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불거토피아 원문보기 글쓴이: 럴수
(알림:아래에 소개한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바이블들에 대한 정보는 미국의 역사 전문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에도 자세히 소개된 내용이며 예수와 관련 서적의 내용도 사실과 기록에 근거해 고고학자와 인류학자 종교학자들의 견해가 함께 들어가 있다는 것을 밝혀 드립니다.
또 아래 글을 소개한 것은 신화서이자 역사서로서 바이블을 주목했고 글을 통해 특정 종교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닌 인류의 성자로 추앙되는 예수에 인생중 사라진 부분에 대한 미스터리에 중점을 맞추었다는 점을 밝혀 드리며 초기 기독교와 관련해 오늘날의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다소 비판적인 내용이 있음을 밝혀 드립니다.그같은 비판은 현재 기독교 내부에서도 있음을 밝혀 드립니다)
세계의 미스터리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소년기와
금지된 바이블의 이야기속 진실들
-글.카페지기 김지오
“이 이야기는 예수가 우리 고향에서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토마스 복음서 1장)
'거기서 나는 모든 시간의 머리를 가진 분을 만났다 ...그렇다 태양과 징표들이 창조되기 전에 하늘의 별들이 만들어지기 전에..'(에녹서 중에서)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이러하였노라 이것은 저들이 의심하고 있는 진리의 진술이니라, 알라께서 당신의 아들을 취하심은 당신의 권위에 맞지 않느니라, 알라는 성스러우시도다..'(꾸란, 마르얌 제 19장 35절)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확실한 근거가 없다'(미 시사 잡지 TIME 1999)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예수라는 인물은 기적을 행하던 당시 무수한 마법사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며 예수의 죽음도 하루에 1천명 이상이 처형되던 정치범 사형자들의 죽음과 다름이 없었다. 로마의 역사가 요제푸스의 유대왕국사를 보라. 예수는 단 두번 그것도 스쳐 지나가듯이 기록했다. '(토머스 게일, 고고학자)
'작금에 한국교회는 초기 기독교와 바이블의 교훈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만의 거대한 성전에서 새로운 우상을 세우고도 자신을 비판하는 어떤 소리도 듣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갈길은 넓은 길 멸망의 길이라. 어리석은 자여 그대의 눈에 든 들보를 보고 세상의 티끌을 빼라 말하라! 교회재정의 10%도 세상에 뿌리지 않으면서 어찌 사랑과 나눔 봉사를 이야기 하더냐! 너희 주인이 가르친 것이 그런 것이었더냐! 오 타락한 바알신의 뱀들아! (카페지기)
종교의 물결도 한때 오대양 육대주를 휘감았소 그러나...이제 내게 들리는 것은 광막한 사막을 떠도는 모래 바람 소리와 헐벗은 바닷 기슭을 떠도는 쓸쓸한 썰물의 소리들 뿐... '(카페지기)
'다수라는 힘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면 그 사회는 열린 사회가 아닌 닫힌 사회가 될 것이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다양한 사고가 아닌 닫힌 사고의 소유자가 될 것이며 소수는 고통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다수에 의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수와 소수가 공존하는 똘레랑스 정신과 다양성에 있다. '(카페지기)
........................*
최근 소설 '다빈치 코드'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예수에 대한 화두가 문학계를 강타하고 있다. 정말 예수는 실존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바이블(성서)에서조차 삭제 되고 편집된 부분이 많은 것일까?
신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을 왜 그 많은 인간들이 가위질을 가한 것일까?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은 나머지 초기 기독교 바이블은 무엇일까? 역사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일까? 왜 그들은 무조건 믿으라고만 강요할 뿐 이런 부분들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 바이블이 신약을 보면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소년기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부분들이 빠졌던 것일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바이블이 완전 무결한 무오류(無誤謬)의 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진실이 있으니 바이블만큼 철저하게 편집과정을 거친 책은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럼 예수의 소년기를 바이블 신약이 설명하지 못한 그 부분을 기록한 복음서는 없었던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에디오피아의 기독교와 고고학 박물관에는 그 기록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초기 기독교 관련 복음서들이 즐비하다.
그 내용들 중에는 예수의 소년기의 충격적인 사건이나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현재의 신약기록과는 전혀 다른 기록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전혀 다른 기록들, 예수가 골고다에서 사망한 뒤 지옥을 다녀온 이야기나 요한 계시록과 쌍벽을 이루다가 마지막 편집과정에서 빠진 ‘베드로의 계시록’이 오래전 기록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바이블 신약은 고대 종교 권력들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특정 종파의 이익에 따라 편집 정리한 책에 불과한 것이지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기록되어진 다양한 기록과 모든 문헌을 정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사기가 신라 출신의 문신이었던 김부식이 신라 경주 토호 세력의 시각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정리한 역사서이다보니 백제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의자왕등을 폄하 하거나 왜곡시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세를 당하고서도 역사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걸고 사기 를 쓴 사마천과는 달리 초기 기도교 당시 정통이라고 우기던 다수파가 소수로 불리던 여러 초기 기독교문헌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편집해 탄생 된 것이 오늘날의 바이블 신약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 완전 무결하단 말인가?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한 것은 시대를 잘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네명의 통치자가 지배하던 로마를 자신의 야욕속에 넣기를 원했고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한 전투에서 그가 기적을 경험했다고 말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에 가까운 것 같으며 오히려 정치적인 목적에 기인한다.
로마를 자기 손아귀에 넣는 과정에서 황제는 억압받지만 엄청난 수를 자랑하던 반정부 세력인 초기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사용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든 뒤에도 그는 무수한 사람을 처형했으며 불륜을 저지른 장남을 화형시켰으며 외도를 한 부인도 질식사 시켰고 자신 또한 환락생활을 하면서 로마제국의 신인 태양 신 아폴로신을 비롯한 로마의 주신들을 여전히 숭배했다.
그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전 로마를 지배하고자 기독교에 엄청난 돈과 재정지원을 했으며 이후 성 베드로 성당 등을 건축해 오늘날 로마 교황청의 시작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이외의 모든 신전과 사원 고대 시대의 보석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마져도..'불 타 없어지기에 이른다.
로마 제국의 역사가로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요제푸스는 예수를 중요한 인물이 아닌 스쳐 지나가듯이 단 두번 '유대왕국사'에서 언급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대제국 로마에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변방중 변방이었고 작은 속주였다. 또한 예수처럼 기적을 행한 자들도 당시 로마에 수천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있었고 넘쳐났으며 그들이 행한 기적도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유대교에서 분파한 초기 기독교와 유사한 종교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왜 예수를 주목해야 하는 것인가?
예수가 처형 당한 것도 예수가 유대의 왕이라고 주장하여서 라기 보다는 본디오 빌라도 입장에서 보면 마사다 사건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의 반란을 의식 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역사가들은 지적한다.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재판이었다.
그럼 바이블 신약에도 안 나오는 예수의 소년기는 어떠했는가?
김부식이 백제사 전체를 비하해 기록했듯이 바이블 신약에서 삭제한 그 예수의 소년기는 어떠했는가? 왜 이런 기록들은 모조리 삭제 했는가?
토마스 복음서 속의 예수의 소년기
오늘날 신약의 마태나 누가 등에는 예수의 소년기 시절의 기록이 빠져 있다. 이로 인해 어떤 기이한 사학자는 예수가 그 기간동안 인도로가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는 황당 무계한 이야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블의 편집과정에서 제외된 ‘토마의 복음서’ 제 1장 1절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우리 고향에서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예수의 어린시절을 그린 그림, 오늘날 그의 소년기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다수에 의한 폭력이다.오늘날 많은 성직자라는 자들이 바이블 토마스 서를 언급하지도 않고 있다)
토마의 복음서에는 예수가 5세때부터 15세때까지 청년기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행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놀랍게도 토마의 복음서는 2~4세기경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보았던 여러 초기 기독교 시대의 복음서 중 하나였다고 한다.
현재 발견된 이 책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기원후 6세기경 출판된 것으로 2세기경 이미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예수의 기적에 대한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토마 복음서 제 2장에는 예수가 5세때에 요단강 가에서 진흙으로 흙을 빚어 새 모양을 만들었는데 그날은 유대교인들의 안식일이었다. 이에 그의 아버지 조셉이 왜 안식일을 쉬지 않고 일을 했느냐며 아들인 예수를 나무랐다. 이에 예수는 화가나 박수를 세 번 쳐 새를 날려 보냈다고 토마의 복음서는 기록한다. 신이 화를 내다니 이 얼마나 충격인가?
더 충격적인 이야기도 있는데 예수가 12살 무렵 마을에서 친구들과 어느집 지붕에서 놀던 중 친구가 갑자기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친구를 밀어내 죽게 한 사람은 다름아닌 소년 예수였다. 이에 죽은 아이와 그 부모들의 원망이 극에 달했고 조셉을 찾아와 아들을 야단치기 시작했다.
이에 예수는 죽은 친구에게 달려가 죽은 자를 살려 내어 “내가 정령 너를 밀어 죽였더냐?”라고 묻는다. 이에 다시 살아난 친구는 “오 신이시여 당신은 아무짓도 하지 않았나이다!”라고 답했다고 기록했다. 인간의 몸으로 온 신이 친구를 죽이다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가?
하루는 율법학자인 안나스의 아들 조셉이 버들가지를 잡아서 예수가 모아 놓은 물을 빼 버리는 장난을 쳤다. 그것을 본 소년 예수가 화를내며 "불경스러운 무식쟁이야 물웅덩이와 물이 너를 해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도 나무처럼 말라 버리고 잎도 뿌리도 열매도 얻지 못할 것이다!"고 소리치자 그 아이가 즉시 온 몸이 말라 버렸으며 그 부모가 아이를 안고 크게 탄식했다.
또 하루는 마을 길거리에서 달려오던 한 아이가 예수와 크게 부딪혔다. 이에 예수가 말하길 "너는 더 이상 이 길위를 달리지 못하리라!"고 화를 내어 소리쳤다. 이에 그 아이가 즉시 땅에 넘어져 죽었다.
이를 본 당시 유대인들이 크게 놀라 그의 아버지인 요셉을 불러 "그대의 아들에게 저주가 아닌 축복하는 법을 가르치시오!"라고 충고했다.
이에 요셉이 아들 예수를 데려다 크게 꾸짖자 예수는 요셉을 보아서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예수의 행위를 비난한 자들은 그 즉시 모두 소경이 되고 말았다.
이에 당황한 아버지 요셉이 예수를 꾸짖자 예수가 오히려 화를 내며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쳤다.
또 하루는 자케우스라는 요셉의 친구에게 예수의 글자 교육을 맡겼다. 하지만 며칠을 가지 못해 자케우스는 아이가 무섭다면서 교육을 중단했다. 그러면서 자케우스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 친구여 이 아이는 위대한신 존재인 것 같군요.신이거나 천사이거나 또 다른 그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며칠후 마을에 한 청년이 도끼로 장작을 패던 중 발등이 찍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비명 소리에 달려간 소년 예수는 그 청년의 죽은 발을 만졌고 청년은 즉시 살아났다.
또 하루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야고보가 뱀에 물려 중태에 빠졌다. 이에 소년 예수가 물린 자국에 입김을 불어 넣자 치유가 일어나고 형을 문 뱀은 몸이 터져 죽어갔다.
그 일이 있은 얼마뒤 이웃에 한 아이가 병들어 죽었는데 이 때에도 예수가 가 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이야 네가 말하노니 죽지 마라 그리고 네 어머니와 함께 하라!"고 말하자 아이가 살아났다. 이 일이 있은 뒤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신의 아들이라 불렀다.
예수가 열두살이 되던 해에 부모가 유대의 유월절(파스카)를 지내고자 예루살렘으로 올가갔는데 그곳에서 아이를 잃어 버린다. 아이를 찾아 나서보니 예수는 성전에서 있었는데 많은 원로들과 율법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은 오늘날 바이블 신약에서도 나오는 부분이지만 그 바로 앞 부분의 이야기는 모조리 편집에서 제외되었다.
예수의 소년기와 관련된 초기 기독교 관련 서에는 이런 이야기 외에도 목수였던 조셉의 목공 솜씨를 나무라던 사람의 눈을 멀게 하거나 조셉이 잘 만들지 못한 정교해야 할 나무판 모양을 잘 다듬어 주거나 하는 기적을 행한 것으로 토마의 복음서는 전한다.
또한 마을에 가뭄때 비를 내리게 하거나 마을에 부족한 식량을 구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는 장난꾸러기에 심술궂고 얄궃은 아이로 묘사된다.
위대한 신이지만 평범한 성장 과정을 거친 소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내용이 당대 바이블을 편집하던 다수의 정통파라는 사람들에게는 신성 모독으로 느껴졌고 결국 토마의 복음서는 신약에서 제외되었다. 다수파의 입김이 작용한 탓이다.
그로 인해 예수의 소년기는 오늘날 바이블 신약에서 완전 사라졌고 무수한 추측만이 난무했다고 바이블 외경을 연구하는 존 도미니크 크로산(예수의 발견의 저자) 같은 학자들은 지적했다. 이 밖에도 오늘날 제외된 바이블은 너무도 많다. 그들 역시 예수나 마이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밖의 바이블에서 제외된 복음서들
(1)야고보 최초의 복음서(The Gospel of James)
야고보 최초의 복음서(The Gospel of James)는 바이블 신약 어디에도 자세한 언급이 없는 동정녀 마리아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오는 초기 기독교 복음서이다. 놀라운 것은 이 기록이 최초의 바이블보다 약 600여년전에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이 책은 오늘날 바이블 신약의 4대 복음서 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고 한다.
야고보 최초의 복음서에는 마리아의 어머니로 불임증이 있었던 에나에게 천사가 나타나 에나가 여자 아이를 낳게 되고 그 아이의 자녀(예수)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계시 내용을 담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초기기독교에서 마리아 숭배가 없었다고 말해 왔지만 이 책을 보면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삼위일체론 또한 그 원조를 따지고 올라가 보면 고대 이집트의 세 신, 오시리스와 이시스, 호루스를 만나게 된다. 오늘날 인류의 모든 신앙의 기본에는 수메르의 다신들과 이집트 문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처녀에게서 태어난 마리아와 다시 처녀 상태에서 그녀가 예수를 낳았다는 순결성을 강조하는 부분으로 채워져 있으며 성모 마리아가 다른 여러 초기 기독교 관련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아이를 낳고 기른 여자가 아닌 성스러운 여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평생 순결성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이루 무슬림 사회에서 여성에게 차도르를 강요하거나 길가는 남성을 흘깃 보기만 해도 그 남편이 여성을 가족들 앞에서 공개 처형하는 잔인한 이슬람 세계의 여성 차별의 문화를 만드는데 마리아의 순결성 강조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꾸란(코란)을 보라 무하마드는 여성 차별을 지시한 바가 없다. 그 자신도 부유한 여인과 결혼한 자로 아들없이 딸만 여럿 두었던 자가 아니었던가?
또한 홀아비로 처녀와 결혼한 남편 조셉이 전처와 낳은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 아이들이 마리아의 아이들이 아니었다는 내용들도 함께 포함되어 그녀의 순결성을 강조하는데 주력하고 있는데 이 역시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복음서 중 하나였지만 초점이 예수보다는 마리아에게 있다해서 바이블 편집과정에서 제외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바이블 신약에서도 홀대한 성모 마리아를 같은 유대교에서 분파한 이슬람교의 꾸란(코란)에서는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이슬람권에서 여성은 ‘누구누구의 부인, 누구누구 황제의 부인, 아내, 누구누구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
마치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때 ‘이조참판 홍길동의 부인 박씨’로 묘비명에 기록된 것처럼 말이다. 이는 남성 중심의 이슬람 사회의 영향인데 놀랍게도 꾸란에서 ‘성모 마리아는 원래의 이름을 사용한 채 여러 차례 등장한다. ’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의 마리아에 대한 경외감과 순결성을 부각 시켜 당시 여성 사회를 지배하려했던 정치적 종교적 이유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꾸란을 읽으면서 마리아를 경외한 이슬람 신자들과 예수와 마리아를 믿는 기독교 가톨릭 교도들이 이라크와 중동 유고내전과 체첸과 러시아에서 피터지는 유혈 참극과 전쟁 테러를 오늘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말 참 신앙을 알기나 하는 자들인가? 모두다 평화를 밥 퍼먹듯이 매일같이 떠들어대는데 왜 그들은 서로 저주와 피의 전쟁 유혈 참극을 오늘날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가혹하게 저지르고 있단 말인가?
(2)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서
오늘날 바이블 신약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은 바이블에서 창녀 이야기 다음에 나옴으로서 창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을 뿐 더러 귀신들린 여인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로마 교황 그레고리는 그녀를 창녀와 동급의 여성으로 비하했고 이러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남성 우월주의 관은 후대에도 이어져 오늘날에도 수많은 교회들에서 그녀를 천박한 여인으로 비하해 예수의 신성을 높히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신약 바이블에 편집되지 않은 또다른 복음서인 ‘마리아의 복음서’에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다.
고고학자들과 바이블 고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고대의 기록이 발견되기를 고대 해왔다. 그러던 중 여러분도 잘 아는 ‘사해문서’가 쿰란에서 발견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해문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보도되었고 알려졌지만 또 다른 고대 초기 기독교 문서의 대량 발견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언론과 방송을 통제한 프리메이슨과 기독교 세력의 음모인 듯하다.
1945년 한 이집트의 농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의 원수를 갚고자 뒤를 쫓아가던 중 사막 한 가운데 길 위에 튀어나온 커다란 항아리 단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가 그 단지안을 들여다보니 아주 오래된 양피지의 기록이 12권이나 있었는데 농부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다시 그 양피지의 일부를 불을 지피는데 마구 사용했다.
아마 그 기록은 사라질 뻔했지만 원수를 죽인뒤 이집트 경찰에 쫓기던 농부가 12권의 고대 문서를 갖고 있다가 발각이 되면서 그 기록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열두권의 책은 미국과 유럽의 고고학자들에게 넘겨져 조사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기원전 2세기경 초기 기독교인들이 즐겨 읽던 여러 복음서들이었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몇몇 고고학자들만 알고 있을 뿐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언론에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초기 복음서 정리에서 행한 과거의 죄악을 대중에게 숨기려 했던 의도는 아니었을까?
(예수를 외계인 초능력자로 주장하는 외계인 바이블 커넥션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나 부처 등 소위 성자들을 외계인이 파송했다는 주장의 모든 원조는 역사적으로 1950년대초 외계인 피 접촉사의 역사를 연 인물인 조지 아담스키였다. 문제는 그가 외계인과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제시한 사진과 영상이 조작되었다는 결론이 미국과 영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수만년 앞섰다느니, 예수나 부처 마호멧을 보냈다느니, 외계인이 인간을 창조했다느니 하는 류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조지 아담스키보다 원조가 있다면 그는 사기꾼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외신에 의하면 미국에만 5천개가 넘는 UFO외계인 종교가 있는데 그들이 저마다 자신이 미륵부처요 메시아니 외계인 지구 파견 대사라고 우긴다는 점이다. 도대체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왜 자신의 진실을 입증할 단 한조각의 UFO파편이나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접촉은 없는 것인가? 우리 속담에 이르기를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하지 않았던가?)
토마와 필립 이집트 마리아 복음서등이 그것들이었는데 그 12권의 복음서는 초기 기독교의 복음서이기는 했지만 당시 다수의 기독교 인들이 이단시 했던 영지주의 (일명, 그노시스 주의) 자들이 즐겨 읽던 복음서였다.
초기 기독교의 한 분파였던 영지주의 파는 똑같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겼지만 당대의 기독교 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지주의 파는 유대교의 경전인 토라 5경(모세 5경)에 나오는 신 야훼의 우주 창조론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의 창조를 사악한 신의 창조로 규정하고 있고 이 세계또한 사악한 신(神)의 세계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파들은 따라서 예수와 같은 빛과 진리의 초월적인 존재만이 신적인 구원의 대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모세 5경의 창조행위나 여러 이적을 사악함으로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다수를 이루던 초기 기독교세력의 반발을 산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영지주의 파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형제 자매들아 이제 깨어날때이다 너희들은 무지 몽매하다!"
그 영지주의 파들이 즐겨 있던 바이블 복음서 중 하나가 ‘마리아의 복음서’였다. 이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는 오늘날 바이블에 나오는 창녀나 창부 이미지 같은 여성으로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이다.
마리아의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사랑을 받은 지혜를 얻은 여성으로 예수와 함께 진리에 대해 문답을 나눈 여성으로 종교지도자로 등장한다.
또한 필립보 복음서에는 예수가 그녀의 입에 입맞춤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마리아가 예수의 뒤에서 울었다거나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부 학자들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실제 예수의 부활뒤 최초로 만난 여성은 교회가 천박하다고 말한 막달라 마리아였고 예수의 승천 후 제자인 피터(베드로)는 마리아에게 예수가 너에게 무엇이라 물었더냐며 여러차례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 나온다.
그노시스 성서의 저자인 마빈 메이어 박사는 마리아의 복음서는 신약 바이블을 집대성 편집한 성서 편집자들에게는 소수파인 영지주의파들이 즐겨 읽었던 복음서라는 낙인이 찍혔고 그 영향으로 신약에서 제외되었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남성 중심의 종교제사장들이 바이블의 편집에 나서면서 여성을 비하 하는 방향으로 편집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마리아 복음서는 오늘날 신약 바이블이 비하해 말한 귀신들린 그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사실과는 다른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3)니고데모의 복음서
기원 2세기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최고의 복음서는 무엇이었을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천만의 말씀이다.
그 복음서는 단연코 [니고데모의 복음서]였다. 커스티 코플랜드(성서 종교학자)는 니고데모 복음서는 초기 기독교 사회의 최고 인기 책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바이블 신약에는 결코 나오지 않는 예수의 처형과정과 그 이후 죽음과 예수가 지옥에 간 이야기들이 자세히 언급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니고데모의 복음서 16:1에는 지옥에 다다른 예수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지옥의 왕들은 문을 열라! 영원한 문들이여 영광의 왕을 영접하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지옥에 단체의 신곡(神曲)에 나오는 이야기나 삽화 그림들에서 처럼 공포와 두려움 고통으로 가득찬 불의 지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가 내려간 지옥은 죽은 자들이 거쳐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고 그 과정에 도달한 예수는 에이브라함과 제이콥스 데이비드(다윗) 등 옛 조상들을 만난다.
한마디로 신앙의 대 조상들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 있었던 것이다. 지옥으로 간 예수는 그들 모두를 구원해 천국으로 이끈다는 내용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인데 니고데모란 ‘진정한 승리자’라는 그리스어라고 한다.
신앙의 조상들이 간 곳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었고 예수가 지옥까지 다녀왔다는 니고데모 복음서의 이야기는 2세기 초기 기독교 사회 최고의 인기 복음서 였지만 당시 주류이자 다수파였던 기독교 바이블 편집자들에게 이단시 되어 모두 편집 제외시켰다.
그러나 이 책이 기원 2세기 가장 인기를 끌었던 복음서라는 것은 종교문제 연구가들도 잘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오늘날 편집 투성이인 책인 바이블만이 진리라는 자들에겐 그것은 기득권 수호를 위해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는 괴담이자 이단서 일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오래전 수많은 복음서를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은 자들의 꼭두각시가 된 자들일 뿐 진정한 초기 기독교의 복음서의 가르침을 만난 자들은 아니다.
그런데 누가 진리를 알고 누가 복음서를 제대로 안다고 감히 외친단 말인가?
(4) 베드로의 복음서(The Apocalypse of Peter)
바이블 신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존의 묵시록(요한 계시록)과 함께 신약에 널까 말까를 놓고 끝까지 경합을 벌였던 초기 복음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피터(베드로)의 복음서였다.
존의 묵시록과는 달리 피터의 묵시록은 지옥의 잔인한 참상을 마치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간음하다가 죽어 지옥에서 성기에 매달려 고통받는 자나 신을 비난했다가 혀가 매달려 고통받는 자등 그 모습이 리얼리티다. 고통과 공포 두려움 죄에 대한 심판이 잔인하게 가해지는 지옥 그 자체인 것이다.
(성 피터 상)
하지만 ‘비밀을 알린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계시록의 말대로 피터의 복음서에서는 결정적으로 지옥에 간 피터(베드로)와 예수의 대화에서 신약에 집어 넣지 않는 이유가 발생한다.
곧 지옥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보고 베드로가 예수에게 청한다.
“사랑과 자비의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 많은 영혼들을 이 고통의 나락에서 살게 하나이까?”라고 호소한다. 이제 예수는 결코 알리지 말라면서 ‘저들은 곧 지옥에서 나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준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의 생생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유대교에서 분파한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들이 이라크와 러시아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전쟁과 테러 유혈사건 등을 보면 이곳이야 말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슬람의 무하마드(마호멧) 승천 신화에는 그가 만난 사람들이 예수나 모세를 비롯한 기독교와 유대교 가톨릭의 모든 성인들로 평화적인 만남과 포웅을 그리고 있다. 왜 야훼 알라 하나님 하느님 천주님 이라는 단 하나의 신을 서로 달리 부른다고 해서 석유와 종교적인 이유로 수많은 전쟁을 벌이는가? 정말 유대교에서 분파한 종교들은 피를 먹고 사는 종교들인가?)
죄를 범한 자가 지옥에 보내졌는데 곧 풀려 나다니?
바로 이부분에서 베드로 복음서는 신약에서 제외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의 묵시록보더 더 자세한 지옥의 고통이 서술되어 있다.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간 자들이 지옥에서 빠져 나가다니...이런 말을 예수가 했다고 하니 그런 이야기 전개가 다수파였던 바이블 편집자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 제외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 무오설을 떠들어대거나 강한 신앙심을 자부하는 자들도 이 오래되고 알려지지 않은 초기 기독교의 여러 복음서들을 단 한권도 읽어 본 이는 드물다.
그런 그들이 자신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고 있는양 나르시시즘과 자화자찬에 빠진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이 만든 또 하나의 우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사진은 지난해 영국 BBC가 역사학자 고고학자 성경전문가 종교학자 인류학자 인체전문가 의사 그래픽 전문가 등 관련 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해 2,000년전 나사렛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수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럿셀 크로우와 닮았다. 왜 기독교 서점에 있는 예수상이 아닐까? 모래 바람이 많은 중동에서 긴 머리를 길렀다는 것은 상식과 거리가 멀다. 다음으로 피부가 약간 검은데 이는 예수의 가계에 아프리카 여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블을 보라. 그리고 광대뼈도 많이 튀어 나온 얼굴에 입술도 두꺼운 편이다. 이는 BBC가 바이블을 중심으로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한 얼굴이다.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럼 그많은 기독교 가게에 있는 예수상은 누구의 얼굴? 그 많은 기독교 가계의 돈벌이 사업용으로 팔리는 예수상은 그리스의 8등신관이 만들어 낸 얼굴로 정확히 말해 오늘날 올림픽의 기원이 된 신 제우스 신상에서 시작된 얼굴이자 서구인들이 만든 예수상이지 2,000년전 예루살렘의 나사렛에 살았을 진짜 예수의 얼굴과는 무관하다고 BBC는 밝힌 바 있다. 정말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
아마 이 글을 읽는 광적인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 역시 피가 역류하는 기분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신도 초기 기독교 가장 원시적인 모습 순수했던 당시의 복음서들을 제대로 안 본것은 사실이다. 보지 않고서 어찌 말을 한단 말인가?
*에필로그...........*
이들 외에도 여러 바이블의 외경들이 전혀져 온다.
대표적으로 에녹서도 그중 하나인데 에녹서에는 토라 5경의 창세기에도 나오지 않는 창조의 이야기나 신과 타락한 천사들 악마들의 이야기 들이 자세히 나온다 .
또 지상에 온 타락한 천사들이 지상의 여인들과 관계를 저질러 거인족을 낳고 다시 신이 세상을 홍수로 멸망 시킨 이야기등이 창세기 보다 훨씬 더 자세히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창조의 신 또한 타락한 행위를 보일 때가 있다. 이런 내용전개가 에녹서를 바이블에서 제외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고려시대때 기득권 세력이었던 김부식과 경주파가 쓴 삼국 사기를 통해 삼국의 역사를 판단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의 역사는 정사가 아닌 야사인 삼국 유사로도 전해져 오지만 두권의 책이 삼국시대의 역사를 좀더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가 본 삼국사기가 없기 때문이며 당대 지배세력이었던 김부식이 본 삼국의 역사에 가깝기 때문이다.
바이블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특정 세력이 다수의 힘으로 자신들의 입맛대로 수십권의 초기 기독교 복음서에서 몇권만을 추려서 편집해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수의 소년기도 사라졌고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 둔갑 시켰으며 성모 마리아의 인생은 거들떠 기록도 하지 않았다.
이는 바이블을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잊어서는 안되는 명백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 특정 세력 몇몇 사람들이 제단한 몇권의 초기 기독교 복음서만을 보고 진리라고 단언하는 것은 그래서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들이 진짜 바이블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제외되고 누락되고 삭제된 바이블의 여러 초기 복음서를 읽어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찾아 연구하는 자들은 모조리 이단시 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며 기득권 수호에 열을 올리는 그런 행위야 말로 예수를 핍박했던 빌라도와 유대교 제사장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더욱이 바이블에 단 한구절도 안나오는 거대주의와 물량주의 당회장직의 부자세습 무지한 성도들과 부르조와화한 배나온 성직자들과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들이 우글거리는 거대한 성전에서 예수를 찬양하고 있지만 그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에 정말 예수가 있는지는 언제나 의문이다. 그들은 정령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찾았는가 아니면 황금으로 만든 또다른 바알신의 섬기는 자들인가?
한반도의 북쪽에는 기독교인들을 생체실험해 죽이는 김일성 부자 세습이 있고 그 남쪽에는 반공 숭미 이데올로기라는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채 당회장 직을 부자세습하는 한국 교회가 있다. 둘다 대립해 있지만 부자세습이라는 공통적인 교조주의와 파시즘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1996년과 1997년 두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교회내 성추행 사건은 1,000건이 넘는다고 한다. 이곳이 진정 성전의 참된 모습인가? 아니면 넓고 황량한 멸망의 문인가! 그대들이 갈길이 어디인가?
두레마을 공동 대표인 김진홍 목사는 몇해 전 KBS에 나온 초청강연에서 "한국 교회가 지금 처럼 거대주의 물량주의 물신주의 귀족화한 성직자들과 무지한 기복 신앙으로 달려간다면 100년안에 사라질 것이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여러분의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과 귀족화한 성직자들과 기복신앙이 넘치는 신자들과 당회장직도 부자세습하는 그 거대한 돈으로 쌓은 성전에는 진정 예수님이 살고 있나요? 과연 여러분은 초기기독교와 얼마나 닮아 있습니까?"
이상에서 세계 최고의 베스트 셀러라는 바이블, 그 바이블의 편집과정에서 빠지고 삭제된 여러 바이블 들 중 극히 일부만을 소개했을 뿐이다. 여러분이 바이블이라는 한권의 책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에필로그......................*
끝으로 이글을 쓴 카페지기는 ‘아무런 종교가 없음을 밝혀둔다.'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있다면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
종교나 신앙을 믿지 않으며 보고 듣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최근 보도된 바 대로 기독교 신자들을 생체실험용이나 가스 실험에 사용하고 있는 북한 김정일 독재정권과 같은 교조주의적 공상주의와 파시즘을 신봉하는 자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고를 가진 자들이다.
프랑스는 전국민의 85%이상이 가톨릭 신자이지만 가톨릭을 국교로 하지 않았다. 안 믿는 사람들의 안 볼권리 안 믿을 권리와 자유도 있다는 똘레랑스 정신에서 이다.
한국의 무능력하며 부패하고 타락한 김영삼 장로와 천주교 신자였던 타락한 위선자 김대중이 청와대에서 자주 하던 구국기도회니 조찬 기도회 같은 행위를 대통령이 나서서 하지 않았다.
또 한국의 몇몇 기독교 학교재단들처럼 학생들에게 종교행위를 강요하는 변태짓도 하지 않는다. 이는 다수에 의한 학교 재단에 의한 인권 유린이다. 특히 청소년에게 이런 행위를 강요하는 학교와 재단은 인권유린과 헌법 정신을 위배하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프랑스는 한국보다 훨씬 더 부패 지수가 낮은 나라이며 전직 대통령과 그 아들들이 감옥에 가는 생쑈를 보이는 한국의 추악한 모습이 보기 힘들다.
'민주주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김대중과 박정희와 전두환과 싸웠던 민주투사 김영삼도 오늘날 신앙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부정과 부패 그 자식들의 비리 사건으로 종교인들의 양두구육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생 싸웠던 죽은 박정희를 스스로의 부패와 타락으로 무덤에서 살려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승리인가?
종교는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 순수한 최초의 시간과 사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종교자체가 인생의 모든 목적이 되어 그곳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은 오늘날 이라크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들이 피터지게 싸우는 현실에서 보듯이 나와 이웃 가족 사회 국제 사회 전체를 위험속에 빠지게 만들고 그 자신도 불행해 진다.
진정한 자유란 나와 다른 생각도 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국가에 살고 있고 다양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