대시조의 출범 이래 가장 큰 행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러 면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는 행사였고요.
이지엽 : 개인이나 한 단체의 힘으로는 물론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 행사 준비 시에 시조단의 주요단체를 이끌고 있는 분들이 인사동 이모집에 다 모였습니다. 시조단의 원로 선생님들도 한 목소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이 사실 시조단 전체가 집결했다 해도 그 자체로서 만은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홍 시인도 얘기했지만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없었다면 반쪽짜리 행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수자 : 저 역시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이만한 규모의 행사를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산 같은 문화재단에서도 혹시 지원을 받았는지요?
홍성란 : 지원이 없었죠.
정수자 : 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지원이 어느 정도 있었다지요.
이지엽 : 이 행사에는 6백만 원을 지원했습니다. 담당자가 미안해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수자 : 이번 행사는 누군가가 나서지 않으면 정말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만한 영향력이 있는 분이 나서서 처음에 일을 도모했기 때문에 이렇게 협조나 여러 가지 지원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고 봐요.
홍성란 : 우리가 후일담으로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맨 처음에 그런 안을 내고 앞장서서 봉화를 올린 공을 우리는 인정해야 되죠.
정수자 : 그럼요.
이지엽 : 세미나와 주요 내용들과 관련하여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김제현, 유성호 두 분 선생님과 제가 발표를 했는데, 시조 100년을 정리하면서 김제현 교수님의 ‘시대문학으로서의 시조’를 강조한 점이 시의 적절했다고 봅니다. 유성호 교수님의 논문도 시기적절했던 것 같아요. 같이 몰아서 ‘현대시조의 양식적 위상과 쟁점’이라는 논의와 논의 뒤에 제기된 문제점에 대해서 두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발표한 내용은 두 가지 줄기입니다. 태학사에서 발간된 100인선의 의의와 시조의 발전적 방향인데 좌담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각각 시조집과 시조단의 문제점과 미래적 전망을 살피는 데서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됩니다. 그 때 얘기하기로 하고, 두 교수님의 발표에 대한 두 분의 의견을 한 번 듣고 싶습니다. 특히 김제현 교수님의 “시대문학으로서 시조가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홍성란 :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데, 사실 시조에 있어서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개념이 문학적 개념이 아니라 음악적 개념이었거든요. 그 이전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시절가조는 시조가 음악이라고 할 때 악곡의 빠르기와 관련된 용어거든요. 당시 영조 때 유행하던 악곡의 빠르기, 그것을 얘기한 거죠. 문학이, 노래로서 시가를 포함한 시문학 양식이 우리 당대 사상과 감정, 생활을 반영하지 않은 적이 없죠. 그러니까 상대시가는 상대 생활인의 삶의 모습을 담은 것이고, 향가는 신라인들의 세계관, 삶의 모습을 담은 것이고 속요는 속요대로 시조는 시조대로 그 당대인의 세계관과 삶의 이야기를 담은 거죠. 21세기 현대인은 현대인의 사회와 역사, 삶의 모습을 시조 양식에 담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거죠. 어느 때고 시문학이 시절가조가 아니었던 적은 없는 거죠. 시조가 시절가조이기 때문에 시대성을 담지한다는 얘기는 그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나 시조나 당대의 우리가 지금, 여기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지엽 : 아니, 그런 것보다도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상당히 음풍농월이었다는 것, 이런 것들에 현대시조가 깊은 반성과 시대에 대한 자각을 못하면서 비판적인 의견들이 많았고, 특히 그런 부분이 일반인들한테 은연중에 작용이 되면서 시대와는 동떨어진 장르로 인식이 되어지고 있는 기류가 엄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양 단체 중 하나인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는 시조에 대해서 편향된 인식을 갖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과 관련지어서 시대문학으로서의 시조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고 계속 흘러나오고 있고 맥락을 집어 본 의도는 의미가 작지 않다고 봅니다. 시조가 여러 시가들 가운데 나름대로 어떤 시대상을 잘 반영한 본 줄기였다는 거죠. 왜곡된 현실 부분들을 조금이라도 지적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점에서 시기적절한 부분은 있었다고 봅니다.
정수자 : 저는 시대문학으로서 시조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절가조’에 담겨 있는 당대성에 주안점을 두고 볼 때, 사실 현대시조가 시대정신을 충분히 담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특히 70년대, 80년대라는 우리의 험난한 현대를 거치면서 시조가 진정 시대를 고민하면서 그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했는가, 이런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조가 반드시 꼭 시대적 발언만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하지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시조가 당대의 문제들을 첨예한 시대의식으로 보다 잘 드러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시대 문제를 전혀 안 다룬 것은 아니지요. 저항을 보여준 시편처럼 강도 높은 시대적 발언은 아니지만, 한편에서는 시대적 발언을 나름대로 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시대 인식이 그만한 완성도나 전파력으로 부각되지 않았고, 남이 다 한 것을 뒤늦게 추수한 듯한 시조도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조에서 시대성을 다룰 때 절규랄까 육성 같은 것을 생생하게 터뜨리는 데는 어려움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절제를 통한 정형이라는 형식을 거쳐 나오기 때문에 아마도 감옥에 가는 정도의 시적 발언들이 그때그때 터져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반영도 그렇게 다채롭게 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시대문학으로서의 소임에는 미흡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시대의 문제들을 앞서서 이슈화하거나 아주 치열하게 그려서 범문단적 관심을 촉발한다거나 하는 측면에서는 부족했다는 거죠. 그와 다른 면에서 또 돌아보면, 시조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조라면 무조건 옛 형식이라고 고루하다, 낡았다, 구태의연하다, 관념적이다, 추상적이다, 이런 선입견들을 잔뜩 갖고 현대시조도 도외시하는 게 일반적 현상이죠. 그것이 또 고정관념으로 계속 재생산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온 시대에 대한 어떤 발언도 안 본 상태에서 평가할 수 있지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이 문제는 계속 고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지엽 : 얘기의 방향을 우선 논문에 관해서 거론하고 넘어가는 정도로 해야 될 것 같아요. 지금 얘기한 우리 시조단에서 시대적인 시 이런 것까지 참여하지 못한 부분이 물론 자유시에 비하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시로 활동했던 사람들과 견주어 볼 때 우리 80년대도 책임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부분까지 우선 확대를 하지 말고, 그것은 시조단의 과제나 전망에서 시간이 되면 정리해보기로 하죠.
홍성란 : 시단에서 자유시가 주도적인 위치에 있고 시조는 물러나 있기 때문에 시조가 발언을 해도 듣지도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정치적 인유나 시사적 인유를 담은 시조도 얼마든지 있죠. 그런데 우리 시조에서 얘기하면 듣지도 않아요. 조명하지도 않아요. 그런 문제점도 있어요.
이지엽 :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감안해서 일단은 김제현 교수님의 시대문학으로서 시조 부분은 현대시조 100주년 선포와 관련지어서 100주년을 그냥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혈죽가〉부터 시작해서 전통적인 맥락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이런 측면에서 봐야 될 것 같아요. 사실 80년대 민중시의 진폭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조단에서도 시대를 잘 반영한 작품들이 적었던 것은 아니죠. 생태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든지, 노동시조라든지. 일반인들의 인식도 부족했지만 우선 연구자들이 이에 대해 어필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요. 이 이야기는 시간 관계상 여기서 줄이기로 하고 유성호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한 번 나눠보죠. 유성호 선생님의 양식적 위상과 쟁점 문제에 대한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 전망은 나중에 얘기를 하더라도…….
홍성란 : 우리 시조시인들이 발끈한 것이 뭐냐면, 우리가 분명히 시조를 쓰고 있는데 죽었다고 그러니까(웃음). 시조시인들은, 시조는 소임을 다하고 사라진 역사적 장르라는 데에 반발합니다. 물론 고시조는 소임을 다하고 사라진 역사적 장르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창작하고 있는 시조양식은 다시 말해 현대시조는 엄연하게 살아 움직이는 우리 시대 역사적 장르라는 거죠. 시조가 소임을 다하고 사라졌다는 말씀이 물론 고시조를 염두에 둔 거라는 건 알아요. 양반 사대부라는 장르 담당층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것은 고시조라는 거죠. 그러나 영원하고 지속적인 시적 태도가 되는 시조의 ‘3장 6구’라는 양식은, 그야말로 영원하다는 거죠. 그래서 그 3장 6구라는 양식은 현대인이 지속적인 시적 태도로 받아들여서 현대시조라는 역사적 장르를 이어가고 있다는 거죠.
정수자 : 유성호 선생 논문도 시조가 역사적 장르로서는 소멸되었지만, 시대적 양식으로의 지위는 계속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보다 세밀하게 의미를 따져보면 ‘음주사종(音主詞從)’ 양식의 고시조가 소멸됐다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현대시조는 창조적으로 계승된다는 표현 아닌가요?
홍성란 : 발표할 때 시조시인들이 들으면서 오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아무튼 시조가 사라졌다는 말은 고시조를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말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이지엽 : 100주년 기념 세미나와 관련된 내용들을 포함하여 이번에 제정된 ‘시조의 날’이 갖는 의의와 ‘시조의 날’이 유명무실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안 같은 것이 있다면요?
정수자 : ‘시조의 날’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촉발하고 중요한 날로 계속적인 자리매김을 해가기 위한 전망을 해보라는 말씀 같습니다. 사실 ‘시의 날’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시조의 날’을 우리끼리라도 축하하고 시조 발전의 계기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문학인과 일반인들의 사랑과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현 상황에서는 매우 중요하겠지요. 일단 시조와의 거리 좁히기를 통해 많은 사람이 시조를 향수할 수 있게 하려면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기폭제가 될 만한 다양한 기획이나 준비가 따라야 하겠고요.
이지엽 : 그런 것을 계기로 해서 시조에 대해서 내가 창작하는 데만 염두에 둘 것이 아니고, 시조가 길이 보존되고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는 데에 의미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제 이어져야 되는데 한 번 선언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될 것 같습니다.
홍성란 :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는 거죠.
현대시조 100년 세계민족시 대회와 심포지엄
이지엽 : 앞서의 행사도 만해축전과 관련하여 행사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만해마을 중심으로 8월에 열린 행사로 화제를 옮겨 보죠. 이근배 선생님께서 대회장을 맡으시고,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요.‘현대시조 100년 세계민족시 대회’로 열렸는데 주요 행사들은 크게 각 단체의 시조 관련 세미나, 100주년 기념 고유제, 현대시조 100년 세계민족시 포럼, 현대시조 100년 작곡발표회 등입니다. 하나하나가 다 의미를 갖는 큰 행사들인데 하나씩 나누어서 얘기를 해보도록 하죠. 우선 화제가 된 ‘100주년 고유제’와 ‘현대시조 100년 세계민족시 포럼’부터 얘기해 볼까요.
홍성란 : 고유제는 천년의 역사를 갖는 시조의 후손들이 조상님들께 올리는 의식입니다. 노래로 즐기던 시조가 시문학이 된 100년 역사를 아뢰는 그런 의식이죠. 고유제와 세계민족시 포럼은 우리 겨레의 기쁨과 슬픔을, 이 땅에 흥망성쇠를 시조에 담아 노래해 온 천년의 역사를 온 국민이 기뻐하고 세계만방에 자랑하는 축제였다고 생각해요. 세계민족시 포럼은 세계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죠. 세계 정형시가 한 자리에 모여서 정형시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연변, 중국, 대만, 이태리, 일본 등 정형시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만나서 자국의 정형시를, 정형시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뜻 있는 자리였다고 생각해요.
이지엽 : 주목되는 것들은 없었나요? 이를테면 각국이 민족시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의 하이쿠 경우는―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만―세계적인 장르가 되어 있고 그런 것에 비하면 시조는 좀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나 하는 점이죠. 다른 국가들의 경우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잘 모르고 있잖아요? 그런 부분과 관련 돼서 얘기들 좀 나온 것 있었나요?
정수자 : 저도 세계민족시 포럼의 자리에 토론자로 있었는데요. 일단 정형시라는 게 세계적으로 자유시에 밀리는 상황이긴 하죠. 현재 정형시가 확실한 위상을 확보하고 그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보입니다. 중국에서도 지금 오언율시, 칠언율시 같은 정형시(격률시)가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드물답니다. 대만도 자유시에 밀린 정형시 되살리기를 정책적으로 밀어 보고자 하는데 아직은 상황이 불투명하다고 했습니다. 연변에서는 아직 시조를 많이 쓰는 편이지만, 문예미학적 측면이나 현대적인 면은 약하게 나타나고 있지요. 그리고 소네트가 이태리에서 나와 영미권으로 확산되며 프랑스, 독일 등 이런 나라까지 즐겨 쓴 정형시지만, 현대에 와서는 많이 창작되지 않는답니다. 자유시 안으로 많이 흡수됐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하이쿠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라고 하겠지요. 아시다시피 정부의 어떤 정책이나 지속적인 관심이 정형시의 지위를 견지하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공영방송인 NHK에서 하이쿠 공모를 한다든가, 공원에 하이쿠 전용 우체통을 설치하는 등 생활 구석구석까지 하이쿠가 파고들게 하니까요. 그러니 세계 50여 개 대학에서 하이쿠를 가르치는 등 세계적인 ‘하이쿠 포교’가 가능하지 싶어요. 하이쿠는 창작 층도 향수 층도 상당히 넓다는데, 정책적인 배려만 아니라 일본 민족성의 힘이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일본인은 자기 것에 대한 자부심과 철저한 계승 같은 대물림 정신도 유독 강한 편이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노년층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 하이쿠를 창작하고 향수할 수 있는 여건도 강하게 작용한다고 합니다.
이지엽 : 어쨌든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민족시 포럼이 각 나라 정형시를 모아 놓고 얘기하긴 했지만 실제적인 성공은 일본의 경우고, 그렇다면 그들이 자유시도 있지만 현재 살아나고 있는 자체가 국가 정책이 주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그런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서 노력을 해 볼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계기는 마련된 것 같죠?
정수자 : 그렇죠. 세계문학의 보편적 변화를 무조건 도외시할 것은 아니지만 추수에 급급하다면 그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예컨대 일본의 경우, 자기 식으로 자기 문학을 고수하면서 그것을 오히려 정체성으로 확립하고 세계에 알리는 데도 열심이지 않습니까? 일본의 국력이 지금 같지 않을 때도 세계 유수의 시인이 하이쿠 영향을 받아 시를 쓰곤 했다지요. 그런가 하면 뉴욕 거리에 하이쿠 한 편이 간판으로 걸려 있고 미국 어린이들이 영어로 하이쿠를 쓸 만큼 생활 속에도 널리 퍼뜨리고 있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자국의 고유문화에 대한 긍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수주의가 아니라 저는 이 시점에서 우리 것에 대한, 우리 뿌리에 대한, 우리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문화적 긍지를 위해서도 시조와 관련된 고민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지엽 : 그것과 관련지어서 우리가 번역 문제를 논하면서 얘기가 되겠지만 그런 움직임이 실제로 있습니다. 일본하고 체계적인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이를테면 가칭 ‘한·일 정형시 교류연합회’의 예비모임이 며칠 전에 있었습니다. 우리 자유시를 번역해서 화제를 일으킨 한성례 시인이 같이 참석했는데 일본의 하이쿠 단체들과 접촉해서 일본측 대표단을 만들고 그래서 우리 한국과 정식 모임을 조만간 갖자는 것이었지요. 우선 내년 봄호를 기준으로 일본과 우리 두세 개 잡지에서 시조와 하이쿠를 공동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이번 백담사에서의 모임은 상호 교류 측면에서 세계화로 가는 예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호 교류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일단은 그런 계기를 만든 것만은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수자 : 그런 교류를 통해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이해를 높이면서 보존 방식도 같이 찾아보면 좋겠네요. 문화의 다양성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도 시조 같은 전통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고유문화를 잘 지켜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것에 대한 자긍을 심어 주도록 교육에서도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문화가 급격히 뒤섞이는 국제화시대, 새로운 문화 합병의 와중에서 우리 자신의 문화적 고유성을 잃을 우려가 더 커지겠지요.
이지엽 : 네. 아울러 만해마을에서는 이번에 10여 개 단체에서 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주요 의제들이 시조에 집중되었습니다. 한국시조시학회와 열린시학사에서는 ‘현대시조 100년과 21세기 담론’을 중심으로 김학성, 정수자, 이정환, 임준성, 그리고 제가 발표를 했고, 한국시조학회에서는 ‘사회 발전과 문화기반으로서의 시조문학’을 주제로 류해춘, 윤영옥, 임종찬 교수 등이 발표를 했습니다. 이 심포지엄에 주목되는 내용은 없었는지요?
정수자 : 저는 현대시조 100년의 장을 연 근대 초기의 시조를 고찰해 봤습니다. 당초 ‘근대 초기 시조의 탈식민성’으로 잡아 근대성의 한 측면인 탈식민성에 대한 구명을 생각했다가 ‘개화기 시조의 탈식민성’으로 제목을 바꿨습니다. 그건 ‘근대성’이라는 난제 때문인데, 그 구명이 우선 깊이 있게 개진된 다음이라야 연구를 진전할 수 있을 겁니다. 근대성(modernity)은 그 동안 현대문학이 지속적으로 천착해온 문제이지만, 시조에 좁혀서 더 세밀하게 논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문학 전반의 근대성이 시조에서는 어떻게 발현되고, 그것이 다르다면 어떻게 다르며,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등등에 대한 구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전의 논의들이 있었지만 다른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도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 작업이 되겠지요. 그게 우선 저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됐는데요, 현대시조의 장을 열어간 당시의 시조들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 무렵의 시조가 보여주는 반외세와 애국, 독립, 계몽 등은 시대적 소임을 압축한 정신의 근간이지요. 이런 정신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같은 외세에 저항하는 시조의 당대적 정신성을 보았고, 그것이 궁극에는 탈식민성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시대정신의 구현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물론 생경한 표현이나 직설적인 주장이 문학적 장치 없이 그대로 표출되긴 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국가적 위기였기에 문학성을 고민할 여유 없이 시대에 대한 각성과 저항을 독려하고 촉구하느라 다급했던 거죠. 근대 초기 시조의 역할을 보며 새삼 깨달은 것은 그런 측면을 앞으로도 시조의 한 축으로 살려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다른 분의 논문에 대해서는 이런 좌담 자리에서 말하기가 좀 뭣하네요. 다만, 제가 발표자로 참여한 ‘현대시조 100년과 21세기 담론’에 대해 얘기하자면, 좋은 주제에 걸맞도록 발표를 위한 준비가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현대시조 100년의 의미를 돌아보고 전망을 해보는 자리라면 시기별로 혹은 주제별로 분담해서 발표를 하는 게 학술발표회의 큰 주제로 수렴되면서 효과를 더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앞으로도 그런 기획 발표는 사전에 의논을 거쳐서 더 의미 있는 발표의 장을 만들어야 시조 연구가 더 의미 있게 축적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홍성란 : ‘사회발전과 문화기반으로서의 시조문학’이라는 제하의 심포지엄에서도 여러 의미 있는 논의가 개진되었죠. 그런데 문제점을 지나치게 노출하고 있는 임종찬 교수의 논의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임 교수는, 현대시조는 고시조를 거역하는 데서 출발 의의를 찾는다1)고 말한 바 있는데, 고시조에 대한 거역은 자유시가 하는 거죠. 거역이 아니라 변용이죠. 변용이란 고시조의 형식적 정체성을 계승하면서 현대성을 모색한다는 겁니다. 이미 여러 글을 통해서 임 교수는, 시조는 3행시라는 생각에서 3행이나 6행으로 써야 한다는 논지로 표현방법을 규제하려는 의도를 노출해왔죠. 임 교수 말대로 “시는 언어의 효용성을 극대화”하고 “시적 대상에 대한 언술”은 “극도로 제약하면서 상징이나 은유의 수법으로 의의를 강화”시키는 거죠. 특히 “정서 전달을 위한 정보성의 강화를 위해 때로는 비예측적 언어를 동원하기도 하고 포괄적 언어를 활용하기도 하면서 시적 대상의 단순한 의미 부여를 초월”하기도 하죠. 현대시는 알다시피 현대시조와 자유시를 하위장르로 하는 양식이죠. 현대시조가 현대시일진대 시의 속성을 포괄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고시조가 현실의 알레고리로 기호와 의미가 1:1로 대응된다는 사실(〈단심가〉와 〈하여가〉 같은 예를 들면서)에 기초해서 임 교수는 말하고 있어요. “고시조는 의미와 의미의 연결을 확실히 하여 텍스트로서 단단히 결속되어 있”으니까 현대시조도 그래야 한다는 논리죠. 그래서 박시교 시인의 〈전봉건 추억〉을 인용하면서 “수석 취미를 가진 전(전봉건: 인용자) 시인을 나타내려고 의도했다면 돌을 줍는 모습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임 교수는 시인들의 시를 다 고쳐주고 다녀야 할 거예요.(웃음) 고시조가 ‘삶의 언어’로 된 ‘기의 지향의 언어’라면 현대시조는 ‘생각의 언어’로 된 ‘기표 지향의 언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거죠. 현대시조는 표출된 ‘언어’의 의미(축어적 의미)는 알 수 있어도 언어의 ‘의미’(이면적 의미, 속뜻)는 잘 알 수 없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하는 거죠. 이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태도가 꼼꼼하게 읽고 논해야 하는 평론가는 물론 학자들의 텍스트 독해방식이어야죠. 임 교수는 〈시조의 텍스트성 연구〉에서 〈가늘고 긴 기울기〉라는 작품에 대해 “의미를 연결시켜 주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독자의 상상력으로 의미를 끼워 넣어야 하는데 무슨 의미를 채워 넣어야 의미의 혈관이 통할지가 의심스러운 작품”이라고 했어요. 임 교수는 〈문장구조에서 본 현대시조 연구〉2)에서 〈바람 불어 그리운 날〉을 인용하면서 “시는 말장난이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어요. 이 작품이 “시적인 표현성, 의미의 충만성, 이미지의 선명성, 주제의 참신성”을 제대로 갖춘 작품이 아니라는 뜻으로 “시조대상 작품이라니 이게 보통일은 아닌 것 같다”고 했어요.(웃음) 이 시조는 3연 3행의 장별 배행을 취하고 있는데, 초·중·종장 사이의 공간 확보가 대단할 뿐만 아니라 말을 엮고 부리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도 그렇고 백수 정완영 선생께서도 “품이 넓은 시조”라고 하셨죠. 대담한 생략어법으로 낯선 듯한 구와 구를 연결하여 장을 취하되 의미의 완결성을 확보하는 장치를 택한 형식실험이죠. 임종찬 교수는 “비가 와서 부르르 온기에 떨며 있다는 말도 신통스럽지 못하다”고 했어요. 2005년 《유심》 겨울호에 임수만 교수가 “냉온감각의 혼류를 민감하게 그려” “아련한 슬픔과 그리움의 교착된 심정을 그런 모순적 감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했죠. 아무튼 다양한 텍스트 독법이 있겠지만, 좀더 성실하고 꼼꼼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작품을 따라다니며 물고 늘어지는 느낌이 있어요.(웃음) 그리고 “바람 불고 날이 차다”를 “바람 불어 날이 차다”고 인용할 때 오식을 하게 되면 글 전반에 대해 불신이 생깁니다. 기본적인 사항부터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죠.
이지엽 : 창작 21작가회의와 한국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도 각각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특히 주목이 되는 것은 서울대 한국문학연구소에서 ‘현대시조의 재인식과 세계화’를 주제로 열린 장경렬, 유성호, 박진임 교수의 논의들인데 어떻게 보셨는지요?
홍성란 : 장경렬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 있어요. 유종호 교수가 〈유구한 역사와 반(反) 모더니즘〉이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했고, 장 교수가 〈시조의 세계 내 현주소, 그 지표를 찾아서〉, 유성호 교수가 〈현대시조에서의 자연 형상과 그 논의〉, 박진임 교수가 〈시조번역,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발표들을 해주셨는데, 그 중에서 장 교수의 발표는 캐나다 시인 엘리자베스 세인트 자크의 시조집을 발굴, 소개한 거예요. 저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북미 지역에서도 우리의 개입 없이 자생적으로 시조를 활발하게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오세영 교수도 유럽 어느 나라 시인이 시조집을 냈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세계적으로 시조 창작과 향수가 이루어진다는 걸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서 알게 됐어요. 그리고 인터넷상에서 북미 지역에서 운영하는 〈시조포럼(sijoforum)〉 외에도 여러 개의 시조 싸이트가 있대요. 그리고 북미 지역 최초의 시조 저널인 《시조 웨스트(Sijo West)》라는 문예지도 있고. 그밖에도 여타의 문예지들이 시조에 관심을 보여서 지면을 제공하고 있다는 내용도 알게 됐죠. 놀라운 것은 애리조나 주 시인협회, 플로리다 주 시인협회, 그리고 《캐나다 작가 저널》, 《HWUP 시 뉴스레터(HWUP Poetry Newsletter)》 라는 문예지들 주관으로 시조 콘테스트를 열었대요. 그래서 준 오웬즈(June Owens), 플로렌스 W. 오터(Florence W. Otther), 게리 에버리(Gary Every), 로라 킴(Laura Kim), 이런 영어 시조시인들이 탄생했다는 거죠. 이것은 몇 년 전 얘기니까, 지금은 더 확대되었을 걸로 봐요. 북미 쪽만 아니라 헝가리…… 오세영 교수가 말씀하신 게 유럽 쪽의 어느 나란데, 거기에서도 시조집이 나왔다고 했어요.
정수자 : 그러니까 우리가 시조의 세계화든 국제화든 세계문학 속의 한국문학으로 시조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조가 다른 나라의 언어로 어디선가 씌어지고 시조집까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퍽 고무적입니다. 그런 상황을 모르고 시조를 너무 좁혀서만 보면 안 되겠죠, 이제는. 시조에 관심을 갖고 창작을 하거나 보급을 하는 분들과 교류가 활발해지면 훨씬 많은 확산이 가능할 것 같네요. 그러고 보면 일본이 하이쿠를 세계에 전파하면서 세계의 시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시조도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물론 번역문제가 따르겠지요. 하이쿠가 음수율을 젖혀 놓고 이미지 병치로 나갔다면, 우리 시조는 외국어로 율격을 따질 수 없는 상태에서 3장 구조를 활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어로 시조를 쓰고 책까지 묶어내며 시조를 창작한다는 사실은 어쨌든 굉장히 희망적인 현상이네요.
홍성란 : 번역문제를 장경렬, 박진임 두 분이 중점적으로 논의했어요. 우리말 시를 영어권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번역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번역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특히 시조의 경우는 율격 문제가 번역상의 난제라고 할 수 있어요. 에즈라 파운드의 논의를 빌리자면 멜로포에이아(MELOPOEIA)는 의미 전달을 위한 형식상 요건(시조에서는 3·4조 또는 4음4보격이라는 율격 문제)인데, 각각의 언어마다 독특한 음성학적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거나 번역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런가 하면 파노포에이아(PHA-NOPOEIA)나 로고포에이아(LOGOPOEIA)는 번역 가능한 부분이죠. 파노포에이아는 시각적 상상력 위에 이미지들을 투사하는 것이고, 로고포에이아는 낱말의 의미와 언어 사용의 관습, 낱말이 연상시키는 전후 문맥이나 부수적인 의미, 기존의 수용 양태와 반어적 효과까지 포함하는 것인데요, 이 두 가지 시적 요소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의미나 이미지는 번역 가능하지만 언어의 음악적 요소는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시조의 음보 같은 율격은 번역(translation)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새롭게 소화되거나 수용(assimilation)될 성질의 문제라는 겁니다.
정수자 : 그렇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어려운 작업인데 정형시인 시조 번역은 더 큰 어려움이 당연히 전제될 겁니다. 형식미의 전달에는 한계가 분명히 많이 나타나겠지요. 그래서 시조의 율격보다 의미나 이미지를 살리는 쪽으로 번역자가 좀 더 노력해야겠다는 방향은 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말 현대시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을 골라 텍스트를 삼아 번역하는가에 달려 있겠지요.
홍성란 : 그리고 시조를 음수율이냐 음보율이냐 이런 얘기들을 하잖아요. 근데 이번에 심포지엄에서 오세영 교수가 음보율이 아니라 음수율이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시는 바람에 좀 당황했죠. 박진임 교수 논의 중에 음보율이라고 여러 번 나왔어요. 오세영 교수가 우리나라 시조를 영시의 foot, 음보 그 개념으로 말할 수 없다, 우리 시는 음수율이다,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조윤제 선생께서 1930년에 〈시조자수고(時調字數考)〉에서 얻은 결과를 서원섭 선생이 평시조 2759수의 자수를 헤아려 1977년에 재확인했죠. 그것이 초장 3·4·4(3)·4/ 중장 3·4·4(3)·4/ 종장 3·5·4·3이라는 음수율이잖아요. 그런데 조동일 선생은 초장, 중장, 종장이 이 통계와 모두 일치하는 것은 확률론의 공식에 따라 계산하면 전체의 4.0%정도라는 거죠. 이 4%밖에 안 되는 통계를 가지고 시조의 정형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실상과는 다른 것이죠. 또 시조 창작의 방향을 부당하게 왜곡한다는 문제점도 있죠. 선학들의 이런 연구는 시조 창작을 위한 지침을 제공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조동일 선생도 말씀하셨어요. 사실 음수율만이 아니라 음보율도 우리 시가의 율격을 온전히 규명하는 데는 문제가 있어서 성기옥 선생의 《한국시가율격의 이론》을 보면 우리 시가의 율격은 음량율이라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어요. 여기서 전문적인 이야기까지는 할 수 없죠.
정수자 : 그런데 실제로는 시조가 음보율만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일단 아이들한테 시조 설명을 할 때는 음보 개념이 확연히 오지 않아서 음수율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의미 단위로 설명하고 음보 개념을 설명해도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많거든요. 아이들이나 일반 독자들한테 설명할 때 음절수에 대한 설명을 빼고 음보율로만 설명하면 정형의 특성을 확고하게 심어 주기 어려운 점이 따라요. 그래서 음보율에 음수율적 개념을 같이 도입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의견도 있지요. 그 때문에 학문적으로 시조 율격을 음보율로 어느 정도 정리한 상태에서도 문제제기를 여전히 하는 분들이 있는 거죠.
홍성란 : 시조는 4음4보격의 음보율이라고 하게 되면, 하나의 음보에 4음절이 다 채워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음절로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장음이나 정음으로 계산되는 부분이죠. 대표적인 예로 황진이의 〈어져 내 일이야〉라는 작품을 보면, 첫음보가 2음절밖에 안됩니다. 율독을 하면 “어져내 일이야”가 되는 거죠.
정수자 : 그건 특별한 경우이고, 그만큼 시인이 배려해서 잘 배치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예전의 시조는 창으로 불린 측면도 고려해야지요. 사실 요즘 언어에서는 장음·단음이 아주 명료하게 살아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잖아요. 일상에서도 언어의 장·단이란 게 많이 희석되었지요. 그런 점에서 언어의 장·단까지 음보율에 도입해 설명하는 게 시조 창작을 더 어렵게 할 수도 있어요. 학문적 연구와 달리 실제로 시인들이 언어의 장·단까지 일일이 고민하며 쓰는 경우가 아주 적다고 보거든요. 현대시조가 이미지 위주인 데다, 장음·단음을 가리지 않고도 시상에 부합하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찾을 정도로 율격의 내면화가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단순히 음수율로만 시조의 율격을 확정할 것이냐는 문제가 또 생겨요. 그래서 음보·음수율 개념을 조심스럽게 내놓는 사람도 있는데 그 용어는 학문적으로 다시 정립해야 하는 어려움이 또 있지만 논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홍성란 : 음수율로만 하면 문제가 되죠. 우리말 구조는 2∼3음절어가 가장 많은데, ‘구름’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시다. 그럼 여기에 조사 또는 어말어미가 붙어서 한 어절이 된다면 음절수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구름이/구름에서/구름으로부터”를 보면 한 마디(음보)의 음절수는 상당히 달라지죠.
정수자 :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시조에 정격과 변격을 나눠본 견해가 있지요. 조운 선생도 그런 구분을 이미 했거든요. 정격 시조가 흔히 말하는 음수율에 거의 맞아떨어지는 것이라면 변격은 음절의 넘나듦이 큰데, 시조 전체를 보면 그런 유형이 훨씬 많다는 거죠. 저는 정격과 변격이 시조 설명에 좋은 지침이 된다고 봐요.
이지엽 : 두 분의 의견이 다 일리는 있지만 음보율이냐 음수율이냐의 문제는 시조 원론 쪽의 문제이므로 이 정도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음수율을 대신하는 개념으로 음보율이 등장했지만 음보율이란 게 김준오 선생의 시론에도 있듯 상당히 자의적인 개념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100주년 행사를 하기 전에 지역에 있는 중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이 부분에 관한 것이었어요. 사실 이런 것 하나가 시조단에 정립이 안 되어 있음을 개탄하면서 혹시 ‘한국시조시학회’가 시조를 연구하는 교수들 모임이니까 이런 것을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지요. 낯이 뜨겁더군요. 이런 것을 개인이 어떻게 하자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관한 논의는 연구자나 창작자가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과제로 남기기로 하죠.
현대시조 100년 작곡발표회
이지엽 : 현대시조 100년 작곡발표회는 백담사 만해마을과 서울 KBS 공개홀에서 열렸는데 작고 시인을 포함하여 30곡을 선정, 작곡과 동시에 발표회를 갖고 음반으로까지 나왔는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홍성란 시인이 얘기를 해 주시지요.
홍성란 : 현대시조 100년을 기념하는 여러 가지 행사 모두가 시조문학 사상 초유의 일로 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작곡 발표회는 비중 있는 작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는 좀 거리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정통 성악곡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즐겨 듣기에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거죠. 그래서 호응도 문제에 있어서도 조금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지엽 : 시에서도 노래화 작업은 시작 단계라고 생각해요. 월간 《현대시》에서 이전에 〈사이렌 사이키〉라는 위승희 음반을 내기도 했는데 깨끗이 실패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또 시인 열다섯 분의 시를 가지고 대중가요 음반을 냈어요. 작곡가이자 언더 가수인 황강록 시인이 작곡하고 위승희 시인과 황강록 시인이 노래를 불러 대중가요 쪽으로 만들어서 냈는데 제가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 몇에게 들려 줬더니 “70년대 노래냐?”, “요즘 아이들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라는 반응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원인이 있는 셈인데, 전통 가곡이라 할지라도 이번에 작곡된 것들을 보니까…….
홍성란 : 노랫말이 어렵지 않았어요? 작곡도 곡에 따라서는 너무 어렵게 된 것 같고.
이지엽 : 노랫말도 어려울 뿐더러 작곡도 어렵고, 그런 것들이 좀더 정교하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죠. 텍스트를 고르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좀 자발적인 분위기들이 오히려 좋은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로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수자 : 대중화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가곡 자체가 대중화와는 거리가 좀 있죠.
이지엽 : 아니, 〈가고파〉라든지…….
홍성란 : 그 당시의 정서와 맞았다는 거죠.
이지엽 : 저는 가곡이라고 해서 거리가 멀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물론 가곡에서도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 되는 거죠.
정수자 : 그렇지요, 물론. 이번 기획 자체가 일반한테 호소력 있는 건 아니었다는 거죠.
이지엽 : 그렇죠. 그건 음악 쪽, 성악이나 작곡의 대중화 노력에도 문제가 있다는 거죠.
정수자 : 네,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고, 그런 게 다 해결된다고 해도 가곡이 그만큼 만인에게 불려지는 것은 아니죠. 요즘 클래식 같은 음악도 극소수만 즐기거든요. 그와 비슷한 경우인데요, 예를 들면 저도 저번에 모 방송에서 시조창과 시조음악으로서의 시조와 문학으로서의 시조와 만나는…….
이지엽 : 그게, 어느 방송이죠?
정수자 : KTV라고 합니다.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다양한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지엽 : KTV에서는 주로 어떤 내용들이 얘기가 됐죠?
정수자 : 시조시인들은 다섯 분이 참석을 했어요. 윤금초 선생님, 유재영 선생님, 오종문 시인, 권갑하 시인 그리고 저 이렇게 참석을 했지요. 주요 논제는 그러니까 문학으로서의 시조와 음악으로서의 시조가 다시 만나는 자리를 통해 어떤 시너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까, 그런 모색의 자리였습니다. 일단 시인이 낭송한 시를 즉석에서 시조창으로 불러 봤어요. 창으로 하니까 우리한테는 참 좋아요. 그런데 아이들한테 호소력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고 대중화가 어렵다 싶어요. 하지만 클래식도 소양이 없으면 못 들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 점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시조의 절제나 느림 같은 것들이 젊은 층에 흡수되기 어려운 측면이라면, 그것들을 강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요.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소수라도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홍성란 : 시조창의 악곡이 정형화돼 있어요. 평시조, 엇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 같은 이런 패턴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는 거거든요. 상당히 느려요.
정수자 : 시조창하는 분들 내부에서도 물론 변화를 원한다는데요. 그렇다고 기본의 것을 넘어서 완전히 새로운 창을 만들고 활용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문학도 그렇거니와 창도 다양화해야 하는데, 시조창 자체가 그렇게 다양하게 창작되어 있지 않답니다. 그런데 제 시조를 창으로 듣자니 굉장히 절절하고 좋던데요.
홍성란 : 자기 것이니까 이해와 감동이 빠를 수 있죠.
정수자 : 그렇겠죠. 그래서 전 이런 생각을 해봐요. 우리 문화 소비가 점점 세분화되는데, 문화 소외 계층의 향수에 대한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요.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되는 게 대중가요의 힘이라면, 시조창은 일정 정도 소양 있는 층에서 향수가 가능하겠지요. 그 계층이 주로 노년에 접어드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소양을 갖춘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향수가 늘도록 해야 한다는 거죠.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상당한 난관이 따를 것으로 봅니다만.
홍성란 : 시조의 작곡 사업이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쉬운 노랫말로 감미로운 선율에 얹어서 친화력 있는 가수가 부른다면 어떨까요? 대중가수든 장사익 씨든 친화력 있는 가수가 요즘 감각에 맞게 부른다면 좀 달라질 거라는 얘기죠. 지금 정통 성악곡으로 해서 어렵게 작곡되고 노랫말도 어려워서 만해마을에서 들었을 때는 감동이 덜했어요. 그런데 KBS홀에서 할 때 가 봤거든요. 역시 음향시설이 완벽한 KBS홀에서 듣는 것과 열린 공간인 만해마을에서 듣는 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었어요. KBS홀에서 들을 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러나 그 감동과 대중성과는 또 다르지요.
정수자 : 가곡이 가요의 다양한 흡입력을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시조 가사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겠지요. 예컨대 사설을 랩으로 부를 수 있겠죠, 관련성이 깊으니까요. 어쨌든 시적인 가사로 오래 남는 노래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가요도 격조 있는 시적 가사와 곡으로 호소력을 겸비하면 생명이 긴 노래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당장은 대중에게 크게 어필되지 않더라도 그런 노래가 많아야 대중음악 전체가 풍요로워진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좋은 가사로 대중의 정서에 어필하면서 가사가 갖는 정화 기능도 고려하자는 거지요. 팝 가수 밥 딜런이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것은 가요가 갖고 있는 가사의 힘이잖아요. 시적인 가사의 힘.
이지엽 : 가사가 정제되고 좀더 쉽다면 그런 것으로 대중화를 시킬 수 있다 이거죠? 저는 문화운동의 마지막 단계는 노래로 봐요. 노래의 부분을 포기하고 다른 걸로 아무리 큰 효과 얻는다고 해도 노래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무튼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것을 작곡해서 성악가가 부르고 이런 대규모 행사를 할 수 있었다는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자구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중에 과연 불려질 것인가, 일회적으로 그냥 끝날 가능성이 있지만 정말 이제 가요하고 만날 수 있는 자리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죠. 일반 작곡가들이 들을 수 있는 텍스트를 만든다든지 콘테스트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들이 주체가 되어 이를테면 방송국에서 개최하는 강변가요제나, 대학가요제처럼 만들어서 우리가 준 시 텍스트를 가지고 작곡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한다는 것 등은 가능하다는 거죠. 문제는 자금력인데 이제는 이런 것들을 체계적으로 작업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이것은 파급력이 엄청나게 크고, 다른 문화운동과는 다르게 가장 빠르게 일반인들에게 침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2006년 주요 시조집 출간과 작품
이지엽 : 자, 이번에는 시조집하고 시조전집, 책 출간과 관련해서 잡지까지 총괄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태학사에서 ‘우리시대 현대시조100인집’ 총 102권이 완간됐는데 이 전집의 기초 작업은 1997년부터 했습니다. 만 10년이 걸린 셈이죠. 이번 7월 시조의 날 행사에 맞춰 오느라고 30권 정도가 한꺼번에 출간이 되었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부실공사가 안 됐나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그것에 관련지어서 의문점 등을 짚어보고 넘어가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정수자 : 현대시조 100년사에서 제일 큰 기획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현대시조 100인 선집’이라고 봅니다. 이런 결과는 이지엽 선생이나 지현구 사장님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합쳐져 가능한 것이었죠. 그리고 당초에 100년을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닌데 시기도 맞아서 의미가 배가됐지요. 어쨌든 100인의 시인을 한자리에 모아서 출판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기획이었고 그만한 성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위주의 선정이라는 취지에 따라 시인들을 선별한 것이 텍스트의 어떤 수월성이라고 할까, 공정성의 담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작품 위주로 꼭 엄선이 되었느냐는 점에서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점에도 불구하고 100인을 한자리에 모아서 현대시조를 출판해서 좋은 텍스트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창작하는 시인으로서나 독자의 입장에서나 앞으로도 이런 기획 같은 시조집 출판이 계속 나오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홍성란 : 큰 서점에 시조집이 꽂혀 있고, 가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거죠. 독자들에게 기본적인 텍스트는 마련됐다는 충족감이 생긴 거죠. 대학에서 시조를 가르치다 보면 “아직도 고시조를 쓰느냐?”고 질문해요. 국문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우리가 쓰는 것은 현대시조라고 하면, 현대시조라는 게 뭔지 그 자체를 몰라요. 초·중·고등학교에서 현대시조를 가르치는 데가 없다는 얘깁니다. 제도권 교육에서 현대시조를 안 가르치잖아요. 입시교육에만 치중해서 학생들의 정서함양이라는 문제는 돌볼 겨를이 없는 거죠. 교과서 문제도 이야기하겠지만, 교과서에 등재된 현대시조가 거의 없는 실정이고, 그것도 시조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자유시적 감식안으로 이야기하고 자유시 교육에 활용한다는 거죠. 지금 일선 학교에서 지도하는 선생님들이 시조를 배우지 않았으니까 가르치지 못해요. 좋은 시조를 선별해서 소개하고 가르치면 오히려 학생들이 반문해요. 현대시조가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시인 줄 몰랐다는 거죠. 그리고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문제점을 학생들이 지적한단 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100권을 한데 모아 낸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이고, 100권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좋은 시조를 선별하여 시조선집 형태로 좋은 텍스트를 만들어서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어요.
이지엽 : 당초에는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1998년이죠. 1998년 시조 관련 세미나를 오늘의 시조학회에서 할 때 《열린시학》 편집인들 사이에서 얘기가 되다가 가을호에 ‘우리 시를 사랑하는 모임’ 공고를 내고 회원 모집을 시작하면서 가시화됐죠. 그래서 그 때 각 지역별로 감사를 두고 99년 1월에 서울에서 발족식을 가졌죠. ‘우리 시를 사랑하는 모임’ 발족식을 가지면서, 그때 60년대까지 33인이던가요, 33인을 첫 발표를 했어요. 시조단의 여러 의견을 종합해서 명단을 발표했는데 연공서열이 아니라 작품 위주로 하다 보니까 상당히 충격을 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70년대 이후는 시집공모를 통해서 모집을 하고 가능 여부를 편집인들 사이에서 결정을 해가지고 계속적으로 작업을 했는데, 말하자면 1999년부터 2000년 사이에 대개 인원들이 결정이 되면서 그때 당시에는 굉장히 열심히 쓰고, 평론이 되는 사람들도 나중에 시조를 안 쓰게 된다거나 시조단을 떠난다거나 그런 사람들부터 선정이 되고, 또 그때는 작품이 좀 안 좋았는데 나중에 상당히 괄목할 만할 정도로 작품이 좋아졌는데도 빠진 경우도 있고, 그런 문제들이 있었다고도 생각됩니다. 김상묵 선생님 같은 경우는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데…….
홍성란 : 안 나왔어요?
이지엽 : 아니, 나왔습니다. 《골뱅이 편지》로 나왔는데 전혀 안 쓰시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완전히 목사의 길을, 교역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까요. 전민 시인의 경우도 거의 안 쓰는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99년이니까, 90년대 등단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사람들 이외는 거의 포함이 안됐죠. 지금 시점에서 보면 2006년이니까 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사람들 그 이후에 대강 주목되는 사람들이 판가름되는데, 그 때는 기초 자료들이 없어 특히 90년대의 경우는 선별하는 데에 문제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공모를 받았기 때문에……. 근 10년 가까운 세월, 짧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하시다가 중간에 돌아가신 분들도 계세요.
홍성란 : 김상옥, 박재두, 서벌 선생이 돌아가시고…….
이지엽 : 아, 박재두 선생, 박재두 선생 같은 경우에는 쓰러지셔서 원고정리를 제가 했지요. 우리가 《열린시학》을 통해서 특집도 내보내고 사진으로도 찍어서 내보냈지만 굉장히 난필이었어요. 해독해서 짜 맞추는, 선생님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느냐 이렇게 고쳐서 첨삭한 게 어떤 것인지……. 텍스트 확정 그런 것까지도 여기서 했죠. 그 뒤에 따님인 박진임 선생이 최종 정리했죠.
홍성란 : 만해축전에서 8월 13일에 학술심포지엄이 있었는데, 거기서 박진임 교수가 주제발표를 했어요.
정수자 : 박진임 교수가 전에 현대문학회에서도 시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어요. 그 논문에 제가 토론을 했는데, 아버지 박재두 시인이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서죠. 현대문학회에서 시조에 대한 논문은 발표조차 보기 어려운데, 저로서는 퍽 반가웠지요.
이지엽 : 그렇게 해서 마지막은 박재두 선생님의 최종 결과를 보고, 결국 돌아가신 후에 나오게 되고, 서벌 선생님도 돌아가셨고, 짧은 세월이지만 그 안에서 희비들이 많이 엇갈렸고, 이우종 선생님도 그랬던 것 같네요.
정수자·홍성란 : 그렇죠.
이지엽 : 일반 독자들한테 제대로 된 텍스트를 제공하는 게 아마 제일 큰, 본래 기획할 때 의도도 그랬던 것 같고, 그것은 어느 정도 성취된 것도 있죠. 그리고 이런 부분도 검토를 했었는데, 우리 한국 문학사에서 시조라는 장르가 제대로 어떤 대접이나, 제대로 된 어떤 이상을 정립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문학사에서 많이 빠져 있는 거죠. 그런 부분은 연구자들한테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토대도 어느 정도 마련됐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대부분 평론가들이 시조를 처음 접해 보거나 하는 이런 사람들, 우리 나라의 연구자들이 대부분 거기에 들어가서 평론을 썼기 때문에 아마 그런 효과 등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리라고 기대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홍성란 : 그게 일단은 시집 해설을 쉽게 해서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게 했고, 그런 의도에서 자유시 쪽의 평론가들을 많이 참여시켜서 시단의 관심을 촉발하자는 생각이 있었죠. 많은 연구자들이 한꺼번에 참여해서 현대시조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이지엽 : 진행하면서 애로 사항은 굉장히 많기는 한데 텍스트 중에 의미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안확의 《시조시학》 같은 것은 원문이 거기에 다 실려 있어서, 작품만이 아니고 다른 자료적인 것들도 좀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조남령 시인의 경우는 작품이 적어서 단편소설까지 들어갔죠.
홍성란 : 그분의 논설도 있잖아요.
이지엽 : 그 경우는 작품 중심이죠. 아무튼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고, 100인집은 결과적으로 말해 자료적인 가치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욕심을 낸다면 90년대나 2000년대에도 이어서 후속 작업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수지 관계가 어느 정도 맞아야 되는데, 태학사 지현구 사장이 고생을 하고 출혈을 한 것 같아서 미안한 일입니다.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금년에 나온 전집들이 있는데, 정완영 선생님의 전집이 나왔고, 경규희 선생의 전집도 간행이 되었어요. 그리고 시조집도 상당히 많이 출간이 되었는데 주목이 되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좀 얘기 해볼까요.
홍성란 : 백수 선생께서 1919년생이니까 미수를 기념해서…….
정수자 : 그 연세에 아직도 ‘현역’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그간의 작품 전체를 정리한 전집을 내신 거예요. 큰 의미가 있죠.
이지엽 : 백수 선생 시를 “불권방할(拂拳棒喝)같고 가불매조(呵佛罵祖)와 같다. 전기독로(全機獨露)한 해탈의 모습을 보여 주는 염화미소(華微笑)”라고 무산 스님이 한마디로 정리를 해버리셨는데, 아주 적절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수 선생은 시조단의 정말 큰 어른이시죠.
홍성란 : 문학관이 지어졌죠?
이지엽 : 문학관이 서실 형태로 해서 원래 직지사 안에 공간을 줘서 만들어 놨는데, 실제 가서 보니까 아직 일반인들한테 공개도 잘 안 되고 그냥 비치해 놓은 상태고, 이번에는 백수 선생께서 조그마하게 서실을 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수자 : 중견 쪽에서는 백이운 시인과 이지엽 시인이 주목할 만한 시조집을 냈고요. 오종문 시인이 첫 시조집을 냈고, 채천수 시인도 시조집을 냈지요.
이지엽 : 신진들로 주영숙, 최오균, 허열웅, 장기숙 등 시인들도 있죠.
홍성란 : 대구 쪽에서 나온 정표년 시인의 《신의 섬으로 가서》와 채천수 시인의 《발품》도 있어요. 백이운, 정위진, 윤정란, 정남채, 제주도의 이애자 시인이 시조집을 냈지요.
정수자 : 그리고 자유시에서 어떤 성취를 보여주신 오세영 선생님이나 정일근 시인의 시조집 출간도 우리가 짚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문단이 시조와 자유시를 완전히 다른 장르처럼 구분해서 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봐요. 시인이라면 그리고 문인이라면 일단 글을 잘 써야 하고, 그 중에서도 자기만의 특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우리 문학 풍토에서는 자신의 등단 영역을 넘어서 활동을 넓히면 그것을 무슨 아마추어의 취미생활인 양 취급하는 경향이 있지요. 물론 한 영역에서 자신의 최고치 문학을 구현하는 게 중요하죠. 하지만 한 장르 안에서도 아예 문을 닫아걸듯 서로를 대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시조도 현대시라는 장르 안에 하위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거기서 정형시와 자유시가 나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치 전혀 다른 장르인 양 너무 배타적인 태도가 심하고 그런 측면은 시조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집니다. 아까도 잠시 얘기했지만 시조를 잘 보지도 않은 채 편견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좋은 시조를 보면 새삼 놀라워하는 겁니다. 그런 와중에 시조에 대한 약간의 관심을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과장하거나 시혜적 태도를 은근히 드러내는 등 평소의 선입견을 보이게 되죠.
홍성란 : 오세영 선생의 시조집 이름이 《너와 나 한생이 또한 이와 같지 않더냐》 이거예요. 시조집의 의미도 의미지만 제목도 멋지죠.
이지엽 : 거론된 시인들이나 그 밖의 시인들 포함해서 아주 재미있는 작품 같은 것은 없던가요?
정수자 : 올해 주목할 만한 작품은 시간을 더 두고 살펴야 하는데, 전 아직 정리가 안 됐습니다. 다만 현대시조 100년 특집의 작품들이 그렇게 눈에 확 띄거나 새롭게 평가할 만한 문제작 또는 화제작이 적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현대시조 100년 특집에 들 정도라면 어느 정도 가려진 작품을 만날 수 있다고 보는데, 실망스럽다는 말을 좀 들었어요. 기대치를 높이 잡은 쪽 견해를 들은 탓인지는 모르지만,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이런 점은 시조가 좀 더 긴장하면서 치열한 시 정신으로 각자의 앞을 열어 가는 자극제로 삼아야겠지요. 그와 관련해서 자화자찬하는 식의 평가도 지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예 안이한 세계에 안주한 것과 노력하는데도 작품이 안 따르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요. 물론 엄정한 비평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저도 실감하는데, 시조 바깥의 평가에 너무 좌우될 것도 아니지만 내부에서의 지나치게 후한 평가도 시조 발전을 저해한다고 봅니다.
홍성란 : 제가 살펴본 시조집 가운데 이채로웠던 것을 얘기할 게요. 이민자로 20년 남짓 미국에 살아온 김영수 시인이 이민생활의 역경을 함께 헤쳐 온 아내를 위한 헌정시집 《당신의 사과나무》를 냈어요. 그런데 시어가 담박하고 쉬운 일상어들로 돼 있어서 시조다운 면모를 갖췄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시조들이 언어가 너무 거칠고 지나치게 관념이나 설명으로 흘러서 읽고 싶지 않다는 얘기들도 있고, 지나치게 현학 취미를 보이는 작품들이 읽는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는 불평을 종종 들어요. 또 갓 나온 시인들이 선배시인의 흉내를 너무 많이 내고 있다든가, 언어의 잔치 같이 어지럽게 말만 많은 작품들도 눈에 띱니다. 쉬운 일상어로 풀어놓을 수 있는 부분은 그렇게 조탁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시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시가 있죠. 시를 읽고서 짜증이 나거나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곤란하죠. 그리고 박종대 시인이 《눈맞추기놀이》라는 시조집을 냈어요. 이분은 교육자이면서 일본 후쿠오카 총영사관 영사를 지낸 분인데 95년에 《시조문학》으로 등단했어요. 32년 생이니까 75세죠. 이렇게 늦깎이 시인들이 요즘 많아요. 생활현장에서 수고하시다가 늦게나마 유년시절의 소망을 이룬 분들이죠. 그리고 시조라는 ‘느림의 미학’에 눈을 돌릴 수 있는 나이나 환경이 된 거죠. 고령화 사회에서 시인들의 연령층이 높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것으로 봐요. 문제는 젊은이들이 문학에 몰리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이게 또 특히 우리 시조 쪽의 숙제이기도 하고요.
시조 전문지의 동향
이지엽 : 자, 얘기를 마저 환원해서 해봅시다. 주목되는 작품들을 기억나는 대로 얘기를 해주시고, 금년에 시조 전문지 동향에 관련해서 얘기 해보죠. 시와 시조를 쓰는 김충규 시인이 《시인 시각》이라는 시 전문 계간지를 창간했고, 시 전문 계간지라고 하는데 시조가 안 들어가 있더라구요. 그리고 《한국시조시학》 창간호가 나왔고 물론 학회지이지만요. 《시조시학》이 계간으로 개편되고, 신웅순 시인이 《시조예술》이라는 잡지를 창간을 했어요.
홍성란 : 《시조예술》은 시조창과 관련해서 만든 책인데요, 현대시조를 창곡에 얹어 부르는 운동을 하는 것 같아요. 노랫말로 쓰이는 현대시조와 시조창 악보가 나와 있어요.
이지엽 : 창이 좀 강조된 느낌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요?
홍성란 : 저는 개인적으로 시조창이 지금 시대에 맞는지 의문이 돼요.
이지엽 : 전통 계승이라는 관심 차원에서, 그러니까 전통을 복원한다는 이런 의미는 있지만,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는 좀 부정적이라는 얘기죠?
홍성란 : 그렇게 말할 수 있죠. 학문적인 차원에서 아주 느린 음악과 현대시조 그 두 가지가 결합해서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거죠.
이지엽 : 우리가 시조 관련 행사들을 하다 보면 노래와 같이 주목을 끈다는 측면에서 이색적으로 시조창 같은 것을 하고, 백일장 같은 데서도 장원작을 시조창하는데, 그런 것은 어떻게 보세요?
홍성란 : 그것은 하나의 이벤트죠. 이런 말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크게 감동을 줘서 시조창을 우리가 해야 되겠다, 창곡에 현대시조를 얹어 불러야겠다, 대중의 생각이 이런 데까지 연결이 될까요?
이지엽 : 문제는 그렇게 대중들을 호도해 갈 가능성, 그러니까 행사 같은 때 맛보기로 넣어서 창을 하게 하고, 그래서 또 그렇게 부르고…….
홍성란 : 저는 역효과인 것 같아요. 시조를 시조창에다 불러야 되는 그런 낡은 형식을 지금 끌어와서 뭐하겠는가 싶어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시조의 형식이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력를 구속한다고 백안시하는데 그렇게 느린 시조창이 대중적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지엽 : 그런 문제들은 여전히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100주년 고유제 할 때 안숙선 선생이 판소리에 시조도 하나 했던 것 같은데, 그런 데서는 상당히 주목되지 않았나요?
정수자 : 만해 선생의 시였지요, 아마.
홍성란 : 그건 이벤트의 성격이죠. 주목을 끌기 위한 효과죠.
이지엽 : 그러니까 이벤트성으로는 괜찮은데, 시조가 불려지고 정말 연구해서 계승되고 하는 차원은 별개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되네요.
홍성란 :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은 대중적인 확산이고, 온 국민이 더 나아가서는 하이쿠처럼 세계적으로 각광 받을 수 있는 그런 차원을 얘기하는 거잖아요.
정수자 :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전에 시조창하는 분들과 만나면서 대중에게 보여주는 면도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요. 우리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측면이 너무 약하잖아요. 시낭송 모임도 이제 찾아가는 문학 행사를 시도할 필요가 있는데, 그때 창과 같이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창하는 분들은 ‘배자’가 맞아야 부르기가 좋다며 현대시조가 이미지 위주라서 창으로 하기 어려운 점을 갖고 있다고 하던데요. 물론 창에 맞춰서 시조를 쓰며 과거 방식으로 회귀하자는 게 아니고, 시조의 멋이나 격조를 창으로 더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지엽 : 그러니까 잘못 오도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을 안 해봤죠. 일반인들이 시조를 창으로 불러야 되고, 그러면 그 당시에 듣기는 좋아도 꼭 그런 쪽으로만 연관돼서 시조를 생각해 버리고 본격문학으로서의 어떤 시조, 활자로 된 시조에 대해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홍성란 : 반작용이 있을 수도 있죠.
이지엽 : 그런 부분들은 염두에 둬야 되지 않겠는가 싶군요.
정수자 : 제 생각은 시조를 낭송하고, 그것을 또 창으로 한다든지 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죠. 물론 창을 위해서 시조를 쓰는 것은 아니니까 문학성을 노래성에 온전히 내어줄 수는 없지요. 하지만 노래성에 대한 고민도 다시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미지 위주에서 놓친 언어의 율감이나 가락의 멋스러움 같은 측면 말이죠.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서로 시너지를 내는 방법 쪽으로 모색을 해봐야죠. 그런 방향이 아닌 창만의 부활이라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이지엽 : 여기 《시조예술》이라는 잡지가 내걸고 있는 창에 관한 관심은 좀 지켜봐야 되겠지만, 그런 점에서 좀 검토를 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렇게 지역에서 열심히 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정수자 : 금년에 출간한 거죠?
이지엽 : 네. 그 다음에 어린이 동시조에 관련해서 역시 계속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박석순 시인이 《한국동시조》 22집을 내셨어요. 대전에서는 《현대동시조》라고 7집도 간행이 되었는데, 이 두 잡지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시조월드》를 중심으로 한 사단법인 세계시조사랑협회에서는 더 체계화시켜서 초등학생들 작품을 뽑고, 어린이 시조왕도 탄생시켜 격려하고 있는데, 《한국동시조》, 《현대동시조》에도 초등학생들 작품이 실려 있어요. 굉장히 의미 있어 보이고, 이번에 《한국동시조》에는 연변조선족 학생 13명의 시조가 실려 있는데 우리 정서하고 똑같아 그것이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홍성란 : 여기 《시조월드》 하반기호만 해도, 연길 태평소학 교사와 흥안소학 교사들의 시조가 나왔어요. 또 연변 쪽 어린이 시조교실을 찾아서 교사와 어린이들의 시조를 실었어요. 금년 7월엔 그쪽의 《시조 목단강 2006》 출판기념회도 열고 세계어린이 시조백일장도 열어서 그쪽 동포들을 위해 소위 ‘북방시조’를 확대 보급하는 사업이 크게 부각되고 있네요.
이지엽 : 그런 부분들은 상당히 의미가 있어요.
홍성란 : 연변 교사들에게 시조를 가르치고, 또 그 교사들이 어린이들을 가르쳐서…….
이지엽 : 《시조월드》에 파이팅을 보냅니다. 수용자층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수자 : 저도 《시조월드》 요청으로 심사에 참여를 했었는데요, 일단은 아이들이 시상을 정제된 형식 안에 잘 담아내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시조의 또 다른 가능성을 봤거든요. 잘못하면 시조 형식이 상상력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어요. 어려서부터 너무 형식에 맞추다 보면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확장을 닫아버릴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정제된 형식 안에 시상을 담아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동시조가 많았어요. 그렇듯 형식 안에 시상을 담아내는 게 어쩌면 시에 더 편하게 가까워지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이 주어진 자유보다는 일정한 형식이 주어지면 그 안에서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골라내는 능력도 더 생기지 않나 싶어요.
이지엽 : (《한국동시조》 22집을 들춰보며) 이런 〈비방울〉 같은 작품, 심양시황고구 화신조선족소학교 6학년 학생 작품인데, 초등학교 6학년이니까 어린 학생이죠. “집집의 창문에다 똑똑똑 편지 쓰네/ 한국에서 일하시는 엄마께 편지 쓰네/ 어머니 못 보실까봐 세상천지에 다 썼네./” 참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세계화를 시킬 때 작은 노력 같지만은 비중 있게 생각을 해봐야 돼요. 이 학생이 앞으로도 계속 시조의 형식에 담아내서 우리 정서를 써내고 이런 것들이 확산되어 나간다면 즐거운 일입니다. 작은 작업은 아니라고 판단돼요. 오히려 어린이 시조운동 등이 좀 활성화될 필요가 있고, 또 관심도 가져주고, 또 가급적으로는 시를 쓰는 사람들도 시조도 좀 같이 써서 훌륭한 자료들을 제공도 하고 이런 노력도 좀 따라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성란 : 이게 무크지인데요, 《디카시(詩) 마니아》라고 창간호가 나왔어요. 그래서 여기에 디카시(詩)에 대한 좌담도 김열규 교수하고 이상옥 교수 두 분이 하고, 책이 얇고 예쁘네요. 또 디카시인 만큼 사진을 찍어서 그 사진에 맞는 시를 쓰는 그런 작업이죠.
이지엽 : 시조하고는 관련이 되나요?
홍성란 : 시와 시조를 구분하지 않고 해요. 그래서 권갑하 시인하고 저하고 한 편씩 들어갔어요. 재미있더군요. 사진을 직접 찍어서 그 사진을 보고 썼는데, 그러면서 이상옥 교수 말씀이 디카시라는 것이 시조와 딱 맞다 또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사진을 보고 앙증맞게 그 순간의 장면을 포착해서…….
정수자 : 순간을 포착해서 이미지화한다는 점에서는 단시조와 디카의 특성이 잘 어울리겠죠.
홍성란 : 네, 잘 드러내는 거니까요. 권갑하 시인도 단시조였고 저도 단시조였어요. 디카시가 처음에 시조 공부하는 사람한테는 좋을 것 같아요.
이지엽 : 문학상 얘길 한번 해 볼까요. 이번에 한국시조작품상은 서숙희 씨가, 가람시조문학상은 민병도 선생이, 이호우 문학상은 김영재 시인이 수상자가 되었는데, 다들 열심히 쓰시는 분들이라고 생각되네요. 정운엽 문학상은 최오균 시인이 수상자로 결정되었죠.
홍성란 : 금년에 특별한 게 현대불교문학상은 현대시조 100년을 맞이해서 이번에 시조 부문이 새로 생겼죠? 이근배 선생께서 이전에 〈절필〉이라는 자유시로 이 상을 받았고, 윤금초 선생이 타셨죠.
이지엽 : 자유시로 받았고. 그럼 시조로는 처음이네요? 현대불교문학상도 의미 있는 일이죠. 그리고 고산문학대상은 이론 쪽으로 성기옥 선생님이 받았는데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조금 왜곡되긴 했는데…….
홍성란 : 작년에는 문학 부문으로, 시 부문에서 수상자가 나왔죠?
이지엽 : 김종길 선생이 받았습니다. 조금 왜곡된 부분이 있었죠.
홍성란 : 그런데요, 고산문학대상이라는 게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나요? 고산 윤선도라는 분이 어떤 분이세요. 시조문학의 대가이신데 굳이 그것을 시, 시조로 나누고 하는 것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조문학상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시조창작과 학술 부문이 같이 가야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미당문학상의 경우, 미당도 시조를 썼어요. 오늘 중앙일보 칼럼 〈명사시조〉에도 나왔지만 1970년 《현대시조》 창간호에 축시로 〈비는 마음〉 두 수의 작품을 쓰셨거든요. 그런 식으로 찾아보면 더 있겠죠. 그런데 미당문학상이 시 부문, 시조 부문으로 나눠서 합니까? 시 부문만 하거든요. 우리가 지금 유수한 상이 많은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특히 고산문학대상 같은 경우 그렇게 시하고 갈라먹기 식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정수자 : 그건 운영위원회에서 처음의 취지를 더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고산문학대상은 시조에 한정해 가야 된다고 봅니다. 이렇게 저렇게 걸러서 가는 것이 아니라 창작과 학술 부문을 처음에 나눠서 했으면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데…….
홍성란 : 가람시조문학상도 그런다면서요?
정수자 : 그래서 양점숙 시인이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시조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적다고 시를 통해서 관심을 끌려는 경우가 생기나 봅니다. 애초에 시조에 한해 제정한 상을 인기 때문에 바꾸려는 그 발상 자체가 참 어이없는 일이죠.
이지엽 : 문제점으로 지적하기도 했는데 문학상이 작품상을 달고는 있지만 일정기간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이를테면, 시조단은 이상하게도 등단하고 나서는 한동안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요. 말하자면 가장 왕성하게 작품을 써야 할 시기에 실종되고 있는 거지요. 문학상이 거의 10년이 넘어야 주어지는 겁니다. 중앙시조대상의 신인상도 5년 이상이고요. 갓 등단한 유망주에게도 주어지는 문학상이 필요합니다. 《시조시학》에서 본상 이외에 이번에 ‘젊은 시인상’을 제정한 것도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맥락인데요, 문학상 제정 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고, 잡지 편집자들도 신인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홍성란 : 올해 또 《현대시학》에서 시조 100년이라고 특집을 했잖아요. 일별하면 처음 이근배 시인 작품이 나오는데, 연륜만큼 깊이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 주십니다.
이지엽 : 그래도 중심 되는 시 잡지에서 특집으로 기획한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보통 때도 관심을 가지고 그런 지면을 열어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정수자 : 《현대시학》은 이번 특집을 계기로 시조에 관심을 더 가질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신인상도 시조 부문을 모집하고 뽑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시만 아니라 시조도 섞어서 편집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1월호 원고 청탁이 제게도 온 것이나 이종문 시인이 ‘이 달의 작품’란에 시조 담당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적어도 한 달에 두세 편 이상은 시조가 실릴 것 같습니다. 현대시조 100년 기념특집을 《현대시학》에서 기획한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인데, 예전에 신작 특집을 했던 기억에 지면이 더 새로웠지요. 아마 《현대시학》 출신 시인들은 이번 기획이 더 특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홍성란 : 그런 적이 있어요?
정수자 : 《현대시학》에 시조도 같이 싣던 무렵에 두어 번 신작특집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87년인가, 그때는 시조 월평도 계속 나왔지요. 이번 기획이 시조 지면 확대에 좋은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참, 전에 《현대시》도 정형시 특집을 몇 년 동안 꾸준히 했었지요. 당시 이우걸 선생님이 지면을 확보했던 것으로 아는데요.
이지엽 : 특히 《현대시학》은 괜찮은 시조 작가들이 그쪽을 통해서 많이 나왔죠.
정수자 : 박시교, 이우걸, 김영재, 정해송 같은 좋은 시인을 많이 배출했죠.
이지엽 : 주된 활동 무대였고 향수가 있는 잡지인데 주간이 바뀌고 나서 관심이 많이 없어졌는데 고무적입니다. 이제 관심을 갖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좋은 방향으로 되길 기대해 볼 수 있겠네요.
정수자 : 정진규 선생님이 그런 약속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유재영 선생님이 어떤 역할을 하시지 않았나 싶은데요. 중앙일보 미당문학상 최종후보작 지상 중계에서도 정진규 선생님이 시조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 동안 여러 잡지에 구색 맞추기처럼 끼어 있는 시조를 대할 때면 안타까웠지만, 시조를 고려하는 시 전문지가 늘고 있어 기대가 됩니다. 《열린시학》이나 《서정과 현실》처럼 당초 시조와 시가 함께 가는 편집이 아닌 잡지 중에는 《문학사상》, 《불교문예》, 《시와 사람》, 《리토피아》 등에서 시조를 게재하고 있지요? 그런 여러 잡지 중에서도 《유심》이야말로 시조 대접을 확실히 하는 느낌입니다만.
홍성란 : 《유심》에서 ‘유심 시조백일장’ 공모를 하기 시작했어요. 매호, 이게 계간이니까 네 번 나오잖아요? 그 때마다 작품 공모해서 발표를 하는데 장원 상금이 100만원, 차상이 20만원, 차하가 10만원인데, 장원은 기성 시인으로 대우한다는 거죠. 아마 이번 겨울호부터 시행이 된다고 들었어요. 신인상은 종전의 그 제도로 가고, 그러니까 1년에 시인이 여기서 다섯 명이 배출이 되는 거죠. 장원이 네 명에 신인상 한 명. 이 사업도 현대시조 100주년을 맞이해서 새롭게 마련된 거죠. 시민대학에서 강의하시는 줄로 아는데 시조도 가르치시죠?
이지엽 : 원래 시창작 강의인데 그 중에 시조를 쓰는 분도 있고, 꼭 시조를 알아야 한다고 강의에 강조를 합니다. 몇 분은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유심》에서 시조백일장을 시작했다는 것은 시조 확산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많이 알려서 좋은 젊은 친구들이 배출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정수자 : 그리고 시조 전문지 《시조세계》나 《나래시조》, 《시조월드》 등의 잡지에서 현대시조 100년 특집을 각기 했죠? 그런 것들이 100년의 시조 족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면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 했습니다. 그런 작업이 시조의 앞날을 길게 내다보며 준비를 촉구하는 의미도 갖고 있다고 보는데요. 홍성란 : 《나래시조》에서 흥미 있는 작업들을 했던데 그 중에서 제일 인기 좋은 작품이 이지엽 시인의 〈해남에서 온 편지〉던데요?
이지엽 : 그래요? 전혀 몰랐는데요.
홍성란 : 현대시조 100년을 기념해서 원로들이 칼럼을 내서 ‘시조 좀 잘 써라’ 하고 혼도 좀 내시고, 시조시단에 현실 진단 및 발전 방향 모색, 이런 차원의 글을 정수자, 박기섭 시인하고 몇 분이 쓰셨어요. 저는 밀린 일 때문에 못썼어요.
이지엽 : 내용들은 주목할 만한 것이 있었나요?
홍성란 : 네. 시조시인 100인이 선정한 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라는 작품과 다수 추천 시조가 있는데, 이 작업에도 뒷얘기가 들리기도 하고.
정수자 :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의견을 공정하게 반영했느냐에 대한 문제 제기는 늘 따르는 것 같아요. 시조단 의견을 골고루 수렴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실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비판이 없으면 더 이상의 노력도 없이 갈 테니 우리 스스로 안이해지지 않도록 문제점을 극복하는 노력을 해야겠죠.
시조단의 과제와 전망
이지엽 : 그 다음에 우리가 얘기 해 볼 건 시조단의 과제와 전망인데 불평등한 요소들이 많잖아요? 100주년을 맞이해서 돌아보면 등용문부터 시작해서 교과서 등재, 우리 대표적인 기반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도 시조가 하나도 없다든가,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가 사업에서도 제외되고 불평등한 요소들이 너무나 많아요. 물론 제가 세미나에서도 발표도 하고, 그리고 100년 기념 세미나 전 《월간문학》 좌담에서도 그런 얘기들이 있었어요. 시조가 빠졌다고 긴급 좌담도 열고 《유심》에서도 그런 특집 가졌는데…….
정수자 : 문제의 진단과 환기에서 나아가 뭔가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조가 처한 현실에 대해 문제 제기는 많이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안의 제시는 적고 또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시조포럼’ 같은 범시조단 모임을 통해 그때그때 시급한 문제부터 풀어가며 힘을 모으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한시적인 모임으로라도 시조단의 지혜를 모아 그것을 통합하고 추진해가는 역량을 발휘해야 할 때이고요. 또 무슨 일이든 지속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당초의 취지나 결의가 퇴색할 것이니 길게 보고 나아가야겠죠. 어떤 개인의 입지 마련이 아니라 시조의 미래를 내다보는 방향 설정과 전략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 일을 위해 팔 걷고 나서는 분에게는 적극 지원을 해야겠지요.
이지엽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각 영역에서 이런 다양한 역할들을 해나가고 힘을 합할 부분에서는 한마음이 되어 모여야겠지요. 시조단이 한 목소리를 낼 경우에는 이해득실을 떠나 뭉칠 필요가 있고, 이를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범시조단적인 기구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사안이 있을 때만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아닌 시조 생존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시조의 계승 발전, 중흥과 확산까지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한 기구지요. 그런 거창한 기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조를 창작하면서 시조를 연구하는 모임, 이를테면 한국시조시학회와 같은 유사한 모임들이 활발하게 움직여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홍성란 : 교과서 편수위원들이 시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요. 전통시가로서 현존하는 유일한 장르이고, 세계의 정형시로 상품가치가 충분한 시조를 사라진 장르 취급만 하고 있어요. 전근대적이다, 분방한 현대인의 사유에 맞지 않는다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판에 박힌 고시조 몇 편 싣고 현대시조를 두세 편 실었다 해도, 시조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시적 안목에서 활용하고 마는 거죠. 천년의 역사를 가지는 시조에는 우리 민족의 예지와 습속이 그대로 들어 있죠. 우리 민족의 삶을 우리말로 풀어서 천년 동안 가다듬어온 시형이라는 거죠. 왜 시조가 지금까지 면면히 창작되는지 신중히 생각하고 정책에 반영해야 합니다.시조가 교육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학교 현장에서 시조를 가르칠 선생님이 없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어요. 배우지 못한 선생님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는 시조를 가르칠 필요는 없죠. 입시에 직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지난 가을에 《유심》이나 《대산문화》에 이지엽 시인도 발표한 내용이지만 100명 정원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현재 73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시조인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문학분야를 장르별로 보면 시 6명, 소설 7명, 평론 4명으로 모두 17명 가운데 시조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죠. 여러 지면에서 거론된 얘기지만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으로서 한국이 한국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한국의 책 100권’을 선정했죠. 그런데 이중에 시조집이 단 1권도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참담한 심정이었어요. 조운이나 이은상의 시조집도 가능한 일이고 아니면 《청구영언》 같은 옛시조집이나 현대시조 선집도 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정수자 : 네, 시조에 대한 오해가 몰이해를 양산하는데 그렇게 판이 굳어 가면 시조는 점점 왜소해질 겁니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하는 ‘힘내라, 한국문학’의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선정에서도 100여 편의 시가 선정되는 가운데 시조는 고작 서너 편 아니면 심할 때는 1편만 선정이 됩니다.(작년의 사십만 원이 올해는 백만 원으로 증액됨) 시조가 그렇게 홀대를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문학성으로만 평가한다지만 사실 심의위원의 주관적 견해를 배제한 백퍼센트 공정한 평가란 없지요. 여기서도 시조에 대한 편견이 많이 작용한다고 보는데 시조에 대해 잘 알지 못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결정을 더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유성호 선생 같은 분은 시조와 자유시의 시인 수를 고려한 할당량 제도로 전환하고, 시조에 일정 정도 배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답니다. 아무튼 시조의 위상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찾지 않으면 높일 수 없을 터이니 각자의 역할을 더 찾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되어가나요? 현대시조를 엄선해서 책으로 하나 묶자, 어디든 제시할 수 있는 자료를 제대로 만들자, 이렇게 얘기 한 게 있었지요. 교과서 수록 시조를 늘리자는 주장을 할 때, 엄선한 현대시조 자료를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 결과를 이끌어내자고 한 것인데, 진행이 되고 있는지요?
이지엽 : 엄선해서 하는 것은 외국어로의 번역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아 아직 작품을 수집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뒤에 시조단의 중지를 모아 선정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외국어 번역은 대산의 번역 프로그램 지원을 담당하는 분과도 얘기를 나누었고 긍정적인 답변을 듣기도 했습니다. 외국 번역은 단순히 번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어로 출판되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드는 사업입니다. 번역원까지 타진해 보면 좋은 결과들이 나올 듯합니다. 홍성란 시인은 별도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꼭 같은 텍스트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교과서 수록 자료는 김복근, 김연동 시인 등이 중심이 되어 텍스트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조단의 과제나 노력에 관해 두 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100주년 기념 선포식과 《유심》 권두언에서 저는 시조단의 발전 방향을 위해 단기적인 대책과 장기적인 대책을 몇 가지로 나누어 문제 제기도 하면서 대응책을 몇 가지 얘기한 바 있습니다. 어느 한 방향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일선 교육의 현장에서 시조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작년 여름방학 때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들 400여 명을 한 달 동안 교육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여기서 ‘피를 토하는 심정’이란 표현을 강의 시간에 실제로 썼어요. 그 심정으로 여러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얘기했어요. 물론 현대시조의 좋은 작품들을 소개하고, 현대시조가 이렇게 달라지고 있구나 라는 것을 다들 공감하고 있을 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중에 이분들이 고맙다고 하는 소리를 여러 군데서 들었어요. 시조단 전체로 보면 교육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은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00주년 올해의 큰 행사들을 살펴보고 시조단 이모저모를 훑어보았습니다. 혹시 더 하시고 싶은 얘기 있으신지요?
홍성란 : 작년 연말 올 연초에 중앙일보의 시조백일장과 중앙시조대상 관계로 좀 복잡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지면을 살리고 시상제도를 지속적으로 운용하려고 중앙일보의 문학담당 기자들과 시조시인 몇 분이 애를 많이 쓰셨어요. 그래서 잠정적이지만 스폰서도 구하고 〈명사시조〉라는 칼럼까지 만들었는데…….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이 문제는 좀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경제논리를 떠나서 우리 문화를 수호하고 보전한다는 측면, 중앙의 대언론사가 국민정서 함양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접근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길 바랍니다. 금년은 만해사상실천선양회의 시조축전으로 현대시조사에 큰 획을 그은 아주 의미 깊은 해였습니다. 이 시조축전의 의미를 오롯이 이어받아서 시조문학을 확산시키고 문학성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수자 : 당면한 문제들은 물론 시조단의 꾸준한 노력이 뒤따라야 풀어갈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노력들도 시조 자체의 문학성을 담보하지 못하면 공소한 메아리만 반복하는 격이 될 거라고 봅니다. 저는 지금 시조에서 시급한 게 진정한 현대시조로서의 위상 확보이고, 그것은 무엇보다 작품성을 바탕으로 할 때 자리매김도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시조가 문학작품으로서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급선무겠죠. 이제는 양이 아니라 질적 비약을 더 다양하게 추구하며 타 장르와의 상생 속에서 시조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져가야겠습니다.
이지엽 : 두 분 장시간 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좋은 얘기들에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