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세상에는 진실에 대하여 오해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잘못 알고 있는 일로 인하여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 가운데 이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오해를 하는 것은 성령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령이란 ‘루아흐’(푸뉴마)로서 ‘숨결, 호흡’등으로 해석이 되는 말로서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삼위로서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활동하시는 하나님 그 자체, 생명의 힘으로서의 하나님) 그런데 이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지.정.의의 하나님)으로서 감정과 지식과 능력과 사역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어떤 힘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단지 성령님의 한 가지 특성을 이해한 것 일뿐 진정한 성령님의 이해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성령님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아서 올바른 성령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이 분이 우리에게 대해서 무엇을 하여 주시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1. 언제 성령을 받습니까?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의 성령의 강림의 역사가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사역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 때 강림의 결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는 모든 사람에게 강림하시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성령이 그 믿는 마음에 임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보내셔서 강림하시는 분이지만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회개와 간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지금은 성령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밀착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내 이름으로 보낼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강림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성령님을 모시고 싶으시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속에 거하십니다.(너희 속에 거하시겠음이라)
2. 언제까지 거하십니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합니다. 이는 6.25사변 때 죽기까지 싸워서 함께 동지애를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참으로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14장 16절에 이르기를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서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 임한 성령께서 그가 범죄하므로 결국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신 성령께서는 한번 임하시면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도 함께 하시며, 내 힘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서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이 때는 움츠러 들어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탄식하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할 뿐입니다.
이런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죄를 지어도 떠나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면 이는 선을 악으로 돌려주는 것이 됩니다. 항상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존귀히 여기고 지도와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진리를 가르친다는 말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이를 알게 한 이는 성령이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해하고 깨달아 알고 마음에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진리에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진리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잊어 버렸던 것을 기억나게 한다는 것을 넘어선 말씀입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망각상태에 있던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력 있게 이해하도록 하심과 동시에 더욱 분명하게 기억하도록 도우셔서 생명력 있는 신앙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오류가 없이 전하게 하십니다. 오늘의 성경이 오류가 없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생각나게 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진리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생명력이 가득할 것이며, 담대하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진리로 무엇을 하십니까?
성령님께서 진리로 우리에게 무엇을 하여 주실까요? 성도를 위로해 주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파라크레토스’인데 이는 ‘파라(곁에서)+크레토스’(부르다)라는 말이 합성되어 된 말입니다. 즉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살고,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 해보려다가 안되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을 때 성령께서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반드시 진리로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진리가 아닌 것으로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쿵하고 땅에 넘어져서 울고 있으면 달려가서 하는 말이 ‘아이구 너 용감하구나. 이것 봐. 땅이 꺼졌네’하면서 아이를 달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저 아이를 달래 보려는 심사에서 한 진실하지 않은 위로였습니다. 또한 나이를 먹은 자신을 한탄하는 노인을 달래기 위해서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50정도밖에 안 보입니다’라고 하면 얼굴이 희색이 돌면서 하하호호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을 위로하려고 진실하지 않은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반드시 진리로 위로해 주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진실을 말하면 아프고 힘들 수도 있지만 잠시 후면 그 아픔이 지나가고 참된 회복이 찾아옵니다. 진리로 위로하는 것은 온전한 위로가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진리로 위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5. 성령의 위로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평안이 깃듭니다. 세상에도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화는 일시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주는 평화는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몸이 건강하니까 평안하고, 생활이 잘 되니까 평안하고, 자녀가 충실히 건전하게 자라주니까 평안합니다. 그러나 항상 불안한 평안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인 평화입니다. 혼란에 빠질 때는 평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로 위로하여 주시는 평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적인 평안으로서 모든 조건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이 평안은 영원한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외적인 조건을 극복하고 추월하는 영원한 평안을 주님께서는 성령의 위로로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의 신앙이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우리 안에 내주하여 계시는 성령님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믿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내주와 도우심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분인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우리는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하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성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더욱더 자라고 온전해 질 것입니다.
금번 부흥회는 성령충만한 대부흥회가 되기를 열망합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과 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새벽에 일어나서 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함께 기도합시다. 틀림없이 성령의 충만함이 부어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